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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ep Inside] 균형과 조화의 미학이 빚어낸 한 편의 짧은 동화

발행일자 | 2017-10-13

Deep Inside #8
균형과 조화의 미학이 빚어낸 한 편의 짧은 동화 [구원찬 / 반복]

 

 

2000년대 초반에서 중반까지 내가 아직 20대였던 시절, 내 소소한 취미생활 중 하나는 중고 CD(씨디)를 사는 거였다. 당시 내가 자주 가던 가게는 이화여대 앞이었는데 이화여대 정문에서 신촌기차역으로 가는 길 중간에 있었다. 아주 작은 가게였는데 늘 가게 입구에 가판을 꺼내놓고 중고 CD를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팔았다. 오만가지 잡다한 음반들로 가득한 여기엔 종종 근사한 보물들이 숨어 있었는데 제값을 주고 사려면 2만원이 훌쩍 넘는 외국 힙합/알앤비 음악의 수입반이나 행여 정품으로 사려고 해도 구하기 힘든 희귀한 음반들을 이따금씩 여기서 발견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이런 음반들을 고작 5천원, 7천원 정도의 헐값에 살 수 있으니 구미에 맞는 물건을 찾아낼 수만 있다면 횡재도 이런 횡재가 없다. 그래서 이곳은 내게 늘 탐험의 대상인 미지의 세계, 보물섬이었고 난 틈만 나면-최소한 한 달에 한 번은-그곳으로 달려가 수북하게 쌓인 씨디 더미 구석구석을 탐험하는 인디아나 존스 박사가 되었다.

 

https://youtu.be/BAtPipmmlkI

<Mos Def / Body Rock (feat. Tash & Q-Tip)> (Official MV)
그곳에서 건진 여러 음반들 중 꽤 기억에 남는 것 중 하나가 이 싱글이다.
이 노래는 전설의 언더그라운드 힙합 레이블 ‘Rawkus’ 전성시대의 대표작 중 하나다.

  ‘음악을 발견하는’ 즐거움은 소위 음악 산업 안에서 일하게 되면서 또 다른 형태로 이어졌고 또 확장되었다. 10년을 넘게 이 산업에 종사하며 정말 다양한 종류와 형태의 일들을 해왔는데-음원/음반 제작과 유통에 관련해서 내가 실무로 경험해보지 않은 일은 거의 없는 거 같다-그 수많은 경험들 속에는 하나의 공통적인 요소가 있었다. 새로운 음악가,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음악들과의 만남. 지난 11년 동안 정말 많은 음악가들, 음악들을 만났다. 그래서, 그렇게 만난 모든 음악들이 다 좋았냐고 하면 솔직히 그렇지는 않다. 난 취향이 꽤나 단호한 사람이고 어떤 면에선 솔직히 편협하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건 저 시간들이 나에게 수많은 ‘보석’들을 선사했다는 것, 그 보석 같은 음악들이 지난 11년 동안 내게 끊임없이 영감을, 감동을, 그리고 에너지를 주었다는 것이다. 여전히 이 일을 하고 있는 이유, 이 일을 사랑하는 이유다.

 

어느 여름날, ‘구원찬’이라는 생소한 이름으로부터 카카오톡 메시지가 왔다. 그는 내게 음악 칼럼니스트인 ‘BLUC(블럭)’님의 소개로 연락을 했으며 ‘포크라노스’를 통해 자신이 셀프-프로듀싱한 EP를 유통하고 싶다고 했다. 몇 개의 메시지들, 메일을 주고 받은 후 음반에 수록될 곡들을 먼저 들어볼 수 있었다.

 

아, 또 하나의 즐거운 발견이구나.’

 

아무래도 나는 이렇게 또 하나의 ‘보석’을 발견한 것 같았다.

 

구원찬(Ku One Chan)

 

구원찬’ A.K.A. ‘Vankudi’

 

구원찬. 본래는 ‘Vankudi(반쿠디)’라는 예명으로 힙합/알앤비 그룹 ‘DOPEMANSION(돕맨션)’의 멤버로 2014년에 음악씬에 처음 등장했다. 보컬리스트인 그 외에 MC인 ‘AXAX Kuddy'(후에 ‘김심야’), 프로듀서/비트메이커 ‘FRNK$EOUL'(후에 ‘FRNK’)의 3인조 유닛인 ‘돕맨션’은 힙합, 비트뮤직, PBR&B 등을 넘나들며 전위적, 미래적인 무드의 음악을 들려줬다. 더러 만듦새가 다소 아쉽게 느껴지는 트랙들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음악은 상당히 신선했고 또 인상적이었다. 이후 ‘김심야’와 ‘FRNK’는 ‘돕맨션’의 진보적 성향을 더욱 심화시킨 그룹 ‘XXX’를 결성, 현재도 활동하고 있다.

 

<DOPEMANSION / Smoke Seoul> (Official M/V)

<XXX / 승무원> Official MV
이 트랙이 담긴 EP [KYOMI(교미)]는 작년에 굉장히 즐겨 들었던 한국 힙합 음반 중 하나다.

 ‘구원찬=반쿠디’라는 사실을 알고 꽤 반가웠다. ‘돕맨션’의 음악을 꽤 즐겁게 들었던 기억이 있으니까. 솔직히 본인이 알려주기 전까지는 짐작조차 할 수가 없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그가 미리 들려준 솔로 음반의 수록곡들, 그러니까 ‘구원찬’의 음악이 ‘돕맨션’의 ‘반쿠디’가 들려줬던 그것과는 굉장히 많이 달랐기 때문이다.

 

 

[구원찬 / 반복] EP cover

 

이제 막 솔로 아티스트로서의 걸음을 시작한 ‘구원찬’의 데뷔 EP [반복]에서 가장 먼저 도드라지는 것은 최근 발표되고 있는 대부분의 알앤비 음반들과 확연하게 다른 음악의 컨셉트다. 근래 힙합/알앤비 음악들이 대체로 칠하고 몽환적인 바이브를 표현하는, 소위 ‘미래’적인 사운드에 포커스를 두고 있는 것에 반해 그의 음악은 되려 ‘복고’로 가는 듯한 인상이다. 적당히 도회적인 무드와 달콤한 서정성을 겸비한 그의 음악은 마치 2000년대 초반의 네오소울, 또는 컨템포러리한 알앤비 음악들의 스타일이나 정서와 매우 닮아있다. 그의 음악을 듣는 내내 내 머릿속에는 ‘Glenn Lewis(글렌 루이스)’, ‘Maxwell(맥스웰)’, ‘Donell Jones(도넬 존스)’, ‘Musiq Soulchild(뮤지끄 소울차일드)’, 혹은 ‘Eric Benet(에릭 베넷)’ 등의 이름이 어렴풋이 맴돌았다. 더불어 이러한 컨셉트의 음악을 따뜻한 질감의, 균형이 잘 잡힌 사운드로 그려내고 있는데 마치 쓴 맛, 신 맛, 단 맛이 고르게 균형을 이루는 잘 만들어진 커피처럼 적절한 조화 속 풍부한 맛을 전달한다. 어떤 면이든 과거 그가 속했던 그룹 ‘DOPEMASION’의 그것과는 확연하게 구분이 된다.

 

<Donell Jones / You Know That I Love You> official MV
한때 정말 좋아했던 노래. 개인적으로 이런 그루브의 음악이 가장 춤추기 좋다고 생각한다.

 

쫀득한 기타 리프가 시작부터 귀를 잡아 끄는 첫 곡 ‘동화’는 누군가를 만나 사랑에 빠지면서 자연스레 상대방에게 동화되어 가는 과정을 노래한다. 비슷한 경험을 해본 누구나 공감할 만한 가사와 더불어 세련된 그루브가 산뜻하고 기분 좋은 무드를 형성한다. 이어지는 감미로운 발라드 ‘Sweether’는 본래 과거 ‘돕맨션’의 첫 EP [Young Adult`s Way]에 수록되었던 곡. Sweet와 Her의 합성으로 만들어진 제목처럼 달콤한 연가인 이 곡은 시퀀싱 중심의 사운드였던 원곡에 비해 피아노, 브라스 등이 가미되어 한층 담백하고 따뜻한 사운드로 그려지고 있다. 매끈한 네오소울 넘버인 ‘감정관리’로 넘어오며 시종 1인칭의 시점으로 전개되던 화자의 상황에 큰 변화가 생기는데 앞서 두 곡에서 시종 사랑의 달콤한 면들을 찬양해온 화자가 정작 이 곡에서는 이별 후 감정을 추스르려 노력하지만 잘 되지 않는 자신의 모습을 처연하게 노래하고 있다. 곡이 전개될 수록 악기, 리듬이 변화하며 차츰 고조되는 사운드 구성을 통해 자연스레 청자의 감정을 증폭시키는 세련된 사운드와 그루브는 일견 ‘맥스웰’의 음악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나는 네게 착륙하고 있어, 오래 있을 것만 같아.”

 

만남의 끝이 필연적으로 헤어짐이라면 헤어짐 뒤에 찾아오는 새로운 만남 역시 필연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라 여겨도 되지 않을까. 음반의 마지막 곡이자 타이틀곡인 ‘행성’은 사랑을 하고, 헤어지고, 방황하지만 다시 누군가를 만나 새로운 사랑을 하게 되는, 우리네 삶 속 익숙한 장면 중 하나를 끄집어내 ‘우주여행’에 비유한 아름다운-그리고 왠지 ‘어린왕자’를 연상시키는-가사로 그려낸다. 개인적으로는 도입부의 기타 리프에서 이미 마음을 완전히 뺏겨버렸는데 그 리프를 들으면서 왠지 결이 전혀 다름에도 불구하고 ‘Lou Reed(루 리드)’의 노래 ‘Walk on the Wild Side’의 그것을 떠올리기도. 이 심플하지만 아름다운 기타 리프를 중심으로 차츰 소리를 채우고, 또 차츰 비워가면서 짙은 감동과 여운을 동시에 선사하는 이 서정적인 노래는 음반의 대미인 동시에 단연 백미이기도 하다.

 

<구원찬 / 행성> official MV
밴드 ‘실리카겔’의 프론트맨 ‘김한주’가 주연이다.

 

총 네 곡이 실린 이 음반을 끝까지 듣고 나서야 비로소 ‘반복’의 의미를 어렴풋이 이해하게 된다. ‘반복’은 삶이 지닌 하나의 속성, 우리 모두의 삶의 여정에서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만남과 헤어짐의 필연적 속성이며 이 EP는 그래서 그렇게 가장 보편적인 필연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짤막한 동화다. 이야기 속 주인공이 그러하듯 우리들 또한 앞으로도 무수히 많은, 다양한 형태의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할 것이다. 긴 여정 속에서 몇 번이고 누군가에게 ‘동화’될 것이며, 언젠가는 진정한 인연이라는 ‘행성’에 도달해 착륙하고 정착하게 될 것이다. 이 모든 풍경은 가장 보편적이지만, 동시에 가장 아름답기도 하다. 어쩌면 ‘반복’이라는 작품을 통해 그가 그려내고자 한 풍경은 바로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대부분의 ‘처음’은 아무래도 특별한 의미를 지니곤 한다. ‘돕맨션’의 ‘반쿠디’가 아닌 솔로 아티스트 ‘구원찬’으로서의 첫 걸음. 그는 처음이라는 단어의 무게감에도 불구, 애써 힘을 주거나 시류를 좇는 것보다는 있는 그대로의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그리고 음악이 담고 있는 이야기를 오롯이 전하는 것에 집중한 것 같다는 인상을 준다. 도무지 신예 아티스트의 처녀작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음반 전반에서 느껴지는 안정감과 여유. 이건 아마도 그가 어떤 과욕이나 강박에 사로잡히지 않았기에, 본질에 충실하고자 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조급하지 않게, 그저 자신의 페이스로 차근차근 나아가려는 이 조심스럽고 현명한 음악가의 기나긴 여행은 이렇게, 이제 막 시작되었다.

 


 

Editor / 김설탕
sugarules@poclanos.com

(‘Deep Inside’ 코너의 모든 글은 에디터의 개인적 주관을 반영한 것으로 본사의 공식적인 입장과는 일절 무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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