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blent. [loves]

발행일자 | 2019-03-27

 

“블렌트의 첫 앨범 [loves]는 제목이 의미하는 바 그대로 ‘사랑’에 관한 이야기지만 단수형(love)이 아닌 복수형(loves) 표기가 의미하듯 어떤 특정한 – 이를테면 연인간의 – 관계가 아닌 보다 넓은 의미, 그리고 다양한 형태와 관계의 ‘사랑들’을 조망한다.”

 


 

blent.
loves
2019.03.18

 

DAZE ALIVE는 한국의 레이블로 수장인 JERRY.K(제리케이), 소속 음악가인 SLEEQ(슬릭), RICO(리코) 등의 로스터 면면에서 볼 수 있듯이 힙합, 알앤비를 음악적 근간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최근 이 레이블의 행보, 발매작들의 면면을 살피다 보면 이들이 여타 한국 레이블들과는 조금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제리케이나 슬릭이 본인들의 확고한 – 특히 인권에 대한 – 정치적 지향을 음악을 통해 발화하는 것에 매우 적극적인 음악가들인 덕이다. 제리케이의 경우 과거 소울컴퍼니 시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동시대 다양한 정치/사회 이슈들에 대한 문제의식을 끊임없이 드러내며 현실 참여적 음악들을 선보여왔고 슬릭은 두말할 것도 없이 현재 가장 대표적인 페미니스트 음악가다.

메시지뿐 아니라 음악적으로도 이들은 최근 힙합씬의 주요한 흐름들과는 조금 다른 방향성의 사운드 프로덕션을 자주 선보이고 있다. 현재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트랩이나 붐뱁, 혹은 멈블랩, 랩싱잉 성향 아티스트들의 릴리즈에서 종종 만나볼 수 있는 다소 추상적인 이미지의 음악 스타일 등과는 사뭇 결이 다른, 심지어 탈 장르적인 형태의 음악들을 데이즈 얼라이브의 최근 발매작들을 통해 심심찮게 만날 수 있는데 이는 이들이 힙합씬 바깥에 있는 다양한 음악가와 교류하고 협업하는 시도들을 꾸준히 이어오고 있는 덕이기도 하다.

 

 

제리케이가 전자음악가 FIRST AID(퍼스트에이드)와 처음 호흡을 맞춘 것은 2017년 발표한 앨범 [OVRWRT]에 수록된 싱글 ‘알약’을 통해서다. 솔로 아티스트로, 보컬리스트 홍효진과의 밴드 프로젝트인 Room306(룸306)으로, 혹은 권월과의 듀오 F.W.D.(포워드)로 다채롭게 작품활동을 펼쳐온 베테랑 프로듀서 퍼스트에이드는 제리케이만큼이나 자기 세계가 확고한 음악가다.

활동 영역과 스타일이 확연히 다르건만 ‘알약’을 통해 뜻밖에 좋은 합을 보여준 두 사람은 이후 Room306(룸306)의 정규 2집 [겹]에 수록된 ‘손뼉’에 제리케이가 피쳐링하면서 다시 만났다. 두 번의 작업을 통해 상호간에 발생하는 좋은 케미스트리를 재차 확인한 두 사람, 이는 자연스레 프로젝트 ‘blent’(블렌트)의 결성, 그리고 실행으로 이어졌다.

 

 

블렌트의 첫 앨범 [loves]는 제목이 의미하는 바 그대로 ‘사랑’에 관한 이야기지만 단수형(love)이 아닌 복수형(loves) 표기가 의미하듯 어떤 특정한 – 이를테면 연인간의 – 관계가 아닌 보다 넓은 의미, 그리고 다양한 형태와 관계의 ‘사랑들’을 조망한다. 그건 백내장에 걸려 ‘달처럼 빛나는’ 하얀 눈을 가지게 된 반려견 사자에 대한 사랑이기도(‘odd eye’),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친구이자 동반자인 아내에 대한 사랑이기도(‘best friend’, ‘나랑 나란히’) 하며 혹은 너무나 서로를 잘 알기에 이해를 구하기 위해 애써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각별한 존재에 대한 사랑이기도 하다(‘no words’).

무엇보다 ‘나’에 대한 사랑이 중요하게 다뤄지며 전반부의 대부분이 여기에 할애되는데 다만 이건 ‘내가 제일 잘났어’ 따위의 맹목적 자기애 따위와는 명백히 다른 종류의 것이다. 제리케이가 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이야기하는 자기애란 잘못과 실수를, 혹은 세상과 부딪히기를 반복하며 이게 다 내 탓인가, 난 이것 밖에 안되는 존재인가-하며 스스로를 자책하고 의심하는, 거친 세상 속 나약한 존재인 내가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감싸고 다독이는 그런 사랑이다(‘not yours’, ‘나도 처음 만난 내가 나인데’). 특히 심리상담까지 받으며 스스로의 깊숙한 밑바닥과 마주하는 시간을 가지고 마침내 자기혐오를 극복해가는 과정을 다루는 ‘2907’은 앨범 전체에서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 트랙인데 줄곧 다소 우울하고 어두운 무드로 일관하며 작가 내면의 고뇌를 다루던 앨범의 서사가 이 노래를 기점으로 비로소 외부로 확장하기 시작한다. (‘2907’은 제리케이가 다녔던 심리상담센터의 호수라고 한다)

삶은, 세상은 고되고 거칠지만, 이 험난한 세상 속 녹록찮은 삶을 지탱하는 것은 결국 저 모든 사랑들이다. 나를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들을 사랑하며 다시 일어서고 다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차분한 무드로 전개되는 작품으로 사운드도, 보컬도 꽉꽉 채우기보단 여백이 넉넉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퍼스트에이드의 노련하고 섬세한 사운드 프로덕션은 심은보님이 공식 코멘터리에서 언급한 것처럼 ‘잔잔하기에 놓칠 수 있는 디테일한 지점들’을 앨범 전반에 만들어낸다. 소리 하나하나에, 리듬에, 공간감에 귀를 기울이며 감상하면 또 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김사월, uju(우주), Rico(리코), klang(클랑) 등 판이하게 다른 스타일을 지닌 보컬리스트들의 조력이 곳곳에서 반짝반짝 빛난다. 생각할 거리만큼이나 들을 거리 역시 충실하게 마련된 작품이다.

 

 


Editor / 김설탕
sugarules@poclano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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