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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CK] 난 누군가, 또 여긴 어딘가

발행일자 | 2017-02-13

지난 달, 바이닐 디깅을 위해 도쿄에 다녀왔다. 미약하게나마 커지고 있는 국내 바이닐 시장 규모에 대해 마냥 비관적인 입장은 아니지만, 작년 가을부터 이어진 시티팝 바이닐에 대한 갈증을 해소하기엔 어려움이 다소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아무리 바이닐과 음악 그 자체를 좋아한다지만, 선택과 소비의 자유가 지극히 제한된, 소위 말하는 ‘팔릴 음악’들로만 채워진 바이닐 꾸러미들 속에서 나의 취향을 탐구하는 것은 여간 께름칙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다른 나라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취약한 산업 구조 때문인 것을 알기에 이해는 할 수 있다만, 지갑은 쉬이 열리지 않는다. 어쨌든, 나는 그렇게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일본에 다녀오게 되었다.

 

유년기 내내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던 것에 질린 나는, 낯선 나라에서 즐겁게 지내다 오는 것도 능력 중 하나라고 여기는 사람이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일본행은 작지 않은 성취감을 안겨주었다. 닷새 내내 신나게 디깅을 하고, 마지막 이틀은 심신의 안정을 위해 의도적으로 공항 근처 허허벌판에 잡은 숙소에서 보냈다. 로밍 날짜를 잘못 계산하는 바람에 마지막 이틀은 인터넷도 없이 지냈다. 일어는 할 줄도, 읽을 줄도, 들을 줄도 모르는 나에겐 철저히 단절된 이틀이었다. 의도치 않은 극한의 고독 속에서 나를 마주할 수 있었고, 나의 정체에 대한 고찰의 바다 속에서 헤엄치다 서울로 돌아왔다. 나의 정체와 좌표를 끊임없이 묻는 세상에 던질 어떤 단단한 것을 쌓는 고찰이었다. 내가 일본에서 찾은 것은 훌륭한 바이닐들뿐만이 아니었다. 나도 있었다.

 

이번 편에서는 존재의 이야기를 담은 앨범들을 소개한다. 나 자신일 수도 있고, 타인일 수도 있고, 그 관계를 이루는 어떤 존재일 수도 있다. 반대로, 무(蕪)와 허(虛)도 있다. 철학적인 말들로 조금 더 예쁘게 가다듬을 수 없는 것은 아쉽지만, 그건 다른 훌륭한 분들께서 많이 해두신 것 같아 패스해본다.

 

1. 사비나앤드론즈 <우리의 시간은 여기에 흐른다 (Our Time Lies Within)>

<우리의 시간은 여기에 흐른다>는 생업이 간호사인 사비나앤드론즈가 아티스트로서 가졌던 5년 간의 공백을 아쉬움 없이 메워주는 앨범이다. 그녀의 긴 공백과 쏙 닮은 이 앨범에는 응급실 환자들의 생사를 지켜보며 음악의 존재적 가치와 허무의 바닥까지 쳐본 그녀의 긴 호흡과 촘촘히 다져진 감정선이 담겨 있다. 타이틀 ‘Don’t Break Your Heart’를 셀 수 없이 반복해 들으며 감히 상상해 보았다. 짐작도 할 수 없는 그 긴 터널 속에서 음악에 대한 믿음 하나만을 가지고 걸어온 그녀의 시간을. 나는 학업을 미루고 이 일을 한 지 2년차에 들었다. 학생으로서의 신분에 기준을 둔다면 이건 공백이다. 반대로, 음악 하겠다고 아등바등하던 고교 시절이 있었으니 학업에 열중하던 때가 공백이 될 수도 있겠다. 두 개의 신분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두 배로 즐겁고 두 배로 괴로운 일이다. 공백이 끝으로 바뀌는 것은 종이 한 장의 차이와도 같아서, 순간의 의지에 따라 순식간에 일어날 수 있는 내적 갈등을 안고 지내야 한다는 것. 생업을 이어나가는 중에 아티스트로서의 위기를 느꼈다는 그녀의 이야기를 알고서 듣는 <우리의 시간은 여기에 흐른다>는, 그렇게 때문에 더 아찔하다. 음악으로 돌아오고자 하는 그녀의 의지는 강했지만, 이 아름다운 앨범이 순간의 고뇌로 없어졌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끔찍하다.

 

2. 그림자 공동체 <거울의 숲>

<거울의 숲>을 듣고 가장 먼저 떠오른 단어는 ‘이방인’이다. 음악에 있어 장르란, 누군가의 국적이나 고향처럼 최소한의 소속감이나 정체를 대변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긴 이야기를 가지고 있는 존재들에게는 참으로 난감한 것이겠지만. 그런 의미에서 그림자 공동체의 음악은 참 난감하다. 록이기도 하고, 포크이기도 하다. 얼터너티브라고 하면 그것도 부분적으로 맞다. 하지만 그 무엇도 아니다. ‘4개의 느리고 꽤 조용한 곡들입니다. 볼륨을 크게 틀고 들어주세요.’라는 설명이 전부인 <거울의 숲>. 그림자 공동체라는 이름도 낯선데, 그 어떠한 정보도 조회가 불가한 미지의 발매다. 옹알이는 듯한 말에 가사가 궁금하지만 그 역시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 강한 리버브로 가사조차 귀에 잘 들어오지도 않는 4개의 곡. 부유하는 온갖 요소들이 제각기 흘러가다 하나의 합으로 이어진다. 그러다 다시 흩어지는 걸 반복하며 듣는 이의 정신을 흐려 놓는다. 정의되고 어딘가 귀속된 것, 기왕이면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속 편한 우리의 마음과 다르게, 정체를 확인하기 어려운 <거울의 숲>을 듣다 보면 여간 약 오르는 것이 아니다. 너무 좋은데, 이 좋음의 출처를 알 수 없으니. 귀에 울리는 이 느리고 조용한 곡들이 주는 벅찬 울림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혹자는 공중도덕의 새 프로젝트로 의심한다. 여러분의 생각은 어떤가?

 

3. 루시의 조용한 친구들 <루시>

개인적으로 젠더의 이슈는 가장 기피하고 싶은 주제이다. 어떤 성별을 가졌든 개개인의 기준에 따라 언쟁으로 이어지는 주제이기도 하고, 우리 인간이 의지대로 고를 수 없는 가장 원초적인 것은 언제나 논란의 소지를 안고 있으니까. 여성 혐오, 여성 비하의 개념이 갑자기 생긴 것은 아니다.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을 뿐 누군가는 생활 속 직접 경험을 통해, 또는 간접 경험을 통해 이미 인식하고 있던 것들이다. 의사를 표출하고 각자의 관점을 공유할 수 있는 곳이 많아지고, 젠더를 둘러싼 다양한 논의가 가시화되면서 극단적인(심지어 때로는 공격적인) 워딩이 등장한 것뿐이다. ‘루시’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인간으로써의 주체를 위협받는 가상의 인물이다. 꽃과 같은 아름다움을 지녔다 하여 누군가에게 꽃처럼 대해질 이유도 없으며, 인형 다루듯 함부로 대해질 이유도 없는 ‘루시’.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성이기 이전에 그녀도 우리 모두와 똑같은 사람일 뿐이라는 것. 너무도 당연하지만 이 사실은 종종 너무도 쉽게 잊혀져  남성과 여성을 막론하고 누군가의 큰 상처로 남는다. 요조와 Needle&Gem(니들앤젬)의 에릭(Eric)의 프로젝트로 세상에 나오게 된 <루시>. 참 좋아하는 곡이고 누구나 한 번쯤은 잊고 있던 성에 대한 느슨한 잣대를 다시금 돌이켜볼 수 있는 앨범이지만, ‘루시’들의 존재와 그 안타까움을 노래하는 작품들이 많아지진 않았으면 좋겠다.

 

4. 요조 <나의 쓸모>

 

나의 <나의 쓸모>에 대한 잊지 못할 추억을 갖고 있다. 재작년 10월, “개입”이라는 이름으로 요조와 배우 양종욱이 함께한 공연이 있었다. 요조가 노래를 마치면 양종욱이 등장해 요조의 속마음을 전하는, 흡사 뮤지컬과도 같은 라이브 공연이었다. 이 공연에서 <나의 쓸모>에 수록된 대부분의 트랙을 라이브로 들을 수 있었는데, 사회인으로서의 첫 출근날부터 ‘나의 쓸모’를 고민해볼 수 있는 시간을 보냈다. ‘정말 내가 이 회사에서 쓸모가 있는가’에 대한 고민이라기보다는, 나 자신 자체에 대한 고찰이었던 것 같다. 어느 밤 엄마와 아빠가 뜨겁게 안아버렸기 때문에 내가 존재한다는 것, 나의 존재, 나의 쓸모. 이것을 따져봐야 하는 순간을 마주하는 것에 대해.

 

5. 이랑 <신의 놀이>

‘신의 놀이’라니. 아주 기가 막힌 앨범명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존재와 내가 좇는 것에 대해 쉼없이 생각하게 되는 것이 결국엔 다 ‘신의 놀이’란 말인가. 아주 뚜렷하고 직접적인 딕션 덕분에 가사 제공 서비스가 없는 것이 아쉽지 않다. 말을 건네듯, 일기를 읽듯 그냥 이야기할 뿐이다. 이것이 노래인지, 음정을 얹은 혼잣말인지 분간이 안되어 갸우뚱하다보면 어느새 트랙이 끝나있다. 재기발랄한 멜로디 뒤에 숨겨진 무시무시한 이야기(?)를 잘 들어보라. 평범한 것을 평범하지 않게 노래하는 것은 물론, ‘하하, 호호’ 의성어만 등장하는 트랙 ‘웃어, 유머에’는 그 어떤 노래보다 냉소적이다. 여러모로 다양한 해석의 여지를 많이 남겨놓은 앨범이라는 생각이 드는데, 무엇이 맞고 그른 것인지, 그것을 판단하는 ‘나’는 결국 얼마나 맞고 틀렸는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신의 놀이’에 맡겨보자.

 

6. 루싸이트 토끼 <L+>

단순한 감정을 노래하는 음악은 너무나 많지만, 감정의 주체인 자아들의 의식을 노래하는 음악은 그리 많지 않다. 단순히 ‘너’와 ‘나’가 아니고, ‘너에게 나’와 ‘나에게 너’로 확장되는 이 앨범의 철학은 듣는 이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질 수 있지만, 특유의 심오함이 난 참 재미있다. 나에게 <L+>는 아주 특별한 앨범이다. 모든 제작 단계에 함께할 수 있었던 앨범인 것은 둘째 치고, 한창 나 자신의 존재에 대해 깊이 고민하던 때에 가장 많이 들었던 앨범이기도 하다. 불현듯 <L+>이 생각났던 건 다시 날씨가 쌀쌀해지던 작년 가을. 어쩐 일인지 그 반 년 사이에 사운드는 더욱 깊어졌고, 가사가 던지는 존재론적 무게는 실로 더욱 묵직해져 있었다. 지금보다 한참 몰랐을 때, 이 ‘좋음’을 정말 좋은 만큼 인지할 수 있기 전에 함께했던 앨범이라 아쉬움이 남기도 한다. <L+> 제작 당시 팀장님이 ’좋다’는 감탄사를 다소 과하게 남발하신다고 생각했으니까. 당시 팀장님은 무려 <L+>의 앨범 소개글을 나에게 맡기는 실수를 하셨다. 보기보다 심오한 철학을 지닌 이 앨범의 소개글 한 줄이 나오지 않아 이틀 밤을 꼬박 샜고, 영이라든가 혼이라든가, 영원, 궁극, 관계, 우주 등 잡히지 않는 온갖 것들이 문장에 들어갔다 나왔다. 어쨌든, 이 모든 추억을 제하고도 <L+>가 선사하는 좋음의 무게는 달라지지 않는다. 그런 점에 있어서 <L+>는 일관되게 아름답다. 참, 당분간은 루싸이트 토끼가 한국에서 앨범을 내는 모습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은 굉장히 슬프다.

 

Editor / 김은마로
eunmaro10@poclano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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