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명산파크

  • Artist 천용성
  • Release2026-03-12
  • Genre Electronicindie
  • Label천용성
  • FormatEP
  • CountryKorea
  • 1.공원
  • 2.묻지 마세요
  • 3.별 대단치도 않은 생각
  • 4.

노래도 끝나고, 이야기도 끝나지만

 

천용성의 노래를 듣고 있으면, 혼자 극장에 앉아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의 노래들이 대개 삶의 어떤 장면들을 그려내기 때문이었다. 오랜만에 만나 따뜻한 밥을 함께 먹는 두 사람을, 그댈 만나러 가는 날 눈이 많이 내리던 터미널을, 여기 와서 두부 물기 좀 짜달라고 말하던 엄마의 모습을. 그 장면들을 하나씩 그려가다 보면, 나에게도 비슷한 기억들이 떠오르곤 했다. 저마다 디테일이 조금씩 다를 뿐, 누구나 한 번쯤 겪어봤을 법한 일들이었으니까. 자신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함께 데려오는 것.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천용성 노래의 힘이었다.

 

그러나 『수명산파크』는 조금 다르게 다가왔다. 극장을 빠져나와 집으로 돌아온 뒤, 거울 속 나의 얼굴을 마주하는 기분이랄까. 지난 노래들이 그가 무엇을 기억하는지 들려주었다면, 이제는 그가 어떤 생각을 되뇌며 살아가는지 들려주는 노래처럼 느껴졌다. 이미 몇 장의 앨범을 지나온 음악가로서, 가깝고 먼 사람들을 떠나보내며 나이 들어가는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그런 생각은 비슷한 나이에 접어든 내게도 익숙한 것이어서, 자연스레 지금 나의 모습을 겹쳐볼 수 있었다. 그는 여전히 자신의 노래 속으로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불러온다. 이를테면 이런 방식으로.

 

 

1. 공원

 

나무에 전봇대에ᅠ등을 두드리는 할머니 할아버지ᅠ

허리춤 라디오엔 같고 또 다른 노래 사는 건 지겨워도 이건 지겹지 않아

― 「공원」

 

공원에 자주 간다. 볕과 그늘이 좋은 자리에 앉아 사람들을 구경한다. 한낮의 공원엔 주로 노인들이 있다. 초고령화 사회, 그 많은 노인들이 다 어디에 있을까 궁금할 땐 공원에 와보면 된다. 여럿이 모인 노인들은 장기를 두거나 수다를 떨고, 혼자 있는 노인들은 주로 맨발로 걷거나 운동을 한다. 제법 진지한 얼굴로 다리를 앞뒤로 찢고, 기합 소리와 함께 철봉에 매달리는 이도 있다. 몇 달 전 공원에서 만난 한 노인은 입버릇처럼 “일찍 죽는 게 소원”이라고 말했다. 이 나이까지 살았는데 더 살아봤자 무얼 하겠느냐며. 그럼에도 그는 매일 아침 집에서 나와 만보를 걷는다. 걷다가 멈춰 서서 꽃 사진을 찍고, 이웃집 할머니와 복지관에 가서 수채화를 배운다. 며칠에 한 번씩 멀리 사는 손주에게 영상통화를 걸고, 명절에 오면 로보트를 사주겠다는 약속도 한다. 어쩌면 나도 그와 비슷하게 늙게 될까. 나이 들수록 나이 드는 일이 무섭다고 생각한다. 그러고 싶지 않은데 마음처럼 잘 되지 않는다. 그럴 때는 공원에서 다른 것들을 본다. 유아차에 새로 산 꽃 화분을 소중히 담고 걷는 할머니. 쪼그려 앉아 쑥을 캐는 할머니. 혼자 그네 타는 할머니. 악보를 펼쳐놓고 트럼펫을 연주하는 할아버지. 백설기를 나눠 먹으며 구경하는 할머니들. 저마다 다르게 시간을 달래가며 살아가는 모습을 본다. 사는 거 별거 없다지만, 살아있는 동안엔 살아가는 일을 좋아하고 싶다.

사실은, 오래 살고 싶다.

 

 

2. 묻지 마세요

 

묻지 마세요 나의 고향을ᅠ나는 어디서도 오지 않았어요

― 「묻지 마세요」

 

딱 한 번, 내가 태어난 곳에 가본 적 있다. 아빠와 고모들이 태어나 어른이 될 때까지 살았다는 곳. 그러나 어떤 이유로 도망치듯 떠나게 돼, 정작 나는 일 년도 살지 않았다는 곳. 그래서 누군가 고향이 어디냐고 물으면 선뜻 대답하기 어려웠던 곳. 몇 해 전, 경기도 어디쯤이라고만 듣던 그곳에 가족들이 다 함께 가게 된 건, 할아버지의 바람 때문이었다. 죽기 전에 다시 한번 눈으로 보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그렇게 가본 고향은 김포공항과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오랫동안 개발이 묶여있었던 그 동네는 1990년대 어디쯤에서 시간이 멈춘 듯한 모습이었다. 할아버지는 그무렵 가장 기력을 되찾은 모습으로, 40년 전 자신이 떠나왔던 동네를 다시 걸었다. 뒤따라 걷는 내게 여기엔 어떤 가게가 있었고, 저기엔 누가 살았었는지를 이야기하며. 그러다 어느 골목에 다다랐을 때, 할아버지는 걸음을 멈추고 한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길 봐라. 저기에서 네가 태어났다.”

손끝이 가리킨 자리에는, 수풀로 뒤덮인 오래된 집터 하나가 있었다.

 

이후 3년이 흘렀다. 몇 해 전 일인데도 그때 내가 보았던 고향 풍경은 흐릿한 사진처럼 남아 있다. 대신 나는 이런 것들을 기억한다. 그날 동네를 걷다 말없이 눈물을 손바닥으로 닦던―몇 달 뒤면 세상을 떠나게 될―내 할아버지의 얼굴과, 그 집에서 겪은 지긋지긋한 가난을 이제는 웃으며 떠들게 된, 나이 든 고모들의 목소리를.

이제 나는 내가 어디에서 왔는지 궁금해하지 않는다.

떠난 사람들은 어디로 가는 걸까, 그런 걸 궁금해하며 산다.

 

 

3. 별 대단치도 않은 생각

 

별 대단치도 않은 생각에 이런 저런 음 붙여보고

희미한 옛 노래와 비슷하단 생각에 아무 쓸모 없단 기분만

― 「별 대단치도 않은 생각」

 

처음 책을 쓰던 날들을 기억한다. 내가 쓴 글이 정확히 어떤 것이 될지, 어떤 환희와 두려움을 가져다줄지 알 수 없었기에 지금보다 더 자유롭게 쓸 수 있었다. 내게 가장 좋은 슬픔과 기쁨을 아낌없이 쓸 수 있었다. 글쓰기가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8년이 흘렀다. 그동안 네 권의 산문집을 더 썼다. 언제부턴가 노트북 앞에 앉으면, 내게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기분이 든다. 몇 줄 쓰다가도 이미 쓴 이야기 같고, 너무 흔한 이야기 같다는 생각에 멈춰서는 일도 잦다. 그럴 때면 바깥으로 나가 걷는다. 나 자신과 멀어지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먼 곳까지 걷는다. 나를 너무 사랑하는 마음도, 너무 미워하는 마음도 작아질 때까지. 그러다 문득 머리 위로 나뭇잎을 흔드는 바람이 불면, 그가 쓴 노랫말처럼 생각한다.

“애써 만든 노래보다 빗소리가 나는 좋아.”

“애써 만든 노래보다 빗소리가 나는 좋아.”

그러나 오래지 않아 나는 다시 책상으로 돌아온다.

돌아온 자리에서 무엇이라도 쓴다.

여기를 떠나 살아가는 법을, 알고 싶지 않은 것 같다.

 

 

4. 산

 

일년에 몇 번 산을 올라요 혼자 하는 말 입에 붙었어요

엎드려 땅냄새를 맡고요 철에 제일 예쁜 꽃을 올려요

 

은박지처럼 구겨진 기억을 하나씩 펼쳐 보아요

주름 없이 매끈한 그림 될 때까지 잘 이어 붙여요

― 「산」

 

일 년에 몇 번씩 산에 오른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묻힌 선산은 말 그대로 양지바른 곳이다. 왜 어른들이 그토록 묫자리에 신경 썼는지 이제는 이해할 수 있다. 볕이 잘 드는 모습을 보면 괜히 안심이 된다. 꼭 그들이 평안할 것만 같다. 고모들은 산소에 올 때마다 조화를 사온다. 시들지 않은 꽃을 버리고 새로운 꽃을 꽂는다. 에구구구 하며 쪼그려 앉아 물티슈로 비석을 닦고, 늘 조금 운다. 아빠는 남은 술을 뿌리면서“우리 엄마 취하겠네”하고 매번 같은 농담을 한다. 그러면 나도 고모들도 같이 웃는다. 할머니는 알까. 늙어가는 아빠의 잠든 얼굴이 점점 더 할머니의 얼굴을 닮아간다는 걸. 이제는 귤을 볼 때마다, 어릴 적 아빠가 부잣집 친구에게서 얻은 귤 하나를 할머니에게 주고 싶어 집으로 달려갔던 이야기를 되풀이한다는 걸.

 

다행히 아직은 할머니 할아버지 얼굴을 떠올리는 일이 어렵지 않다. 제일 먼저 잊히는 게 목소리라는 말을 들은 뒤로는, 일부러 두 사람을 찍은 동영상을 자주 본다. 언젠가 기억나지 않을까 봐 생각날 때마다 목소리를 반복해서 떠올린다.

그러다 보면 겁이 난다.

앞으로 또 누군가를, 이렇게 잊지 않기 위해 애쓰며 살아가게 될까.

 

노래는 끝이 난다.

이야기도 끝이 난다.

그래도 사는 일은 계속된다.

살아있는 동안엔 살아가는 일을 좋아하고 싶다.

 

―작가 김달님

 

 

Credits

 

강승희 @driemon : 마스터링

김달님 @moonlight_2046 : 라이너 노트

정수민 @sumin_jsm : 베이스(2, 4)

천용성 @000yongsung : 작사, 작곡, 노래, 베이스(3), 일렉트릭 기타(4), 디자인

천학주 @mushroomrecording : 녹음(2, 4), 믹싱

한인집 @99hanta : 드럼(4)

해파 @steadyhaepa : 프로듀싱, 편곡, 프로그래밍, 일렉트릭 기타(3, 4), 코러스(1), 녹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