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ep Inside #7
‘밤의 사랑’을 노래하는 R&B 보이 ‘리코(Rico)’, 슬로우잼의 바깥에서 딛는 본격적인 첫 걸음 [White Light]
아마 2012년 즈음이었나, 알앤비/힙합 프로듀서 ‘이치원'(EachONE)이 갑자기 메신저로 “형, 이거 들어봐요. 대박이에요”라며 어떤 음반의 압축파일을 하나 던져줬다. 집파일의 압축을 풀고, 윈앰프의 플레이리스트에 파일을 넣고, 몇 개의 트랙들을 재생해 듣는 사이 어느새 난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와아…한국에도 이런 톤으로, 이렇게 끈적하게 슬로우잼을 부르는 가수가 있었구나!’
당시에 내가 들었던, 속된 말로 ‘지렸던’ 그 음반은 바로 ‘리코(Rico)’의 첫 번째 믹스테잎 [Boys’ Voice]였다.
<Rico / 여기 있어> (from the Mixtape [Boy’s Voice])(Instrumental: Miguel / Quickie)
‘알앤비(R&B)’는 국내 대중들에게 대단히 친숙한 장르인 것 같으면서도 소수의 장르 열혈팬들을 제외하면 의외로 장르에 대한 이해도나 인식이 다소 낮은 음악이 아닐까. 알앤비의 창법만을 부분적으로 빌려와 한국식 가요에 덧씌운 음악들이 ‘알앤비’로 불리며 대중가요의 주류로 군림한 시절이 꽤나 길었던 탓도 있을 것이고 한편으로는 본토 힙합/알앤비 음악 특유의 다소 노골적인 정서가 우리의 감성으로 받아들이기에 다소 생경했던 탓도 있을 거다. 힙합이 90년대 말부터 현재까지 흥망성쇠를 반복하면서도 꾸준히 플레이어들을 배출하고 그 와중에 스타플레이어들을 탄생시키며 차츰 입지를 넓히고 자리를 잡아온 반면, 알앤비 음악은 여전히 독자적인 ‘씬(Scene)’조차도 확보해내지 못하고 있다는 점, 또 주류 케이팝 음악들이 여전히 알앤비의 요소를 수없이 차용하고 활용함에도 불구하고 정작 한국에 진짜 알앤비를 하는 음악가들의 수는 많지 않다는 점은 알앤비 음악 애호가로서 못내 아쉬운 부분이다.
‘리코(Rico)’
그 많지 않은 한국의 알앤비 음악가 중 한 명으로 본명은 박형민이다. 2012년부터 믹스테잎 [Boy’s Voice] 3연작을 잇달아 공개하면서 힙합/알앤비 팬들의 이목을 끌기 시작했다. 사실 다른 어떤 장르보다도 유독 남녀간의 사랑, 특히 ‘밤의 사랑’을 다루는 것에 최적화된 음악이 알앤비이고, 그 중에서도 발라드 성향 하위 장르인 ‘슬로우잼(Slow Jam)’은 소위 ‘섹스잼(Sex Jam)’, ‘Baby Making Music’으로 불릴 만큼 ‘육체간의 사랑’, 그러니까 ‘섹스’에 대한 묘사를 다루는 곡들이 많다. 한국에서 보편적으로 통용되기엔 다소 버거운 정서일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리코는 바로 이 슬로우잼을 본격적으로 표방하면서 씬에 등장했고 이는 알앤비 팬들의 호기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Tyrese / How You Gonna Act Like That> 공식 뮤직비디오
개인적으로 아주 좋아하는 슬로우잼 넘버를 하나 소개한다.
‘타이리즈’는 국내에선 영화 <분노의 질주>, <트랜스포머> 시리즈 등에 출연한 영화배우로 익숙할 터.
하지만 사실 그는 원래 아주 훌륭한 알앤비 보컬리스트이며 슬로우잼을 특히 잘 부른다.
고등학교 시절, 학업에 회의를 느낄 무렵 본격적으로 노래를 해보고 싶다는 열망을 느끼고 음악을 시작했다는 리코가 처음부터 알앤비를 추구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평소에 가요보다는 팝송을 즐겨 들었고 그 팝송들이 주로 ‘시스코(Sisqo)’, ‘니요(Ne-yo)’, ‘마리오(Mario)’ 등의 상업적으로 빅히트를 거둔 컨템포러리 알앤비 아티스트들의 음악이었다고 하는데 당시만 해도 ‘이게 알앤비구나’라는 인식은 없었다고 한다. 그랬던 그가 ‘알앤비’라는 장르를 인식하고 매력을 느끼게 된 것은 트레이 송즈(Trey Songz)’, ‘제이 할러데이(J. Holiday)’ 등 슬로우잼 성향 아티스트들의 음악을 접하면서부터. 이후 알앤비 음악들을 열심히 디깅하며 학창시절을 보낸 그는 일찌감치 군입대를 택했고 그래서 그의 음악가로서의 커리어는 전역 이후에야 비로소 시작된다.
<Trey Songz / Neighbors Know My Name> 공식 뮤직비디오 (후방주의)
‘트레이 송즈’는 현시대 가장 대표적인 슬로우잼 아티스트라고 해도 무방할 터이다.
전역 이후 활동을 시작한 리코의 초반 행보는 그야말로 ‘Hustle Real Hard’라고 할 만하다. 앞서 언급한 첫 믹스테잎 [Boy’s Voice]가 공개된 것이 2012년 4월. 이후 두 번째 믹스테잎 [Boy’s Voice 2] (2012년 07월), 세 번째 믹스테잎 [Boys’ Voice 3] (2013년 1월), 오리지널 트랙도 포함한 네 번째 믹스테잎 [R&B Boy] (2013년 3월), 이렇듯 불과 1년 사이에 무려 네 장의 믹스테잎을 쏟아내며 왕성한 작업량을 과시한다. 힙합 믹스테잎이야 당시에도 드물지 않았지만 알앤비 믹스테잎은 대단히 생소했기에 이 시기 그의 이 작업들은 완성도와는 별개로 나름의 희소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2013년 6월, 마침내 리코의 첫 공식 싱글 [Work That]이 세상에 공개되었다.
<Rico / Work That>
“낮엔 져줬지만 밤엔 가만 안 둬”
‘Work That’의 한 구절인 이 표현이 리코의 개성을 단적으로 드러낸다. 이 싱글을 포함해 이 시기 리코의 음악에서 주목해야 할 점은 본토 슬로우잼 음악의 스타일과 사운드를 충실히 구현하는 것 외에도 이 장르의 가사가 가진 특유의 노골적인 정서를 우리말로 어색함 없이 표현해내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노랫말들은 때론 과하다 싶을 정도로 진득하게 성애를 묘사해내는데 이런 리코만의 표현법은 아마 커리어 초반에 쉴 새 없이 이어간 커버 작업들, 그리고 그 결실인 네 장의 믹스테잎들을 통해 만들어지고 또 다듬어진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해본다.
리코(Rico)
같은 해 7월, 그의 신변에 변화가 생긴다. 베테랑 엠씨 ‘제리케이(Jerry.k)’가 설립한 흑인음악 레이블 ‘데이즈얼라이브(Daze Alive)’에 정식으로 합류하게 된 것. 제리케이의 노래 ‘사랑한다는 말’에 피쳐링한 것을 계기로 친분을 유지해오던 중 제리케이가 먼저 영입을 제안했다고 한다. 레이블 합류 직후 곧 발표된 두 번째 싱글 [Shawty]는 이 시기 그의 작품 중 비교적 라이트(?)한 축에 속하는 트랙으로 대중적으로 좋은 반응을 얻었고 지금도 여전히 ‘Works That’, ‘Special’ 등과 함께 그를 대표하는 곡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역시 같은 해 후반기에 발표된 또 하나의 싱글 [Bad on the Bed]는 제목이 암시하는 것처럼 리코 특유의 ‘침대송’ 슬로우잼인데 처음으로 뮤직비디오를 만들었다. 현재 언더그라운드 힙합 씬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레이블 ‘비스메이저(VMC)’의 수장이자 래퍼인 ‘딥플로우(Deepflow)’가 이 뮤비를 연출했다.
<Rico / Shawty> 라이브 @ ‘데이즈 얼라이브’ 레이블쇼 <D3>
<Rico / Bad on the Bed> 공식 뮤직비디오
화끈한 가사에 비해 되려 비디오는 수위가 좀 낮아서 약간 아쉽다.
<Rico / The Slow Tape> Cover
폭발적인 페이스로 작업물을 발표해온 ‘허슬러’ 리코의 행보는 첫 앨범 준비와 함께 마침내 잠시 숨을 고르게 되고 마침내 2015년의 시작과 함께 대망의 첫 번째 정규앨범인 [The Slow Tape]이 세상에 공개된다. ‘이치원(EachONE)’, ‘버기(Buggy)’, ‘티케이(TK)’, ‘엔소울(N-Soul)’ 등 다양한 비트메이커들과 작업, 총 열 트랙의 진득한 슬로우잼 넘버들을 수록한 이 앨범이 다루는 이야기는 시작부터 끝까지 오직 단 하나 ‘섹스’다. 그 결과 1번 트랙인 ‘Intro’와 마지막 10번 트랙 ‘남김없이’를 제외한 무려 여덟 곡이 ’19세 이상 청취’ 판정을 받는 기염을 토하며 ‘침대송 제왕’의 위엄을 유감없이 뽐낸다.
19금 표시가 난무하는 트랙리스트. 이쯤 되면 위엄마저 느껴진다. (Image captured from Naver Music)
<Rico / ‘Til The Sune Comes Up> 공식 뮤직비디오
앨범 발매 직전에 선공개되었던 이 싱글은 노래 만큼이나 비디오도 19금이다.
국내에서 보기 드문 정통 슬로우잼 스타일을 사운드, 보컬, 정서 등 모든 면에서 완성도 있게 구현한 이 앨범은 힙합/알앤비 매니아들의 뜨거운 호응을 얻었고 혹자들은 그를 ‘한국의 트레이 송즈’라 표현했다. 그의 음악에 관심을 표한 것은 이들뿐이 아니었다. 평단 역시 이 파격적인 앨범에 깊은 관심을 표했고 그 결과 제 13회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알앤비&소울 음반’, ‘최우수 알앤비&소울 노래'(수록곡 ‘Special’) 2개 부문에 후보로 노미네이트되는 쾌거를 이뤘다.
<Rico / Special> 공식 뮤직비디오
앨범의 타이틀곡으로 13회 한대음의 ‘최우수 알앤비&소울 노래’에 노미네이트되었다
이 시기 리코 스타일의 집대성이라고 할 만한 노래
데뷔 앨범을 통해 ‘침대송’은 할 만큼 했다고 판단한 것일까. 이후 공개한 세 개의 싱글 [Think I’m in Love], [T.F.D (Prod. by 87sound)], [Open Your Mind]는 모두 기존의 리코와는 다소 다른 스탠스를 취한다. 사랑하는 여성에게 마음을 고백하는 대폭 순화된 노랫말과 더불어 ‘Open Your Mind’, ‘Think I’m in Love’ 등의 트랙들은 사운드 면에서도 한결 밝아졌고 또 산뜻해졌다. 리코의 음악은 이미 이때부터 다음 스텝으로 이행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https://www.youtube.com/watch?v=rE4y7_trpgs
<Rico / Think I’m in Love> 공식 뮤직비디오
뮤지끄 소울차일드, 글렌 루이스 등의 음악이 연상되는 산뜻한 업템포 트랙.
기존의 리코와 눈에 띄게 다름이 느껴진다. (그 와중에 여주 완전 존예로움…)
프로듀서 ‘이치원(EachONE)’과 작업한 마지막 싱글 ‘Open Your Mind’로부터 꼭 1년이 지난 2017년 여름, 리코가 새로운 앨범 [White Light]를 예고하며 수록곡 ‘Paradise’를 먼저 공개했다. 1집 이후의 몇몇 싱글들에게 감지된 변화에 대한 예감은 이 선공개 트랙을 통해 확신으로 바뀐다. ‘붐뱁(Boom Bap)’ 스타일 힙합 비트의 ‘장인’이라 할 수 있는 베테랑 비트메이커 ‘마일드비츠(Mild Beats)’가 프로듀싱한 댐핑 ‘쩌는’ 비트 위로 팔세토 보컬을 수놓는 리코의 바이브는 예전과는 확연히 달랐다.
<Rico / Paradise> 공식 뮤직비디오
이 노래가 별로라고 하는 사람과는 진지하게 절교도 고려하겠다. 그만큼 멋진 곡이다.
총 다섯 트랙을 수록한 미니앨범 [White Light]는 리코가 자신의 뿌리였던 ‘슬로우잼’의 바깥으로 나와 무수히 많은 갈래가 펼쳐진 광활한 알앤비 세계의 다른 영역들에 과감히 발걸음을 딛으며 외연의 확장을 꾀하는, 본격적인 변화의 첫 걸음을 담은 작품이다. 이를 위해 ‘데이즈얼라이브’ 레이블의 동료 아티스트인 래퍼 ‘던말릭(Don Malik)’이 총괄 프로듀서로 참여, 리코의 음악에 새로운 색을 입히는 이 작업에 힘을 더했다고. 래퍼가 알앤비 앨범의 프로듀서로 나서는 상황이 의아할 수도 있는데 이런 과감한 시도는 던말릭의 음악적 역량에 대한 리코의 전폭적인 믿음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Don Malik / Untitled> 공식 뮤직비디오
96년생으로 비교적 어린 나이에도 불구, 트렌드를 좇기보다 전통적 ‘엠씨(MC)’로서의 애티튜드를 고수하고 있다는 점이 던말릭의 매력이다. 무엇보다 압도적인 실력을 지닌 래퍼다.
<Rico / White Light> cover
앨범의 포문을 여는 타이틀곡 ‘Come My Way’는 질주감과 청량감을 동시에 선사하는 활발한 기타 리프를 중심으로 업템포의, 그러나 묵직함도 함께 느껴지는 힙합 비트가 어우러져 한껏 흥겨운 분위기를 만들면서 새로운 리코의 컴백을 유쾌하게 선언한다. 사운드, 스타일에서의 확장과 변화뿐 아니라, ‘보컬리스트’ 리코의 역량 역시 한층 진화했음을 느낄 수 있는데 보컬의 완급조절, 그루브 등 모든 면에서 스텝업한 리코를 만날 수 있다. 무엇보다 그 멋진 음색이 지닌 매력을 어떻게 해야 더 잘 활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노하우가 진일보하지 않았나-라는 느낌을 준다.
<Rico / Come My Way> 공식 뮤직비디오
신예 여성 싱어송라이터 ‘SOMA’와 호흡을 맞춘 끈적한 알앤비 넘버 ‘Like This’는 흑인음악 레이블 NOP 소속의 싱어송라이터 ‘Livin’ Forest’가 프로듀스한 트랙으로 멜랑콜리한 기타 리프와 두 사람의 보컬이 조화를 이뤄 만들어내는 은밀하고 관능적인 바이브가 일품이다. 무대 위에 섰을 때 최고의 기분을 느끼는 아티스트로서의 자기 자신을 노래하는 이 트랙은 사운드의 결에서 수록곡 중 유일하게 과거 리코의 스타일과 접점이 있는 듯 느껴지기도 한다. 가볍게 몸을 흔들게 하는 그루브가 매력적인 ‘Sign’은 미묘하게 썸을 타는 관계에 대해 노래하는데 ‘너가 내게 주는 작은 신호(Sign)를 찾으려 하는’ 화자의 속내를 리코 특유의 위트로 표현하는 노랫말이 재미있다. 이어 싱글로 먼저 공개되었던 ‘Paradise’를 지나고 나면 앨범의 마지막 트랙인 ‘Interlude’가 짤막하게 흐르며 미니앨범에 마침표를 찍는다. 30초 남짓의 이 짧은 트랙에서 리코의 보컬은 랩과 보컬의 경계선 위에 미묘하게 걸쳐 있는데 왠지 ‘앤더슨 팩(Anderson .Paak)’을 연상케 하는 부분이 있다.
그런데 마지막 트랙이면서 어째서 제목이 ‘Interlude’냐고? (‘인터루드’는 일반적으로 ‘간주곡’을 의미한다) 이제 와서야 비로소 밝히건대 [White Light]는 사실 그 자체로 하나의 온전한 완성작은 아니다. 이 미니앨범은 어디까지나 진정한 리코의 2집 앨범으로 향해 가는 여정의 첫 번째 파트일 뿐이며 그 여정은 뒤이어 공개될 두 번째 파트 [Panorama]를 거쳐 마침내 [White Light Panorama]라는 이름의 “완전체” 풀렝스(Full-length) 앨범으로 귀결될 것이다.
그렇다. 리코의 손에는 아직도 남은 카드가, 최후를 위해 숨겨둔 패들이 더 남아있다. 모처럼 돌아온 리코가 우리에게 선사하는 이 새로운 즐거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뜻이다. (데이즈얼라이브 레이블의 수장 제리케이의 귀띔에 따르면 앨범의 나머지 파트는 [White Light]와는 또 완전히 다른 색깔의 음악을 담고 있다고 한다) 오랜 알앤비 음악의 팬으로서 빨리, 하루라도 빨리 나머지 음악들도 들어보고 싶다. 이 미니앨범은 내게 크나큰 즐거움을 선물하는 동시에 즐거운 기다림까지 함께 덤으로 안겨주었다.
<Rico / Come My Way> (Long-take ver.)
Editor / 김설탕
sugarules@poclanos.com
(‘Deep Inside’ 코너의 모든 글은 에디터의 개인적 주관을 반영한 것으로 본사의 공식적인 입장과는 일절 무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