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ep Inside #9
서바이벌 쇼의 바깥에서 치열한 현실 인식으로 써내려가는 사실적 리리시즘, 그것은 여전히 현재진행형 [Jerry.K / OVRWRT]
“어제 쇼미더머니 봤어?”
매년 쇼미더머니 시즌이 되면 주변 사람들에게 이 질문을 꽤나 많이 받는다. 올해도 역시 마찬가지였고. 그들의 인식 속 내가 ‘힙합을 좋아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비롯되는, 질문인 듯 질문 아닌 질문 같은 이 말. 사회적 인간의-공통의 화제를 통해 대화를 부드럽게 시작하려는-보편적 커뮤니케이션 스킬이라는 것을 이해하지만 같은 문답이 잦아지고 반복되면 아무래도 피로감을 느낄 수 밖에 없다. 그런 고로 이 자리를 빌어 그들에게 명확하게 밝혀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아니. 나 쇼미더머니 안 봐. 앞으로도 안 봐.”
내가 ‘쇼미더머니’라는 프로그램을 보지 않는(이라 쓰고 ‘싫어하는’이라 읽는다) 이유를 대보라 하면 사실 꽤 여러 가지 구구절절 읊어댈 수 있을 테지만 그냥 굳이 한 마디로 딱 잘라 정리해 말하자면 ‘멋없게 느껴져서’다. 멋없다-라는 표현이 딱히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음악가들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어쨌거나 지금의 한국에서 힙합 음악가들이 인스타그램 팔로워 숫자를 늘리기 위해, 그러니까 ‘나를 알리기 위해’ 택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이고 강력한 수단이 ‘쇼미더머니’라는 것만은 분명하고 내겐 그들의 현실적 선택을 가타부타 평가할 자격 같은 것은 없으니까. 다만 내겐 이 프로그램이, 혹은 이 프로그램에 얽힌 주변의 모든 상황들, 영향들이 죄다 멋없게 느껴진다. 멋이 없어 흥미도 없다. 그저 그뿐이다. (이에 대해 나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면 사석에서 뜨끈한 국물에 소주 한 잔 하는 걸로 하자)
하여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행여 다수의 대중들, 혹은 이 글을 읽는 당신의 인식 속에서 ‘쇼미더머니’가 현재 한국의 힙합 전체와 동일시되고 있거나 혹은 이를 대표하는 존재로 여겨질지언정 정작 현실세계에서 ‘한국힙합’은 그 바깥에도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곳에서 여전히 의미심장한 움직임들이, 훌륭한 음악적 성취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난 늘 그곳에 관심이 있고 거기서 벌어지는 일들에 촉각을 세운다. 그리고 바로 거기, ‘제리케이(Jerry.k)’라는 음악가가 있다.
[Soul Company / 아에이오우 어? (feat. Kebee, Jerry.k, Makesense, MC Meta, Planet Black, The Quiett, 최적화)] (2004)
‘제리케이’를 이야기하기 위한 첫 단추는 당연히 레이블 ‘소울컴퍼니(Soul Company)’다. 2004년, 컴필레이션 앨범 [The Bangerz]와 함께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낸 이 레이블은 2011년에 해체되기까지 ‘더 콰이엇’, ‘화나’, ‘키비’, ‘마이노스’, ‘랍티미스트’, ‘펜토’, ‘매드클라운’, ‘크루셜스타’ 등 쟁쟁한 아티스트들을 배출하며 큰 사랑을 받았고 한국 힙합의 역사에 크고도 진한 흔적을 남겼다. 한국 언더그라운드 힙합의 시작을 논하면서 ‘마스터플랜’을 빼놓을 수 없듯 언더그라운드 힙합이 본격적으로 성장하고, 대중들과 교감하며 파이를 키워가는 2000년대 중후반기를 이야기할 때 반드시 언급되어야 할 이름, 제리케이는 바로 이 레이블의 시작과 끝을 함께한 핵심 멤버였다. 그는 솔로 아티스트로, 또 ‘메익센스(Makesense)’와 결성한 듀오 ‘로퀜스(Loquence)’의 멤버로 종횡무진 활약하며 ‘소울컴퍼니’의 역사 내내 줄곧 레이블을 대표하는 얼굴 중 하나였다.
Jerry.k(제리케이)
2004년 첫 EP [일갈(一喝)]을 온라인에서 무료로 공개하면서 솔로아티스트로서의 행보를 시작했다. (이 음반은 이후 2006년에 몇 곡의 신곡, 리믹스를 포함해 정식 발매되었다) ‘소울컴퍼니’ 레이블의 음악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감성적인 힙합’이라 회자되었던 반면, 그의 음악은 붐뱁이나 하드코어에 기반을 둔 묵직한 사운드와 함께 공격적, 비판적인 가사로 레이블의 또 다른 면을 보여주는데 이는 당시 그가 속해있던 그룹 ‘로퀜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때부터 보여진 독설가적인 면모는 현재까지 이어지는 그의 커리어 전체를 꿰뚫어 일관되게 유지, ‘현실 참여적 음악가’로서의 제리케이의 캐릭터를 설명하는 특징적인 요소가 되고 있다.
[제리케이 / 발전을 논하는가 (Break: 바닥까지 떨어져라) (2004)
“내 랩은 시보다는 웅변에 가깝다”
2008년, 현재도 여전히 그의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로 꼽히는 첫 번째 정규작 [마왕]이 발표된다. ‘인간성’을 위협하고 타락시키는 모든 것을 ‘마왕’으로 규정하고 사회구조, 정치, 교육 등 다양한 이슈들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내며 특유의 날이 바짝 선 날카로운 메시지들을 쏟아내는 작품이다. 일반적으로 랩을 ‘시’에 비유하지만 제리케이는 이런 자신의 음악에 대해 차라리 ‘웅변’에 더 가깝다 말한 바 있는데 실제로 그의 가사는 종종 그저 비판적인 것 이상으로 ‘선동적’인 뉘앙스마저 풍기며 부당한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껍질을 깨라 외치는 것처럼 들린다. (이러한 특유의 성향으로 이후 정치 팟캐스트의 시초와도 같은 프로그램 ‘나는 꼼수다’의 로고송을 부르기도 했다)
“미끄럼틀을 보며 삼각함수를 읊어대고
영어단어를 붙여놨지 심지어 물병에도
미술대회 피아노 대회 또 웅변회도 휩쓸면 그 한마디
역시 특별해 넌“
– [마왕] 수록곡 ‘아이들이 미쳐가(The Kids Go Crazy)’ 中
<제리케이 / 마왕> Cover Artwork
2011년, ‘소울컴퍼니’가 마침내 그 다사다난했던 히스토리의 마침표를 찍고 해체한 후 2012년, 그는 1인 레이블 ‘Daze Alive(데이즈얼라이브)’를 설립했다. 같은 해 초에 발표한 ‘연애담’ EP가 비교적 가벼운 터치로 연애의 다양한 면들을 조명하며 기존의 제리케이의 음악과는 결을 달리하는 모습을 보여줬던 반면, 연말에 발표한 두 번째 정규작 [True Self]에서는 특유의 사회비판적 메시지와 더불어, 본인의 내면을 탐구하는 깊이 있는 자아성찰을 함께 담아내며 호평을 받는다. 이 앨범은 제 10회 한국대중음악상에서 최우수 랩/힙합 음반 부문에 노미네이트되기도. 또한 이 시기의 제리케이를 이야기하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시국선언’이다. 2009년부터 2012년까지 MB 정부가 대선 승리 등을 목적으로 여론조작에 국정원, 국군사이버사령부 등을 동원한, 이른바 ‘국정원 댓글조작 사건’이 불거지자 랩으로 만든 시국선언문을 공개하며 민주주의를 침해하는 국가권력의 부당함을 통렬하게 비판한다. 제리케이는 이 시기에 이 문제를 음악으로 다룬 거의 유일한 음악가였으며 바로 그런 점이 한국 힙합씬에서의 제리케이의 존재 가치를 단적으로 설명한다. (한편 이 노래는 그를 부정적으로 칭하는 호칭 중 하나인 좌리케이의 탄생배경이기도 하다)
[제리케이 / 시국선언] official M/V (2013)
“제일 무해한 랩을 하는 제일 악명 높은 크루” Daze Alive의 탄생
2013년 여름, 여성 래퍼 ‘슬릭(Sleeq)’과 알앤비 보컬리스트 ‘리코(Rico)’가 레이블에 합류하면서 ‘Daze Alive’는 더 이상 1인 레이블이 아니게 되었다. 이후 2015년에는 ‘던말릭(Don Malik)’이 합류, 현재의 로스터를 갖추게 된다. 이제 그는 어엿한 레이블의 수장, 그리고 후배 음악가들의 멘토의 역할까지 겸하게 되면서 본인 커리어의 새로운 막을 본격적으로 열게 된다. ‘슬릭’, 그리고 ‘던말릭’은 제리케이와 마찬가지로 트렌드를 좆기보다는 리리시즘(Lyricism)에 바탕을 두고 자신의 철학, 애티튜드를 음악에 담으려 노력하는 음악가들이라는 점에서 ‘데이즈 얼라이브’ 레이블의 색깔에 꼭 맞는, 최적의 조각들임에 틀림없다.
[슬릭 & 던말릭 @ MIC SWAGGER Season 2] (2016)
“중요해 팔리는 노래, 더 중요한 건 누굴 살리는 노래”
여전히 여성혐오의 정서가 잔재하는 ‘힙합’이라는 바운더리 안에서 ‘슬릭’은 스스로를 ‘헬라 페미니스트’라 지칭하며 씬의 여성혐오 정서를 신랄하게-매우 명료한 딜리버리로-디스한다.
한편 윗잔다리 싸이퍼 출신의 래퍼 던말릭은 96년생이라는 것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 경악스러울 정도로 여유로우며 또 유려한 플로우의 리튼 프리스타일을 선사한다.
[리코 / Paradise] official M/V (2017)
슬로우잼 아티스트로 알앤비 팬들에게 이름을 알린 [The Slow Tape] 에라를 지나 자신의 음악세계를 한 차원 확장한 리코의 컴백 싱글. 개인적으로 올해 최고의 알앤비 트랙 중 하나.
오는 12월 초에 정규 2집 [White Light Panorama]의 풀버젼을 음원으로 공개할 예정이다.
한편 ‘데이즈얼라이브’ 설립 이후부터의 제리케이는 정말 ‘쉴 새 없이’ 작업물을 선보이며 소위 ‘허슬러’적인 면모를 보여주는데 인터넷에서 그의 디스코그래피를 검색해보면 2012년부터 현재까지 그가 발매한 음원, 음반의 양이 상당함을 확인할 수 있다. 2014년의 정규 3집 [현실, 적], 그리고 2016년의 정규 4집 [감정노동]은 이 기간 그의 창작활동을 대표하는 결과물들로 제리케이의 음악이 여전히 현실(현재의 대한민국) 위에 발을 딛고 서있음을, 자신이 속한 세상의 불편한 진실들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치열하게 고민하고, 여전히 비판의식을 날카롭게 벼리고 있음을 증거한다.
[제리케이 / 다 뻥이야] (official MV) (2014)
3집 [현실, 적]에 수록된 이 트랙은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고 권력과 자본의 노예로 타락해버린
한국의 기성언론들을 락킹한 비트 위에서 신랄하게 조롱하고, 또 질타한다.
“Ferguson의 SNS는 인생의 낭비라는 말로 날 욕먹게 만든 반면
Ferguson Brown의 죽음* 미국 래퍼들이 거기에 모여드는 장면
표현의 자유 온갖 종류의 차별 그 무엇 하나도 넌 관심 없잖어”
– [감정노동] 수록곡 ‘Studio Gangstas’ 中
특히 4집 [감정노동]은 제리케이의 디스코그라피를 통틀어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는 앨범인데 이 앨범에서는 특유의 날카로운 메시지를 표현하는 방식, 또 이를 담는 그릇인 사운드 프로덕션 모두 한 단계 스텝업하는 동시에 이 두 가지의 조화 역시 그의 커리어를 통틀어 최고의 수준에 이르렀다-는 인상을 준다. 유연하게 완급을 조절하는 랩과 사운드의 조화로운 구성은 음악에의 몰입도를 한층 높인다.
[제리케이 / #MicTwitter] official MV (2016)
4집 [감정노동]의 백미 중 하나인 이 트랙은 트위터 헤비유저로 익히 알려진 ‘트잉여’ 제리케이가
트위터의 형식을 빌려 140자 이하의 벌스 7개를 엮은, 독특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날카로운 위트가 번뜩이는 가사들을 트위터 화면을 통해 텍스트로 나열하는 비디오 역시 흥미롭다.
[제리케이 / 콜센터 (feat. 우효)] official MV (2016)
“우리 기분은 아무도 묻질 않아”
제 14회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랩/힙합 노래’ 부문에 노미네이트된 이 곡은
콜센터 직원의 고단한 일상을 묘사하며 ‘감정노동’이라는 앨범의 주제의식을 또렷하게 드러낸다.
[감정노동] 이후 잠시 숨을 고른 제리케이가 2017년 11월, 이전 앨범으로부터 약 20개월 만에 공개한 새 앨범이 바로 [OVRWRT]이다. 총 열 트랙을 수록하고 있는 이 앨범에 대해 제리케이 본인은 정규 5집이 아닌 4.5집 개념의 ‘비정규’ 앨범이라 설명하고 있다. ‘덮어쓰기(Overwrite)’라는 타이틀은 과거의 자신을 부정하며 단절시키기보다는 과거의 모습들도 있는 그대로 감싸 안으며 그 위에 새로운 나를 덮어써 ‘업데이트’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다수의 수록곡을 본인이 프로듀싱, 비트메이커로서 진일보한 모습을 보이는 동시에 국내외 다양한 비트메이커들과도 작업한 이 앨범은 사운드 프로덕션의 측면에서 전작 [감정노동]을 상회하는 만듦새를 보여준다. 한편 다양한 스타일의 트랙들을 소화하는 제리케이의 랩 역시 스킬, 표현 방식 모든 면에서 더욱 발전, ‘래퍼’ 제리케이도 여전히 진화하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제리케이 / OVRWRT> Cover Artwork
앨범 타이틀과 동명인 인트로 격의 오프닝 트랙 ‘OVRWRT’은 제리케이 본인이 프로듀스한 매끈하고 감각적인 비트 위로 촘촘하게 라임을 배열하며 2017년 현재의 ‘제리케이’가 어떤 상태인지 이야기하는 동시에 여전히 자신의 포지션을 굳건하게 지키고 있는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과 자신감을 드러낸다. 열렬한 레드벨벳의 팬으로 알려진 그답게 레드벨벳의 노래 ‘빨간 맛 (Red Flavor)의 가사를 슬며시 인용한 부분이 재미있다.
<레드벨벳 / 빨간 맛 (Red Flavor)> Unofficial Remix by 제리케이
단순 덕심으로 만들었다고 하기엔 지나치게 고퀄. ㅇㅇ
“어이 내가 위선자냐 그럼 넌 뭔데
위선자라고 치자 넌 왜 그 정도도 못 해
적어도 난 선이라는 선 위에 서 있으려 노력해
선이란 건 없단 놈들의 면면은 눈 뜨고 볼 수 없네”
– [OVRWRT] 수록곡 ‘아이봉 (アイボン)’ 中
이어지는 ‘아이봉’은 랩과 비트 모든 면에서 앨범에서 가장 공격적인 트랙이다. 자신과 레이블에 부정적인 시선과 태도를 취해온 이들에게 ‘우리가 이야기하는 불편한 진실은 너희 신경을 긁지’라 얘기하며 다양한 각도에서 그들을 향한 비판과 조소를 날린다. 자신이 택한 길에 대한 당당함과 자신감의 표출은 이 트랙에서도 이어진다.
[제리케이 / 아이봉 (アイボン)] Lyric Video (2017)
알앤비 보컬리스트 ‘호림(Horim)’이 피쳐링한 트랙 ‘Mercy’는 개인적으로 앨범의 베스트 트랙으로 꼽고 싶은 곡이다.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가스펠적인 코러스가 인상적인 이 곡에서 제리케이는 그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겪게 되는 내적인 고뇌를 은유적으로 노래한다.
[제리케이 / Mercy (feat. Horim)] Lyric Video (2017)
레이블 동료 ‘던말릭’의 랩, ‘슬릭’의 코러스, 그리고 제리케이의 애견 ‘사자’도 슬쩍 목소리를 보탠(?) 트랙 ‘알약’은 전자음악가인 ‘퍼스트에이드(FIRST AID)’가 주조한 몽롱한 바이브 가득한 비트가 인상적이다. 퍼스트에이드 특유의 따스한 질감의 비트 위로 서늘한 무드를 조성하는 슬릭의 코러스가 어우러져 어딘지 현실을 벗어난 것만 같은 독특한 인상으로 다가온다.
[제리케이 / 알약 (feat. 던말릭, 슬릭 & 사자)] Lyric Video (2017)
사자는 사람 나이로 치면 마흔다섯이란다. 나보다도 형님이다.
쉽지 않은 길을 걸으며 겪는 현실적 갈등과 고충을 솔직히 고백하는 ‘Can We Dance’, 제리케이와 슬릭 각자의 내면의 갈등을 투영하는 관조적 분위기의 트랙 ‘걸리버’를 지나 이어지는 ‘New New’, 그리고 ‘리짓군즈’의 새 멤버 ‘재달’이 피쳐링한 ‘PM 2.5’는 앨범을 통틀어 가장 트렌디한 감각을 담은 트랙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섯 해가 지나가는 많은 이의 최애곡이 나는 이젠 창피해”
– [OVRWRT] 수록곡 ‘New New’ 中
트랩 비트를 기반으로 보컬과 랩의 경계를 넘나드는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이 두 트랙 중 특히 ‘New New’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새롭게 하고 싶다고 외치는, ‘덮어쓰기’라는 앨범의 타이틀이 지닌 주제의식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곡이다. “다섯 해가 지나가는 많은 이의 최애곡”은 본인의 2012년 싱글 ‘You’re Not A Lady’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 곡에서의 본인의 맨스플레인적 스탠스가 무지에서 비롯된 과오임을 순순히 인정하고, 동시에 이런 ‘어제의 나를 업데이트한 오늘의 나’가 되리라 이야기한다. 바로 이런 지점이 제리케이의 진면목이기도 하다. 끝으로 클로징 트랙인 ‘셰셰셰 (Yes Yes Yeah)’는 앞서 지난 5월에 본인의 결혼 2주년을 기념하고 자축하고자 선보였던 즐거운 바이브가 듬뿍 담긴 펑키 그루브의 곡. 다양한 감정, 속내를 표출하는 이 자전적인 성격의 앨범에서 마지막 트랙이 이 곡이라는 것은 어쩐지 의미심장하다. 그는 이 같은 트랙 배열을 통해 이런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난 여전히 괜찮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여전히 내 자리에 잘 서있다고.” 비록 자신이 걸어온 길이, 또 앞으로 걸어갈 길이 가시밭길이었고, 또 여전히 가시밭길일 것임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즘으로 마케팅하는 제리케이.”
제리케이를 폄하, 비방하는 몇몇 논리들 중 가장 납득할 수 없는 한 가지를 꼽자면 바로 이거다. 그래서 익명의 그 누군가들에게 되려 되묻는다. [일갈], [마왕], [감정노동] 등을 거치며 무려 14년이라는 긴 시간을 지속해온 제리케이의 커리어를 통틀어 그가 정치적, 사회적으로 ‘올바름’을 추구하지 않은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나? 게다가 과연 힙합이라는 카테고리 내에 존재하면서 페미니즘을 팔아먹는 것은 정말 유용한 마케팅의 방법일까? 우리 제발 솔직해지자.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우린 이미 충분히 봐오지 않았나.
온갖 혐오가 만연한 시대, 불편한 진실을 이야기하면 그래서 불편한 사람으로 취급 받는 시대, 올바름, 선을 추구하면 되려 이상한 사람, 관종 취급을 받는 이상한 시대다. 이런 시대의 한복판에서 우직하게 자신의 스탠스를 고수하며 자신의 목소리를 내온 그의 태도는 마케팅은 커녕 되려 ‘적’의 숫자만 늘리기 딱 좋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지점이 제리케이가 한국 힙합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그리고 여전히 필요한 이유가 된다. 비록 그는 가장 최신의 힙합을 하는 래퍼도, 혹은 가장 랩을 잘하는 래퍼도 아닐지 모르지만, 그가 추구해온 태도가 힙합이라면 반드시 담보해야 할 ‘정답’ 또한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까지 치열하게 시대정신을 리리시즘 안에 녹여내고 노래할 수 있는 래퍼는 여기 대한민국 안에서 매우 희귀하니까. ‘이 씬의 유일한 독립변수’ 제리케이의 가치는 바로 거기에 있다.
Editor / 김설탕
sugarules@poclanos.com
(‘Deep Inside’ 코너의 모든 글은 에디터의 개인적 주관을 반영한 것으로 본사의 공식적인 입장과는 일절 무관합니다)
각주
* 2014년, 미주리주 퍼거슨시에서 경찰이 무고한 흑인 ‘마이크 브라운’을 편의점 강도로 오인해 총격 사살한 사건. 이를 계기로 #BlackLivesMatter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 캠페인이 본격화되었고 다수의 흑인 음악가들이 이 캠페인에 적극적으로 참여, 대중들에게 흑인사회의 메시지를 전파하는 역할을 자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