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처음은 이제 없어요
- Artist 썬 타운 걸즈,
- Release2025-10-13
- Genre Pop, Rock,
- Label썬썬레코즈
- FormatEP
- CountryKorea
- 1.눈물젖은
- 2.꿈내음
- 3.입맞춤
- 4.손인사
- 5.볼빨간
- 6.고백
요새 나는 종종 1950년대 말엽의 트랙들을 찾아 듣는다. 로큰롤이 시끌벅적한 형체를 갖춰가고, 보컬 그룹이 두-왑거리며 화성을 맞추고, 프로듀서들은 천국 같은 리버브를 또 기타리스트들은 지옥 같은 디스토션을 걸고, 그렇게 소리가 그 자체로 매력적인 인공물이 되어가던 시절의 팝송들. 이 원초적인 곡들에서 부쩍 실감이 가는 점이란, 팝은 원래부터 이상했다는 것이다. 시끄러운 동시에 부드러울 수가 있고, 분열된 동시에 통합되어 있고, 전혀 말이 안 되는 동시에 아주 말이 되게 하는, 어디로 튈지 모를 소리를 안정화 하는 이 기묘한 힘이야 말로 팝일 것이다. 이 힘을 알아차리고 그에 매료된 사람들은 재료와 규칙에 상관없이 오늘날까지도 그저 좋은 팝을 만들어낸다. 그러한 좋은 팝은 이른바 ‘대중성’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언제서든 어디서든 제 모습을 갖출 수가 있다.
부산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썬 타운 걸즈가 첫 EP 《처음은 이제 없어요.》에서 하는 일도 바로 그것이다. 저 이상한 힘을 활용하면서 (흔하게는 ‘모던 록’이라는 표현으로 익숙할) 가요식 기타 팝을 만들기. 한 예로 음반의 두 번째 곡인 〈꿈내음〉을 우선 들어 보자. 경쾌한 네 박자 드럼에 따라 찌그러진 전기기타 소리가 울리더니, 뒤이어 기타 노이즈가 공간을 순식간에 채워버린다. 그러나 작렬하는 소음에도 불구하고 본래의 리프에 담긴 명랑한 선율은 묻히지 않고 오히려 저 소음을 흐릿한 배경으로 보내 버린다. 바로 이런 연출에서 썬 타운 걸즈만의 팝이 성립한다. 이 간명하고 효과적인 도입부가 지나고, 로네츠(The Ronettes)가 연상되는 상징적인 드럼 패턴이 리버브를 살짝 머금고 깔리는 것에서도 옛 팝이 남긴 흔적을 발견할 수가 있고 말이다. 후렴구에서 노이즈의 밀도가 더욱 높아지며 공간감을 확 넓히더라도, 이에 크게 간섭 받지 않고 전경에 남아 곡을 이끄는 보컬과 리드 기타의 선명한 멜로디가 〈꿈내음〉의 구조를, 드럼 뿐만 아니라 이러한 소리에 물기를 살짝 덧입혀 거칠어질 수도 있을 질감을 촉촉하게 조정하는 리버브가 〈꿈내음〉의 질감을 묶어내는 셈이다.
이렇게 《처음은 이제 없어요.》에서의 팝은 곳곳에 소음이 매캐하게 깔렸음에도 음향 전반을 ‘안정적으로’ 제어하는 특출난 기예에서 발생한다. 거슬러 올라가자면 브라이언 윌슨(Brian Wilson)과 필 스펙터(Phil Spector)와 같은 당시의 프로듀서들이 서로 다른 소리를 한 덩어리의 질감으로 합치는 제작법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아니면 지저스 앤 메리체인(The Jesus and Mary Chain)의 《Psychocandy》부터 위민(Women)의 《Public Strain》까지 시대를 불문하고, 1950~60년대의 꿈결 같은 울림을 머금은 채 과거를 아름답게 찌그러뜨리면서도 분명히 팝으로 남은 현대의 음반들이 좀 더 유사할 수 있겠고 말이다. 어느 쪽이든, 팝은 악음과 소음 가리지 않고 모든 소리를 부드럽게 안정시킬 수가 있다.
생각해 보자면, 썬 타운 걸즈에는 누구보다 소음에 노련한 사람들이 속해 있다. 보컬과 기타를 맡은 강동수는 올해만 해도 소음발광의 라이브 음반 《‘25 Live <쾅!!>》으로 한국 대중음악사상 가장 시끄러운 록 사운드 중 하나를 성공적으로 담아냈고, 이 음반의 녹음부터 소음발광의 드러머로 참여한 마재현도 썬 타운 걸즈에 합류했다. 그와 같은 부산대 동아리 우든키드 출신인 허정훈·김정은도 각각 기타와 베이스로 힘을 보탰고 말이다. 그럼에도 《처음은 이제 없어요.》의 노이즈는 사운드를 날카롭게 찢거나 육중하게 포화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번의 EP 특유의 분위기는 극단적인 음역대들을 깎아서 좀 더 부들거리게 다듬어지고, 여기에 리버브를 알맞게 건 덕에 여백을 뿌옇게 칠하는 질감에 가까워진 소음을 기반으로 한다. 바로 이런 특징들이 썬 타운 걸즈가 팝의 힘을 노련하게 활용하는 솜씨다.
그렇지만, 썬 타운 걸즈는 오로지 반세기도 전의 영미권 팝만을 지향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바로 여기서는 가요의 힘이 오히려 팝보다도 중요해 진다. 또 다른 예시로 첫 곡인 〈눈물 젖은〉을 들어 보자. 앞서 설명했듯, 여기서도 팝은 노이즈와 리버브가 균형 잡혀 조절된 질감에서 힘을 발휘하고 있다. 그렇지만 곡의 전경에서 전개를 주도적으로 이끄는 건 절에서는 리드 기타가 후렴에서는 백킹 기타까지 합세해 고유한 음색과 선율을 실컷 뽐내는 리프다. 영미권의 인디 록에서 고전적인 팝 사운드를 훨씬 극단적으로 몰아가 아예 망가뜨리는 사례들을 종종 들을 수 있는 것과 달리, 〈눈물 젖은〉에서 제시되는 다양한 톤들은 왜곡과 증폭을 밀어붙이기보다 오히려 과감히 절제하는 음색을 택한 듯 들린다. 그러나 첫 절에서는 상대적으로 소박하게 느껴졌던 기타 음색이 후렴에서 갑자기 명료한 선율을 타고 카랑카랑하게 쏘아붙일 때, 이러한 연출에서 가요식의 기타 팝이 두드러지는 셈이다. 조금 도식적으로라도 구분 짓자면, 팝의 힘이 시끄러움을 부드럽게 안정시킬 수 있는 한편 가요의 힘은 부드러움도 시끄럽게 표현할 수가 있다고 해야 하나. 나에게는 팝의 힘을 가져오되 이를 역으로 받아 쳐서 흐트러뜨리는 것이 가요에 잠재된 가능성이고, 썬 타운 걸즈가 《처음은 이제 없어요.》에서 음향 전반적인 질감과 전기기타의 톤과 멜로디를 엎치락뒤치락 조정하면서 실현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언니네 이발관의 첫 음반이 발매되던 1990년대 중순부터 싹이 터 얄개들의 《그래, 아무것도 하지 말자》와 같이 알찬 열매들이 잔뜩 맺어지는 2010년대 중순까지. 가요식 기타 팝은 지난 사반세기 동안 한국의 인디 록(과 어쩌면 대중음악사)에서 한줄기를 차지하며 저만의 구색을 갖추기는 물론 어느새 제 나름의 유산까지도 누적해 왔다. 바로 이 역사를 참조해, 썬 타운 걸즈는 《처음은 이제 없어요.》의 특징적인 기타 톤과 멜로디를 구성했다. 이펙트의 과도한 사용은 자제하지만, 오히려 단순 명쾌한 기본 조건들 만을 충분히 활용해 세부가 무척이나 구체적으로 짜이고 때로는 안정적으로 시끄러워질 수도 있는 식으로. 그런 전기기타 음색에 맡겨진 멜로디를 타고 화자의 내밀한 서정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심정이 벅차 오르도록 청자를 이끄는 식으로. 썬 타운 걸즈는 어느새 교본이자 정전이 된 《비둘기는 하늘의 쥐》 풍이나 얄개들 풍이라고도 할 수 있을 가요 식 기타 팝이 좀만 더 요란해지고 그만큼 색채부터 감정까지 여러 면모가 부드러워질 수 있기를 시도한다. 짙은 소음이 무성해진 질감과 제법 일그러진 전기기타의 음색으로도 충분히 가요가 성립될 수 있다고 기꺼이 믿어보면서.
그런 의미에서, 《처음은 이제 없어요.》는 뿌옇게 울리는 옛 팝의 분위기로 펼쳐진 질감 속에 가요적인 기타 음색과 선율을 성공적으로 채워 넣었다. 타이틀 트랙인 〈입맞춤〉이야말로 이런 썬 타운 걸즈의 특성을 훌륭하게 전달하는 곡이다. 소음발광의 첫 EP인 《풋》에 실린 예쁘장한 곡들이 연상되기도 하는 보컬 라인이 “철없는 사랑놀이”의 면면을 전하자, 짧은 후렴의 역할을 맡은 전기기타가 첫 입맞춤을 나누는 마음을 전하듯 꽤 떠들썩하게 음색을 키워 또렷한 멜로디의 리프를 연주한다. 그러나 〈입맞춤〉은 이런 첫사랑을 과거로 보내면서 새로운 구간으로 접어들고, 그에 따라 찰그랑거리는 전기기타의 음색이 불꽃놀이가 만발하듯 강도와 밀도를 서서히 올린다. 실패한 사랑을 되새기는 이의 마음은 이러한 모습을 띨 것이다. 천천히 불어나는 소음에 따라 곡 전체가 고조되는 와중, 리버브의 잔향에 실려 들려오는 한 줄기 목소리에서 문득 “처음은 이제 없어요”라는 문장이 묻어나온다.
바로 이러한 노랫말에서도 팝의 힘은 가요의 힘으로 역이용된다. 사랑을 주제 삼아 화자와 청자의 관계를 풀어내는 것이란 물론 고전적인 팝의 방식이겠지만, 노랫말의 세부로 파고 들어가면 “잊지 못한 꿈의 파편들”을 나열하면서 실패한 사랑의 감정을 되새기고 “볼 일 없이 가버렸”던 연인과 즐거웠던 한때를 떠올리는 화자는 좀 더 친숙하게 가요적일 테니까. 그런 덕인지, 〈입맞춤〉에서 어렴풋한 질감을 뚫고 상쾌한 소음을 내뿜으며 달려가는 전기기타 리프는 흥얼거리는 보컬과 만나 벅찬 마무리를 만들어낸다. 바로 이렇게, 《처음은 이제 없어요.》에서 썬 타운 걸즈는 양편의 힘을 끌어와 그들만의 가요식 기타 팝을 들려준다. 어림잡아서 듣는다면 팝이겠지만, 자세하게 들을수록 결국 좋은 가요라고 해야 할까.
사뭇 경쾌한 속도로 시작한 EP는 〈입맞춤〉을 기점으로 뒤쪽 절반에서는 훨씬 느릿해지는데, 그런 만큼 곡들은 어떠한 정경을 더욱 끈덕지게 들려준다. 다섯 번째 곡인〈볼빨간〉에서도 〈입맞춤〉만큼 썬 타운 걸즈의 정수가 담겨 있다고 느껴진다. 7분이나 되는 시간 동안 똑같은 노랫말로 하나의 장면을 맴돌기 때문이다. 〈손인사〉가 “아 꿈이어라”라 중얼거리며 지나간 사랑을 떠나보내고 〈고백〉이 말하자면 ‘망사랑’을 일종의 우스운 단막극처럼 느껴지게 전달하면서 그 ‘실패’를 규정하는 것에 비해, 〈볼빨간> 은 처음부터 모든 구성 요소의 선명도를 확 올려놓고 추운 호숫가를 걷다가 “빨간 두 볼을 감싸안고” 우는 모습만을 계속 생각하듯 반복한다. 다른 곡들에 비해, 이 곡만큼은 썬 타운 걸즈가 묘사하는 과거의 순간이 ‘실패한 사랑’으로 직접 규정되지는 않는 듯하다. 뜨겁게 눈물 젖은 이유는 언뜻 숨겨지고, 일단 추위로 빨개진 볼을 감싸고 우는 두 사람이 있을 뿐. 백킹 기타가 짜릿하게 내려치며 둘의 주변을 제법 우람하게 채우더라도, 반짝이는 멜로디를 전달하던 리드 기타는 이에 굴하지 않고 한 줄의 리프를 꿋꿋하게 쏘아 보낸다. 그 덕에 〈볼빨간> 은 노랫말과 연주로 묘사되는 과거에 미련을 품기보다도 오히려 이를 후련하게 풀어나가는 듯 개운하게 들린다. 팝의 질감으로 가요의 음색을 전하는 썬 타운 걸즈가 그런 마음을 시끄러우면서도 부드럽고, 부드러우면서도 시끄럽게 전달하는 것처럼.
어쩌면 바로 그것이 《처음은 이제 없어요.》가 가장 잘하는 일이겠다. 확실히 아스라한 노이즈와 리버브가 질감에 맺혀 있지만, 그 안쪽을 채운 여러 소리는 명확하고 구체적인 음색을 띠고 친숙하고 깔끔한 멜로디를 들려준다. 종종 지글거리며 끓어오르는 음색은 정서를 훨씬 격하게 전달하는 것도 같지만, 따라 듣다 보면 오히려 맑게 개운해지는 느낌을 받기도 한다. 다시금 부드러운 동시에 시끄러울 수가 있고, 통합된 동시에 분열되어 있기도 하고, 아주 말이 되면서도 전혀 말이 되지 않기도 하는, 좋은 팝이면서 좋은 가요기도 하는 음악. 이 햇살마을의 사람들은 그렇게 방긋 웃는 뿌연 햇님 같은 소리를 보낸다.
-나원영 /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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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edits |
썬 타운 걸즈
강동수 / 보컬, 일렉트릭 기타 마재현 / 드럼 허정훈 / 기타 김정은 / 베이스
작사, 작곡 : 강동수 편곡 : 썬 타운 걸즈 (강동수, 마재현, 허정훈, 김정은)
레코딩, 믹싱 : 안현우 (Erotic Worms Exhibition) 마스터링 : 정기훈 @스튜디오 산보
디자인 : 허정훈
라이너노트 : 나원영
음원 배급 : 포크라노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