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상달빛’, ‘십센치’, ‘선우정아’, 최근에는 ‘치즈’까지 주로 팝 성향이 강한 가수들의 소속사로 유명해진 레이블 ‘매직스트로베리사운드’에서 ‘RAINBOW99’는 그의 음악, 캐릭터 등 모든 면에서 다분히, 아니 독보적으로 이질적인 존재다. 전자음악가, 기타리스트, 사운드디자이너 등 그를 카테고라이징하는 몇몇 키워드들 외에도 개인적으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그에 관한 연관키워드는 ‘다작’이다. ‘RAINBOW99’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시작한 2009년부터 현재까지 무려 서른 개 이상의 정규앨범, 싱글, 프로젝트앨범들을 발표해왔고 여기에 초창기 프로젝트인 ‘시와무지개’나 근래의 ‘우쿠루쿠’, 뜻밖의 펑크 유닛 ‘SXPTY’까지 굳이 포함하면 그 숫자는 마흔을 훌쩍 넘어간다.
그 중 2015년 내내 담양, 동해, 제주도 등 국내 각지를 매달 한 곳씩 여행하며 여행지에서 얻은 영감을 바탕으로 만든 음악들을 월간으로 공개, 이윽고 이듬해인 2016년 초에 이를 집대성해 정규앨범 [Calendar]로 발표한 여행 프로젝트가 있다. 그는 불쑥 떠나고, 한없이 걷고, 그리고 음악을 만든다. 눈보라 몰아치는 담양 대나무 숲의 압도적인 풍경을 소리로 그려내고, 제주도에선 불쑥 여행에 동참한 아버지의 색소폰 연주를 자신의 전자음악 세계 안에 동참시킨다. 한편 남한산성에선 우연히 만난 트로트 가수 ‘꿩털’이 대접한 막걸리에 얼큰히 취해 그 자리에서 곡을 쓰고 연주하기도 한다. 새로운 공간엔 늘 예기치 못한 풍경, 상황, 경험들이 있고 이는 오롯이 그의 영감의 원천이 되어 음악으로 피어났다. 개인적으로 그의 모든 프로젝트 중 단연 백미로 꼽고 싶다.
2015년 월간 여행 프로젝트의 커버들
몇 해를 지나-물론 그 사이에도 그는 쉼 없이 음악을 만들고 또 발표했지만-2018년에 그가 다시 여행 프로젝트를 시작한다는 소식은 그래서 더욱 반가웠다. 새 여정의 면면을 들여다보니 이전과는 다른, 작은 변화들이 눈에 띈다. 이전 프로젝트의 작업 방식이 대부분 여행지에서의 스케치, 돌아와 서울에서의 후반작업의 과정을 거쳤다면 이번에 그는 마스터링을 제외한 모든 작업, 그러니까 곡의 구상부터 작곡, 연주, 녹음, 심지어 믹스까지 현장에서 해내며 그 순간의 감정을 더 생생히 담아내는 데에 집중한다. 아울러 대부분 혼자만의 여행이었던 이전에 비해 이번에는 왕민철 다큐멘터리 감독이 여정을 함께하며 그 발자취를 하나하나 기록하고 있다는 것 또한 달라진 점. 여하튼 이 새 여정은 1월의 논산, 2월의 청주를 거쳐 3월엔 수원으로 발길을 돌린다. 수원화성 성곽 주변 곳곳을 거닐다 발견한 가장 인상적인 장소 두 곳에서 만들어낸 두 곡의 음악은 각각의 정서가 확연하게 다르다. 아련한 무드를 자아내는 전자음의 앰비언스 위로 청초한 건반, 기타, 베이스 등 갖가지 소리들이 쌓여가며 가슴 뭉클하게 아름다운 서정을 그리는 ‘수원화성과 종교화합’, 이와는 대조적으로 기계적으로 차갑게 반복되는 리듬과 전자음, 거기에 음울한 소리들을 흩뿌려대는 건반 소리와 연주라기보단 그저 노이즈처럼 불쑥불쑥 끼어드는 기타의 소리 등이 어우러져 마치 사이버펑크 영화의 한 장면 같은 불온하고 불편한 무드를 시종 조성하는 ‘수원화성과 과학기술’은 수원화성 주변의 독특한, 혹은 이질적인 풍경에서 음악가가 느낀 감정들을 저마다의 방법으로 생생히 담아낸다.
아래 두 편의 비디오를 꼭 감상하길 권한다. 내가 이렇게 쓴 몇 단락의 글보다 훨씬 더, 이 프로젝트의 성격을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RAINBOW99 (with 신지용) / 수원화성과 종교화합> Live
<RAINBOW99 (with 신지용) / 수원화성과 과학기술> Live
Editor / 김설탕
sugarules@poclano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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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김설탕입니다. 작년 한 해 동안 연재해온 ‘Deep Inside’를 최근의 ‘O3ohn’ 편으로 마무리하고 새 코너인 ‘Weekly Choice by [S]’를 새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한 장의 음반을 수십 번 이상 듣고 또 들으며 깊숙히 파고 들어가 맥락을, 이야기를 읽어내는 일, 그리고 이를 통해 얻은 나름의 생각들을 글로 풀어내는 일은 개인적으로 굉장히 즐거운-동시에 무척 힘들기도 했던-작업이었기에 아쉬움도 조금 남지만 새로 선보이는 이 코너를 통해 더 많은 분들이 더 가볍게 접할 수 있는 글을, 대신에 더 많이 써보려고 해요. 매주 수요일에 포크라노스 공식 홈페이지에서 여러분을 만납니다. 잘 부탁해요. 🙂
(‘Weekly Choice by [S]’ 코너의 모든 글은 에디터의 개인적 주관을 반영한 것으로 본사의 공식적인 입장과는 일절 무관합니다)
오랜만에 돌아온 추천의 추천의 추천입니다. 2018년은 유독 초반부터 반가운 활동 소식이 많은 것 같습니다. 2018 한국대중음악상에서 최우수 알앤비&소울 노래 부문을 수상한 리코(Rico)는 청량함이 가득한 싱글 [Fruit Juice]를 발표했고, 테테(TETE)도 2곡의 싱글을 공개하며 오랜만의 활동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 예서(YESEO)는 올해 첫 싱글을 발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SM STATION’을 통해 새로운 곡을 공개하며 큰 주목을 받기도 했고요. 김간지X하헌진은 4년 만의 정규 앨범을, 에고펑션에러 역시 3년 만의 정규 2집을 발표했습니다. 김사월X김해원 활동과 영화 음악 작업으로 분주했던 김해원은 첫 정규 1집을 선보이기도 했죠.
그 어느 때보다도 풍성한 포크라노스의 새해를 함께 하고 있는 아티스트들 중 이번 추천의 추천의 추천에서 소개할 아티스트는 오존, 더핀, 에몬, 하비누아주입니다. 각각 자신만의 음악색을 선보이고 있는 뮤지션들인데요. 추천곡들마저도 너무나 오존, 더핀, 에몬, 하비누아주 답습니다. 궁금해지신다고요? 매주 월요일마다 공개될 이들의 추천곡들과 그에 얽힌 이야기를 기대해주세요.
오존(O3ohn)
오존(O3ohn) / jon2 (2018.02.20)
2017년 초 발표한 싱글 [Kalt] 이후 한동안 조용했던 오존의 음악 팬들에게 2018년은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한 시작이었을 것 같습니다. 한 달 간격으로 2장의 EP를 발표한 오존은 다양한 매체를 통해 그 모습을 드러내며 활동 중입니다. 이번 활동 재개에서 음악 외에 눈에 띄는 점은 그동안 조용히 오존의 음악을 찾아 듣던 팬들이 봄 새싹처럼 곳곳에서 그 존재를 드러냈다는 것 같습니다. 음원사이트 댓글로 “나만 알고 싶었던 아티스트”란 고백이 이어졌고, 대림미술관, 현대카드 언더스테이지에서의 단독공연은 순식간에 매진되었을 정도니까요.
지금 가장 뜨거운 싱어송라이터 오존의 음악적 취향과 관심사 역시 많은 음악 팬들이 궁금해할 것 같습니다. 한창 바쁜 스케줄을 보내고 있을 오존이 보내온 추천곡들은 그의 곡만큼이나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군요. 오존에 대한 애정을 한층 더 단단히 해줄 것이 분명한 그의 추천들을 지금 만나보시길 바랍니다.
추천의 추천의 추천: 오존(O3ohn)이 추천합니다.
Stella Donnelly – Mechanical Bull
“좋아하는 형이 인스타그램에 올렸던 앨범에 수록된 곡. 편하게 듣기 좋은 앨범이다. 좋은 음악을 공유하는 사람들은 정말 고마운 존재..”
Frank Ocean – Moon River
“프랭크 오션의 최근 싱글. 이전의 싱글들과는 사뭇 다른 결의 소리를 담고 있다. 커버곡이지만 자신의 방식으로 신선하게 소화해낸 곡이다.”
Everything Is Recorded – Everything Is Recorded (feat. Sampha, Owen Pallett)
XL레코즈의 수장 리차드 러셀(Richard Russell)의 최근 앨범 마지막 트랙. 엄청난 참여진을 동원한 앨범이다. 절대 살 수 없을 것 같은 슈퍼카를 만져보는 느낌..”
Ruthven – Evil
“자이 폴(Jai Paul) & 에이케이 폴(A.K. Paul) 형제의 새로운 집단인 폴 인스티튜트(Paul Institute)에서 발매됐던 싱글. 같은 날 파비아나 팔라디노(Fabiana Palladino)라는 아티스트의 싱글도 공개됐다. 앞으로의 행보가 궁금한 사람들.”
Deep Inside #11, 오존(O3ohn) 어지러이 널린 일상의 파편들을 가만히 응시하는 어느 청년의 지극히 개인적인 노래
2016년 5월, 미국의 인디펜던트/언더그라운드 힙합 레이블 ‘스톤즈 스로우 레코드(Stones Throw Records)’의 쇼가 뜬금없이 서울 한복판에서 열렸다. 이들과 협업해온 스트릿 패션 브랜드 ‘스투시(Stussy)’, 근래에 가열찬 행보를 보이고 있는 국내의 공연기획사인 ‘20/20’의 작품이었는데 한편으론 고마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솔직히 말하건대-‘대체 한국에서 이걸 누가, 몇 명이나 보러 갈까?’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연히 보러 갔지만. (심지어 혼자 가서 엄청 잘 놀다 왔다, 하하하;)
여하튼 난데없이 2년 전의 개인적 기억을 끄집어낸 것은 이 날이 내가-이 글의 주인공인-‘오존(O3ohn)’이라는 음악가를 생전 처음으로 만난 날이었기 때문이다. 이날 이벤트의 오프닝 밴드 ‘신세하 앤 더 타운(Xin Seha & The Town)’의 기타리스트로 무대에 오른 그는 시종 밝게 웃고 있었고, 그가 연주하는 기타 역시 그 웃음만큼이나 기분 좋은 울림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오존(O3ohn)’, 본명은 오준호로 기타를 베이스로 하는 셀프-프로듀싱 싱어송라이터다. ‘O3ohn’이라는 독특한 이름 표기는 분자 ‘오존’의 원소기호가 ‘O3’라는 점, 더불어 러시아어의 ‘3’가 알파벳 ‘J’와 같은 발음이라는 점을 두루 아우른 중의적인 작명이라고 한다. 팬들에겐 이미 익히 알려진 것처럼 초중고등학교 동창인 친구 ‘신세하(Xin Seha)’의 밴드 ‘신세하 앤 더 타운’의 기타리스트로 처음 음악 활동을 시작했다. 전역 시점인 2014년 겨울, 당시 첫 앨범 [24Town]을 준비하고 있던 신세하가 먼저 제안을 했다고. 한편 그 시기에 이미 본인의 오리지널을 창조해보고 싶다는 열망도 품고 있던 그였다.
이 열망이 가시적으로 발현되어 ‘솔로 아티스트’ 오존이 세상에 드러나기 시작된 것은 2016년 10월, 이전까지는 사운드클라우드에 드문드문 습작을 공개하던 그가 그 중 몇몇 곡들을 추리고 다듬어서 담은 데뷔 EP [O]를 공개하면서부터다. 다분히 개인적인 이야기와 여기서 비롯된 감정들을 바탕에 둔 채 종종 포근하게 다정하고, 때론 쓸쓸하며 헛헛한, 그러나 전반적으로는 어떤 고독의 정서가 뭉근하게 배어있는 네 곡의 노래들은 온전히 그 자신에 의해 쓰여지고, 편곡되고, 연주되고, 불려지고 녹음되었다.
기타를 중심으로 한 최소한의 소리들이 넉넉한 여백을 지니고 배열되는 단출한 편곡, 그래서 덤덤하게 노래함에도 되려 더욱 도드라지는 오존의 목소리는 소절 하나하나를 끝맺는 미세한 떨림마저 슬며시 귓가에 남아 여운을 만들어내며 노래의 일부가 된다.
<오존(O3ohn) / [O]> Cover Artwork
의미를 알 수 없는 노랑 생명체, 더 의미를 알 수 없는 하와이… 아티스트가 그저 의식의 흐름대로 끄적인 낙서가 그대로 커버가 되었다고.
다양한 음악들을 좋아하고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그 중에는 ‘존 메이어’도, ‘언니네 이발관‘도, ‘프랭크 오션’도 있다. 실제로 첫 EP를 통해 드러나는 ‘오존’의 음악에선 ‘존 메이어’의 팝이 지닌 은근한 블루스의 요소, ‘언니네 이발관’의 담백한, 어딘지 유약하기도 한 기타팝의 감성, 또 ‘프랭크 오션’의 음악처럼-또한 대부분의 PBR&B 계열 음악들이 그러하듯-너른 공간감으로 표현되어 근사한 부유감과 잔향의 여운을 주는 사운드 등이 두루 감지되어 그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그들에게서 다양한 형태로 영향을 받았으리라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하게 된다.
혹자는 ‘혁오’를 위시해 최근 등장하고 있는 몇몇 인디팝 아티스트들과의 어떤 공통분모를 그에게서 발견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의 음악은 그 무엇과도 같지 않고 그 무엇도 굳이 레퍼런스로 삼지 않으며 ‘오존만의 것’을 단단한 심지로 지니고 있었고 아마도 그래서, 오존의 음악을 들어본 이들은 저마다 각각 그의 미래에 대해 어떤 ‘기대’를 품기 시작한 것 같았다. 나 역시 그들 중 한 사람이었고.
“’신세하 앤 더 타운(XinSeha& The Town)’의 기타리스트로 활동해온 그가 솔로 아티스트로 등장해 EP [O]를 불쑥 내민 순간, 우리는 가슴 깊숙한 곳을 찌르는 근사한 음색과 훌륭한 송라이팅 능력을 두루 지닌, 진짜 괜찮은 싱어송라이터를 만나게 되었다.
영롱하게 빛나는 낭만과 서늘한 우수를 함께 품고 있는 오존의 노래는 보편적인 감성에 호소하는 동시에 ‘힙’한 것을 찾는 이들의 촉각을 잡아 끄는 지점도 동시에 지니고 있다.”
-포크라노스 컴필레이션 [Emerging] 공식 소개글 中
오존(O3ohn) – untitled01 M/V
[O] EP 이후 몇 개월이 지나 해를 넘긴 2017년 초에 공개된 싱글 ‘Kalt’는 전작에서 품기 시작한 기대의 감정을 이윽고 ‘믿음’의 형태로 슬며시 치환시킨다. 꽤 매력적인 음색의 여성 보컬리스트 ‘JOONIE’와 함께한 이 노래에서 오존은 [O]에서 일관되게 그려냈던 고독에 대해 다시 한 번 노래하고 바로 이 ‘고독’의 감정을 그려내는 특유의 심상이야말로 자신이 지닌 고유의 개성임을 분명히 밝힌다. 태생적으로 혼자이면서 또 결코 혼자일 수 없는, 그래서 늘 관계를 애타게 갈구하고 그 속에서 때론 상처 받고 깊은 고독과 마주하는 존재가 인간이고 이것은 우리 모두의 지극히 보편적인 모습일 것이다.
그렇게 관계와 관계 속에서 갖가지 감정의 조각들을 흩뿌리는 무수한 일상의 순간순간을 오존은 가만히 응시하고, 이를 차분하게, 그리고 조금은 서글프게 노래한다. 그리고 그 노래는 이미 단 맛 쓴 맛 죄다 맛본 닳고 닳은 어른의 그것이 아닌, 아직 미처 다 자라지 못한-그래서 소년과 어른의 경계에 서 있는-한 청년의 개인적 노래로 들린다. (한편 ‘JOONIE’는 이 노래 외에 달리 활동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아 그 정체(?)에 대해 나로선 딱히 알 길이 없다. 아티스트에게 직접 물어볼까-라는 생각도 잠시 했지만 이내 그러지 않기로 했다)
오존(O3ohn) – kalt(feat. JOONIE) M/V
그 해 여름, 네이버의 ‘온스테이지’에 등장해 몇 곡의 라이브를 선보였다. 여기에 등장했다는 것은 이 시점에서 이미 그가 인디씬에 촉각을 세우고 있는 이들의 레이더망에 포착되어 있었다는 의미일 터다.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낸 기존의 곡들이 아닌 당시 시점에서는 미공개였던 세 곡의 노래를 기타, 베이스, 드럼의 심플한 구성으로 노래했는데 이 중 ‘Rolling’과 ‘언제부터’는 앞으로 이야기할 EP 2연작에 수록되었다. 특히 ‘Rolling’ 같은 경우 라이브와 레코딩의 편곡에 꽤 큰 차이가 있으니 비교해서 들어보는 것도 소소한 재미가 될 것이다.
[온스테이지] 356. 오존(O3ohn) – Rolling
이후 공개된 정식 레코딩에 비하면 다소 투박한 편곡. 반면 더 흥겹기도 하다. 예컨대 레코딩이 산책이라면 라이브는 드라이브랄까.
2018년의 시작과 함께 두 장의 EP <jon1>, <jon2>를 한 달의 간격을 두고 연이어 공개했다. [O]와 동일하게 저마다 꼭 네 트랙씩을 수록하고 있는 각각의 EP들은-역시 [O]와 동일하게-모두 온전히 그 스스로에 의해 만들어지고 녹음되었다. 꾸준히 작업하며 쌓아둔 곡들 중에서 수록곡들을 추려 트랙리스트를 구성한 것 또한 전작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jon2>의 경우 전곡의 가사를 영어로 썼다는 점이 이채롭다. (왜 하필 ‘네’ 곡인 건지 역시나 아티스트에게 물어볼까 했지만 역시나 굳이 그러지는 않기로 했다)
<오존(O3ohn) / jon1 & jon2> Cover Artwork
어쿠스틱 발라드 ‘Somehow’로 문을 여는 첫 번째 파트 <jon1>은 전체적으로 전작 [O] EP의 색채를 일정 부분 이어가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영롱하게 울려펴지는 기타의 전주에 이어 오존 특유의-따사로우면서 한편으론 헛헛하기도 한-음색을 다시금 만나게 되는 ‘Somehow’의 아름다운 기타 선율에는 짙은 우수가 배어있고 그 위를 떠돌듯 부유하며 떠나보낸 사랑에 대한 그리움을 관조하듯 읊조리는 오존의 노래는 덤덤하기만 해서 도리어 더욱 애달프다.
[MV] 오존(O3ohn) – Somehow / Official Music Video
이번에도 역시 그간 오존의 모든 뮤비를 만들어온 새가지 비디오(SEGAJI VIDEO)의 작품이다.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도시 속 건축물의 디자인이 지닌 구조적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 근사한 그림이 된다.
후렴구의 허밍 ‘우우우’를 제목으로 한 ‘Oooh’, 네이버 온스테이지와 뮤지션리그를 통해 프로토타입(?)을 먼저 공개한 적이 있는 ‘언제부터’는 적당히 낭만적이고 적당히 달콤하며 또 적당히 담백해 비교적 편안하게 귀에 감긴다. 두 곡 모두 ‘관계’, 구체적으로는 ‘너’와의 관계에 대한 기대감 또는 설레임에 대한 이야기이다. 한편 이 파트의 마지막 노래인 ‘Thoms Piano’는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이의 상실감, 언제까지고 온전히 다 치유될 수는 없는 아픔에 대해 조용히 노래한다. 앞서 ‘Somehow’와 마찬가지로 우울의 정서를 아름답게 그려내는 그의 특유의 감성을 오롯이 맛볼 수 있는 노래로 오존은 ‘만약 언젠가 자신의 부모님을 떠나보낸 후에, 이후 부모님을 떠올릴 때의 자신의 마음은 어떨까’를 생각하면서 이 곡을 썼다고 이야기했다.
오존(O3ohn) – Thoms Piano M/V
오존(O3ohn) – 언제부터(Live) [CASPER RADIO]
<jon2>의 첫 곡인 ‘R’을 플레이하고 조금 흠칫했다. 그간 들어왔던 그의 음악과는 사뭇 다른 첫인상 때문이었는데, 그 주된 이유는 일단 ‘리듬’이다. 그간 발표한 그의 어떤 노래보다도 이 노래는 리듬이 전면으로 부각되어 사운드의 중심에 서는데 밝고 경쾌한 리듬이 댄서블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선율을 구성하는 소리들의 은근한 변화들도 귀를 기울여 듣게 하는 재미가 있다. (정확히 어떤 악기의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실로폰, 혹은 비브라폰 같은 종금류 타건악기의 소리가 마치 물방울이 떨어지듯 리듬 사이사이에 톡톡 떨어져 곡의 느낌을 굉장히 퍼커시브하게 만들어주는 동시에 선율의 바탕이 된다.
한편 곡이 전개될수록 다양한 결의 기타의 소리들이 곡 중간중간에 끼어들어 변화를 준다. 오존은 여전히 비교적 차분하게 노래하지만 그럼에도 청량한 흥겨움이 있는, 이를테면 ‘오존 식(式)의 미니멀한 댄스뮤직’이랄까. 개인적으로 두 번째 파트의 가장 특징적인 트랙이면서 이전과는 조금 다른 오존을 담은 이 파트의 개성을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트랙이기도 하다.
오존(O3ohn) – R
‘온스테이지’에서 먼저 공개했던 노래 ‘Rolling’은 앞에서도 언급했듯 편곡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라이브에서 직선적으로 질주하던 리듬은 시계의 초침이 똑딱이듯 정적이고 차분해졌으며 오존의 노래와 기타 역시 여기에 발맞춰 호흡을 늦추고 느슨해졌다. 덕분에 온스테이지의 라이브 버전보다 훨씬 편안하고 부드러운 분위기의 곡으로 변모했다. 화사한 느낌마저 든다. 이어지는 ‘Seeyouin’에서 급격하게 분위기를 반전 음습하고 침울한 무드를 조성한다. 블루지하게 울리는-다소 퇴폐적인 무드까지 만들어내는-기타의 소리를 배경으로 독백처럼 들리는 오존의 노래는 내면의 심연 어딘가로 깊이, 더 깊이 침잠해 들어간다. 제목처럼 이 파트의, 그리고 ‘jon’이라는 전체 프로젝트의 마지막 노래인 ‘Finale’은 지인에게 빌린 테이프레코더로 녹음한 곡이다. 로파이한 질감, 차분하게 음을 짚어가는 일렉트릭 건반의 소리, 알앤비나 소울의 뉘앙스가 느껴지는 오존의 팔세토 섞인 보컬은 차분하게 끝을 향해 걷고 마침내 마침표를 찍는다. ([O] EP의 마지막 트랙이었던 ‘her’와 어딘지 비슷한 느낌을 준다)
당신은 ‘고독’, 혹은 고독으로부터 비롯되는 ‘우울’을 어떻게 다루는가? 한때 나는 이 감정들을 극복의 대상으로 여겼다. 이따금씩 우울의 심연에 발을 들이게 될 때마다 그 어둠에서 어떻게든 벗어나려 있는 힘껏 발버둥쳤다. 그러다 어느 순간 깨달았다. 이 감정들은 ‘지금의 나’ 그 자체라서 사실 벗어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것, 그래서 벗어나려 발버둥치는 행위 그 자체가 되려 스스로의 감정을 더 갉아먹으며 핍박한다는 것을. 이후 나는 부정적인 감정을 그냥 그 자체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우울하면 우울한대로, 슬프면 슬픈대로 그저 ‘이것이 지금의 나’라고, 그 모습을 어떤 식으로든-행여 궁상맞고 한심하기 짝이 없더라도-인정하기로 한 것이다. 맘껏 슬퍼하고 맘껏 우울해하며 내 속에 있는 어두움의 밑바닥까지 깊숙히 침잠해 들어가보는 것, 이 행위가 되려 일종의 평화를 가져다줬고 이건 이후 나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다루는 가장 자연스럽고 유효한 방식이 되었다.
동일한 맥락에서 오존의 음악을 바라보게 된다. 우울하고 슬플 때 더 슬픈 노래를 듣고 영화를 보며 감정을 동화하고 쏟아내 어떤 카타르시스를 획득하는 것처럼, 그의 음악을 들으면서 나는 종종 내 안 깊숙한 곳에 있는 근원적 외로움과 마주하고, 이를 보듬어안으며 마음에 위안을 얻는다. 그것은 참으로 기분 좋은 고독의 순간, 그리고 우울의 낭만이다.
Editor / 김설탕
sugarules@poclanos.com
(‘Deep Inside’ 코너의 모든 글은 에디터의 개인적 주관을 반영한 것으로 본사의 공식적인 입장과는 일절 무관합니다)
20세기에 태어난 21세기의 청년들, 20대 남성 뮤지션 특집 데카당, 강태구, 정봉길(바이바이배드맨)
여성 뮤지션 특집에서는 이제까지 규제화된 이미지들을 벗어난 좀 더 포괄적인 여성 뮤지션을 찾아 담고 싶었다면 좀 더 새로운 성장과 발전을 도모하는 젊은 남성 뮤지션들을 소개해보려 한다.
펑크에서 소울, 포스트 록 등 장르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대범한 신예 밴드 ‘데카당’, 가장 깊은 곳의 감정을 외롭지만 아름다운 포크의 언어로 주조하는 ‘강태구’, 직선적인 로큰롤에서 신스팝까지 다양한 변화 속에서도 중심을 잃지 않는 데뷔 9년 차의 ‘바이바이배드맨(정봉길)’까지. 장르의 혼종이나 과정에서의 연대가 자연스럽고, 본인들만의 아이덴티티가 확실한 21세기의 청년들이다.
힘주어 말하지 않아도, 손을 들어 나서지 않는다 해도 그저 그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 빛나는 시절을 20대라 생각해왔다. 그래서일까, 언젠가 전혜린의 문장 속에 20대의 나를 대입해본 적 있다. ‘아름다운 꿈을 꿀 수 있는 특권이야말로 언제나 새해가 우리에게 주는 아마 유일의 선물’이라면 나는 이들을 지금 가장 힘주어 소개해야 하는, 해의 첫 시작 같은 날들을 보내고 있는 이들이라 하겠다. 매일이 1월이라면 불확실한 것들 속에서도 우리는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할 수도, 더 벅찬 발걸음을 내디딜 수도 있을 테다.
데카당
다소 추상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음악에 있어서만큼은 첫인상을 믿는 편이다. 이들을 처음 만난 순간에 대한 얘기는 언젠가 좀 더 진득하게 풀어놓고 싶어 아껴두고 있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카당에 대해 설명하려면 어쩔 수 없이 언급해야 하는 필연적인 ‘처음’이 있는데, 이들의 라이브를 처음 본 날과 데카당의 데뷔 앨범의 유통 담당자로 이들의 결과물을 처음 만난 일. 사실 공연과 음원이라는 꽤 극단적 첫 인상의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내겐 매번 같은 긍정적 충격이었고, 그러니 그 어느 순서였다해도 결국엔 이들에게 반하고 말았을 것이다.
무방비 상태로 접한 이들의 공연은 펑크, 네오 소울, 록 등 그 모든 걸 가로지르는 셋리스트였고 그 안에서도 이들을 지탱하는 묵직한 중심은 소울보다는 록이라는 생각을 했다. 아마 EP에는 포함되지 못했지만 공연에서 자주 등장하는 ‘각주’, ‘토마토 살인사건’ 등이 곡이 안긴 강렬함 때문이리라. ‘A’나 ‘너와 나’를 변주라고 생각하기도 했을 만큼 실제로 이들의 활동 초반부 라이브부터 자주 선보인 ‘Peter parker’, ‘일당백’ 등의 곡에서의 퍼포먼스는 경구에 가까운 가사보다도 인상적이었다.
실제로 이들의 첫 EP [ㅔ]에는 이들이 본래 싣고자 했던 일부 곡이 빠져있다. 그것은 앞서 언급한 ‘각주’와 ‘토마토 살인사건’이라는 두 곡. 덕분에 다소 일관적이지 않아 보이는 트랙 구성, 변이된 형태의 앨범이 완성이 되었고 되려 관계자들과 리스너에게 신선함으로 다가왔다. 라이브를 처음 보았을 때에 대한 표현에서 쓴 ‘가로질렀다’는 말도 사실 그 때문이다. 녹음 과정에서 의도하지 못했던 사건으로 인해 2곡이나 빠지게 되었다는 이들의 변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그 흐름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것은 물론, 도대체 뭘 더 보여줄 수 있을까에 대한 기대감이 팽팽한 허공 사이를 가른다. 극단적으로 도치되는 표현임에도 이들의 의도하지 않은 빈틈은 제법 가볍고 매끄럽다. 무엇이 비집고 들어간대도 그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왜냐면 데카당이니까.
장르 자체에 대해 앞서 언급했지만 애써 그것에 대한 이해 없이도 데카당을 좋아할 수 있는 포인트는 충분하다. 95, 96년생의 멤버들로 구성된 20대 초반인 이들의 자연스러웠던 결집의 과정, 의도하지 않은 크로스오버에 대해 더 힘을 주어 이야기하고 싶다. 예술에서 연대가 익숙한 지금의 20대가 선보인 결과물 중 대표적 예로 볼 수 있겠다. 성서에 등장하는 ‘살로메’, 동명의 만화로도 존재하는 ‘우주형제’처럼 문학 등의 타 예술 장르에서 가져온 곡 제목 등 이들의 배경이나 살짝 접어둔 책장 같은 의도를 찾는 재미 역시 쏠쏠하다.
사실 이들은 스스로가 가져올 본인의 미래를 잘 모르는 것도 같다. 저자는 자기 책의 단점을 알게 되는 첫 번째 사람이자 장점을 알게 되는 마지막 사람이라는 신형철의 말처럼 말이다. 하지만 뭐 어떠한가. 젊음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아름다운 고집같은 거니까. 사적 체험을 통해 층층이 쌓이는 취향이 만들어낼 아름다운 결과물이라는 게 존재한다면, 우리는 그저 트랙 제목이나 가사의 배경을 음미하며 데카당의 다음을 기다리면 될 뿐이다.
강태구
사실 강태구라는 뮤지션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채 두어 달도 못 된다. 처음은 지난 11월 발표된 ‘그랑블루’와 ‘내 방 가을’이었고, 그 이후 발매된 ‘Passenger’를 그보다 더 늦게 접하면서 단순한 감상을 넘어 이 강태구라는 뮤지션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분명 부재하는 존재와 기억에 대해서 노래하면서도 참 이상하리만치 덤덤한 그의 보컬이 인상 깊었다. 한숨을 뱉는 것 같다가도 어떤 곡에선 선명하고 단호하게 감정을 전하는 것마저 참 신기해서 몇 번을 갸웃거렸다. 포크라는 장르에 대해 잘 알지못한다는 두려움이, 혹여 조금의 견해를 덧붙여도 그게 이 앨범의 ‘완벽함’에 오기가 될까 싶어 음악이 좋다 언급하는 것도 애써 눌러두었던 것 같다. 앞서 언급한 두 싱글 모두 오프라인에서 피지컬 음반으로 처음 발표된 [bleu]를 작년 연말 싱글 컷으로 두 곡씩 담아 발표한 것이고, 금번 온라인으로 발매된 정규 앨범 [bleu]는 그 전부를 묶어 디지털 음원으로 발표한 것이다. 2012, 3년도 무렵부터 공연을 하고 앨범을 만든 그는 비교적 최근엔 바이올리니스트 ‘강혜인’과 만나 전보다 더 아름다운 애상의 정서가 덧대여졌다.
앞서서 말한 그 두려웠다는 표현을 조금 고쳐 주저했다는 표현으로 다시 써본다면 그것은 아름다운 음악을 좀 더 일찍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일종의 죄책감이다. ‘아를’과 함께 한 2013년의 스플릿 앨범을 진작에 접했다면 포크에 대한 내 인상이 좀 더 빨리, 뭔가 더 다른 방향으로 닿지 않았을까. 기껏해야 내 플레이리스트 안에서의 변화겠지만 어쨌든 지난 겨울 사이 크고 작은 변곡 중 하나라고 할 대 강태구의 음악은 내 안의 새로운 문을 열어주는 가장 인상적인 손길이었다.
가사를 더듬다 그의 나이가 20대라는 걸 뒤늦게 알게 되고 사실 의외라고 생각했다. 그에 대한 첫인상은 어딘가에 홀로 오래 남아 그 기억으로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기웠을 것 같은 사람이었다. 그의 곡들을 듣는 내내 한 번도 닿아본 적 없는 심해처럼, 내밀한 누군가의 마음속 저 끝을 들여다본 여행을 한 것 같았다. (그의 가사를 인용해보자면)’모두 내 안에 왔다가 떠나가 너무 많은 이별 속에 울었지’만 ‘행복하게 살기만 하면 된다’고 말하는 이, 가본 적 없는 먼 훗날, ‘평생’에 대해 노래하는 이가 보내온 시절은 도대체 어떠할까. 사랑에 있어 한 번도 담담해본 적 없던 나의 지난 20대를 떠올리다 ‘밤의 끝’이라는 곡까지 닿고 보니 그가 겪어온 모든 이별, 실패, 슬픔까지 보였다. 덤덤하게 뱉은 자조적인 토로 이후엔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바램이 따라붙는다. 동경과 기대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그래도 어쩐지 그건 지금의 젊은 날에만 가능한 간절한 선언 같았다.
언젠가의 나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사랑이라 믿었던 시간이 참 길었다. 언젠가 헤어진 이의 얘기를 전해 들으며 괴롭고 지난한 연애 내내 내가 그를 이해하기 위해 부단히 애썼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나는 어쩐지 또 너무 쉽게 사랑에 빠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그 상대는 한 번도 닿아본 적 없었지만 그게 세상의 끝일지언정 무작정 닿아보고 싶은 강태구의 음악이다.
잘 모르는 것을 알고 싶어질 때의 감정, 새로운 것에 발을 들이는 순간에 느끼는 감정이란 얼마나 무모한가. 그래도 여전한 호기심과 두려움 속에서도 시도하는게 젊음이라면 그 뜨거운 감정들을 미지의 세계로 발 딛게 하는 무엇 역시 같은 젊음일테다. 태양이 닿은 적 없는 고독의 바다, 바람이 들지 않는 고독의 숲. 혹은 그 둘을 오가며 내면의 말을 살피는 사람. 나는 그런 강태구를 포크의 가장 젊은 현재이자 미래라 소개하고 싶다.
정봉길 (Bye Bye Badman)
“무슨 일이든지 일단 10년만 하면 프로야.” 처음 일을 시작할 때 주변 선배, 지인들에게 들었던 말이다. 그렇다면 고작 20대에 데뷔 9년 차를 맞았다는 사실은 인생에 있어 어떤 의미일까.
지난 2011년 스톤 로지스의 곡 제목에서 따온 ‘바이바이배드맨’이란 이름으로 데뷔한 보컬 정봉길은 10대에 만난 친구이자 동료인 구름(고형석), 곽민혁, 이루리와 햇수로 9년이라는 긴 시간을 함께 쌓아왔다. 동명의 EP를 발매한 이후 2011년 EBS 스페이스 공감 올해의 헬로루키 대상, 2012년 제9회 한국대중음악상 올해의 신인상을 수상하는 등 당시 반짝이는 루키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냈다. 그래선지 초기의 바이바이배드맨에게 붙은 ‘직선적’이라는 수식은 단순히 사운드에 대한 설명 말고도 그들의 발전과 성장에 대한 꾸밈에 대한 지칭으로도 꽤 근사하게 어울린다.
밴드의 역사에서 결집이나 연대야 언제고 일어날 수 있는 자연스러운 일이어도 90년 대생의 젊은 밴드 ‘바이바이배드맨’이 ‘글렌체크’와 만나 선보인 활동들 역시 (크루, 신(Scene)의 개념으로 생각해볼 때)2010년대 국내 인디신 역사에 있어서 짚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 될 주요한 장면들이라 생각한다. 바이바이배드맨의 디스코그라피에 있어 ‘변화’의 표피를 가진 얕거나 깊은 굴곡들도 그래서 아름다웠다 말할 수 있다.
매해 나이를 먹을 때마다 작은 습관이나 취향이 아집이 되진 않을까 걱정이 될 때가 있다. 새로운 것보다 익숙한 것을 찾게 되고 내 생활의 단조로움에서 불안함을 느끼는 일들이 꽤 잦다. 타성 속에서 일이나 작업의 목적을 잃어버리는 주변인들을 많이 보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바이바이배드맨, 특히 프론트맨 정봉길이 순수하게 디스코그라피 안에서만 증명해 보이는 자연스럽고 꾸준한 변화는 주목할만하다. 밴드 역사에서 앨범의 주조가 정봉길만의 영역이나 유일한 역할은 아니지만, ‘있어서 보탬이 되는’ 것보다 ‘없으면 안 되는’ 것들의 의미가 얼마나 큰 지에 대해선 사실 모두가 알고 있지 않을까. 신스팝, 드림팝이 연상되는 일부 앨범에서 그의 보컬이 만드는 이미지, 거기에서 얻어지는 스토리텔링이야말로 앞으로의 행보에 있어 주목할 만한 지점이라 생각한다.
바이바이배드맨은 작년 매직스트로베리사운드의 서브레이블 피치스레이블에 소속되며 4개의 싱글을 연달아 새롭게 발표하는 등 근래 크고 작은 다양한 활동을 했다. 솔로 및 다양한 활동 중인 유일한 홍일점 ‘이루리’, 역시 기타리스트로서의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곽민혁’과 작곡과 프로듀싱으로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구름(고형석)’이 새롭게 가지를 만든 영역도 사실은 바이바이배드맨이라는 한 줄기에서 시작되었다 본다. 다양한 갈래로 대변될만한 팀의 대표적 이미지인 정봉길이라는 캐릭터가 바이바이배드맨 안에서 꾸준하게 만들어내는 곡들은 그게 직진이나 곡선의 변곡일지언정 밴드를 변함없이 ‘고정’시키는 하나의 축이다. 그것이 바이바이배드맨 안에서만 통용되는 언어라고 해도 상관없을 정도로 말이다.
기준은 누구에게나 다르겠지만 ‘꾸준함’이란 시대와 계열을 막론하고 통용되는 일 같다. 이십 대 초반의 나에게 자극을 주었던 또래이자 동료, 혹은 라이벌이었던 이들과 동시대를 함께 하며 성장, 그 이후의 전진을 함께 한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여전히 무언의 지지를 받는 기분이다. 생각해보면 바이바이배드맨, 그 중심의 정봉길은 이미 생애의 절반을 ‘록스타’로 살아온 셈. 그런 의미에서 남은 전 생애를 다 바쳐야 하는 일,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란 의외로 간단한 질문이 아닐까. 시대는 달라져도 역사는 바뀌지 않고 바이바이배드맨은 여전하다.
한 해의 결산이 여기저기서 벌어지는 연말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들어야 할 음악들이 많았던 기분입니다. 새해의 부산함이 조금 가라앉고 난 지금엔 어떤 음악이 어울릴까 생각하다 보니 문득 “새해엔 포크”란 문구가 떠올랐습니다. 아마도 매년 1월 열리는 포크 음악인들의 축제 <새해의 포크> 공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포크가 정말 잘 어울리는 계절이 1월의 겨울이란 생각이 듭니다. 같은 겨울이지만 12월의 겨울이 들썩이는 록과 일렉트로닉의 느낌이라면, 시끌벅적한 연말의 피로감을 씻어내고 차분히 새해를 준비하는 1월에 듣는 포크는 한층 따뜻하고 포근하게 느껴집니다.
포크라노스와 함께 하는 아티스트들 중에도 포크 뮤지션이 여럿입니다. 최근 몇 년간 한국대중음악상 포크 부문을 휩쓸었던 권나무, 이랑, 김사월과 김해원뿐만 아니라 단단한 팬층의 지지를 받고 있는 우주히피, 이영훈 같은 아티스트까지 말이죠. 1월의 추추추에서는 지난 연말 눈에 띄는 음악 활동을 선보인 강태구, 김사월, 송은지, 홍갑의 음악을 들여다보려 합니다. 마침 대부분이 <새해의 포크>에도 출연하는군요. 이들의 플레이리스트와 함께 그 어느 때보다도 따뜻한 1월을 보내시길 바랍니다.
강태구
강태구 / Passenger / 아름다운 꿈 (2017.12.06)
2017년 느지막이 등장한 포크 뮤지션 강태구의 여파는 예상했던 것보다 더 강렬했습니다. 매체와 평론가들은 음반으로 먼저 세상에 얼굴을 내민 [bleu]를 올해의 앨범으로 꼽기 시작했고, 발 빠른 리스너들도 금세 이 앨범을 발견했습니다. 단, 4곡만이 음원으로 선공개 되었음에도 연말에 열린 강태구의 공연들은 속속 매진되었습니다. 한국 포크 음악의 산실이라고 할 수 있는 푸른곰팡이에 적을 두기도 했던 강태구의 첫 정규 앨범을 찬찬히 듣다 보면 이런 놀라운 반응들에 수긍하게 됩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소리 같다고 묘사되는 깊고 푸른 강태구의 목소리에 기타와 바이올린 소리에 덧입혀 차곡차곡 쌓이는 사운드는 그저 포크 음악으로 분류하기엔 부족한 기분입니다. 본 이베어(Bon Iver)의 행보 같은 놀라움을 강태구의 미래에서 보게 될 거라 상상하게 될 정도로요. 그가 보내온 추천곡 중 본 이베어의 곡도 있다는 것도 마치 운명 같습니다. 인디 포크뿐만 아니라 포스트록부터 클래식까지 장르를 넘나드는 강태구의 추천곡들과 함께 그가 전하는 음악을 만끽하시길 바랍니다. 곧 음원으로 공개될 나머지 정규 앨범 수록곡들을 기다리면서요.
추천의 추천의 추천: 강태구가 추천합니다.
Rachmaninoff – Symphony No.2 Op.27, 3rd
“조용하고 느린 클래식을 좋아한다. 긴 시간 동안 아무 생각하고 싶지 않을 때, 조용하고 느린 클래식만큼 좋은 게 없다. 뜻밖의 낮잠도 청할 수 있다. 이 곡을 듣기 전까지는 클라리넷 소리가 이토록 아름다운지 몰랐다. 어릴 적 학교 친구들이나 이웃이 연주하는 클라리넷 소리는 이런 소리가 아니었다.”
James Blake – A Case Of You
James Blake – The Wilhelm Scream
“그는 목소리와 연주로 한순간에 분위기를 바꿀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음악가 중 한 명이다. 차가운데 따뜻하다. 섹시한 창법을 가지고 있다.”
Sam Smith – Palace
“외국 라디오를 주로 듣는데 이상하게 느린 음악은 나오지 않는다. 그나마 나오는 느린 음악이 아델(Adele), 샘 스미스(Sam Smith) 정도인데. 그의 목소리를 듣고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아델도 좋아한다.”
Keaton Henson – No Witnesses
Keaton Henson – Alright
Keaton Henson [Romantic Works]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다. 아름답다. 그는 자신의 뮤직비디오에 자주 출연하는데 처음 그를 봤을 때 에드거 앨런 포(Edgar Allan Poe) ‘어셔가의 몰락’의 로더릭 어셔가 떠올랐다. 왜인지는 보면 알게 된다. 그와 첼리스트 렌 포드(Ren Ford)가 함께 한 인스트루멘탈(instrumental) 앨범 [Romantic Works] 또한 좋은데, 비 오는 날, 추운 날, 혹은 어두운 방 안에서 가만히 있고 싶을 때 좋다. 출퇴근 음반으로도 자주 들었다. 장거리 운전을 하게 된다면 듣지 않는 게 좋다.”
Angus & Julia Stone – Wherever You Are
Angus & Julia Stone – Heart Beats Slow
“’Heart Beats Slow’의 뮤직비디오를 좋아한다. 약간 내 취향이다.”
Lou Reed – Vanishing Act
“밤늦은 시간 아무도 없는 한강 둔치에 앉아 이 곡만 재생했었다. 가슴이 점점 터질 것 같은 기분이 든다.”
Bjorn Meyer – Provenance
“몇 년 전부터 노래가 있는 음악보다 연주곡을 훨씬 많이 듣는다. 추천할 연주 음반은 너무 많다. 다만 ECM으로 모든 게 해결되기도 한다. 앨범 커버들 또한 너무 내 취향이다.”
Bon Iver – Blindsided
“[For Emma, Forever Ago]는 꼭 들어봐야 하는 음반이라고 생각한다. 이 음반을 처음 듣게 된 사연이 있다. 이 음반이 막 나왔을 즈음이었을 것이다. 카페언플러그드라는 공연장에서 오픈 마이크를 했었는데, 그날은 존 레논(John Lennon)의 ‘Love’라는 곡을 불렀다. 그때 영국에서 온 처음 보는 어린 친구가 내게 ‘네가 쓴 곡이냐’고 물었다. 표정이 제법 시리어스했기 때문에 “존 레논 노래다. 정말 모르냐”고 대답했더니 존 레논도 잘 모른다고 하더라. 그럼 어떤 음악을 듣는지 물었더니 본 아이버를 듣는다고 했다. 요즘 영국에서 난리가 났다고. 그 자리에서 바로 음악을 들어보고 깜짝 놀랐다. 익숙하지 않은 사운드였는데 그냥 너무 좋았다. 그 후로 그 이름을 내 플레이리스트에 문신으로 새겼다.”
해일 – Carol
“포스트록도 참 좋아하는데, 국내 포스트록 밴드 중 해일을 가장 애정한다. 아름답고 유려한 사운드. 나는 다양한 방법으로 멍하니 순간을 보내는 것을 좋아하는데, 록 음악 중에 그것이 가능한 장르가 포스트록이다. 해일은 [세계관(世界觀)] 때부터 좋아했는데, 이번에 나온 신보 [Carol]도 너무 좋다. 라이브가 자주 있진 않지만, 기회가 있다면 라이브도 꼭 보러 가시길.”
김사월X김해원으로 인디 신에 등장해 한국대중음악상 신인 아티스트 부문과 포크 부문을 휩쓸었던 김사월은 첫 솔로 앨범 [수잔]으로 다음 해 다시 한 번 한국대중음악상 포크 부문을 수상합니다. 독보적인 여성 포크 뮤지션으로 자리 잡은 김사월은 2017년을 추억하기 위해 이번 겨울이 시작할 즈음 첫 라이브 앨범을 발표합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공간 다섯 곳에서 열두 개의 이야기를 공연하고 녹음한 이 앨범에는 김사월의 ‘지금’이 담겨있습니다. 기존에 발매된 곡뿐만 아니라 신곡들이 포함된 이유, 곡 순서, 그리고 앨범명까지 그녀의 ‘지금’을 의미합니다.
노래 속 느껴지는 그녀의 숨소리와 곡이 끝나고 이어지는 인사, 관객들의 소리까지 라이브 현장의 공기가 정제된 앨범을 듣다 보면 바로 앞 가까이서 그녀의 노래를 듣는 기분마저 듭니다. 노래할 땐 가녀리기만 한 그녀의 목소리가 이야기할 땐 생각보다 더 가라앉은 낮은 목소리라는 것에 새삼 놀라게 되듯 김사월X김해원으로, 또 [수잔]으로, 그리고 이렇게 라이브 앨범으로 또 한 번 놀라운 면모를 드러냅니다. 추천곡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로커빌리(rockabilly)에 비욘세(Beyoncé)라니요. 이렇게 새해 시작부터 매력을 뿜는 김사월입니다.
추천의 추천의 추천: 김사월이 추천합니다.
Beach House – Norway
“나의 라이브 앨범 [7102]는 어쩌면 ‘신곡을 라이브로 기록하기 위한’ 앨범이다. 편곡 능력으로도 퍼포먼스 적으로도 너무나 사랑하는 키보디스트 박희진 님과 함께한 단출하며 감정 넘치는 라이브를 꼭 기록하고 싶었다. 공유했던 수많은 레퍼런스 중 우리가 꿈꾸는 레퍼런스를 꼽았다.”
Charlotte Gainsbourg – Deadly Valentine
“샬롯 갱스부르의 신보 [Rest] 중에서 자주 듣는 노래이다. 질감으로 만들어진 그의 목소리에 나는 영원히 신비로움을 느낄 것이다. 슬프고 찬란한 편곡과 자신의 삶 속에서 건져 올린 고독한 노랫말이 가장 최근의 세련됨을 만들어낸다. 그는 “나는 날 드러내는 게 더 이상 두렵지 않다”라고 말하고, 나는 그 이야기를 사랑할 준비가 되었다.”
Hillbilly Moon Explosion – Do I Love You
“김사월X김해원 활동과 김사월 활동을 해오면서, 내향적인 내가 스스로와 사람들의 감정을 음악적으로 고양시킬 수 있는 양식이 무엇인지 참으로 찾고 싶고 지금도 그렇다. 최근의 탐구 영역은 로커빌리이다.”
Beyoncé – Love On Top
“영웅이라 일컫고 싶은 비욘세. 이 노래는 뮤직비디오와 함께 즐기면 더 끝내준다. 그의 프로페셔널한 아름다움과 눈부신 카리스마가 나의 삶에 에너지를 준다. 비욘세를 들으면 가치 있는 하루를 보내고 싶어진다.”
소규모 아카시아 밴드로 활동한 송은지의 첫 정규 앨범에는 장기하와 얼굴들의 베이시스트 정중엽이 프로듀서로, 김사월X김해원의 멤버이자 영화 음악 작곡가인 김해원이 수록곡 ‘폭스파인더’에 편곡으로 참여해 눈길을 끌었습니다. 앨범 커버 디자인을 파블로프의 오도함이 했다는 사실도 흥미롭죠. 앨범 발매 쇼케이스 <난 이미 엎질러진 물>이 연극 공연을 주로 올리는 무대에서 연극인들의 퍼포먼스와 함께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호기심을 더욱 자극합니다. 지금의 송은지가 극단 떼아뜨르 봄날의 일원이라는 것은 그녀가 소규모 아카시아 밴드의 보컬이라는 것만큼이나 의미가 있을 것 같습니다.
솔로 앨범 수록곡들은 한 편의 연극 같이 느껴질 정도로 이야기를 전면에 드러냅니다. 사각거리는 목소리로 들려주는 그녀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다 보면 송은지가 찬찬히 밟아가고 있는 어떤 새로운 길이 조금씩 눈앞에 그려지는 기분입니다. 송은지가 고른 곡들은 앨범 [Songs For An Afterlife]의 주제와 닿아있거나, 앨범을 만들던 시기에 많이 들었던 곡이라고 합니다. 그녀가 소개하는 곡마다 담긴 이야기들은 당신의 겨울밤을 한층 특별하게 만들 것 같습니다. 송은지의 앨범이 그러하듯 말이죠.
추천의 추천의 추천: 송은지가 추천합니다.
Bach – Suite for Cello Solo, No.1 Prelude in G Major BWV 1007
“바흐가 남긴 첼로 무반주 조곡의 악보를 12살의 파블로 카잘스(Pablo Casals)가 고서점에서 우연히 발견하고 평생에 걸쳐 연구했다고 한다. 신의 계획으로 지금 이 곡을 듣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Leonard Cohen – Paper Thin Hotel
“호텔의 얇은 벽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에 고통을 느끼는 노래의 화자를 통해 코헨은 고통 속에 자기를 드러내며 오는 해방과 초월의 순간을 만들어 낸다. “지옥에 한 번 다녀오면 천국에 가게 되지, 내 영혼이 무거운 짐을 덜게 됐어, 저 사랑이 내 손을 떠난 것을 들었어.””
Sufjan Stevens – Should Have Known Better
“알려진 바대로 어릴 때부터 떨어져 지냈던 어머니를 잃은 후의 상실감과 그리움, 애도하는 마음이 빚어낸 걸작 [Carrie & Lowell]의 수록곡.”
Richard Hawley – Remorse Code
“모스 부호로 누군가에게 상스럽고 짓궂은 메시지를 보내고 난 후, 사과하는 의미의 신호를 다시 보낼 때 ‘ReMorse Code’라고 한다고. Remorse는 ‘회한’. 넘치도록 아름다운 이 곡에 얼마나 큰 위로를 받았었는지.”
Vashti Bunyan – Turning Backs
“바시티 버년이 이끄는 치유의 길. 이 앨범의 프로듀서는 막스 리히터(Max Richter).”
박인희 – 세월이 가면
“2016년도 촛불집회가 시작될 무렵 가을에 어떤 연극에서 수녀가 되어 도레미송을 불렀다가 다시 박인희가 되어 이 곡을 불렀던 적이 있다. 이명박근혜 정권 말기에 정신착란에 빠진 익명의 등장인물들이 나오는 연극이었는데, 살수차에서 뿌려지는 것 같은 비를 맞으며 행복해했고, 죽음의 원인이 조작되었던 수몰 장병들의 원혼처럼 보이는 무엇이 햄릿의 아버지처럼 자꾸 등장했었다. 이토록 투명한 목소리가 놀랍다.”
Brian Eno – This
“지금, 이것, 여기”
Arvo Pärt – Cantus in Memoriam Benjamin Britten
“아르보 페르트가 영국의 작곡가 벤자민 브리튼을 추모하며 작곡한 곡. 어떤 영화의 장면에 나오듯이 하늘에서 내려오는 눈을 떠올릴 수도 있고, 무너지는 건물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이 곡을 처음 듣고 성령이 내려오는 장면을 이렇게 표현한 게 아닐까 생각했었다. 오케스트라의 연주 영상을 함께 보면 좋다.
“이 곡은 시작과 끝날 때 한참 동안 침묵을 지키도록 작곡되어 있다.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명상만 하도록 되어 있는데 그것도 악보에 표시되어 있다. 페르트의 전기작가인 파울 힐러(Paul Hillier)는 이 곡에 대하여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는 것은 죽음에 대한 우리의 관계에 달려 있다. 우리가 어떻게 음악을 만드느냐는 것은 침묵에 대한 우리의 관계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3집 [꿈의 편집]으로 호평을 받으며,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포크 음반 후보에 올랐던 홍갑이 2017년 말 싱글 ‘감기’로 오랜만에 존재를 드러냈다. “감기에 걸렸었습니다. 얼마 전에 또 걸렸어요.”라는 짧지만, 홍갑스러움이라 쓰고 귀여움이라고 읽고 싶은 소개와 함께 발표한 신곡의 노랫말은 평소 하는 말보다 노래를 통해 들어본 말이 더 많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말수 적은 홍갑이 떠오르는 순간 귀여움이라는 것이 폭발하는 기분입니다.
루시드폴, 김목인, 강아솔, 델리스파이스, 뜨거운 감자, 이적 등 수많은 음악인들이 그와 함께 작업하기를 원하고 홍갑 역시 무표정한 얼굴로 능숙한 기타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지만, 싱어송라이터로서의 홍갑은 여전히 수줍은 많은 소년의 모습입니다. 귀여운 친구 같은 음악을 담은 홍갑의 2018년이 그 어느 때보다 기대되는 지금, 그가 보내온 추천곡들은 함께 도착한 코멘트조차 너무나 홍갑스러워 사뭇 웃음이 새어 나왔습니다. 혹시라도 지금 감기로 고생하고 있다면, 툭 하니 치고 들어오는 포근한 홍갑의 음악으로 조금이라도 나아질 것만 같습니다.
요즘은 무언가를 표현할 때 ‘여성스러운’이라는 말 앞에서 망설여질 때가 있다. 음악을 소개할 때면 그런 표현에 대해 더 많은 고민이 꽈리를 튼다. 여성에 대한 기준을, 특히 여성이 만드는 음악에 대한 기준을 우리는 그간 어떻게 만들어 왔을까. 알게 모르게 ‘예쁜’ 표현들과 ‘아름다움’의 기준 속에서 규제화되온 여성 뮤지션. 무형의 벽과 틀을 넘어 누구도 부술 수 없는 본인만의 확실한 세계를 만들어가고 있는 세 팀의 여성 뮤지션을 소개한다.
자기만의 방에서, 그 어느 것에도 구속되지 않고 어떤 것에도 흐려지지 않은 시야로 온전히 자기 자신이 되어 글을 쓰라던 버니지아 울프의 문장을 이들의 행보에 대입해본다. 지나온 시간보다 보이지도, 가늠할 수도 없는 앞으로의 미래가 더 기대되는 여성 뮤지션들이다. 지금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름. 끝없는잔향속에서우리는의 ‘안다영’, ‘새소년’의 황소윤, ‘김사월X김해원’의 김사월.
안다영 (끝없는잔향속에서우리는)
보컬과 신디사이저를 맡은 안다영을 중심으로 결성된 밴드 ‘끝없는잔향속에서우리는’은 슈게이징 장르에 기반을 둔 음악이 그렇듯 음원만큼 라이브에서 좋은 평가를 받는 팀 중 하나다. 한동안 ‘안다영 밴드’라는 이름으로 활동해온 이들은 2016년 일련의 신인 경연 프로그램에서 좋은 성과를 얻는다. 하나둘 멤버가 합류하며 온전한 팀 구성을 장착해 완전체가 된 것도 새로운 이름을 얻은 이 시기다.
아이슬란드 밴드 ‘시규어로스’의 앨범에서 이름을 따온 이들은 올해 1월 발매된 [우연의 연속에 의한 필연]부터 싱글 [야광바다]에 이르기 까지 우리에게 익숙한 공간보다는 자연스러운 풍경 그 안에서 느껴지는 심상을 곡으로 담아내는데 집중해왔다. 어쩐지 한밤 중보다는 밤의 시작, 폭풍의 전야 같은 느낌이랄까. 아이러니하게도 라이브에서는 그 반대의 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
언젠가 공연을 하는 안다영의 모습을 ‘맹수’같다 표현한 적 있다. 건반을 치며 노래 부르는 뮤지션의 모습에서 생명력을 느낀 건 생전 처음 느껴본 생경함이었다. 건반을 치는 손이나 펄럭이는 머리칼과 구르는 발짓마저 보는 사람이 의식하지 않고 빠져들게 하는 건 자신의 음악을 체화한 뮤지션이 가진 가장 강력한 에너지가 아닐까. 여성 뮤지션만이 가질 수 있는 라이브에서의 장악력, 특유의 표현과 감성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이들의 라이브 공연을 한창 찾아다니던 그즈음이었다. 매번 같지만 다르다는 것을 어떤 말로 더 설명할 수 있을까. 그날의 분위기, 기분이 주는 자연스러운 심상들은 이처럼 음원뿐 아니라 공연에서도 이어진다.
보컬이자 팀을 이끌어온 존재인 안다영이 이전의 솔로 앨범 ‘Dreamer’와 ‘Waves,Smoke,River’에서부터 쌓아온 탄탄한 줄기의 확장. ‘야광바다’가 ‘안다영’이라는 존재감과 ‘끝없는잔향속에서우리는’의 브릿지이자 혼종이라면, 이들이 2017년 선보인 앨범들은 다른 말로 어느 여성 뮤지션의 끝없는 전진과 일련의 성장기라 보아도 좋겠다. 안다영이 가진 가장 큰 무기는 (가장 최근 발매된 ‘야광바다’의 문장을 빌려보자면)아무 부끄럼 없이 ‘옷을 벗고 춤’을 출 수 있는, 정제되지 않은 날 것 그대로의 폭발력이다.
황소윤 (새소년)
새소년을 거론하지 않고 2017년의 인디신을 설명할 수 있을까. 물론 이 괴물 신인의 등장이 더 놀라운 것은 새소년의 주축이 이제 고작 스물두살이 된 프론트우먼 황소윤이라는 점이다.(심지어 팬들에게 ‘대장’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고.)
새소년의 모태는 10대 시절 황소윤이 만들어온 음악이다. 사운드 클라우드, 유튜브 등에 자신이 만든 음악과 커버 등을 올리며 다양한 장르를 흡수한 창작물들을 쌓아간다. 밤을 새며 작업했다 회상하는 솔로 앨범 [16-19]는 정식 음반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본인도 소장할 앨범 한 장 남기지 못할 정도로 꽤 그럴싸한 반응을 얻었고, 같은 대안학교에 다니던 드러머 강토와 전 베이시스트 김푸른하늘을 만나 처음 팀을 이룬 것도 졸업을 앞둔 고교생이던 이즈음이다. 이후 자잘한 클럽 공연을 소화하며 관계자 사이에 입소문이 퍼지기 시작하며 여러 세션이 팀을 거쳐가던 와중 탄탄한 실력의 새로운 베이시스트 문팬시를 만나며 3인조 새소년이 완성된다.
한동안 지금의 [여름깃]이 나오기 전인 2016년경 이들의 클럽 공연을 거의 매주 찾아가던 때가 있었다. 그때의 공연을 보고 나면 잘 한다고 말하는 것보다 참 재미있다고 여기저기 소개하고 싶었다. 아직도 자라는 중이 아닐까 싶게 매주 같고도 다른 하얀 얼굴로 노래하던 그때, 몇 백석 짜리 단독 공연이 1분 만에 매진되는 지금이 무색하게 좁고 퀴퀴하던 어느 클럽 무대에서, 열댓 명도 안 되는 사람들 앞에서 지금과는 다른 버전의 ‘긴 꿈’을 부르던 그는 무대 위에 서면 이상하리만치 자신감이 넘쳤다. 뭐랄까. 나는 공연을 끝낸 그에게 매번 ‘잘 했다’보다 ‘좋았다’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미묘한 차이지만 전자는 어쩐지 그가 어리기에 함부로 내리는 평가 같아 조심스러웠기 때문이었고, 후자를 선택한 건 덕분에 내가 오늘의 당신의 분위기를 함께 공유했음을 알리고 싶은 까닭이었으리라.
그간의 내가 학습한, 심지어 직접 겪어본 ‘스무 살 여성’에 대한 편향적인 이미지는 어떠했는가. 상대가 가진 능력보다는 나이로 사람을 치환해버리는 건 어디에서나 펼쳐지는 일상적인 편견인 것 같다. 나 역시도 지긋지긋한 교복을 벗고 나서도 그런 상황 앞에 여러 번 놓였고 때론 입이 없는 사람처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것 같다. 그땐 그랬다는 걸 말할 수 있기까지, 하나의 발언권을 얻기까지 나는 각각의 이유로 제한을 느꼈던 여러 나이와 직업을 거쳤고 고달픈 상황을 건너왔다. 하나로 질끈 동여맨 머리에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로 무대에서 드러누운 채 기타를 치고 흠뻑 젖어 발개진 얼굴로 숨차하던 소윤의 모습이 흥미롭기보단 경이롭게 느껴졌던 건, 그 소녀가 단순히 달뜬 갓 스물이었기 때문이 아닌 앞으로 해야 할 것을 아는 이의 ‘과거’였기 때문은 아닌가 회상해본다.
‘긴 꿈’, ‘파도’에 이어 첫 EP ‘여름깃’에 이르기까지 황소윤이 10대 시절부터 찬찬히 꾸려온 세계관의 너비가 늘어나는 순간을 바라보는 것은 황홀하기까지 하다. 자신이 하는 행동을 의식하지 않음에도 모든 이가 의식할 수밖에 없는, 차라리 주목할 수밖에 없는 이의 지금. 동시대를 살아가는 뮤지션의 현재와 성장을 지켜보는 일은 모두에게나 기대와 벅참을 안겨주는 일일 것이다.
“한 번도 그런 걸 의식하고 해본 적이 없어요.”
본인 스스로가 그동안 규제되어왔던 틀에서 얼마나 벗어날 수 있는지, 성별에 대한 이분법적인 편견조차 무너트리고 싶고 그게 본인이 할 일이라 말하는 당찬 스물두 살이다. 나는 새소년을, 황소윤을 설명할 때 되려 성별과 나이를 강조해 언급하게 된다. 일상적인 편견의 요소를 되짚어 언급하면서 이걸 깨트리기 시작한 이가 여기 있다 말하고 싶은 것이다. 내가 그에게서 느꼈던 감정이었듯 나이도, 성별도 모두 초월하는 이의 시작은 누군가의 학습된 편견마저도 돌이켜보게 하는 법이다. 언젠가 이런 문장을 서두로 어떤 ‘역사’의 처음에 대해 설명하는 날이 오지 않을까. ‘그 때쯤이죠. 새소년의 음악이, 그리고 황소윤이 그 모든 것의 시작이었어요.’
김사월 (김사월X김해원)
2013년인지 2014년이었는지 연도는 정확하진 않지만 김사월의 음악을 처음으로 접한 건 ‘접속’이라는 곡의 데모 버전이었다. 첫 솔로 앨범 [수잔]에 실릴 때까지, 마치 테이프 늘어지도록 듣던 옛 시절처럼 한 곡을 죽어라 반복하며 멜로디나 가사, 잡음 한 터럭마저 꽤 오래 곱씹었던 기억이 난다. 그 곡 덕에 긴긴 밤 입이 까슬해지도록 울기도 했고 어느 날은 위로를 받는 덕에 긴긴 밤 잠에 들지 못하기도 했다.
앞서 소개한 ‘접속’외에도 사운드 클라우드에 올라왔던 데모 중 손꼽아 좋아하는 곡들이 있는데 ‘새’, ‘흠집’, ‘꿈꿀 수 있다면 어디라도’같은 곡들이다. 안착할 곳 없는 감정들을 매만져 노랫말로 틈을 메운 곡들. 그 속 새로울 것 없는 ‘사랑’이란 보편적 정서마저 특별하게 느껴지는 건 특히나 그가 쓴 가사 때문이리라는 생각이 든다. 언젠가 어떤 책에서 본 구절이 생각난다. 말은 사람의 입에서 태어났다가 사람의 귀에서 죽는다고. 하지만 어떤 말들은 죽지 않고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살아남는다는다고.
언제였을까. 누군가를 좋아하는 게 맞는지 고민하던 순간이 생각난다. 허공을 돌던 눈빛과 메마른 눈가, 문장 사이 잦은 헛기침, 취기에 벌게진 콧잔등이나 자꾸 매만지는 손가락 끝 같은 것마저 재밌다고 생각이 들던 일. 사랑을 이해하려 노력해서, 너무 많은 책을 읽고 너무 많은 음악을 들은 탓에 판단마저 어려운 걸까. 나는 그날의 장면을 김사월의 곡을 들으며 되짚어보았다. 아, 사소한 것들에서 운명을 느끼고 사소한 것에서 우연이었음을 깨닫고 헤어짐을 느끼는 것마저 사랑이었지. 그렇다, 이건 사랑이구나. 훗날 나의 감정이 오독과 오기라 느낄지언정 누군가를 대신해서 깊이 생각하는 사람 혹은 먼 곳까지 가보는 사람, 그것이 나에겐 ‘김사월’이었다.
한창 김사월이라는 존재, 특히 가사에 대해서만 얘기하긴 했지만 2015년 첫 솔로 앨범 <수잔>의 발매 전해인 2014년, 김해원과 함께 한 듀오 ‘김사월X김해원’으로 이미 평단과 리스너의 고른 사랑을 받아온 그다. 각기 활동해오던 이들의 고유의 정서가 농축된 <비밀>이라는 첫 EP로 2015년 제12회 한국대중음악상 올해의 신인상, 최우수 포크 음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단순히 남녀 듀오라는 조합에서 느낄 수 있는 합보다 더 좋은 게 많았다. 각각의 화자로써 각자의 확실한 존재감이 비교적 단출한 구성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음악을 더 풍성하고 특별하게 만드는 건 아닐까 생각한 적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생각이 이후 ‘단편선과 선원들’의 ‘연애’라는 곡에 등장하는 김사월의 목소리를 들으며 확신에 가까워지기도 했다. 누군가와의 협업에서도 그렇지만 혼자일 때도 그의 존재감은 강력하다. 비워진 많은 것들을 스스로 채워내야 하는 일들. 나는 혼자일 때의 존재감을 절대 당연하다 말하고 싶지 않다. 일종의 일대기였던 ‘수잔’에 이은 라이브 앨범 ‘7012’에 대해 본인은 지나온 것에 대한 정리라는 개념으로 말하기도 했지만, 나는 그 모든 것을 시간과 공간에 대한 김사월만의 장악력이라 표현하고 싶다.
앨범 프로모션과 관련된 일정을 함께 준비하며 그녀와 나누었던 많은 대화들이 떠오른다. 공연 중간 멘트할 때는 그 수줍은 몸짓과 멘트에 같이 따라 소리 없이 따라 웃기도 했다. 공연을 보면서도 어쩐지 그와 매 순간 대화를 하는 기분이었다. 그 무엇도 거짓이라고 느낀 적 없지만 언제 어느 때나 그 작고 사소한 것마저 다 진실돼 보여 김사월에 존재에 대해선 이상하리만치 언제든, 무엇이든 좋았던 것 같다. ‘우리가 동시대에 살아서, 같고도 비슷한 생각을 나눌 수 있어 좋아요.’ 언젠가 그런 얘기를 김사월에게 건넸던 것 같다. 이제 나는 김사월에게 되돌려 받을, 내일에 대한 얘기를 기다리고 있다.
Deep Inside #10 2017, 너는 참 좋은 해였다 [Top 5 albums of the year]
“나이를 한 살 한 살 먹을 수록 시간이 점점 더 빨리 가.”
서두부터 대단히 ‘아재’스럽다만 사실 이 말은 옛날부터 주변에 있는 선배, 형들이 툭하면 내게 던지던 공통적인 넋두리다. 그땐 그저 한 귀로 흘려 들었건만 시간은 흐르고 흘러, 불행하게도 이젠 내가 그 넋두리의 주체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진짜로! 요즘 내가 체감하는 ‘시간’이라는 것은 마치 육상경기에 방불케 하는 대단히 숨가쁜 무엇이 되어버린 거 같다. 확실히 시간의 체감속도는 스스로의 나이듦에 비례해 상승곡선을 그리고 있고 그 상승곡선을 타고 2017년도 어느새 막바지에 와있다. 동시에 내 마흔두 살도 함께 끝자락에 섰다.
여하튼 마냥 반갑지만은 한 해의 끝에서, 이 꼭지의 에디터가 아닌 ‘포크라노스’라는 브랜드의 런칭부터 현재까지 실무를 줄곧 책임져온 한 사람의 스태프의 입장에 서서 2017년의 포크라노스를 되돌아본다. 2015년 런칭 이후 꼭 3년차였던 이 브랜드의 올해는 우리들의 안에서, 그리고 밖에서, 꽤 의미심장한 변화와 진화들이 일어났던 것 같다. 이런 변화 속에서 개인적으로 특히 좋았던 점은 무엇보다 더 많은, 젊고 신선한 음악가들과 함께 일하게 되면서 포크라노스가 다루는 장르의 풀이 이전보다 한층 넓어졌다는 것. 게다가 2017년은 앞서 두 해에 비해 내 개인적인 음악취향을 무차별 폭격하는, 취향저격 음반들이 대거 쏟아진 해이기도 했는데 그래서 올해의 마지막 ‘Deep Inside’는 올 한해 내가 가장 사랑했던 다섯 장의 음반을 꼽아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내 나름의 소소한 연말 기분내기 같은 거랄까. 자 그럼 레스기릿!
#1 [데카당 / ㅔ] (EP / 2017)
데카당 / 봄 (Live @ 온스테이지)
올 한 해 내 SNS의 타임라인에서 ‘최애’라는 단어가 쓰인 포스트 중 상당수는 분명 ‘데카당(Decadent)’과 연관이 있다. 이들의 첫 EP [ㅔ]는 내게 적잖은 충격을 줬다. 도무지 어디로 튈지 알 수 없는, 무정부적이면서 젊음의 치기처럼 뾰족하게 모가 난 사운드, 여기에 지독히도 자의적인 노랫말을 제멋대로 강약을 오가며 불러 젖히는 보컬의 기묘한 불협화음. 데카당의 음악은 뭐랄까, 종종 ‘부조화 속 조화’라는 느낌을 강하게 불러일으킨다.
이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상상이지만 ‘디안젤로(D’angelo)’가 ‘빌랄(Bilal)’, ‘앤더슨 팩(Anderson .Paak)’ 등을 모아놓고 “야, 우리 좀 싸이키델릭한 거 같이 해볼래?” 하고 뭔가를 만들면 아마 이런 게 나오지 않을까 싶은 소울과 블루스, 싸이키델릭, 프로그레시브가 혼재하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그들만의 음악문법을 펼쳐놓는 밴드다.
요새 듣는 음악들이 죄다 왠지 뻔하게 느껴진다면, 신선한 자극이 필요하다면 지금 당장 이 음반을, 그리고 최근에 발매한 싱글 ‘우주형제’와 ‘너와 나’를 들어보길 권한다. 내가 ‘최애’라는 수식어를 썼을 정도면 확실히 이건 장난 아닌 거니까.
EP [Format]은 최근 흑인음악의 트렌드를 완전히 역주행하는, 포근한 정서의 복고풍 알앤비-팝 음악들을 담은 EP [반복]으로 등장해 서서히 주목 받고 있는 싱어송라이터 ‘구원찬’이 솔로 EP로부터 불과 한 달 만에, 비트메이커/프로듀서인 ‘피셔맨(Fisherman)’과 함께 발표한 프로젝트 음반이다.
본인의 음반 [반복] EP가 90년대 후반에서 2000년대 초반의 얼반, 컨템포러리 알앤비의 무드를 재현하고 있다면 이 음반은 좀 더 네오소울적인 색채가 짙다는 인상. 특유의 몽글몽글한 질감의 사운드로 구현하는 동화적인 멜로디의 선율이 심플한 힙합 비트와 공존하는 ‘피셔맨’ 특유의 사운드와 스무스한 구원찬의 보컬은 어디 하나 모나지 않고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데 음반을 들으면서 왠지 모르게 ‘뮤지끄 소울차일드(Musiq Soulchild)를 자꾸 떠올렸다. 낭만이라곤 1도 없는 사람의 가슴 속에도 낭만꽃이 피어날 것 같은, 로맨틱한 무드로 가득한 음반이다.
아, ‘피셔맨’도 최근 본인의 두 번째 EP [청담]을 발표했다. 아름다운 음악들을 담고 있으니 꼭 시간을 내서 들어보기를.
주류 관습을 거부하는 태도를 좋아한다. 동시에 흥행과 무관하게 자기 곤조를 우직하게 밀고 나갈 수 있는 작가주의적인 태도 역시. 그런 의미에서 대안적인 힙합 음악 컬렉티브인 ‘그랙다니(Grack Thany)’는 최근 내가 한국의 힙합씬에서 가장 주목하고 있는 집단 중 하나다. ‘사일러밤’, ‘션만’, ‘몰디’, ‘BAC’, ‘반다’, 노피치온에어’, ‘행인’, ‘본린 윤’ 등으로 구성된 이 집단은 시종일관 언더그라운드적인 태도를 유지해왔고 실제로 이들이 그간 발표해온 결과물들은 최근 한국힙합 전반의 분위기와는 완전히 다른 스탠스를 취하고 있다.
올해 후반에 발표한 ‘그랙다니’의 컴필레이션 앨범 [8luminum]은 이 집단의 태도, 지향점을 밀도 높게 함축해 담아낸다. 불길한 무드를 조성하며 음반의 첫인상을 빚는 ‘행인’의 첫 트랙 ‘폭파’에서부터 재즈, 훵크의 바이브로 산뜻하게 음반을 매조지는 ‘션만’의 마지막 트랙 ‘포물선’까지, 수록된 열두 트랙 모두 현재 대중들이 주로 소비하고 있는 힙합의 그것과는 사뭇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랙 하나하나가, 또 그 하나하나가 모여 앨범이라는 덩어리가 되었을 때 청자에게 선사하는 매력과 흡입력은 굉장하다. 내가 꼽는 ‘올해의 한국 힙합 앨범’이다.
TFO / Bomb (audio)
VANDA, BAC / 50m Bass
#4 [리코(Rico) / White Light Panorama] (Full-length / 2017)
리코(Rico) / Paradise (official MV)
정말 오랜만에 음악 때문에 소름이 돋았다. 도입부를 듣는 순간 고압전류로 척추를 직격 당한 기분이었달까. ‘리코(Rico)’의 노래 ‘Paradise’ 얘기다. 솔직히 한국에서 이렇게 멋진 네오소울 넘버를 들을 수 있을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D’angelo’의 2집 [Voodoo]에 ‘DJ Premier’와 함께 작업한 ‘Devil’s Pie’라는 트랙이 수록되어 있는데 그 곡을 연상시킨다)
원래 ‘리코’의 팬이었다. 섹스송(?) 매니아(??)인 나는 그가 믹스테잎을 연이어 발표하며 씬에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2012년부터 첫 정규였던 [The Slow Tape]에 이르기까지 음색 하나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잠재력이 느껴졌던 이 보컬리스트가 집요하게 자신을 발전시키며 슬로우잼의 정수로 접근해가는 일련의 과정들을 대단히 기쁘게 지켜봤던 한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Paradise’는 ‘리코=슬로우잼’이라는 내 머릿속 공식을 산산조각내며 새로운 리코의 컴백을 알린 트랙이었고 그의 통산 두 번째 정규작인 [White Light Panorama]는 역시나 이전과는 확연하게 달라진 ‘리코’를 담고 있었다. 새 앨범은 네오소울, 트랩, 피비알앤비 등 ‘알앤비’라는 바운더리 내에서 다룰 수 있는 다양한 스타일들을 시도하며 음악적인 외연을 확장한다. 트랙 하나하나의 프로덕션이 대단히 훌륭할뿐더러 다채로운 스타일을 다룸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트랙도 ‘리코의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그의 확실한 개성, 스타일이 그 모두를 하나로 묶으며 앨범의 통일성을 담보해낸다. 올해 나온 가장 훌륭한 알앤비 음반 중 하나이며 이후 한국 알앤비 음악을 논하는 자리에서 두고두고 거론될 만한 음악적인 성취, 완성도를 고루 갖추고 있다.
리코(Rico) / Don’t Talk to Me (feat. Bloo) (official MV)
솔직히 고백하면 이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지난달 중순만 해도 이 자리에 위치할 음반은 이미 달리 정해져 있던 터였다. 하지만 이달 초의 어느 날 밤, ‘Passenger’라는 노래를 듣는 순간 생각을 바꾸게 되었다, 아니 바꿔야만 했다. 불가항력이었다.
포크 기반의 싱어송라이터 ‘강태구’가 제주도 그 어딘가에서 만들어낸 노래들을 담은 앨범 [bleu(블뢰)]는 음반으로는 전곡을 수록한 앨범의 형태로, 음원으로는 몇 곡씩을 끊어 수록한 싱글의 형태로 소개되고 있다. 현재까지 음원으로 공개된 곡은 총 네 곡.
사실 나는 ‘강태구’라는 음악가에 대해 잘 모른다. 이 음반을 통해 처음 그의 이름을 알게 되었을 뿐. 그래서 그에 대해, 이 음반에 대해 어떤 소개나 안내라 할 만한 이야기는 적어도 지금은 할 수 없다. 다만 내가 여기서 밝히고 싶은 것은 덤덤하게 노래하는 그의 목소리를 듣는 동안 내 안에서 무수히 많은 감정의 파도가 세차게 일렁였다는 것. 그래서 한참을 끝도 없이 먹먹해진 그런 밤을 보냈다는 것. 앞으로 난 아마 그에 대해, 그의 음악에 대해 좀 더 알아가게 될 거다. 한 해의 끝자락에 다다라 그의 음악을 만나게 된 것에 참으로 감사하다.
강태구 /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소리 (Live @ 온스테이지)
강태구 / 그랑블루 (audio)
이상으로 내 멋대로 고른 ‘올해의 음반’ 다섯 장에 대한 이야기를 마친다. 그리고 이 글을 마지막으로 ‘포크라노스’의 스태프이자 에디터로서의 나의 2017년도 공식적으로 종료, 당분간 휴식의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남은 연말은 잠시 서울을 벗어나 저 멀리 강원도 어딘가에 머무르며 좋아하는 스노우보드를 매일 타고, 그간 미처 못 들어본 좋은 음악들도 찾아서 들으며 보내려고 한다. (이건 거의 매해 반복되는, 내 나름의 한 해를 마무리하는 방식이다) 끝으로 이 자리를 빌어 2017년 한 해 동안 보잘것없는 내 글들을 읽어준 모든 이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Editor / 김설탕
sugarules@poclanos.com
(‘Deep Inside’ 코너의 모든 글은 에디터의 개인적 주관을 반영한 것으로 본사의 공식적인 입장과는 일절 무관합니다)
12월이 되면 이곳 저곳에서 연말 결산을 시작합니다. 올 한 해 가장 ‘핫’했던 인물, 가장 충격적이었던 사건, 가장 인상 깊게 보았던 영화 등등. 가장 좋았던 음악과 뮤지션에 대한 이야기 역시 절대 빠지지 않는 흥미로은 결산 소재죠. 2017년에는 유독 반가운 행보들이 많았습니다. 멤버들의 군입대로 활동을 중단했던 밴드 Achime(아침)이 3년 만에 싱글로 돌아왔고, 주로 봄철에만 발매를 하곤 했던 홍갑이 가을에 신곡을 내주었고, ‘더 미러’에서 이름을 바꾸고 등장한 신해경도 있었죠. 구원찬, 새소년, 데카당 등의 설레는 데뷔도 있었습니다. 일일이 꼽을 수 없을 만큼의 많은 등장이 있었고, 또 그만큼의 즐거움도 넘쳐나던 한 해였습니다.
매일매일 쏟아져 나오는 주옥 같은 음악들, 멋진 뮤지션들과 함께하며 포크라노스도 참 즐거웠습니다. 2017년의 마지막 <추천의 추천의 추천> 편에서는 그중에서도 가장 대담한 변화와 신선한 등장을 보여주었던 네 명의 아티스트와 그들의 추천곡들을 소개합니다. 가장 반가웠던 정규 앨범을 내준 10cm, 놀라운 데뷔 EP를 선보인 테림(TE RIM), 그리고 내년이 더욱 기대되는 음악을 보여준 CIFIKA와 Offing을 만나보세요.
10cm
10cm / 4.0 (2017.09.01)
정규 앨범을 발매한다는 것은 모든 뮤지션들에게 가장 큰 욕심 중 하나임과 동시에 가장 무거운 부담일 거예요. 싱글과 미니앨범에서는 보기 어려운 긴 호흡의 서사, 긴 러닝타임을 아우르는 메시지는 물론, 향후 ‘어떤 뮤지션으로 정의될 것인가’에 대한 고찰도 담기니까요. 어딘가 모자르고 찌질하지만, 우리 모두의 깊숙하고 은밀한 무언가를 툭툭 건드리던 10cm에 대한 기억 역시 지난 정규 <3.0>에서 비롯된 것이겠죠. 그래서, 3년 전 발매 당시 타이틀곡도 아니었으면서 지금까지도 차트 100위권을 드나드는 인기곡‘스토커’를 만든 10cm가 대망의 새 정규 4집으로 돌아온 것이 너무도 반갑습니다. 10cm가 보내온 다섯 개의 추천 곡들은 그의 네 번째 정규 앨범만큼이나 흥미롭습니다. 익숙하면서도 새삼 신선한 조합을 보내왔거든요.
추천의 추천의 추천: 10cm가 추천합니다.
Chris Minh Doky – Every Breath You Take
스팅이 속한 the police의 원곡을 재즈버전으로 리메이크한 곡으로 나는 가끔 이 버전이 더 원곡처럼 들릴 때가 있다. Kanye West – Stronger
나는 힙합은 잘 모르지만 사람들이 왜 칸예 웨스트를 좋아하는지는 알겠다. 심지어 daft punk도 잘 몰랐어서 나는 이 곡이 원곡인줄 알았던 때도 있었다. 오혁 – 소녀
그냥 오혁이 너무 부러웠던 곡. Limp Bizkit – Faith
조지 마이클의 위대함을 너무 늦게 안 바람에 이 곡이 원곡인 줄 알았다. 위대한 조지 마이클을 알고 나서도 변하지 않은 이 버전에 대한 리스펙트 데이브레이크 – 우린 제법 잘 어울려요
제법 안 어울릴 것 같았는데 너무 멋지게 리메이크해서 깜짝 놀랐던 노래
테림(TE RIM)
테림(TE RIM) / ODE TO TE (2017.11.22)
이렇게도 화려하게 신스의 매력을 십분 활용한 이가 국내에 또 있을까요. 쇼미더머니6 우원재의 프로듀서로 더 잘 알려져 있는 테림(TE RIM)이 얼마 전 솔로 데뷔 EP로 내놓은 ‘ODE TO TE’에 담긴 감각적인 신스와 전자음악 요소들은 분명 눈여겨볼만 합니다. 여행에서 얻은 영감과 유년 시절의 기억들을 담아낸 것 치고는 사운드부터 아트워크까지 그 무엇 하나 완벽한 소설같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이죠! 첫 트랙 ‘BUNKER’부터 마지막 트랙 ‘THE DESERT ISLAND HOTEL’까지를 관통하는 어떤 이국적인 정서는 러닝타임 내내 몇 번의 감탄을 자아내곤 합니다. 지금껏 공개된 사진들과 뮤직비디오, 스페셜 클립 영상 마저도 일말의 군더더기 없이 깔끔합니다. 강렬한 데뷔를 보여준 그의 추천곡을 만나보세요. 그의 음악 못지 않게, 하나하나 빈틈없이 주옥 같은 8개의 곡들을 테림(TE RIM)이 직접 추천합니다.
추천의 추천의 추천: 테림(TE RIM)이 추천합니다.
Fleetwood Mac – Dreams “좋아하는 텍스쳐와 무드. Stevie Nicks 의 보컬이 담담한 연주에 얹혀있다.
힘들 때 듣곤 하지만 나를 억지로 위로하지도, 밀어내지도 않는, 슬프고 밝은 음악.” Atlas Sound – Quick Canal (w. Laetitia Sadier) “Animal Collective 의 Merriweather Post Pavilion 앨범이 피치포크에 소개되었을 당시
함께 세트처럼 가장 많이 들었던 Atlas Sound 의 Logos 앨범 수록곡.
자글자글한 텍스쳐가 이끌어가는 대곡의 느낌.
음악을 듣고나면 Wisdom is learnt. 라는 노랫말이 귓가를 맴돌 것이다.” Men I Trust – Lauren “반복되는 루프의 베이스가 주인공이면서 지루하지 않고, 미니멀하고 칠한 곡.
에릭 로메르 영화의 한 장면같은 뮤비가 매력적이다.” Oleta Adams – Everything Must Change “11살 무렵에 Oleta Adams 가 부른 이 버전의 곡을 아버지의 오디오에서 많이 들었고,
좀 더 자라서 제목을 알아낸 후 지금까지 오랫동안 가장 꾸준히 들어온 음악.
시적인 가사와 멜로디, 플루겔 호른의 아름다운 연주와 편곡.” Grimes – Artangels “앨범 Art Angels 의 모든 곡을 사랑하지만, 셀렉을 하는 지금 이 순간 가장 고르고 싶은 곡.
보컬 믹스와 리드 신스가 인상적. World Princess Pt. II, REALiTi, California… 결국 모든 곡을 다 들어야한다.” Tame Impala – Past Life “따뜻한 인트로 신스와, 으깨지는 디스토션의 베이스. 꿈꾸게 하는 우주와 같은 음악.” Junior Boys – When I’m Not Around “리드미컬한, 감각적이고도 세련된 무드. 2004년 작이라는 사실이 놀랍다.” Drake – Passionfruit “현재의 내가 생각하는 팝의 이상.”
CIFIKA(씨피카)
CIFIKA(씨피카) / DOOROOGO (2017.12.05)
오늘날 우리나라의 전자음악씬의 현황을 알고 싶을 때, 가장 아이코닉한 인물을 꼽을 때 빠짐없이 언급되는 CIFIKA(씨피카)입니다. 흔치 않게 전자음악 프로듀싱과 동시에 보컬 활동까지도 하는 그녀이죠. 화제의 첫 번째 EP [INTELLIGENTSIA]를 발매한 그녀가 정확히 1년 만에 새 싱글 ‘DOOROOGO’로 돌아왔습니다. 미니멀한 구성으로도 감탄의 최대치를 이끌어낸 ‘DOOROOGO’는 또 한 번 CIFIKA(씨피카)의 역량을 보여준 흥미로운 싱글이죠. 그런 그녀의 플레이리스트를 엿보는 것은 정말 설레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CIFIKA(씨피카)가 추천하는 4개의 트랙을 함께 만나보아요!
추천의 추천의 추천: CIFIKA(씨피카)가 추천합니다.
Adriatique – Quadrivia
아드리아틱의 작년 곡. 많지 않은 악기들은 같은 흐르는 시간안에서 서로 중첩하고, 교류한다. 이런 페이스의 음악은 나의 인생과 같다. 언제 일어날 지 모르는 사건과 같이 뜬금없는 타이밍에 새로운 소리가 등장하고, 그것은 음악 전체의 흐름은 압도한다. 이 곡뿐만 아닌, 해당 EP 의 세 곡은 전부 몸을 들썩이게 한다. (아주 잔잔하게) Howling – Phases
내가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의 편견 중 하나가 ‘이런 풍의 곡에는 보컬은 아니지’ 식의 quote 이다. 그런 편견을 깨부셔줄 나의 페이보릿 트랙. 아티스트의 이름이 하울링이기 때문에, 이 음악가의 작품을 들을 때 마다 나는 늑대가 보름달 아래서 하울링 하는 이미지를 상상하며 듣는다. 내가 자주 사용하는 딜레이를 멋지게 활용한 예라고 생각. Pure X – Starlight
나의 친구 규희가 추천한 밴드의 곡. 이렇게 사랑스러운 러브송을 쓰는 밴드는 실제로는 어떤 외모를 가지고 있을까 궁금하지 않은가? 규희는 처음 이곡을 들려주며 그들의 엘피를 나에게 보여주었다. 나머지는 상상에 맡기겠음.
Otzeki – True love
진실된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두려움과 외로움이 존재 하지 않는 것이 사랑인지 나는 의심한다. 두려움과 외로움은 분명 느끼기에 미소가 지어지는 감정은 아니나, 그것을 인지 후에 받아들이는 행위는 사랑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Offing(오핑)
Offing / Simon Said (2017.12.12)
10cm, 옥상달빛, 선우정아, 치즈 등 다채로운 조합의 뮤지션들이 모여있는 레이블 매직스트로베리사운드의 서브레이블 ‘피치스레이블’의 신인 Offing이 얼마 전 세 번째 싱글을 발매했죠. 로파이한 질감의 사운드, 나른한 보컬로 관조적인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모습이 매력적인 그녀는 평소에도 음악 추천을 굉장히 즐겨 한다고 전했습니다. 그녀가 추천하는 여섯 개의 트랙들을 들으며 앞서 발매된 세 편의 Offing 싱글들을 새로이 떠올려보는 것 또한 재미있는 경험이 될 것 같습니다.
추천의 추천의 추천: Offing이 추천합니다.
Cat Power – The Moon Cat Power 노래에 빠져 있던 고등학교 시절 참 많이 들었던 노래입니다. 실컷 울고 나서 들어도 좋고, 너무 기쁠 때 들어도 좋은 이상한 노래입니다. 가사도 멜로디도 정말 좋아요. Cigarettes after sex – K.
검은 개 드럼 베이스 녹음하러 갔을 때 처음 듣고, 정말 잠깐 들었는데도 너무 좋아서 집에 오는 길에 계속 반복해서 들었어요. 밤에 맥주 한 잔 마시고 들으면 나른해지면서도 묘하게 설레이게 되는 곡입니다. King Krule – Ocean Bed
이 노래를 듣자면 여름 밤 따뜻한 풀에서 튜브를 타고 둥둥 뜬 채로 취해 있는 기분이 듭니다.
Yaeji – Raingurl Oh yeah hey dog hey wassup! 일레트로닉을 즐겨 듣는 편은 아닌데 Yaeji 노래는 정말 많이 듣습니다. 곡들이 감각적이고 창의적인 데다 깔끔해서 너무 좋아요. St. Vincent – Young Lover
정말정말 좋아하는 아티스트라 추천하고 싶은 곡들은 엄청 많지만, 가장 최근 나온 앨범에서는 이 곡을 소개하고 싶어요. 일단 가사가 너무 흥미롭고, 그와 어우러지는 드라마틱한 전개가 무척 멋있는 곡입니다. Klaxons – Echoes
이 노래와 함께 자전거를 타면서 질주하면 극도의 해방감을 느낄수 있습니다. (없던 분노도 해소됩니다.)
12월이 시작하기 무섭게 프랜차이즈 카페에 깔린 음악들이 바뀌었다. 아, 이 음악들이 내가 2017년이 다 갈 때까지 들어야 하는 연말 음악들인가. 크리스마스가 마치 코 앞인 것처럼,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기분만 들뜨게 할뿐더러 전혀 새롭지도 않다. 당분간 우리는 평소와 같이 출근과 업무를 해내는 동시에, 짬을 내 그간 미루었던 지인들과의 만남도 여럿 성사시켜야 한다. 물론 흥이 나는 시간도 늘겠지만, 혼자만의 시간도 잊지 말아야 한다. 북적대는 연말일수록 혼자만의 시간은 필요하고 또, 의도치 않아도 혼자만의 시간은 찾아온다. 함께 있을 때, 그리고 혼자 시간을 보낼 때를 상상하며 연말 음악들을 골라보았다.
A-FUZZ(에이퍼즈) – The Four Seasons
2017년 매 시즌 싱글을 공개한 에이퍼즈가 계절 프로젝트를 마무리하며 내놓은 EP는 가족과 함께 단란한 연말을 보내기에 완벽한 선택일 것이다. 남녀노소, 세대를 뛰어넘는 재즈는 연말에 가장 잘 어울리는 장르이기도 하다. 봄, 여름 곡은 어떡하냐고? 일단 앨범부터 플레이할 것! 봄 트랙은 훈훈한 실내에서 파티 분위기를 띄우기에, 여름 트랙은 차가운 겨울 공기 마시며 가까운 곳으로 밤 드라이브하기에 적절하다. 가을 곡은 자리를 한창 무르익게 할 테고, 겨울 곡은 제목 그대로 크리스마스의 설렘을 담았다.
테림(TE RIM) – ODE TO TE
얼마 전 친구들과 연말 파티를 계획하는데, 각자 디제잉을 해보자는 의견이 나왔다. 모두 음악을 좋아하는 친구들이기에 이런저런 계획을 짜다 보니 결국 연말 파티가 ‘내가 올해 얼마나 핫하고 (너희들은 미처 몰랐던) 엄청난 곡을 가져왔는지 들어봐 대회’가 될 거란 농담 섞인 예측이 나왔다. 부담과 야망이 뒤섞여 쌓여가는 사이, 나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테림을 떠올렸다. 모두가 열광할 레트로 무드의 세련된 전개, 몽환적인 보컬, 그리고 적당히 리듬을 탈 수 있는 비트까지, 이 앨범만큼 연말 무드를 살릴 앨범이 어디 또 있을쏘냐! 디제이가 될 생각에 신이 나 처음부터 끝까지 앨범을 찬찬히 듣다 보니 절로 멋진 파티가 그려지며 설레기 시작한다. 그나저나 우리의 파티가 음악만큼 멋져야 할텐데.
신세하 – 7F, The Void
언젠가 정말 멋들어진 연말 파티를 열고 싶다. 쉽게 눈에 띄지 않는 숨겨진, 하지만 인스타그램에 올리면 모두 열광할 옛날 런던의 클럽 느낌이 나는 공간이면 좋겠다. 상상 속 게스트리스트는 데이빗 보위, 프린스, 마이클 잭슨.. 앗, 너무 나갔군. 현실의 끈을 다시 살짝 붙잡고…. 그래, 신세하가 오면 멋질 것 같다! 구레나룻을 멋지게 기른 신세하가 등장하고, 천장엔 디스코볼이 돌아가고, 조명이 반짝이는.. 아, 그러고 보니 이 장면, 신세하 ‘Tell Her’ 뮤비에서 본 것 같잖아! 그런데 이렇게 멋진 파티를 다 준비해놓고 막상 파티 당일 나는 왠지 쑥스러워 못 갈 것 같다. 그래도 즐거웠다, 상상만으로. 신세하나 들어야지. 음악만 들어도 상상 속 파티에 있는 것 같고 좋네.
위아더나잇 (We Are The Night) – 들뜬 마음 가라앉히고
왁자지껄한 연말모임으로 빽빽한 시즌을 보내다 보면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할 때가 있다.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며 생각에 잠길 그런 시간 말이다. 연말 파티보다 이런 시간이 더 필요한 나 같은 사람들도 많을 것 같다. 밤이 긴 겨울에 그 누구보다 어울릴 위아더나잇의 곡들은 혼자서 보내는 시간을 그 무엇보다 충만하게 만든다. 사색적 가사와 함께 지난 한 해의 여러 순간들을 조용히 곱씹고, 또 내년을 계획하며 연말을 보내고 싶은 이들에겐 위아더나잇이 완벽한 선택일 것이다.
허수아비 레코드 컴필레이션 앨범 – 허수아비들의 겨울잡담
만약 당신이 이런저런 일로 마음이 편치 않아 연말 모임에 나갈 의욕조차 생기지 않을지라도 낙담하지 말 것. 우리 곁엔 허수아비 레코드가 있다. 최근 허수아비 레코드는 무려 2개의 크리스마스 컴필레이션 앨범을 난데없이 발매했다. 수장 김태춘을 비롯해 신승은, 야먀가타 트윅스터, 그리고 아직은 낯선 이름의 뮤지션들까지 각자 크리스마스를 노래한다. 외로움, 슬픔, 그리움, 뭐 이런저런 감정들이 제각각 뒤섞인 크리스마스다. 많은 이들이 그 어느 때보다 행복과 즐거움을 쫓는 시즌이기에 상대적으로 더 외롭고 힘들 수 있는 연말, 마음이 헛헛할 이들에게 그 어떤 것보다 이 앨범이 위로가 될지도 모르겠다.
강태구 – <그랑블루 / 내 방 가을>, <Passenger / 아름다운 꿈>
2017년이 어느 때보다도 힘들고 지친 한 해였다면 강태구의 앨범과 함께 조용히 사색의 시간을 가져볼 것. 조용한 곳, 이왕이면 강태구가 이 앨범을 만들었던 제주도라면 더 좋겠다. 자신을 고립시킨 채 찬찬히 지난 시간을 돌아보고, 글로 정리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홀로 술을 마시며 이 앨범을 듣다간 눈물이 왈칵 날지도 모르겠다. 그럴 땐 맘껏 울어도 될 것 같다. 극한의 슬픔으로 자신을 몰아넣고 깊이 침잠해서야 느낄 수 있는 카타르시스 같은 게 있기도 하니까. 그러고 나서 멍하니 듣는 강태구의 음악과 그 안에 담긴 감정들은 분명 위로일 것이다.
Deep Inside #9 서바이벌 쇼의 바깥에서 치열한 현실 인식으로 써내려가는 사실적 리리시즘, 그것은 여전히 현재진행형 [Jerry.K / OVRWRT]
“어제 쇼미더머니 봤어?”
매년 쇼미더머니 시즌이 되면 주변 사람들에게 이 질문을 꽤나 많이 받는다. 올해도 역시 마찬가지였고. 그들의 인식 속 내가 ‘힙합을 좋아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비롯되는, 질문인 듯 질문 아닌 질문 같은 이 말. 사회적 인간의-공통의 화제를 통해 대화를 부드럽게 시작하려는-보편적 커뮤니케이션 스킬이라는 것을 이해하지만 같은 문답이 잦아지고 반복되면 아무래도 피로감을 느낄 수 밖에 없다. 그런 고로 이 자리를 빌어 그들에게 명확하게 밝혀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아니. 나 쇼미더머니 안 봐. 앞으로도 안 봐.”
내가 ‘쇼미더머니’라는 프로그램을 보지 않는(이라 쓰고 ‘싫어하는’이라 읽는다) 이유를 대보라 하면 사실 꽤 여러 가지 구구절절 읊어댈 수 있을 테지만 그냥 굳이 한 마디로 딱 잘라 정리해 말하자면 ‘멋없게 느껴져서’다. 멋없다-라는 표현이 딱히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음악가들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어쨌거나 지금의 한국에서 힙합 음악가들이 인스타그램 팔로워 숫자를 늘리기 위해, 그러니까 ‘나를 알리기 위해’ 택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이고 강력한 수단이 ‘쇼미더머니’라는 것만은 분명하고 내겐 그들의 현실적 선택을 가타부타 평가할 자격 같은 것은 없으니까. 다만 내겐 이 프로그램이, 혹은 이 프로그램에 얽힌 주변의 모든 상황들, 영향들이 죄다 멋없게 느껴진다. 멋이 없어 흥미도 없다. 그저 그뿐이다. (이에 대해 나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면 사석에서 뜨끈한 국물에 소주 한 잔 하는 걸로 하자)
하여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행여 다수의 대중들, 혹은 이 글을 읽는 당신의 인식 속에서 ‘쇼미더머니’가 현재 한국의 힙합 전체와 동일시되고 있거나 혹은 이를 대표하는 존재로 여겨질지언정 정작 현실세계에서 ‘한국힙합’은 그 바깥에도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곳에서 여전히 의미심장한 움직임들이, 훌륭한 음악적 성취들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난 늘 그곳에 관심이 있고 거기서 벌어지는 일들에 촉각을 세운다. 그리고 바로 거기, ‘제리케이(Jerry.k)’라는 음악가가 있다.
[Soul Company / 아에이오우 어? (feat. Kebee, Jerry.k, Makesense, MC Meta, Planet Black, The Quiett, 최적화)] (2004)
‘제리케이’를 이야기하기 위한 첫 단추는 당연히 레이블 ‘소울컴퍼니(Soul Company)’다. 2004년, 컴필레이션 앨범 [The Bangerz]와 함께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낸 이 레이블은 2011년에 해체되기까지 ‘더 콰이엇’, ‘화나’, ‘키비’, ‘마이노스’, ‘랍티미스트’, ‘펜토’, ‘매드클라운’, ‘크루셜스타’ 등 쟁쟁한 아티스트들을 배출하며 큰 사랑을 받았고 한국 힙합의 역사에 크고도 진한 흔적을 남겼다. 한국 언더그라운드 힙합의 시작을 논하면서 ‘마스터플랜’을 빼놓을 수 없듯 언더그라운드 힙합이 본격적으로 성장하고, 대중들과 교감하며 파이를 키워가는 2000년대 중후반기를 이야기할 때 반드시 언급되어야 할 이름, 제리케이는 바로 이 레이블의 시작과 끝을 함께한 핵심 멤버였다. 그는 솔로 아티스트로, 또 ‘메익센스(Makesense)’와 결성한 듀오 ‘로퀜스(Loquence)’의 멤버로 종횡무진 활약하며 ‘소울컴퍼니’의 역사 내내 줄곧 레이블을 대표하는 얼굴 중 하나였다.
Jerry.k(제리케이)
2004년 첫 EP [일갈(一喝)]을 온라인에서 무료로 공개하면서 솔로아티스트로서의 행보를 시작했다. (이 음반은 이후 2006년에 몇 곡의 신곡, 리믹스를 포함해 정식 발매되었다) ‘소울컴퍼니’ 레이블의 음악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감성적인 힙합’이라 회자되었던 반면, 그의 음악은 붐뱁이나 하드코어에 기반을 둔 묵직한 사운드와 함께 공격적, 비판적인 가사로 레이블의 또 다른 면을 보여주는데 이는 당시 그가 속해있던 그룹 ‘로퀜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때부터 보여진 독설가적인 면모는 현재까지 이어지는 그의 커리어 전체를 꿰뚫어 일관되게 유지, ‘현실 참여적 음악가’로서의 제리케이의 캐릭터를 설명하는 특징적인 요소가 되고 있다.
[제리케이 / 발전을 논하는가 (Break: 바닥까지 떨어져라) (2004)
“내 랩은 시보다는 웅변에 가깝다”
2008년, 현재도 여전히 그의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로 꼽히는 첫 번째 정규작 [마왕]이 발표된다. ‘인간성’을 위협하고 타락시키는 모든 것을 ‘마왕’으로 규정하고 사회구조, 정치, 교육 등 다양한 이슈들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내며 특유의 날이 바짝 선 날카로운 메시지들을 쏟아내는 작품이다. 일반적으로 랩을 ‘시’에 비유하지만 제리케이는 이런 자신의 음악에 대해 차라리 ‘웅변’에 더 가깝다 말한 바 있는데 실제로 그의 가사는 종종 그저 비판적인 것 이상으로 ‘선동적’인 뉘앙스마저 풍기며 부당한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껍질을 깨라 외치는 것처럼 들린다. (이러한 특유의 성향으로 이후 정치 팟캐스트의 시초와도 같은 프로그램 ‘나는 꼼수다’의 로고송을 부르기도 했다)
“미끄럼틀을 보며 삼각함수를 읊어대고
영어단어를 붙여놨지 심지어 물병에도
미술대회 피아노 대회 또 웅변회도 휩쓸면 그 한마디
역시 특별해 넌“
– [마왕] 수록곡 ‘아이들이 미쳐가(The Kids Go Crazy)’ 中
<제리케이 / 마왕> Cover Artwork
2011년, ‘소울컴퍼니’가 마침내 그 다사다난했던 히스토리의 마침표를 찍고 해체한 후 2012년, 그는 1인 레이블 ‘Daze Alive(데이즈얼라이브)’를 설립했다. 같은 해 초에 발표한 ‘연애담’ EP가 비교적 가벼운 터치로 연애의 다양한 면들을 조명하며 기존의 제리케이의 음악과는 결을 달리하는 모습을 보여줬던 반면, 연말에 발표한 두 번째 정규작 [True Self]에서는 특유의 사회비판적 메시지와 더불어, 본인의 내면을 탐구하는 깊이 있는 자아성찰을 함께 담아내며 호평을 받는다. 이 앨범은 제 10회 한국대중음악상에서 최우수 랩/힙합 음반 부문에 노미네이트되기도. 또한 이 시기의 제리케이를 이야기하며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시국선언’이다. 2009년부터 2012년까지 MB 정부가 대선 승리 등을 목적으로 여론조작에 국정원, 국군사이버사령부 등을 동원한, 이른바 ‘국정원 댓글조작 사건’이 불거지자 랩으로 만든 시국선언문을 공개하며 민주주의를 침해하는 국가권력의 부당함을 통렬하게 비판한다. 제리케이는 이 시기에 이 문제를 음악으로 다룬 거의 유일한 음악가였으며 바로 그런 점이 한국 힙합씬에서의 제리케이의 존재 가치를 단적으로 설명한다. (한편 이 노래는 그를 부정적으로 칭하는 호칭 중 하나인 좌리케이의 탄생배경이기도 하다)
[제리케이 / 시국선언] official M/V (2013)
“제일 무해한 랩을 하는 제일 악명 높은 크루” Daze Alive의 탄생
2013년 여름, 여성 래퍼 ‘슬릭(Sleeq)’과 알앤비 보컬리스트 ‘리코(Rico)’가 레이블에 합류하면서 ‘Daze Alive’는 더 이상 1인 레이블이 아니게 되었다. 이후 2015년에는 ‘던말릭(Don Malik)’이 합류, 현재의 로스터를 갖추게 된다. 이제 그는 어엿한 레이블의 수장, 그리고 후배 음악가들의 멘토의 역할까지 겸하게 되면서 본인 커리어의 새로운 막을 본격적으로 열게 된다. ‘슬릭’, 그리고 ‘던말릭’은 제리케이와 마찬가지로 트렌드를 좆기보다는 리리시즘(Lyricism)에 바탕을 두고 자신의 철학, 애티튜드를 음악에 담으려 노력하는 음악가들이라는 점에서 ‘데이즈 얼라이브’ 레이블의 색깔에 꼭 맞는, 최적의 조각들임에 틀림없다.
[슬릭 & 던말릭 @ MIC SWAGGER Season 2] (2016)
“중요해 팔리는 노래, 더 중요한 건 누굴 살리는 노래”
여전히 여성혐오의 정서가 잔재하는 ‘힙합’이라는 바운더리 안에서 ‘슬릭’은 스스로를 ‘헬라 페미니스트’라 지칭하며 씬의 여성혐오 정서를 신랄하게-매우 명료한 딜리버리로-디스한다.
한편 윗잔다리 싸이퍼 출신의 래퍼 던말릭은 96년생이라는 것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 경악스러울 정도로 여유로우며 또 유려한 플로우의 리튼 프리스타일을 선사한다.
[리코 / Paradise] official M/V (2017)
슬로우잼 아티스트로 알앤비 팬들에게 이름을 알린 [The Slow Tape] 에라를 지나 자신의 음악세계를 한 차원 확장한 리코의 컴백 싱글. 개인적으로 올해 최고의 알앤비 트랙 중 하나.
오는 12월 초에 정규 2집 [White Light Panorama]의 풀버젼을 음원으로 공개할 예정이다.
한편 ‘데이즈얼라이브’ 설립 이후부터의 제리케이는 정말 ‘쉴 새 없이’ 작업물을 선보이며 소위 ‘허슬러’적인 면모를 보여주는데 인터넷에서 그의 디스코그래피를 검색해보면 2012년부터 현재까지 그가 발매한 음원, 음반의 양이 상당함을 확인할 수 있다. 2014년의 정규 3집 [현실, 적], 그리고 2016년의 정규 4집 [감정노동]은 이 기간 그의 창작활동을 대표하는 결과물들로 제리케이의 음악이 여전히 현실(현재의 대한민국) 위에 발을 딛고 서있음을, 자신이 속한 세상의 불편한 진실들을 정면으로 마주하며 치열하게 고민하고, 여전히 비판의식을 날카롭게 벼리고 있음을 증거한다.
[제리케이 / 다 뻥이야] (official MV) (2014)
3집 [현실, 적]에 수록된 이 트랙은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고 권력과 자본의 노예로 타락해버린
한국의 기성언론들을 락킹한 비트 위에서 신랄하게 조롱하고, 또 질타한다.
“Ferguson의 SNS는 인생의 낭비라는 말로 날 욕먹게 만든 반면
Ferguson Brown의 죽음* 미국 래퍼들이 거기에 모여드는 장면
표현의 자유 온갖 종류의 차별 그 무엇 하나도 넌 관심 없잖어”
– [감정노동] 수록곡 ‘Studio Gangstas’ 中
특히 4집 [감정노동]은 제리케이의 디스코그라피를 통틀어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는 앨범인데 이 앨범에서는 특유의 날카로운 메시지를 표현하는 방식, 또 이를 담는 그릇인 사운드 프로덕션 모두 한 단계 스텝업하는 동시에 이 두 가지의 조화 역시 그의 커리어를 통틀어 최고의 수준에 이르렀다-는 인상을 준다. 유연하게 완급을 조절하는 랩과 사운드의 조화로운 구성은 음악에의 몰입도를 한층 높인다.
[제리케이 / #MicTwitter] official MV (2016)
4집 [감정노동]의 백미 중 하나인 이 트랙은 트위터 헤비유저로 익히 알려진 ‘트잉여’ 제리케이가
트위터의 형식을 빌려 140자 이하의 벌스 7개를 엮은, 독특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날카로운 위트가 번뜩이는 가사들을 트위터 화면을 통해 텍스트로 나열하는 비디오 역시 흥미롭다.
[제리케이 / 콜센터 (feat. 우효)] official MV (2016)
“우리 기분은 아무도 묻질 않아”
제 14회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랩/힙합 노래’ 부문에 노미네이트된 이 곡은
콜센터 직원의 고단한 일상을 묘사하며 ‘감정노동’이라는 앨범의 주제의식을 또렷하게 드러낸다.
[감정노동] 이후 잠시 숨을 고른 제리케이가 2017년 11월, 이전 앨범으로부터 약 20개월 만에 공개한 새 앨범이 바로 [OVRWRT]이다. 총 열 트랙을 수록하고 있는 이 앨범에 대해 제리케이 본인은 정규 5집이 아닌 4.5집 개념의 ‘비정규’ 앨범이라 설명하고 있다. ‘덮어쓰기(Overwrite)’라는 타이틀은 과거의 자신을 부정하며 단절시키기보다는 과거의 모습들도 있는 그대로 감싸 안으며 그 위에 새로운 나를 덮어써 ‘업데이트’하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다수의 수록곡을 본인이 프로듀싱, 비트메이커로서 진일보한 모습을 보이는 동시에 국내외 다양한 비트메이커들과도 작업한 이 앨범은 사운드 프로덕션의 측면에서 전작 [감정노동]을 상회하는 만듦새를 보여준다. 한편 다양한 스타일의 트랙들을 소화하는 제리케이의 랩 역시 스킬, 표현 방식 모든 면에서 더욱 발전, ‘래퍼’ 제리케이도 여전히 진화하고 있음을 느끼게 한다.
<제리케이 / OVRWRT> Cover Artwork
앨범 타이틀과 동명인 인트로 격의 오프닝 트랙 ‘OVRWRT’은 제리케이 본인이 프로듀스한 매끈하고 감각적인 비트 위로 촘촘하게 라임을 배열하며 2017년 현재의 ‘제리케이’가 어떤 상태인지 이야기하는 동시에 여전히 자신의 포지션을 굳건하게 지키고 있는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과 자신감을 드러낸다. 열렬한 레드벨벳의 팬으로 알려진 그답게 레드벨벳의 노래 ‘빨간 맛 (Red Flavor)의 가사를 슬며시 인용한 부분이 재미있다.
<레드벨벳 / 빨간 맛 (Red Flavor)> Unofficial Remix by 제리케이
단순 덕심으로 만들었다고 하기엔 지나치게 고퀄. ㅇㅇ
“어이 내가 위선자냐 그럼 넌 뭔데
위선자라고 치자 넌 왜 그 정도도 못 해
적어도 난 선이라는 선 위에 서 있으려 노력해
선이란 건 없단 놈들의 면면은 눈 뜨고 볼 수 없네”
– [OVRWRT] 수록곡 ‘아이봉 (アイボン)’ 中
이어지는 ‘아이봉’은 랩과 비트 모든 면에서 앨범에서 가장 공격적인 트랙이다. 자신과 레이블에 부정적인 시선과 태도를 취해온 이들에게 ‘우리가 이야기하는 불편한 진실은 너희 신경을 긁지’라 얘기하며 다양한 각도에서 그들을 향한 비판과 조소를 날린다. 자신이 택한 길에 대한 당당함과 자신감의 표출은 이 트랙에서도 이어진다.
[제리케이 / 아이봉 (アイボン)] Lyric Video (2017)
알앤비 보컬리스트 ‘호림(Horim)’이 피쳐링한 트랙 ‘Mercy’는 개인적으로 앨범의 베스트 트랙으로 꼽고 싶은 곡이다.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가스펠적인 코러스가 인상적인 이 곡에서 제리케이는 그저 한 사람의 인간으로서 겪게 되는 내적인 고뇌를 은유적으로 노래한다.
[제리케이 / Mercy (feat. Horim)] Lyric Video (2017)
레이블 동료 ‘던말릭’의 랩, ‘슬릭’의 코러스, 그리고 제리케이의 애견 ‘사자’도 슬쩍 목소리를 보탠(?) 트랙 ‘알약’은 전자음악가인 ‘퍼스트에이드(FIRST AID)’가 주조한 몽롱한 바이브 가득한 비트가 인상적이다. 퍼스트에이드 특유의 따스한 질감의 비트 위로 서늘한 무드를 조성하는 슬릭의 코러스가 어우러져 어딘지 현실을 벗어난 것만 같은 독특한 인상으로 다가온다.
쉽지 않은 길을 걸으며 겪는 현실적 갈등과 고충을 솔직히 고백하는 ‘Can We Dance’, 제리케이와 슬릭 각자의 내면의 갈등을 투영하는 관조적 분위기의 트랙 ‘걸리버’를 지나 이어지는 ‘New New’, 그리고 ‘리짓군즈’의 새 멤버 ‘재달’이 피쳐링한 ‘PM 2.5’는 앨범을 통틀어 가장 트렌디한 감각을 담은 트랙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섯 해가 지나가는 많은 이의 최애곡이 나는 이젠 창피해”
– [OVRWRT] 수록곡 ‘New New’ 中
트랩 비트를 기반으로 보컬과 랩의 경계를 넘나드는 퍼포먼스를 선보이는 이 두 트랙 중 특히 ‘New New’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새롭게 하고 싶다고 외치는, ‘덮어쓰기’라는 앨범의 타이틀이 지닌 주제의식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곡이다. “다섯 해가 지나가는 많은 이의 최애곡”은 본인의 2012년 싱글 ‘You’re Not A Lady’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 곡에서의 본인의 맨스플레인적 스탠스가 무지에서 비롯된 과오임을 순순히 인정하고, 동시에 이런 ‘어제의 나를 업데이트한 오늘의 나’가 되리라 이야기한다. 바로 이런 지점이 제리케이의 진면목이기도 하다. 끝으로 클로징 트랙인 ‘셰셰셰 (Yes Yes Yeah)’는 앞서 지난 5월에 본인의 결혼 2주년을 기념하고 자축하고자 선보였던 즐거운 바이브가 듬뿍 담긴 펑키 그루브의 곡. 다양한 감정, 속내를 표출하는 이 자전적인 성격의 앨범에서 마지막 트랙이 이 곡이라는 것은 어쩐지 의미심장하다. 그는 이 같은 트랙 배열을 통해 이런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난 여전히 괜찮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여전히 내 자리에 잘 서있다고.” 비록 자신이 걸어온 길이, 또 앞으로 걸어갈 길이 가시밭길이었고, 또 여전히 가시밭길일 것임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즘으로 마케팅하는 제리케이.”
제리케이를 폄하, 비방하는 몇몇 논리들 중 가장 납득할 수 없는 한 가지를 꼽자면 바로 이거다. 그래서 익명의 그 누군가들에게 되려 되묻는다. [일갈], [마왕], [감정노동] 등을 거치며 무려 14년이라는 긴 시간을 지속해온 제리케이의 커리어를 통틀어 그가 정치적, 사회적으로 ‘올바름’을 추구하지 않은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나? 게다가 과연 힙합이라는 카테고리 내에 존재하면서 페미니즘을 팔아먹는 것은 정말 유용한 마케팅의 방법일까? 우리 제발 솔직해지자.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우린 이미 충분히 봐오지 않았나.
온갖 혐오가 만연한 시대, 불편한 진실을 이야기하면 그래서 불편한 사람으로 취급 받는 시대, 올바름, 선을 추구하면 되려 이상한 사람, 관종 취급을 받는 이상한 시대다. 이런 시대의 한복판에서 우직하게 자신의 스탠스를 고수하며 자신의 목소리를 내온 그의 태도는 마케팅은 커녕 되려 ‘적’의 숫자만 늘리기 딱 좋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지점이 제리케이가 한국 힙합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그리고 여전히 필요한 이유가 된다. 비록 그는 가장 최신의 힙합을 하는 래퍼도, 혹은 가장 랩을 잘하는 래퍼도 아닐지 모르지만, 그가 추구해온 태도가 힙합이라면 반드시 담보해야 할 ‘정답’ 또한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까지 치열하게 시대정신을 리리시즘 안에 녹여내고 노래할 수 있는 래퍼는 여기 대한민국 안에서 매우 희귀하니까. ‘이 씬의 유일한 독립변수’ 제리케이의 가치는 바로 거기에 있다.
Editor / 김설탕
sugarules@poclanos.com
(‘Deep Inside’ 코너의 모든 글은 에디터의 개인적 주관을 반영한 것으로 본사의 공식적인 입장과는 일절 무관합니다)
각주
* 2014년, 미주리주 퍼거슨시에서 경찰이 무고한 흑인 ‘마이크 브라운’을 편의점 강도로 오인해 총격 사살한 사건. 이를 계기로 #BlackLivesMatter (흑인의 생명은 소중하다) 캠페인이 본격화되었고 다수의 흑인 음악가들이 이 캠페인에 적극적으로 참여, 대중들에게 흑인사회의 메시지를 전파하는 역할을 자처했다.
미니멀리즘이 유행처럼 번지던 때는 꽤 지났다. 의도적으로 맥시멀리즘을 좆는 이도 종종 보이는 요즘이다. 음악도 마찬가지 아닐까. 빈틈없이 메워진 3분 가량의 트랙에는 온갖 악기로도 모자라 더 많은 가창, 더 많은 피쳐링, 더 많은 콜라보를 다투듯 싣곤 하니 말이다. 뮤지션들 간의 활발한 교류와 음악의 다채로움은 늘 반갑지만, 어딘가 속 빈 강정과 같은 연말이 다가올 땐 여백에 충실한 음악이 그리워지기도 한다.
이번 편에서는 여백이 두드러지는, 느리고 따뜻한 여섯 개의 앨범을 소개한다.
강태구 <그랑블루 / 내 방 가을>
‘자연의 송가’라는 것이 있다면, 아마 그건 강태구의 음악일 것. 늘 자연에 기대어 유한함과 고독을 노래하던 그가 <그랑블루 / 내 방 가을>로 돌아왔다. 언제 들어도 각 트랙 속 배경이 그려지는 입체감 넘치는 가사는 여전하고, 압도적인 몰입감의 깊고 짙은 중저음 보컬 역시 한결같다. 조금씩 파고를 높이는 밀물처럼 더해지는 가사들과 그 뒤 잔물결처럼 이는 기타 소리, 서글피 울리는 바이올린 소리가 멎으면 은은하게 울려퍼지는 하울링이 담긴 ‘그랑블루’. 기교없이 담백한, 한국 정통 포크의 미감을 담은 ‘내 방 가을’. 11월 23일 음반으로 발매되는 강태구의 첫 앨범이 너무도 궁금해진다.
시와 <완벽한 사랑>
그 누구도 완벽한 사랑의 무게나 생김새를 알려준 적 없었다. 아마 그것은 ‘앎’의 영역 밖의 것이 아닐까. 그저그런 사랑에도 젬병인 이 세상에서 완벽한 사랑을 꿈꾸는 것은 곧 욕심이요, 망상이니 싶다가도, 간절히 무지개를 좇는 아이마냥 완벽한 사랑을 갈구하는 시와의 목소리를 들으면, 그 어딘가 아직 내가 디디지 않은 곳에 완벽한 사랑이 있을 것이라 믿고 싶다.
Needle&Gem <34N125E>
에릭 홀로 이끄는 Needle&Gem의 두 번째 싱글 <34N125E>. 귀를 스치는 모든 요소 하나하나들은 뽀얗고 무거운 어딘가에서 부유하고 있을, 오늘도 심연 속에서 숨 쉬는 이들을 위한 것. 그들의 깊은 침묵의 시작과 함께 항해를 멈춘, 가슴 저 아래에 고이 덮어둔 작고 고귀한, 어떤 마음을 간질이는 트랙.
사람또사람 <이유는 없다고 했어>
포크 팝 듀오 사람또사람은 간혹 계절 별미와 같은 의외의 싱글들을 발매하고는 한다. 슈게이징에 가까운 몽환적인 ‘우주’가 그랬고, 올망졸망한 신디사이저 사운드가 별처럼 쏟아지는 ‘리셋버튼’이 그랬다. 심심한 도입부를 지나 심장 박동 소리를 연상케하는 구간에 이르면 ‘우주’와 ‘리셋버튼’을 처음 들었을 때의 놀라움 비슷한 무언가가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한다. 아무 이유 없이 이별을 통보 받은 오건훈의 이야기는, 또 이토록 아름답게 승화되어 우리의 귀에 울리게 되었다.
홍갑 <감기>
일상이 아닌 이야기를 하는 뮤지션이 어디 있을까 싶을 정도로 소소함 가득한 음악들이 넘쳐나는 요즘이다. 그 중 ‘일상적임’의 갑을 꼽자면 당연 홍갑이다. 이번에는 감기다. 감기에게 말을 건네는 듯한 이 귀엽고 앙증맞은 전개는 홍갑 특유의 미소년스러운 보컬을 더욱 앳되게 만들고, 트랙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지배하는 어떤 권태로움은 그 누구도 당해내지 못할 정도로 단연 압도적이다.
김사월 <7102>
김사월의 음악은 늘 감탄스럽고, 어렵다. 전혀 몽환적일 것 없는 악기로 몽환을 만들고 맑은 보컬로 퇴폐를 완성하는 그녀 음악의 메커니즘도 어려웠지만, 문학적 상상력이 뛰어나지 않은 나로서는 그녀가 사뿐사뿐 내뱉는 가사도 어려웠다. 이것들이 그토록 어려웠던 까닭은 김사월의 라이브를 단 한 번도 제대로 본 적 없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7102>를 들으며 떠올랐다. 단 한 번도 한 공간에서 소통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어려웠던 것이다. 그녀가 노래할 때의 표정과 제스처를 본 적 없기 때문에, 노래가 끝나고 나서의 그 수줍은 감사를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깔끔한 믹싱으로 가공된 음원만 붙들고 ‘소통’을 기대했던 나 자신이 민망해지던 앨범. 정말 오랜만에 만나보는 그녀의 신곡들로 가득 채워진 <7102>에서, 나는 또 그렇게 새삼 깨닫고 감탄한다.
차가운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아티스트들이 기지개를 피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 가을부터 주목해야 할 앨범들의 발매가 쏟아지기 시작해 하루하루가 놀라울 정도인데요. 지난 한 달 포크라노스는 실리카겔, 제리케이, 위아더나잇, 홍갑, 송은지, 김오키, 설경, 새소년, 레이지본, 좋아서하는밴드, 피터팬 컴플렉스, 코가손, 우주히피.. 와, 정말 어마어마한 앨범들을 발매했네요.
포크라노스는 그중에서도 최근 특히 눈에 띄는 장르인 모던록, 알앤비, 댄스, 일렉트로닉 부문에서 활약 중인 몽니(Monni), 리코(Rico), KIRARA(키라라), 예서(YESEO)에게 지난 한 달 어떤 음악을 들었는지 물었습니다. 지금 여기에 네 팀의 추천곡들을 소개합니다. 이 곡들을 듣고 난 후 만나는 이들의 앨범은 이전보다 더 즐거운 음악 경험이 될 것입니다. 새로운 곡들, 그리고 여전히 챙겨 듣게 되는 이들의 지난 앨범들, 그리고 추천곡들까지 챙겨 듣다 보면 어느새 금방 겨울이 도착해 있을 것 같네요.
몽니(Monni)
몽니 / Analog Melody (2017.10.30)
앨범명에서 드러나듯 아날로그 감성을 그대로 담은 몽니의 새로운 EP에는 멤버 전원이 곡 작업에 참여해 각자의 감성을 드러냈습니다. 공태우와 정훈태가 각각 작곡과 작사를 맡은 ‘다 괜찮다’는 “딸 바보 송”으로 등극한 김신의 작곡, 작사의 ‘너와 너’와 마지막까지 선공개 여부를 정하지 못 했을 정도로 어느 한 곡도 매력적이지 않은 곡들이 없다는 후문! 이인경의 팬이라면, 외롭고 고독한 사랑 이야기를 애절하면서도 화려한 악기 편성으로 그려낸 ‘길 없는 거리’에서 숨막히는 경험을 하게 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앨범 수록곡들의 개성만큼이나 각 멤버의 추천곡들도 각자의 색깔이 드러나 더욱 듣는 재미가 있는 몽니의 추천곡들입니다. 곡과 함께 보내온 멤버들의 이야기를 통해, 각자가 가진 음악에 대한 생각과 이번 작업을 하며 느꼈을 감정을 상상해볼 기회가 될 것 같네요.
추천의 추천의 추천: 몽니가 추천합니다.
Coldplay – Amazing Day
“음악을 듣는 분들에게 늘 ‘진실함’과 ‘사람’이 느껴지는 음악으로 다가가고 싶다. ‘Amazing Day’를 추천하는 이유이다. 모두 비슷한 삶을 살아가지만, 그 속에서 찾을 수 있는 행복, 그리고 즐거움을 꿈꾸게 하는 곡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김신의)
Rachael Yamagata – Miles On A Car
“이번 EP 작업을 하며 레이첼 야먀가타의 [Chesapeake] 앨범을 많이 들었다. 그 중에서 ‘Miles On A Car’라는 곡을 많이 들었다. 많이 울다 힘이 다 빠진 사람처럼 조금은 담담히 들리는 전주부터 가사를 전달하는 목소리까지 애절하게 전해지는 감성이 돋보이는 곡이다.” (정훈태)
Au Revoir Simone – A Violent Yet Flammable World
“이번 EP 수록곡 ‘길 없는 거리’라는 곡을 작업할 때 데이빗 린치(David Lynch) 감독의 ‘트윈 픽스’라는 작품을 자주 봤다. 난해하고 컬트적인 매력으로 유명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작품에 삽입된 OST들에 매료되었다. 특히, 시즌 3은 매 에피소드 끝에 밴드들이 나와 라이브를 하는 장면으로 마무리되는데 그 중에서 제일 좋아했던 곡이다.” (이인경)
Jet – Shine On
“작곡으로 참여한 ‘다 괜찮다’의 분위기와 잘 맞을 것 같다고 생각해 제트의 빈티지한 사운드를 들으며 연구했다. 그의 곡 중 ‘Shine On’이라는 곡을 추천 드리고 싶다.” (공태우)
윤기타 – 우리의 여름
“제가 평소 좋아하는 곡이기도 하고, 가사를 곱씹으며 들어보면 노래에 담긴 그리움과 담담함이 더욱 잘 전해지는 곡이다. 노래가 끝날 무렵 쓸쓸해지는 감정은 깊은 여운을 남기는 노래인 것 같다.” (공태우)
첫 정규 앨범 [The Slow Tape]으로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알앤비/소울 앨범 및 노래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었던 리코의 2년 만의 정규 2집은 두 파트로 나뉘어 있습니다. 그 첫 파트가 지난 8월 음원으로 공개된 [WHITE LIGHT]고, 한 달여의 간격을 두고 공개된 두 번째 파트가 [Panorama]입니다. 한결 확장된 음악적 스펙트럼을 펼쳐낸 이번 앨범은 트랩 소울, 퓨처 알앤비 등 트렌디한 사운드 위에, 저음의 랩에서 팔세토까지 리코의 다양한 시도가 엿보이는데요. 앨범의 총괄 프로듀서 역할을 맡은 던말릭(Don Malik)부터 작사와 디렉팅으로 참여한 슬릭(SLEEQ), 제리케이(Jerry.K) 등 DAZE ALIVE 동료들의 참여로 한층 여러 색으로 빛나는 리코의 매력을 그대로 담았습니다.
리코가 보내온 추천곡 리스트에는 그가 한 번도 질려본 적이 없을 정도로 팬이라는 사실을 밝힌 디안젤로부터 최근 푹 빠진 뮤지션들까지, 리코의 앨범만큼이나 다양한 색의 알앤비를 느낄 수 있습니다. 리코의 음악적 취향의 정수가 담긴 플레이리스트와 함께 한층 더 깊은 리코의 음악 세계를 느껴보시길 바랍니다.
추천의 추천의 추천: 리코(Rico)가 추천합니다.
D’Angelo – Cruisin’
“제가 가장 좋아하는 아티스트에요. 그 중에서도 가장 좋아하는 곡입니다. 단 한 번도 질려본 적 없는 곡.”
Rahsaan Patterson – So Fine
“최근 저에게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아티스트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이 곡도 정말 좋지만, 이 곡이 수록된 앨범 전체가 정말 감동 그 자체.”
Ty Dolla Sign – R&B
“제가 타이 달라 사인에게 빠진 된 계기를 만들어준 곡입니다. 왠지 모르게 처음 시작되는 멜로디 라인이 저를 가슴 벅차게 만들어요.”
Jagged Edge – He Can’t Love U
O’Ryan – Anything
Usher – Confessions Pt. 2
“2000년대 알앤비의 느낌을 가장 좋아합니다. 음악 활동을 하는 동안 가장 많이 들어왔고 영향도 많이 받았었죠.”
Ro James – Already Knew That
“곡 전체의 느낌과 보컬 사이에서 느껴지는 모순적인 매력이 있다고 생각해요.”
6lack – Free “무심한 듯 뱉어내는 멜로디 라인과 차분한 곡의 느낌이 너무 좋습니다.”
Tone Stith – Mo Freaky
“올드스쿨 알앤비에 현대적인 감성이 들어간 정말 멋진 곡이라고 생각합니다. 매력적인 보컬은 말할 것도 없고요. 최근 정말 좋아하게 되어 많이 들은 곡이에요.”
–
KIRARA(키라라)
KIRARA(키라라) / KM (2017.09.03)
정규 2집 [moves]로 2017년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수 댄스&일렉트로닉 음반 부문을 수상하며 큰 주목을 받은 일렉트로닉 뮤지션 키라라의 새로운 앨범은 총 14개 트랙이 2 CD에 담긴 리믹스 컴필레이션입니다. 단편선과 선원들, 신해경, 파블로프, 코스모스 슈퍼스타 등 인디 신에서 주목받는 뮤지션들의 곡들을 키라라가 리믹스해 인디 음악 팬들에게도 큰 관심을 받았죠. 대부분의 수록곡은 수년간 키라라가 공연을 통해 선보여왔던 것으로, “키라라는 예쁘고 강합니다. 여러분은 춤을 춥니다”라는 캐치프레이즈와 함께 시작하는 라이브를 통해 이미 알음알음 알려진 트랙들이기도 합니다.
[KM] 커버에도 등장한 홍대 한잔의 룰루랄라에서의 첫 단독공연 이후 몇몇 국내 공연, 그리고 프랑스에서의 공연 일정 이후로 키라라는 당분간 공연 휴식기에 들어간다는 소식입니다. 라이브에서 그 진수를 만날 수 있는 키라라이기에 올해 안에 그녀의 공연을 한 번 (더) 보고 싶다면, 지금 당장 스케줄을 체크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공연장에 가기 전 키라라의 앨범부터 추천곡들까지 미리 경험하고 간다면, 공연의 즐거움은 2배가 될 거란 점!
추천의 추천의 추천: 키라라가 추천합니다.
Handbraekes – Bravo
“Handbraekes는 Boys Noise와 Mr. Oizo 두 사람의 프로젝트 유닛이다. Boys Noise는 정말 멋진 음악가고, Mr. Oizo는 정말 이상한 음악가인데, 이 음악은 정말 멋지고 이상한 댄스음악이다. 곡 제목의 의미가 무엇인지,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전혀 알 수 없다. 그런 것이 좋다.”
Max Cooper – Order From Chaos
“막스 쿠퍼는 작년에 내가 공연하러 갔던 프랑스 리옹의 뉘 소노르(Nuits Sonores) 페스티벌에서 알게 된 음악가인데, 공연을 본 이후로 바로 반해서 음악을 찾아 들었다. 소리의 텍스처란 얼마나 무궁무진한 세계인지를 여실히 깨닫게 해주는 이 음악가는 항상 나의 믹싱이 비참하게 느껴지도록 만드는 음악가이기도 하다.”
Tiga – Plush
“나는 티가가 정말 섹시한 전자음악을 만드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섹시한 음악을 만들고 싶어 하는데, 내가 구사하는 음악의 문법 안에서 그걸 어떻게 할 수 있을지 그나마의 해답을 제시해준 고마운 음악가이기도 하다. 섹시해지고 싶다.”
Elton John – Goodbye Yellow Brick Road
“좋은 것이 좋은 것 같다. 이 완벽한 발라드와 함께 하는 청승이라면 정말 완벽한 청승이라고 생각한다. 삶의 그 어떤 순간을 드라마틱하게 만들 수 있는 놀라운 힘이 있는 음악이다.”
Rage Against The Machine – Killing In The Name
“이 명곡이 요즘 내가 가장 많이 듣는 음악이다. 아주 직관적이고 명확한 메시지를 주고 있는 음악이라서 좋다. 나는 평소에 항상 남 기분에 맞추어 나의 욕심을 버리고, 사소한 일 하나하나까지 거절을 잘 못 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는데, 이 노래에서 후반부에 반복되는 “Fuck you, I won’t do what you tell me” 부분을 들으면서 내 인생에서 얼마나 싫은 걸 싫다고 말해왔었는지를 반추해보곤 했었다.”
–
예서(YESEO)
예서(YESEO) / Million Things (2017.07.30)
예서만큼 활발히 앨범을 내고 공연하는 뮤지션은 쉽게 찾기 힘들 것 같습니다. 지난 7월 EP [Million Things]에 이어 11월에도 새로운 EP를 공개 예정인 그녀는 그사이에 단독공연마저 치러냈는데요. 프로듀싱, 작사, 작곡, 편곡까지 모두 직접 해내며 일렉트로닉 신에서 가장 주목 받고 있는 여성 프로듀서입니다. 예서는 얼마 전 포크라노스의 첫 번째 컴필레이션 앨범 [EMERGING]에도 등장했습니다. 새소년, 실리카겔, 위아더나잇, 사비나앤드론즈 등 함께 참여한 아티스트 라인업만 봐도, 현재 음악계에서의 그녀의 존재감이 실감 납니다.
한국에서 활동하기 시작한 아티스트임에도 해외 매체에서 먼저 주목했을 정도로 남다른 감각을 보이는 예서의 플레이리스트에서 그녀의 음악적 취향을 만나는 기회에서 나아가 새로운 아티스트, 또 유명한 아티스트이지만 그간 발견하지 못 했던 면을 경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예서의 추천곡들과 함께 곧 발매될 새 EP를 기다리는 것도 분명 즐거운 시간이 될 듯합니다.
추천의 추천의 추천: 예서(YESEO)가 추천합니다.
Sam Smith – Restart
“최근에 가장 많이 들었던 곡입니다. 샘 스미스를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는 가사가 너무 좋아서인데, 이 곡은 전개되는 멜로디 라인들이 하나도 버릴 것 없이 너무 완벽해서 들으면서 감탄했던 곡입니다.”
H.E.R. – 2
“너무나 좋아하는 아티스트입니다. 가장 최근에 나온 신보인데 H.E.R.의 모든 곡을 좋아하지만, 곡이 나올 때마다 모두 연계성을 지니면서도 새로운 느낌을 동시에 받아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하는 아티스트입니다.”
DMEANOR (ft. Kwamie Liv) – Fool For Loving
“국내 아티스트의 신보들을 듣다가 알게 된 곡인데, ZAYN과 같은 느낌을 국내 아티스트에게서 받은 건 처음이었습니다. 특히, 후렴구의 멜로디와 이펙팅, 편곡 모두 너무 세련됐다고 생각하는 곡입니다.”
Sabrina Claudio – Confidently Lost
“굉장한 탤런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아티스트입니다. 좋아하는 곡들이 많지만, 그중에 처음 이 곡으로 사브리나 클라우디오를 알게 되었습니다. 목소리의 힘과 콘셉트, 곡의 완성도까지 앞으로 나올 곡들도 무척이나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소라 – Track 8
“가장 좋아하는 아티스트 중 한 분입니다. 항상 추천하던 곡은 ‘Track 9’이었지만, 최근엔 이 곡을 더 많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