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영미권 팝이나 알앤비 음악, 그것에 영향 받은 동시대 일본의 AOR이나 시티팝, 혹은 역시 비슷한 시기의 한국 대중가요 등 소위 ‘레트로’라 통칭되는 과거의 여러가지 것들이 두루 떠오르고 그만큼 복고적인 분위기가 또렷하지만 동시에 현재의 감각을 잣대로 해도 충분히 세련된 팝의 멜로디도 함께 지니고 있다.”
nokdu nokdu ep vol.1 2019.04.14
두 번째다. 지난해 가을 싱글 ‘머물러줘’를 이 코너에서 처음 소개한 이후 다시 한 번 ‘nokdu (녹두)’를 이야기하게 되었다. ‘Editor’s Pick’이라는 코너를 진행하면서 되도록이면 한 음악가를 중복으로 다루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 소소하게나마 이런 지면을 통해서라도 더 다양한 음악가들을 언급해주고 세상에 알리고 싶은 마음이 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녹두를 여기서 소개하게 되었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는 반갑고, 또 한편으로는 고맙다. 우선 주목하고 기대하는 음악가가 꾸준히 활동을 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불가항력적으로- 다시 다룰 수밖에 없을 만큼 좋은 음악을 발표해준다는 점에서.
녹두 음악의 가장 큰 매력은 아마도 그 특유의 친근하고 편안한 감성일 것이다. 레트로한 무드, 거기에 걸맞게 빈티지한 신스 사운드를 주로 활용하는 그의 음악은 기본적으로 ‘이지 리스닝’의 팝으로 어느 연령대의 누구나 편안하고 기분좋게 감상할 수 있을 법한 음악이다. 80년대 영미권 팝이나 알앤비 음악, 그것에 영향 받은 동시대 일본의 AOR이나 시티팝, 혹은 역시 비슷한 시기의 한국 대중가요 등 소위 ‘레트로’라 통칭되는 과거의 여러가지 것들이 두루 떠오르고 그만큼 복고적인 분위기가 또렷하지만 동시에 현재의 감각을 잣대로 해도 충분히 세련된 팝의 멜로디도 함께 지니고 있다.
2018년 한 해에 걸쳐 세 개의 싱글을 차근차근 발표한 이후 올해 마침내 세상에 내놓은 그의 첫 EP는 지난해 가을에 선공개했던 싱글 ‘머물러줘’를 포함해 총 다섯 곡의 노래를 담고 있다. 늘 그래왔듯 모든 곡들의 작사, 작곡, 편곡, 레코딩을 손수 다 했고 진보와 함께한 타이틀곡인 ‘그대와 둘이서’만 진보와 공동으로 작업했을 뿐이다. (이 곡은 두 사람이 처음 만난 날 함께 악기를 다루며 놀다가 나온 곡이라고 한다) 앞서 언급한 두 곡을 비롯 ‘오늘 같은 밤’, ‘can’t take my eyes off you’ 등 수록곡들 하나하나에 녹두식 레트로 팝의 매력이 여실하다. 영롱한 신스 사운드가 넘실대며 빚는 달콤한 멜로디, 팝 보컬의 정수를 제대로 보여주는 녹두의 노래, 복고풍의 코러스 라인 등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낭만적인 무드는 그야말로 ‘도시의 밤’ 그 자체로 느껴진다. 다만 마지막에 수록된 노래 ‘hanging a yellow ribbon’은 차분하고 엄숙한 어조로 정제된 슬픔을 표현, 유일하게 전체적인 분위기와는 다른 결을 보여주는데 제목에서 짐작 가능하듯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에게 헌정하는 곡이다. 3년 전 4월, 세월호 희생자들에 대한 추모의 마음으로 만들었다고.
[nokdu ep vol.1], 제목에 붙은 ‘vol. 1’이 의미하듯 그야말로 이제 막 첫걸음을 내디뎠을 뿐이건만 이미 많은 이들의 관심이 그에게 쏟아지고 있음을 느끼고 있는 요즈음이다.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꾸준히 좋은 음악을 만들고 발표해주기를 바란다. 그렇게만 해준다면 아마 멀지 않은 미래에 반드시, ‘녹두’라는 이름은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을 것이고 또 더 많은 곳에서 그의 음악을 들을 수 있게 될 거라고 믿기 때문이다.
“[Mind Web Wanderer]는 그렇게 복잡한 심연의 세계를 어떤 뚜렷한 목적 없이 떠도는 방랑자(Wanderer)의 음악이고 그 세계의 풍경은 힙합, 랩, 다운템포, 재즈, 앰비언트, 엑스페리멘탈, 다운템포, 브레이크비트 등등 다양한 요소들의 조합과 변주를 통해 음악으로 구현된다. 앞서 말했듯 예상했던 것과는 아주 많이 다른 음악, 이 세계를 처음 접한 순간이 ‘기분 좋은 충격’이었던 이유다.”
EJO Mind Web Wanderer 2019.04.13
‘에조(EJO)’라는 이름을 처음 접한 건 2017년 초, ‘김오키’의 다섯 번째 정규작 [fuckingmadness]에서였다. 첫 곡인 ‘Fuc ma dreams’를 비롯 이 앨범의 몇몇 곡들에서 기술적으로 유난히 빼어나거나 도드라지진 않지만 안정감 있고 매력적인 톤, 유연한 플로우로 곳곳에 유려한 영어 랩을 수놓는 이가 있었고 궁금해져 크레딧을 확인해보니 그게 바로 ‘에조’였던 것이다. 이때만 해도 ‘랩’을 하는 ‘외국인’ 정도로 인식하고 있던 그가 ‘헨즈’나 ‘모데시’ 등의 공간에서 디제잉을 하기도 하고 ‘김오키’나 ‘라이언클래드’ 등과 팀을 이뤄 라이브 퍼포먼스도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은 그보다는 조금 이후의 일이다. (그가 국방의 의무까지 마친 엄연한 한국인이라는 사실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2019년 초, 이승준 실장님이 ‘에조’의 정규 앨범을 곧 낸다며 맛배기로 두 곡의 데모를 먼저 들려주셨다. 이때만 해도 에조를 ‘디제잉도 하는 래퍼’ 정도로 인식하고 있던 나는 으레 랩뮤직이겠거니-하며 실장님이 보내주신 파일들을 열었고 이내 뒤통수를 세게 몇 대 맞은 거 같은 기분이 되었다. 예상했던 것과는 아주 많이 다른 음악, 그건 아주 기분 좋은 충격이었다.
그리고 4월, 에조의 정규 앨범 [Mind Web Wanderer]가 마침내 나왔다. 총 11곡, 약 40분 가량의 플레잉타임, 그 속에 담긴 내용물에 대해 ‘앱스트랙트-힙합’이라는 한 마디로 적당히 뭉뚱그려 퉁칠 수도 있을 테지만 사실 그의 음악은 그리 간단명료하게 정의내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한국, 미국, 그리고 인도를 관통하는 다채로운 지역적 배경을 지닌 에조는 다양한 문화들을 체험, 흡수하며 현재에 이르렀고 그렇게 복잡한 백그라운드를 가진 그의 내면 깊숙한 곳의 정신, 무의식의 세계 또한 마치 거미줄(Web)처럼 복잡하게 얽힌 미로와도 같다. [Mind Web Wanderer]는 그렇게 복잡한 심연의 세계를 어떤 뚜렷한 목적 없이 떠도는 방랑자(Wanderer)의 음악이고 그 세계의 풍경은 힙합, 랩, 다운템포, 재즈, 앰비언트, 엑스페리멘탈, 다운템포, 브레이크비트 등등 다양한 요소들의 조합과 변주를 통해 음악으로 구현된다. 앞서 말했듯 예상했던 것과는 아주 많이 다른 음악, 이 세계를 처음 접한 순간이 ‘기분 좋은 충격’이었던 이유다.
“다양한 지역적 백그라운드와 음악적 특색을 지닌 [Mind Web Wanderer]는 애써 해석하려고 하지 않을 때 더 잘 와 닿는다.”
– 림스타그램(limstagram) 힙합엘이 에디터
대체로 힙합 기반의, 레이드백 성향이 짙은 –그리고 종종 변칙적인- 비트 위에서 겹겹이 쌓이고, 변덕스럽게 교차하고, 중독적으로 반복되는 전자음들, 여기에 형식과 무형식, 의미와 무의미를 넘나드는 에조의 랩, 혹은 주술적 중얼거림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바이브는 마치 무의식의 세계 그 자체다. 추상적이고 자유로우며 그 어떤 내러티브도, 혹은 맥락도 존재하지 않는다. 무의식이 그렇듯 그저 흐르는 대로 흘러갈 뿐이다. 어디로든, 어떠한 제약이나 한계도 없이. 작품의 이런 성격 때문에 이 ‘Mind Web’의 세계는 ‘림스타그램’님이 공식 코멘터리에서 언급했듯 애써 이해하거나 해석하려 하기보다 단지 음악의 흐름에 자신을 맡기고 청자 스스로가 ‘방랑자’가 되어 심연의 바다를 맘껏 유영하려는 자세를 취할 때 되려 더욱 인상적인 순간들과 마주하게 된다. 동시에 바로 이런 점이 이 짧은 글에서 굳이 곡 하나하나에 대한 구체적 해석과 감상을 제공하지 않으려는 이유이기도 하다.
수록된 전곡을 직접 프로듀스하고, 가창이 있는 곡은 직접 불렀으며, 심지어 믹스까지 본인이 다 했다. 앨범이 탄생되기까지의 과정의 대부분, 그러니까 소리를 빚고, 빚어낸 소리를 다듬고 깎아내 결과물로 이행하고, 모인 결과물들을 최적의 흐름으로 배열하는, 이 모든 상황을 스스로의 역량으로 통제하면서 비트메이커, 래퍼, 프로듀서, 엔지니어로서의 역할까지 수행한 셈이다. 이 매력적인 다재다능함은 앞으로 어디로, 어떻게 더 뻗어가게 될까. 아주 오래전부터 이어져온 방랑자의 여행, 그 새로운 막이 이제 막 시작되었다.
“‘데모’라는 앨범 제목처럼 대부분의 곡들을 홈레코딩으로 직접 녹음했고 보컬 소스에 어떠한 튜닝도 가미하지 않았다. 또한 대부분의 악곡들을 기타, 혹은 피아노 정도의 어쿠스틱 악기들과 단출하게 레코딩했고 데카당 음악에선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 화성을 이용한 코러스도 곳곳에 배치하는 등 소박하면서도 최대한 ‘목소리’에 집중한 연출을 통해 진동욱 특유의 창법이 여전함에도 그간 들어온 것과는 또 다른 맛을 느낄 수 있다.”
몇 년 전, 포크라노스의 첫 컴필레이션 앨범이었던 [Emerging]의 수록곡들에 대해 당시 컴파일 작업에 참여한 스태프들이 각각 짤막히 코멘트를 했던 콘텐츠의 일부로 밴드 ‘데카당’을 언급하며 적었던 글로 밴드에 대한 코멘트라곤 하지만 보시다시피 사실 프론트맨 ‘진동욱’에 포커스가 주로 맞춰진 글이다. 이때부터 보컬리스트 ‘진동욱’의 열렬한 팬이었다.
진동욱은 ‘노래를 맛있게 부를 줄 아는’ 보컬리스트다. 달콤하게 읊조리던 목소리가 어느 순간 날카로운 냉소로 변하고, 질주하는 기타와 드럼 사운드의 사이를 뚫으며 내지르던 샤우팅이 어느새 느슨한 그루브 위를 노니는 아름다운 팔세토로 변해 공간을 부드럽게 채우기도 한다. 단순히 ‘좋은 목소리’로 ‘노래를 잘하는’ 것 이상으로 그의 보컬엔 자신만의 독창적인 스타일이 있고, 그 개성적인 보컬로 어떤 무드를 명확하게 연출해내는 능력이 있다. 개인적으로 근래에 등장한 가장 드라마틱한 스타일의 보컬리스트가 아닐까 생각한다. 게다가 다양한 은유, 구체적 묘사 등을 동반한 특유의 어법으로 써내려가는 노랫말 역시 근사한, 훌륭한 리리시스트이기도 하다.
[데모 (DFMO)](이하 ‘데모’)는 데카당의 프론트맨이 아닌 개인으로서의 진동욱이 다분히 사적인 이야기들을, 다분히 사적인 방식으로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주로 사랑, 그리고 상실에 관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으며 그가 종종 언급했던 – 지금은 이 세상에 없는 – 소중한 친구 ‘진원’에 대한 기억들도 그 곳곳에 묻어있다. 그만큼 음악의 결이 데카당과는 많이 다르다. 데카당이 록, 블루스, 소울 등 다양한 양식들의 요소를 넘나들며 선이 굵고 색채가 뚜렷한 음악을 선보이는 데 반해 ‘데모’에 담긴 그의 음악은 대체로 여리고 섬세한 감성이 도드라지는, 어쿠스틱한 팝 음악이다. 발라드적인 곡들이 주를 이루는데 이는 데카당이 종종 선보이는 네오소울 풍의 끈적하게 로맨틱한 발라드 넘버들과도 또 다르다.
‘데모’라는 앨범 제목처럼 대부분의 곡들을 홈레코딩으로 직접 녹음했고 보컬 소스에 어떠한 튜닝도 가미하지 않았다. 또한 대부분의 악곡들을 기타, 혹은 피아노 정도의 어쿠스틱 악기들과 단출하게 레코딩했고 데카당 음악에선 좀처럼 보기 힘들었던 화성을 이용한 코러스도 곳곳에 배치하는 등 소박하면서도 최대한 ‘목소리’에 집중한 연출을 통해 진동욱 특유의 창법이 여전함에도 그간 들어온 것과는 또 다른 맛을 느낄 수 있다. 아이슬란드 여행을 하면서 그곳에서 담은 소리들을 인트로와 스킷 등에 앰비언스로 삽입한 것 또한 소소한 감상의 포인트.
아이슬란드로 가는 비행기 내 승무원들의 코멘트를 비롯한 기내 공간의 소리들을 배경으로 청초한 피아노의 선율이 작품의 문을 여는 인트로 ‘시도’, 동료 싱어송라이터 ‘이예린’이 섬세한 터치로 수놓는 피아노의 음들에 귀를 기울이면 이내 그의 나지막한 음성이 그 위에 포개지며 한껏 관조적인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클래시컬한 발라드 ‘바보천치’, 한 대의 기타와 함께 나지막이 시작되지만 차츰 고조되고 소리들이 쌓이며 마침내 뜨거운 격정으로 ‘너를 사랑해’라 목놓아 외치는 작품 내 가장 드라마틱한 악곡 ‘사랑’(수록곡 중 유일하게 ‘진원’과 함께 쓴 곡이기도 하다), 이상 전반부 세 곡이 사랑을 노래한다면 이어지는 후반부는 상실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할아버지의 장례식과 고인에 얽힌 추억들을 소재로 가져와 ‘죽음’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지만 이를 여유로운 그루브가 있는 리듬과 익살스러운 코러스 등을 통해 오히려 밝은 분위기로 그려내는 모순적인 노래 ‘무제’, 친구 ‘진원’의 장례식장에서 목도한 생경한 풍경이 흡사 ‘전시회’같다고 느꼈던 당시의 기억과 감정, 그리고 친구에 대한 진심어린 애도를 마치 한 편의 뮤지컬을 관람하듯 예측불가한 구성으로 회고하고 표현하는 6분 40초의 대곡 ‘너의 멋진 전시회’는 모두 장례식장의 풍경을 소재로 가져와 죽음, 그리고 그로 인한 상실에 관한 기억과 감정을 그리는 곡들. 하지만 이 두곡은 그 분위기가 다른 만큼 그 안에 담긴 마음의 형태도 조금은 다른 듯하다.
어느 박물관에서 녹음한 도슨트**의 음성을 앰비언스로 활용한 스킷 ‘도슨트’를 지나 만나게 되는 피날레 ‘질문’은 오직 보컬과 기타만으로도 인상적인 오르내림을 연출하며 상실의 감정을 가장 절절하게 노래하는 곡이다.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처럼 느껴지는 이 곡은 한편으론 ‘데모’라는 짤막한 전시를 감상한 관객들에게 마지막으로 던지는 질문으로도 여겨진다.
가장 개인적인 것들야말로 종종 가장 보편적이다.
이 작품 속에 전시된 일곱 개의 이야기들이 모두 음악가 개인의 경험과 기억들을 바탕으로 한,지극히 사적인 사연들에서 잉태된 것임에도 보편적인 공감대를 빚어낼 수 있는 이유다. 우리 모두 사랑하고 이별하니까. 어떤 날엔 견디기 힘든 상실에 속절없이 아파하기도 하니까. ‘데모’는 그럼에도, 그 모든 아픈 날들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내일을 살아가야 하는 나, 그리고 당신, 그 모든 남겨진 이들을 위한 노래다.
Editor / 김설탕
sugarules@poclanos.com
■참고
* DAILY DOSE OF MUSIC! 포크라노스 첫 컴필레이션 Vol.1 ‘EMERGING’ 스태프 픽
“블렌트의 첫 앨범 [loves]는 제목이 의미하는 바 그대로 ‘사랑’에 관한 이야기지만 단수형(love)이 아닌 복수형(loves) 표기가 의미하듯 어떤 특정한 – 이를테면 연인간의 – 관계가 아닌 보다 넓은 의미, 그리고 다양한 형태와 관계의 ‘사랑들’을 조망한다.”
blent. loves 2019.03.18
DAZE ALIVE는 한국의 레이블로 수장인 JERRY.K(제리케이), 소속 음악가인 SLEEQ(슬릭), RICO(리코) 등의 로스터 면면에서 볼 수 있듯이 힙합, 알앤비를 음악적 근간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최근 이 레이블의 행보, 발매작들의 면면을 살피다 보면 이들이 여타 한국 레이블들과는 조금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제리케이나 슬릭이 본인들의 확고한 – 특히 인권에 대한 – 정치적 지향을 음악을 통해 발화하는 것에 매우 적극적인 음악가들인 덕이다. 제리케이의 경우 과거 소울컴퍼니 시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동시대 다양한 정치/사회 이슈들에 대한 문제의식을 끊임없이 드러내며 현실 참여적 음악들을 선보여왔고 슬릭은 두말할 것도 없이 현재 가장 대표적인 페미니스트 음악가다.
메시지뿐 아니라 음악적으로도 이들은 최근 힙합씬의 주요한 흐름들과는 조금 다른 방향성의 사운드 프로덕션을 자주 선보이고 있다. 현재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트랩이나 붐뱁, 혹은 멈블랩, 랩싱잉 성향 아티스트들의 릴리즈에서 종종 만나볼 수 있는 다소 추상적인 이미지의 음악 스타일 등과는 사뭇 결이 다른, 심지어 탈 장르적인 형태의 음악들을 데이즈 얼라이브의 최근 발매작들을 통해 심심찮게 만날 수 있는데 이는 이들이 힙합씬 바깥에 있는 다양한 음악가와 교류하고 협업하는 시도들을 꾸준히 이어오고 있는 덕이기도 하다.
제리케이가 전자음악가 FIRST AID(퍼스트에이드)와 처음 호흡을 맞춘 것은 2017년 발표한 앨범 [OVRWRT]에 수록된 싱글 ‘알약’을 통해서다. 솔로 아티스트로, 보컬리스트 홍효진과의 밴드 프로젝트인 Room306(룸306)으로, 혹은 권월과의 듀오 F.W.D.(포워드)로 다채롭게 작품활동을 펼쳐온 베테랑 프로듀서 퍼스트에이드는 제리케이만큼이나 자기 세계가 확고한 음악가다.
활동 영역과 스타일이 확연히 다르건만 ‘알약’을 통해 뜻밖에 좋은 합을 보여준 두 사람은 이후 Room306(룸306)의 정규 2집 [겹]에 수록된 ‘손뼉’에 제리케이가 피쳐링하면서 다시 만났다. 두 번의 작업을 통해 상호간에 발생하는 좋은 케미스트리를 재차 확인한 두 사람, 이는 자연스레 프로젝트 ‘blent’(블렌트)의 결성, 그리고 실행으로 이어졌다.
블렌트의 첫 앨범 [loves]는 제목이 의미하는 바 그대로 ‘사랑’에 관한 이야기지만 단수형(love)이 아닌 복수형(loves) 표기가 의미하듯 어떤 특정한 – 이를테면 연인간의 – 관계가 아닌 보다 넓은 의미, 그리고 다양한 형태와 관계의 ‘사랑들’을 조망한다. 그건 백내장에 걸려 ‘달처럼 빛나는’ 하얀 눈을 가지게 된 반려견 사자에 대한 사랑이기도(‘odd eye’),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친구이자 동반자인 아내에 대한 사랑이기도(‘best friend’, ‘나랑 나란히’) 하며 혹은 너무나 서로를 잘 알기에 이해를 구하기 위해 애써 많은 말을 하지 않아도 되는 각별한 존재에 대한 사랑이기도 하다(‘no words’).
무엇보다 ‘나’에 대한 사랑이 중요하게 다뤄지며 전반부의 대부분이 여기에 할애되는데 다만 이건 ‘내가 제일 잘났어’ 따위의 맹목적 자기애 따위와는 명백히 다른 종류의 것이다. 제리케이가 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이야기하는 자기애란 잘못과 실수를, 혹은 세상과 부딪히기를 반복하며 이게 다 내 탓인가, 난 이것 밖에 안되는 존재인가-하며 스스로를 자책하고 의심하는, 거친 세상 속 나약한 존재인 내가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감싸고 다독이는 그런 사랑이다(‘not yours’, ‘나도 처음 만난 내가 나인데’). 특히 심리상담까지 받으며 스스로의 깊숙한 밑바닥과 마주하는 시간을 가지고 마침내 자기혐오를 극복해가는 과정을 다루는 ‘2907’은 앨범 전체에서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 트랙인데 줄곧 다소 우울하고 어두운 무드로 일관하며 작가 내면의 고뇌를 다루던 앨범의 서사가 이 노래를 기점으로 비로소 외부로 확장하기 시작한다. (‘2907’은 제리케이가 다녔던 심리상담센터의 호수라고 한다)
삶은, 세상은 고되고 거칠지만, 이 험난한 세상 속 녹록찮은 삶을 지탱하는 것은 결국 저 모든 사랑들이다. 나를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시간들을 사랑하며 다시 일어서고 다시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전체적으로 차분한 무드로 전개되는 작품으로 사운드도, 보컬도 꽉꽉 채우기보단 여백이 넉넉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퍼스트에이드의 노련하고 섬세한 사운드 프로덕션은 심은보님이 공식 코멘터리에서 언급한 것처럼 ‘잔잔하기에 놓칠 수 있는 디테일한 지점들’을 앨범 전반에 만들어낸다. 소리 하나하나에, 리듬에, 공간감에 귀를 기울이며 감상하면 또 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 김사월, uju(우주), Rico(리코), klang(클랑) 등 판이하게 다른 스타일을 지닌 보컬리스트들의 조력이 곳곳에서 반짝반짝 빛난다. 생각할 거리만큼이나 들을 거리 역시 충실하게 마련된 작품이다.
“이 노래를 처음 들으며 떠올린 단어는 왠지 ’산들산들’이었다. 귓가를 가볍게 스치고 지나가 기분 좋은 여운을 남기는 심플한 선율도, 그 선율 위에서 조곤조곤 노래하는 꾸밈없는 목소리도, 마치 포근한 기운을 품고 산들산들 불어오는 부드러운 봄바람 같다.”
92914 Koh 2019.03.16
도시에서 태어나 줄곧 도시에서 자랐다. 20대 초반 병역의 의무를 다하느라 강원도에서 보낸 2년 남짓의 시간을 제외하면 현재까지 내 삶의 대부분의 기록은 서울에서 쓰여졌고 또 현재 진행중이다.
도시, 특히 서울쯤 되는 큰 도시가 되면 모든 것들이 참 많다. 사람, 건물, 차, 신호등, 불빛, 소리, 냄새 등을 비롯해 볼 것, 들을 것, 즐길 것, 먹을 것, 예쁜 것, 흉측한 것, 위험한 것, 여하튼 인간이 접할 수 있는 대부분의 것들이 지나칠 정도로 잔뜩 밀집해 있는 것이다. 그렇게 모든 것이 너무 꽉꽉 들어차 있어서, 나는 가끔 숨이 턱턱 막힌다. 너무 많은 불빛들이 정신사납고 너무 많은 소리들이 시끄럽다. 너무 많은 사람들과 너무 많은 언어를 나누는 행위가 번잡스럽게 느껴져 싫어진다. 잠시라도 그 모든 것들, 그리고 도시로부터 도망쳐 어떤 ‘고요함’ 속에 있고 싶은 기분이 된다. 아마 나만 느끼는 기분은 아닐 거다. 주변 사람들 대부분이 때만 되면 휴가다 여행이다 악착같이 챙겨 어딘가로 탈출하기 위해 애를 쓰는 걸 보면. 그렇다. 우리들, 소위 ‘도시인’이라는 종족은 가끔씩은 도시를 벗어나 자연과 마주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92914’는 권주평과 이준기가 만든 듀오다. 두 사람은 함께 노래를 짓고 부른다. 노래는 주로 이준기가 한다. 92914라는 이름은 그들이 처음 구했던 작업실의 우편번호라고 한다.
‘92914’의 음악은 어쩐지 자연의 어떤 풍경을 연상시킨다.
그곳은 각양각색 꽃들이 여기저기 알록달록 피어나 수놓인 초록빛 들판이기도, 혹은 철썩이는 소리와 함께 잔잔한 파도가 들어오고 또 나가는 초여름의 해변이기도 하다. 너무 밝지도, 그렇다고 너무 약하지도 않은 적당히 따스한 볕이 공기를 은은하게 데우고 깃털처럼 가볍게 날리는 옅은 바람이 뺨을 부드럽게 간질이는. 모든 것이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적당하게’ 존재하는 고즈넉한 풍경, 눈을 감고 92914의 음악과 마주하고 있으면 왠지 이런 풍경의 한가운데에 들어와 있는 것 같다.
새 노래 ‘Koh’ 역시 그렇다.
이 노래를 처음 들으며 떠올린 단어는 왠지 ’산들산들’이었다. 귓가를 가볍게 스치고 지나가 기분 좋은 여운을 남기는 심플한 선율도, 그 선율 위에서 조곤조곤 노래하는 꾸밈없는 목소리도, 마치 포근한 기운을 품고 산들산들 불어오는 부드러운 봄바람 같다. 노래가 찬찬히 마음에 스며들 즈음이면 – 음악을 표현하기에 적절치 않은 단어 선정인지 모르겠지만 – 어쩐지 ‘고요’해지는 기분이 든다. 번잡하고 시끄러운 일상으로부터 잠시나마 완전히 분리되어 맛보는 아주 기분좋은 고요함이다. 그리고 이 고요함은 참으로 다정하고 자상하다.
“다소 날카롭고 약간의 비음이 섞인 음색, 그 독특한 톤으로 변화의 폭이 크지 않은 심플한 선율을 나지막이 읊조리듯 노래하는 그의 스타일은 얼핏 단조로운 듯하면서도 대체로 칠한 무드의-그러나 적당한 그루브가 있는-비트와 완벽하게 맞물리면서 본인이 원하는 바로 그 ‘바이브’를 확실하게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BRWN ARMAND 2019.01.14
‘노래를 잘한다’는 것에 대해선 아마 저마다 다양한 견해가 있을 거다. 물론 많은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노래를 잘하는 보컬리스트란 여전히 ‘압도적인 발성과 테크닉으로 풍부한 감정을 표현하는 유형’의 음악가들이지 않겠나 싶지만 사실 세상엔 정말 다양한 개성의 보컬리스트들이 존재하고 ‘노래를 잘한다’는 것의 의미는 그만큼이나 꽤 광범위하지 않을까. 특히 요즘 힙합, 알앤비 씬에서 ‘잘한다’의 의미는 과거의 그것과는 상당히 의미가 달라진 것 같다. 멈블랩, 클라우드랩, 특히 랩싱잉 스타일이 주류가 되고 힙합과 알앤비의 경계가 더욱 옅어지면서 발음, 발성, 호흡, 테크닉 등 과거에 중요하게 여겨지던 모든 가치들보다 보컬이 비트와 맞물려 어떤 무드, 바이브를 형성하고 그것으로 흡입력을 만들어내는 능력, 이것이야말로 ‘실력’의 척도가 된 것이다. 이를테면 ‘Post Malone’(포스트 말론). 이제는 발표하는 곡마다 히트시키며 일약 팝스타가 되어버린 그이지만 그의 노래를 고전적인 관점에서 보면 결코 뛰어난 보컬리스트는 아니지 않나.
‘BRWN’(이하 브라운) 역시 이런 맥락에서 바라봐야 할 아티스트다. 2018년 초에 등장해 지속적으로 음악을 발표하며 빠른 속도로 디스코그라피를 쌓아가고 있는 그 역시 랩과 노래의 경계를 오가는 형태의 보컬리스트이고 장르적으로도 힙합과 알앤비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다. (내 맘대로 비율을 논하자면 6:4 정도로 좀 더 알앤비쪽에 스탠스가 있는 거 같기는 하다)
본인의 통산 일곱 번째 발매작이자 두 번째 EP [ARMAND] 역시 마찬가지. 다양한 프로듀서들과 작업한 총 다섯 트랙을 수록하고 있고 신예 래퍼 ‘Eptend’(에피텐드), 한국에 몇 안 되는 그라임 래퍼 ‘Damndef’(댐데프) 등이 참여한 이 작품 속 브라운의 보컬 퍼포먼스엔 다이나믹하고 드라마틱한 전개도, 시원하게 터지며 분위기를 압도하는 클라이막스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음악은 상당히 매력적이며 심지어 중독적인 면마저 지니고 있다. 다소 날카롭고 약간의 비음이 섞인 음색, 그 독특한 톤으로 변화의 폭이 크지 않은 심플한 선율을 나지막이 읊조리듯 노래하는 그의 스타일은 얼핏 단조로운 듯하면서도 대체로 칠한 무드의-그러나 적당한 그루브가 있는-비트와 완벽하게 맞물리면서 본인이 원하는 바로 그 ‘바이브’를 확실하게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현재 애플뮤직의 힙합/랩 챠트에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관조적 무드의 오프너 ‘a letter to us’를 시작으로 심플하지만 귀에 잘 들어오는 멜로디의 훅이 깊은 인상을 남기는 타이틀곡 ‘Armand’, EP 내 가장 힙합적인 수록곡으로 음울한 무드의 비트와 중독적인 훅, 댐데프의 공격적인 랩이 어우러지는 ‘돈’ 등 뭐 하나 지나치기 힘든 다섯 곡은 대체로 일관된 무드 안에서 전개되어 작품 전체로 감상하는 재미도 꽤 쏠쏠하다. 알앤비의 감성적인 면과 힙합의 음울한 멋스러움을 고루 담아내고 있는, 도시의 밤이 지닌 명암 양쪽 모두를 두루 닮은 음악이다.
“총 아홉 트랙을 수록한 이 정성스런 EP는 시로스카이 특유의 따스한 정서가 비트 곳곳에 가득 배어있어 반가운 작품이다. 정서적으로 여전하다고 해서 음악적으로 변화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앨범 작업을 중간에 한 번 엎으며 50곡이 넘는 그간의 작업물들을 모두 버렸다고 했다. 스스로에게 ‘올드’하게 느껴지는, 과거의 작업을 답습한 듯한 작업물들과 미련없이 결별하고 스스로의 창작 세계를 다음 스테이지로 과감하게 옮겨가고자 시도한 것이다.”
시로스카이 The Seed 2019.01.11
꽤 오래 랩/힙합 음악을 좋아해오면서 가끔씩 의아함이 들곤 한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유독 ‘힙합’ 카테고리 내에선 프로듀서, 혹은 비트메이커 포지션에 있는 여성 음악가를 찾기가 힘들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없는 걸까? 이 점은 비단 국내뿐 아니라 해외 어디나 마찬가지인 거 같지만 그나마 해외에서는 한 시대를 화끈하게 풍미했던 ‘미시 엘리엇(Missy Elliott)’ 같은 슈퍼스타도 있었고 최근엔 ‘원다걸(wondagurl)’이나 ‘크리스탈 케인즈(Crystal Caines)’ 등 신진 여성 비트메이커들의 약진도 꽤 눈에 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성비는 여전히 말도 안 되는 수준이라고 생각하지만) 반면 한국에는 여성 힙합 비트메이커가 누가 있나-하고 한참을 생각해봐도 대번에 떠오르는 이름은 여전히 단 하나뿐이다. ‘시로스카이(Shirosky)’. 2010년 첫 EP <The Orbit>으로 데뷔한 이래 현재까지도 재즈힙합, 멜로우비트에 기반을 두고 꾸준히 창작활동을 펼치고 있는 시로스카이는 한국에서 거의 유일무이한 여성 ‘힙합 비트메이커’다.
2015년 정규작 <La Lecture> 이후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별다른 활동이 없다 싶었던 시로스카이가 2019년의 시작과 함께 새 EP <The Seed>를 공개했다. 총 아홉 트랙을 수록한 이 정성스런 EP는 시로스카이 특유의 따스한 정서가 비트 곳곳에 가득 배어있어 반가운 작품이다. 정서적으로 여전하다고 해서 음악적으로 변화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앨범 작업을 중간에 한 번 엎으며 50곡이 넘는 그간의 작업물들을 모두 버렸다고 했다. 스스로에게 ‘올드’하게 느껴지는, 과거의 작업을 답습한 듯한 작업물들과 미련없이 결별하고 스스로의 창작 세계를 다음 스테이지로 과감하게 옮겨가고자 시도한 것이다. 보컬리스트인 ‘HAKI(하키)’와 ‘RIPLEY(리플리)’를 비롯해 ‘NJ’, ‘차여울’, ‘Jolly V(졸리브이)’ 등 많은 음악가들이 이 작업에 참여했고 무엇보다 한국 힙합의 초창기부터 현재까지 꾸준히 활약하고 있는 베테랑 비트메이커 ‘Pe2ny(페니)’가 다방면으로 조력하며 완성도를 높이는데 일조했다. 신스를 비롯한 전자음들의 향연으로 미래적이고 신비한 무드를 조성하는 ‘Set Me’를 시작으로 808 사운드로 만든 리듬과 신스, 피아노, ‘하키’의 보컬 등 다양한 소리들이 어우러져 한껏 멜랑콜리한 무드를 조성하는 ‘Closer’, 보컬 샘플링의 활용이 돋보이는 재지한 멜로우비트 ‘하현’, 피아노가 중심이 되는 예쁜 선율 위로 보컬리스트 ‘리플리’의 예쁜 보컬이 더해져 왠지 과거 시부야케이 전성시대에 좋아했던 어떤 노래들이 문득문득 떠오르는 ‘Feel Inside’, 근사한 재지 비트 ‘Beat 1’ 등이 연이어 흐르는 25분 남짓의 재생시간은 참으로 정적이고, 또 평온하다.
어둑한 밤, 은은한 조명이 커진 거실 혹은 침실, 그리고 잠시 일상의 모든 것들로부터 벗어나는 고요한 안식의 순간, ‘시로스카이’의 음악은 이전에도, 그리고 현재에도 바로 그런 장면, 순간들을 자연스레 연상시킨다. 그녀의 비트가 품고 있는 따사로움과 다정함이야말로 어쩌면 그 순간에 가장 필요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TAKE#1의 트랙 구성이 현재 서울의 서브컬쳐 씬에서 각광받고 있는 베이스뮤직들을 집중적으로 조명하고자 하는 것에 비해 이번 작품의 트랙리스트는 포크, 록, 전자음악, 힙합까지 다양한 장르를 포괄하며 음악의 결도, 분위기도 저마다 다른 여섯 트랙을 담고 있다. “
V.A. UNFRAME SEOUL TAKE #2 2018.11.28.
옴니버스, 컴필레이션 앨범들이 엄청 유행하던 시절이 있었다. <NOW>나 <MAX>처럼 직배사에서 출판했던 팝 히트곡 모음집이나 가요 발라드 모음집 <연가> 등이 당시에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것들이라면 드럭의 <아워네이션>, 마스터플랜의 <초>나 <풍류>, 소울컴퍼니의 <The Bangerz>처럼 홍대 인디펜던트 씬의 클럽/레이블이 주체가 된, 특정 장르 중심의 매니악한 옴니버스 앨범들도 다양하게 존재했다. 아, 한국 최초의 힙합 컴필레이션이었던 <1999 대한민국>을 시작으로 우후죽순 쏟아져나왔던 ‘대한민국’ 시리즈들도 절대 빼놓아선 안 될 것 같고. 한편 개인적으론 미국의 언더그라운드 힙합 레이블 ‘로커스(Rawkus)’의 <Lyricist Lounge>와 <Soundbombing>, 그리고 라운지 음악이 한창 유행하던 시절에 많이 들었던 <Easy Tempo>나 <Buddha Bar>, 혹은 폼푸냑의 <Hotel Costes> 시리즈 등이 기억에 깊게 남아있다.
음악 매체의 패러다임이 디지털의 세계로 넘어온지 오래이고 이미 ‘앨범’보단 ‘싱글’이 익숙한 시대를 살고 있다. 자연히 이런 모음집에 대한 관심도 더는 예전 같지 않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만 주의를 기울여보면 지금도 여전히 꽤 흥미롭고 의미 있는 컴필레이션 음반들이 나오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여기서 소개할 <UNFRAME SEOUL TAKE #2>도 하나의 좋은 예가 되겠다.
‘UNFRAME SEOUL’(이하 언프레임서울)은 그들의 표현을 그대로 가져오자면 “서울의 경관과 함께 국내 서브컬처 음악을 소개하는” 채널이다. 그들의 공식 홈페이지(unframeseoul.com)에 방문해보면 서울을 베이스로 하는 아티스트들의 음악을 전단지 모티브의 비주얼과 함께 소개하는 ‘JEONDANJI’, 아티스트들이 추천하는 다양한 노래들을 서울의 야경과 함께 소개하는 ‘SEOUL LIGHTS’ 등의 코너들을 만날 수 있고 브랜드의 이름을 그대로 쓰는 컴필레이션 <UNFRAME SEOUL> 시리즈 역시 그들이 기획하는 컨텐츠 중 하나다.
<UNFRAME SEOUL TAKE #2>는 2017년 이 즈음에 선보였던 첫 번째 컴필 <UNFRAME SEOUL TAKE #1>의 후속작이고 ‘서울의 음악을 큐레이팅’한다는 기본적인 컨셉트도 동일하지만 트랙리스트 구성에서 전작과는 다른 접근을 하고 있다. TAKE#1의 트랙 구성이 현재 서울의 서브컬쳐 씬에서 각광받고 있는 베이스뮤직들을 집중적으로 조명하고자 하는 것에 비해 이번 작품의 트랙리스트는 포크, 록, 전자음악, 힙합까지 다양한 장르를 포괄하며 음악의 결도, 분위기도 저마다 다른 여섯 트랙을 담고 있다.
이번 쇼미에서-적어도 나에겐-가장 인상적인 순간을 연출했던 EK의 ‘GOD GOD GOD’을 프로듀스한 노련한 비트메이커 ‘Y0UNG VA$$(영배스)’의 멜랑콜리한 비트 위로 아이돌로 출발해 현재는 VMC의 일원인 ‘BIGONE(빅원)’이 7년간의 치열한 서울 생존기를 차분하게 서술하는 ‘Seoul’은 제목과 내용 양면에서 앨범의 인트로로 손색이 없다. ‘김사월’은 ‘북촌’에서 그녀 특유의 사적인-주로 연애에 관한-경험에서 비롯된 듯한 회상적 이야기를 오로지 기타 하나만을 벗삼아 차분하게 읊조리고 ‘조선 양반의 록’을 자처하는 아이코닉한 밴드 ‘전범선과 양반들’은 그 특유의 기개와 해학 넘치는 스타일을 ‘보따리’를 통해 고스란히 전시한다. 지난 한대음에서 ‘최우수 랩/힙합 음반’에 선정된 수작 <재건축>에서 환상의 호흡을 자랑했던 프로듀서 ‘VIANN(비앙)’과 래퍼 ‘KHUNDI PANDA(쿤디판다)’는 ‘응석’에서 다시 한 번 호흡을 맞춘다. 붐뱁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비앙의 감각적인 비트와 날카롭고 단단한 라임을 촘촘하게 새겨넣는 쿤디판다의 랩은 여전히 조화롭다.
음반의 후반부는 전자음악의 향연이다. 레프트필드 하우스, 테크노, 베이스뮤직을 넘나드는 디제이/프로듀서 ‘DJ Bowlcut(디제이 보울컷)’의 환상적인 테크하우스 넘버 ‘Fucks Given Zero’에 이어 최근 가장 인상적인 행보를 하고 있는 전자음악가라 해도 과언이 아닐 ‘YESEO(예서)’의 ‘Eternal’은 빛을 받아 반짝이며 바스러지는 파도처럼 영롱한 전자음의 향연을 펼치며 근사한 피날레를 선사한다. 어느 하나 거를 것 없이 멋진, 더불어 서울 언더그라운드의 현재를 충분히 맛볼 수 있는 곡들을 담은 음반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여전히 서울에서 살고 있다. 이곳에 대한 감정은 지극히 양가적이다. 어떤 날은 도시의 번잡함이 지겹고 또 어떤 날은 도시라서 누릴 수 있는 것들에 고맙기도 하다. 그렇게 하루에도 몇 번씩, 한 해에 수백수천 번씩 서울을 떠날까 말까 고민하며 ‘보따리만 묶었다 풀었다 한다’. 애증의 대상인 서울에서 그렇게 또 하루를 다 보내고 이 글을 맺는다.
“훗날 2018년의 한국 힙합을 되돌아보면 아마 ‘가장 뜬금없었던, 하지만 동시에 가장 인상적이었던 발견 중 하나’로 이 앨범이 회자되지 않을까. 아무튼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들이 이 앨범을 통해 한국 힙합의 어느 한 귀퉁이에 새로운 색깔 하나를 슬며시, 그러나 아주 뚜렷하게 칠했다는 것.”
Nerdy coke 인터뷰 2018.11.24.
2018년 11월은 힙합이라는 장르의 팬인 나에게는 꽤나 흥미롭고 또 즐거운 달이 되고 있다. 국내외에서 좋은 싱글/앨범들이 줄줄이 쏟아져 나오고 있기-때문이다. 우선 해외에서는 2010년대 나의 최애 아티스트 중 한 사람인 ‘Anderson .Paak’이 세 번째 정규앨범 [Oxnard]를 드디어 공개했고 과거 뉴욕 힙합의 상징과도 같았던 ‘딥셋(The Diplomats)’이 갑자기 새 싱글로 돌아와 반가움을 안겼다. 아버지 윌 스미스처럼 본인 또한 연기와 음악 양쪽에서 활약하는 다재다능한 ‘제이든(Jaden Smith)’도 새로운 프로젝트 [The Sunset Tapes: A Cool Tape Story]와 수록곡 ‘Plastic’의 근사한 뮤비를 공개했는데 더불어 ‘타일러(Tyler, The Creator)와 사귀는 사이라며 갑작스런 커밍아웃까지 해버렸다. 국내 역시 흥미롭긴 매한가지. 먼저 한국힙합의 상징적인 이름 ‘드렁큰 타이거’의 마지막 앨범이 나왔고 BANA의 ‘이센스’와 ‘XXX’가 정규작 공개를 앞두고 나란히 싱글을 공개했다. (아마 이 글이 공개될 즈음 XXX의 첫 정규작이 이미 발매되어 있을 거 같다) 그랙다니(Grack Thany)의 랩 에이스로 왕성한 작업량을 자랑하는 허슬러 ‘몰디’는 또(!) EP를 공개했는데 전작 [Internet KID] EP로부터 불과 5개월 만이다. 그리고 또 하나 주목해야 할 앨범이 최근에 불쑥 나타났다. 신예 듀오 ‘Nerdy Coke’의 첫 앨범 [인터뷰]다.
총 31 트랙, 플레잉타임만 무려 81분 45초의 대작, 여기에 저스디스, 쿤디판다, 테이크원, 제이클레프, 김아일, 시마호이, 사일러 등 양과 질 모두 “호사스럽다” 느껴질 정도의 피쳐링진. Nerdy Coke(이하 너디코크)의 멤버 ‘유오닐’과 ‘손시아’ 두 사람은 이 앨범에 수록된 모든 트랙들을 직접 작사, 작곡, 프로듀싱했고 앨범 전체의 마감 또한 마스터링을 제외한 모든 과정을 손수 해냈는데 여기에 걸린 시간만 무려 3년이라고 한다. ‘3년’ 동안 준비한 ‘31트랙’짜리 ‘데뷔’ 앨범. 음악 외적으로 드러난 기본적 정보들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흥미로운 이 앨범은 속을 들여다보면서 이제 더더욱 흥미로워진다.
[인터뷰]에서 우선 주목하게 되는 점은 프로덕션이다. 너디코크가 만들어내는 비트들은 현재 힙합 세계(?)를 양분하는 트랩, 붐뱁 그 어느 쪽에도 온전히 속하지 않는 동시에 그 스스로도 어떤 하나의 ‘스타일’로 정형화되지 않는다. 다양한 사운드 소스를 흥미롭게 활용해 저마다의 트랙들에 모두 특색을 부여하고 다양한 무드를 조성해내고 있는데 그럼에도 앨범의 전체적인 흐름이 매끄럽게 전개된다-는 인상을 주는 건 그만큼 그들이 트랙 배열 등 ‘앨범의 구조’를 잘 설계하려는 노력을 기울였기 때문일 것이다. 스킷을 적극적으로 활용, 앨범으로서의 통일성을 업그레이드하는 동시에 그들이 의도한 이야기의 서사를 보다 도드라지게 하려는 점 또한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다. 특히 이 스킷 트랙들이 클래시컬한 관현악 오케스트레이션의 무드를 빌려오는 동시에 여기에 다양한 상황, 분위기를 연기하는 성우의 목소리 연기까지 십분 활용함으로서 앨범에 영화적, 혹은 뮤지컬적인 성격을 뚜렷하게 부여하고 있다는 점은 이 앨범의 가장 독특한 특징 중 하나다. (개인적으론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어떤 장면들을 자꾸만 떠올렸다)
사운드 프로덕션 못잖게 ‘이야기’의 측면 역시 중요하다. 앨범 전체를 쭉 감상하고 나면 ‘이야기’야말로 사실 이 앨범의 핵심이라 느끼게 될지도 모른다. [인터뷰]는 두 멤버의 뮤지션으로서의, 또 한국을 사는 청년으로서의 삶, 특히 이 중 2013년부터 2018년에 이르는 특정한 시기에 벌어진 일들에 대해 다양한 각도와 방법으로 서술한다. 유오닐과 손시아는 자신들의 내밀한 개인사, 그리고 그 경험들을 통해 축적된 생각들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랩을 하고, 혹은 노래를 하기도 한다. 피쳐링 아티스트들의 조력을 얻기도 하는데 이 중 상당수의 트랙에서-마치 프로듀서 앨범의 그것처럼-자신들은 부스 바깥으로 물러나고 시마호이, 사일러, 쿤디판다, 테이크원, 제이클레프, 김아일 등 피쳐링 아티스트들에게 보컬 퍼포먼스 일체를 맡기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은 상당히 흥미롭다.
“여기 경찰 불러줘 철컹철컹, 음악 모르는 사장님들 철장에 넣어”
– 수록곡 ‘철컹철컹’ 중
그들이 과거에 다른 이름으로 음반을 냈던 2013년으로 거슬러 올라가(序幕:서막)면서 이야기의 막이 열린다. 이어지는 ‘철컹철컹’은 장난스러운 가사의 후렴구가 처음엔 그저 재미있게 들리지만 막상 두 사람이 대형 기획사에 들어가서 겪는 일들을 다루는 두 개의 벌스를 듣고 나면 더 이상 장난으로 들리지 않게 된다. 장미빛 미래를 꿈꾸며 기획사에 들어갔지만 음악을 음악적으로 접근하지 않는 회사의 태도, 상업적으로는 성공에 가까워졌지만 음악이 즐겁지 않은 상황에 환멸을 느끼고 결국 회사와 헤어지는 과정이 생생하게 다뤄지는 곡이다. 결국 차선을 바꾸고(기획사를 나와서) 원하는 곳으로 내 마음대로 핸들링(하고 싶은 음악)을 해서 큰 사고(음악적 성취)를 내겠다는 내용을 담은 ‘드라이브’에서부터 변화가 시작된다. 물질적 풍요는 무시할 수 없는 것이고 그래서 돈에 대한 심정은 조금 복잡하지만 (‘뭐 때문일까’) 그럼에도 돈 때문에 하고 싶은 걸 해야 하는 삶의 태도를 바꿀 생각은 없다 (‘Skit 1 / 날 좀 내비둬’). 상업적 성공에 대한 강박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초심으로 돌아간(‘미정’) 그들은 이제 삶의 다른 면들도 둘러보게 되고 그 속에는 또래의 청춘답게 이성 관계에 대한 것도 있다.
호감이 생긴 이성과 시작된 대화를 토크쇼에 비유한 ‘Talk show’, 짝사랑을 향한 복잡한 마음을 표현한 ‘난 너가 헤어지길 바래 근데 그걸 티내면 안된다는걸 아네’, 평소엔 안 듣던 발라드를 이별하니까 듣게 되더라는 ‘안듣던 발라드 (Rough)’ 등은 이성과의 관계에 이리저리 요동치는-평범한 청춘다운-모습을 보여주지만 하지만 그런 경험들을 통해 이들의 삶을 바라보는 태도와 정신은 되려 더 단단해진다. (‘이별’, ‘편지’). 이윽고 최후반부에 배치된 두 트랙 ‘希望:희망’, ‘성공 (Live)’은 자신들의 삶에 태도에 대해 확신을 가진 이들이 ‘하고 싶은 걸 마음대로 하는 지금 이 삶’이 이미 성공이며 그들에게 진정한 성공의 의미는 이런 것-이라 외치는 당찬 선언이고 끝으로 마지막 트랙이자 스킷 ‘終幕:종막’까지 듣고 나면 결국 이 모든 이야기들이 그들 자신의 인생사를 얘기하는 ‘인터뷰’였음을 이해하게 된다. 한편 ‘성신여대 반지하 작업실 동료’였던 ‘Justhis’가 중반부에 등장해 타이트한 벌스를 수놓는 ‘미정’, ‘Khundi Panda’가 특유의 날카로운 톤과 유려한 완급 조절로 트랙을 끌어가는 ‘돛대’, 환상적인 곡 해석력과 랩디자인이 감탄스러운 ‘김아일’ 피쳐링의 ‘Silence’를 비롯, 각각의 트랙들에서 저마다의 개성으로 빛을 발하는 TakeOne, Jclef, Syler 등 피쳐링 아티스트들의 좋은 퍼포먼스도 이 앨범을 듣는 즐거움을 배가시키는 요소다.
공들여 구축한 사운드 프로덕션과 이야기의 서사, 여기에 더해진 다양한 아이디어들, 적절하게 선택되고 배치된 피쳐링진의 운용 등 ‘좋은 앨범’으로서의 조건을 고루 갖추고 있다는 점, 더불어 사운드적으로, 또 가사적으로도 기존의 랩/힙합 음악들과는 다른 노선을 택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역력해 이들만의 뚜렷한 개성이나 태도가 분명히 드러나는 작품이라는 점 등 랩/힙합 음악 팬들에게 청취를 권할 이유가 충분한 앨범이다. 훗날 2018년의 한국 힙합을 되돌아보면 아마 ‘가장 뜬금없었던, 하지만 동시에 가장 인상적이었던 발견 중 하나’로 이 앨범이 회자되지 않을까. 아무튼 한 가지는 확실하다. 그들이 이 앨범을 통해 한국 힙합의 어느 한 귀퉁이에 새로운 색깔 하나를 슬며시, 그러나 아주 뚜렷하게 칠했다는 것.
“2017년 여름, 첫 싱글 ‘Birthday Harlem’을 시작으로 그녀가 사운드클라우드에 습작으로 올렸던 곡들은 하나둘 매무새를 정돈하고 정식으로 세상과 차근차근 만나게 되었고 그때부터 2018년 봄까지, 약 일 년여의 기간 동안 두 개의 싱글과 두 개의 더블-싱글을 릴리즈하며 더딘 듯하지만 꾸준한 행보를 착실하게 이어왔다.”
Offing Journey 2018.11.09.
2017년 어느 날 얘기다. 사무실에서 정신없이 업무를 쳐내고 있던 내 옆에서 정준구가 잔뜩 들뜬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진짜 괜찮은 애(?)를 발견했다!”고. 그리고 이내 카톡으로 사운드클라우드 웹링크가 하나 날아왔고 나는 그렇게 처음으로 ‘오핑(Offing)’(이하 오핑)이란 이름을 알게 되었다.
과연. 사운드클라우드를 통해 처음 접한 오핑의 음악은 사뭇 흥미로웠다. 신스팝 같기도 하고, 기타팝 같기도 하고, 더러는 얼터너티브의 느낌도 있는, 아무튼 딱 사운드클라우드 시대의 음악이구나 싶은 그녀의 노래들은 분위기며 사운드며 저마다 결이 무척 다르면서도 묘하게 일관성이 있었는데 그건 이를테면 일종의 나른함? 혹은 권태로움? 콕 찝어 설명하긴 어렵지만 여하튼 어딘지 나사를 하나 탁 풀어놓은 듯한 분위기들이 있었다. 그녀 스스로가 삶을 바라보는 시선의 문제라고 해야 할까, 딱히 염세적인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미화할 마음 역시 딱히 없는, 다만 각박하지 않게 되도록 느슨하게 살고 싶다는 한량스러운(?) 태도 같은 것 말이다. 여기서 개인적인 얘길 조금 보태자면 딱 이런 지점이 내 구미에 맞기도 했는데 그녀의 음악이 취하는 태도가 평소 인생에 대한 내 태도(‘가능한 한 게으르게, 최대한 베짱이처럼 살고 싶다’라든가 ‘인생은 대체로 구린데 아주 가끔 괜찮은 날도 있어서 그 맛에 그럭저럭 죽지 않고 산다’와 같은)와 꽤나 일맥상통한다 느꼈던 탓이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프로듀서형의 젊은 아티스트들을 주로 보유한-그리고 ‘매직스트로베리사운드’의 서브레이블인-‘피치스레이블’의 로스터에 이름을 올리면서 오핑의 ‘공식적인’ 음악가로서의 삶이 시작되었다. 이 즈음에 알게 된 새로운 사실은 그녀가 당시에 회사원이었다는 것, 그리고 정식 음악 교육을 받은 적이 없이 그저 대학 시절에 재미삼아 아이패드에 깔린 개러지밴드를 뚝딱거리며 놀던 것이 음악을 시작한 계기라는 것이다. 친구들과 낄낄대기 위해 장난스럽게 하던 ‘놀이’로서의 창작이 차츰 심화되어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는 사실, 심지어 이렇게 좋은 멜로디와 노랫말을 쓰는 괜찮은 음악가로 발전했다는 사실은 솔직히 꽤나 놀랍다. 여하튼 2017년 여름, 첫 싱글 ‘Birthday Harlem’을 시작으로 그녀가 사운드클라우드에 습작으로 올렸던 곡들은 하나둘 매무새를 정돈하고 정식으로 세상과 차근차근 만나게 되었고 그때부터 2018년 봄까지, 약 일 년여의 기간 동안 두 개의 싱글과 두 개의 더블-싱글을 릴리즈하며 더딘 듯하지만 꾸준한 행보를 착실하게 이어왔다.
마지막 싱글이었던 ‘Mushroom Wave’로부터 약 6개월 정도의 시간이 지나 공개된 오핑의 첫 번째 EP [Journey] 역시 사운드클라우드를 통해 이미 공개했던 다섯 곡의 노래를 가다듬어 수록하고 있는데 그녀 특유의 매력이 여전하다. 일상의 어떤 풍경, 경험들이 모티브가 되어 빚어진 담백하지만 페이소스가 있는 노랫말, 소파에 푹 파묻혀 혼잣말을 중얼거리듯 덤덤하게 뱉어내는 보컬, 귀에 잘 들어오는 멜로디를 낭만적으로 그리는 신스팝적인 사운드 등이 밸런스를 갖추며 ‘오핑’ 고유의 느슨한 바이브를 만들어낸다. 알 듯하면서도 도무지 모르겠는 것 투성이인 인생의 단면들과 그 속에 들어있는 자신의 모습을 그리며 복잡한 속내를 드러내는 ‘Summer Journey’를 시작으로 자신을 ‘물 속에 잘못 들어간 기름 한 방울’에 비유, 이른바 군중 속의 고독에 대해 이야기하는 ‘Ollie’, 유일하게 세션(드럼, 베이스)을 동원해 작업한 트랙으로 개인적 추억의 대상인 검정개 ‘레고’(혹은 레오)에 대해 노래하는 곡 ‘검은개’ 등 일상 속 작은 희비의 편린들을 이야기하는 이 EP속 음악들은 저마다 조금씩 결이 다르면서도 전체적으로는 칠(chill)한 무드를 조성, 그 나름의 통일성을 획득한다. 그저 그녀 자신의 이야기인 그 노래들에 빠져들다 보면 어느 순간 ‘나 스스로의 이야기’로 다가오기도 하는데 사실 이런 느낌이야말로 종종 그 어떤 위로의 말들보다도 더 강력한 위로가 된다. 나와 비슷한 A가, B가, 혹은 E가 같은 하늘 아래 있다는 사실을 체감하는 것 말이다. 고단한 하루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소파에 푹 파묻혀 맥주라도 한 병 마시면서 들으면 좋을 음악, 오핑의 음악은 왠지 그런 음악이다.
“소울/훵크 음악 팬이라면 첫 곡 ‘Playaholic’부터 압도될 것이다. 곡이 시작되자마자 마치 ‘팔리아먼트-펑카델릭’(Parliament-Funkadelic)의 재림을 보는 듯 근사한 피펑크 그루브가 훅 치고 들어와 가슴을 뜨겁게 달군다. 피쳐링한 ‘김아일’의 영리함에 감탄할 수밖에 없는데 피펑크의 맛을 제대로 이해하고 최적의 퍼포먼스를 선사해 피쳐링의 역할을 200% 이상 수행한다.”
술탄 오브 더 디스코 Aliens 2018.10.30.
사실 조금 고민했다. 다시 한 번 ‘술탄 오브 더 디스코’(이하 술탄)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비교적 최근에 이들의 싱글 ‘미끄럼틀’에 대해서 한 차례 글을 썼고 거기서 이미 이 밴드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들을 적잖이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번엔 다른 음악가의 작품을 다루는 것이 형평성의 관점에서 맞지 않을까-하는 고민이 우선 하나, 그리고 이미 밴드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들을 꺼내 놓았기에 새 글에서 행여 동어반복을 하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고민이 또 하나. (심지어 그보다 좀 더 이전, 나잠 수 솔로 앨범에 대한 리뷰를 쓰면서도 술탄에 대한 얘기를 꽤 했다 **) 그러나 그럼에도 다시 한 번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이 앨범을 듣는 순간 내 마음 속에서 ‘올해의 앨범’이 정해졌기 때문이다. 무려 ‘올해의 앨범’, 그렇게까지 생각했다면 굳이 쓰지 않는 쪽이 차라리 이상하다.
첫 앨범 [The Golden Age]로부터 무려 5년, 많은 시간이 흘렀고 그만큼 다양한 경험을 차곡차곡 축적해왔을 것이다. ‘글래스톤베리’를 다녀왔고, 거물 프로듀서/엔지니어 ‘토니 마세라티’와 작업을 했으며 일본에서 앨범을 발매하기도 했다. 멤버들 각자의 음악 활동도 드문드문, 그러나 꾸준히 이어졌다. 새 앨범 [Aliens] 속에는 과연 이런 시간들의 흔적이 음악 구석구석에 묻어나 음악적으로 한층 성숙해지고 단단해진, 그야말로 ‘버전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술탄 오브 더 디스코’가 있다.
1집과 비교해 이 앨범을 바라봤을 때 단연 눈에 띄는 것은 확연하게 높아진 음악적 완성도. 사실 [The Golden Age]도 충분히 좋은 앨범이었고 이때부터 그들이 음악적으로 추구하는 바는 명백했다. 앨범 최고의 트랙이고 그 해 최고의 댄스뮤직 중 하나로 꼽을 만한 ‘의심스러워’나 쟁글쟁글한 기타와 브라스가 근사한 그루브를 자아내는 ‘캐러밴’ 등은 정말 근사한 트랙들이고 이 두 곡만 들어봐도 밴드의 음악적 정체성이 60-70년대 훵크(Funk), 소울, 그리고 디스코 음악에 있음은 분명해진다. 하지만 장르 음악 팬의 관점에서 앨범 전체를 바라봤을 때 조금은 설익은 듯해 살짝 아쉬운 부분이 없지 않았던 것 또한 사실. 더불어 이 시기의 술탄은 그 비주얼 만큼이나 음악 그 자체에서도 컨셉츄얼한 면이 더 도드라지는 면이 있었다. 이를테면 ‘요술왕자’나 ‘압둘라의 여인’같은 곡들에 담긴 해학적 오리엔탈 코드 같은 것들. 마치 ‘블랙스플로테이션’ 영화의 포스터 같은 앨범 커버처럼 이때의 술탄은 모든 면에서 ‘B급 정서’가 너무나도 확연한 밴드였다. *** 그에 비해 [Aliens]의 술탄은 굳이 컨셉트에 목매이지 않고 음악 그 자체에 집중하고 있다는 인상이다. 더욱 촘촘해지고 정교해진 편곡으로 빚어낸 밀도 높은 사운드는 여전히 폭발적인 에너지를 담고 있지만 이를 보다 효율적으로, 능수능란하게 컨트롤한다. 한층 단단하게 응집된 그루브, 되려 더욱 풍부해진 바이브, 과연 ‘진일보한 리듬의 서사’라 할 만하다. 이 괄목할 만한 사운드의 발전상은 이 밴드의 음악적 역량과 더불어 그들이 요리하는 장르들에 대한 이해도 역시 5년 전과는 비할 바가 아닌 수준으로 높아졌음을 확연히 느끼게 한다. 더불어 ‘김아일’, 뱃사공’, ‘SUMIN’ 등 ‘현재의 흑인음악’을 하는 아티스트들과도 함께 작업, 특유의 레트로 바이브에 현대적인 감각마저 더하고 있다. 1집의 첫 인상이 ‘와, 한국에도 이런 음악을 하는 밴드가 있네’라는 반가움이었다면 이 앨범은 한층 높아진 완성도로 듣는 내내 ‘와, 한국에 이런 음악을 이런 높은 수준으로 하는 밴드가 있다니!’라며 그저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연달아 감탄하게 된다. 한편 프론트맨 ‘나잠 수’의 존재감과 장악력은 이 앨범에서도 도드라진다. 대부분 트랙의 작사, 작곡, 편곡을 도맡았고 총 프로듀싱과 심지어 믹싱, 마스터링까지 직접 소화하며 예의 다재다능함을 뽐내고 있다.
소울/훵크 음악 팬이라면 첫 곡 ‘Playaholic’부터 압도될 것이다. 곡이 시작되자마자 마치 ‘팔리아먼트-펑카델릭’(Parliament-Funkadelic)의 재림을 보는 듯 근사한 피펑크 그루브가 훅 치고 들어와 가슴을 뜨겁게 달군다. 피쳐링한 ‘김아일’의 영리함에 감탄할 수밖에 없는데 피펑크의 맛을 제대로 이해하고 최적의 퍼포먼스를 선사해 피쳐링의 역할을 200% 이상 수행한다. 마치 ‘탱탱볼’의 최신 버전과도 같은 유쾌한 댄스 넘버 ‘통배권’에선 여전히 개구진 술탄을 만날 수 있어 반갑다.앨범 내에서 드물게 컨셉츄얼한 이 곡은 곳곳에 심은 디테일들이 그 맛을 한층 맛깔나게 살리는데 너무나도 어이없는 가사를 너무나도 천연덕스럽게 노래하는 술탄을 ‘리짓군즈’ 크루의 래퍼 ‘뱃사송’이 서포트, 곡의 익살스러움을 한껏 부스팅시킨다. 후렴이 ‘꿘이야 꿘이야 꿘이야 통배권’이라니, 그러나 이 황당한 노랫말의 후렴구는 한 번 듣고 나면 입에서 계속 맴도는 강력한 중독성을 지니고 있다. (글을 쓰는 지금도 흥얼거리고 있다)
귀에 착 감기는 세련된 그루브 위로 스산하고 멜랑콜리한 무드가 가득한 ‘사라지는 꿈’은 1집 이후 음악적 고뇌로 방황했던 나잠 수 개인의 솔직한 심경을 고스란히 담아내는 곡으로 ‘작가의 내밀한 면’을 음악에 드러낸다는 점이 흥미롭고 앨범에서 유일하게 나잠 수가 아니라 ‘SUMIN’(수민)이 작사/작곡한 발라드 넘버 ‘미끄럼틀’은 클래식 소울의 정취와 현대의 트렌디한 알앤비의 감각을 생각치도 못한 방식으로 결합하는 파격을 선보인다. 한편 싸이키델릭한 사운드와 뜬금없는 ‘김간지’의 랩(?)이 인상적인 술탄식의 일렉트로닉-댄스 넘버 ‘로켓맨’ 또한 이 앨범에서 가장 흥미로운 트랙 중 하나이고 ‘커티스 메이필드’(Curtis Mayfield) 풍의 시카고 소울 음악을 뼈대로 여기에 오만가지 것들이 다 결합해 탄생한 듯한 기괴하고도 선 굵은 곡 ‘갤로퍼’는 추억의 명차(?) 갤로퍼에 대한 뜨거운 찬양이다. ‘Manic Depression’이나 ‘깍두기’의 흥겨운 에너지 가득한 펑키 사운드와 그루브는 흡사 ‘릭 제임스’(Rick James)의 그것처럼 쫀득쫀득 차지기 그지없다.
솔직히 ‘놀라운’ 수준의 앨범이고 글의 서두에서 밝혔듯이 내 마음 속 확고한 올해의 앨범이다. 더불어 이 얘기도 해야겠다. 술탄의 음악적 코어 ‘나잠 수’는 언제나 ‘가장 좋아하는 한국 아티스트’ 중 한 사람이었는데 이 앨범을 기점으로 티어가 바뀌었다. 이제 그는 ‘가장 존경하는 한국 아티스트’ 중 한 사람이다. 이거 궁서체다.
*** 블랙스플로테이션(Blacksplotation): 블랙스플로이테이션(Blaxploitation)은 1970년대 전반에 미국에서 생겨난 영화 장르이다. 주로 교외에 사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대상으로 만들어진 엑스플로이테이션 영화이며, 이름의 유래는 “black”과 “exploitation”의 합성어이다. 블랙스플로이테이션 영화는 흑인 배우들이 주연으로 하며, 사운드트랙에 펑크와 소울 음악을 사용했다. [출처: 위키백과]
“새 싱글 ‘머물러줘’는 유독 AOR, 혹은 시티팝적인 바이브가 진하게 느껴지는 곡이다. 본인이 추구하는 음악의 성향과 최근의 시티팝 유행이 시기적으로 적절하게 맞물려 나온 결과물이라는 느낌을 주는 이 곡은 앞서 간단히 언급한 이런 스타일 음악의 전형적인 매력들을 모두 담고 있는데 기타, 일렉 피아노, 신스, 드럼 등이 어우러지는 풍성한 사운드와 그루브, 매끈하게 잘 빠진 캐치하면서도 세련된 멜로디 라인, 알앤비 베이스의 유려한 팝 보컬이 적절한 밸런스로 오디오를 빼곡하게 채우며 넘실댄다.”
nokdu 머물러줘 2018.10.31.
글의 시작부터 아주 솔직한 얘길 한 가지 하자면, 사실 최근 몇 년간 꾸준히 이어지고 있는 시티팝(City Pop) 유행에 유독 별다른 감흥이 없었던 편이다. (물론 들으면 좋긴 하지만) 몇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주된 이유는 그저 그것이 나에게 딱히 ‘새로울 것이 없는’ 음악이기 때문이었다. 이미 어릴 때부터 이런 풍의 음악들을 충분히 많이 들어왔던 것이다. 게다가 한때-대략 20대 초반부터 30대 초중반까지-광적으로 모든 시대의 알앤비 음악을 디깅하던 시기가 있다는 점도 한 몫을 했다. 이 시기에 특히 즐겨들었던 음악들 중엔 AOR(Adult Oriented Rock)과의 접점이 큰 음악들, 이를테면 ‘Kool & The Gang’, ‘Earth Wind & Fire’(우린 흔히 ‘지풍화’로 불렀다), 혹은 ‘Bobby Caldwell’ 등의 음악도 있었고 이것들은 지금도 내 음악 취향에서 상당한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 결국 AOR의 영향을 크게 받은 ‘시티팝’이라 불리는 음악들의 무드, 사운드, 형식은 내겐 너무나 익숙한 것이었고 그래서 굳이 디깅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더불어 요즘의 내가 일본 음악을 왠지 잘 안 듣게 된다는 점도 하나의 요인이라면 요인이려나.
여하튼 사운드도, 그루브도 모두 풍부하고 여기에 도회적인 세련미가 뚝뚝 떨어지는-현재의 시점으로 보자면 ‘고급진 레트로’라 칭할 법한-이 부류의 음악들은 내겐 언제나 애정의 대상이었기에 최근 국내에서도 ‘레트로’가 하나의 트렌드가 되어 젊은 음악가들 사이에서 이런 뉘앙스를 재현하고자 하는 움직임들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는 현상은 꽤나 반갑고 또 흥미롭다. 더불어 이 글을 통해 소개할 아티스트 ‘nokdu (녹두)’ 또한 같은 맥락에서 최근 나의 시선을 잡아 끌고 있다.
‘nokdu’(이하 녹두), 이름이 무척 재미있는데 사실 현재의 시점에서 그리 많은 이들에게 알려진 아티스트는 아니다. 지난해부터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서 다양한 노래들을 복고적인 무드로 재해석한 커버 영상들을 꾸준히 공개해오다가 올해에 들어와 비교적 짧은 기간 사이에 세 장의 싱글을 연이어 공개했다. 송라이팅과 보컬, 프로듀싱까지 두루 소화하는 셀프-프로듀싱 싱어송라이터라는 점, 80년대의 알앤비, 훵크 음악들에서 영감을 받은 음악을 만든다는 점 등이 여기까지의 활동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의 전부다. 아, 또 한 가지. 아주 좋은 보컬리스트다. 레코딩, 라이브 그 어느 쪽에서도 훌륭한 모습을 보여준다.
새 싱글 ‘머물러줘’는 유독 AOR, 혹은 시티팝적인 바이브가 진하게 느껴지는 곡이다. 본인이 추구하는 음악의 성향과 최근의 시티팝 유행이 시기적으로 적절하게 맞물려 나온 결과물이라는 느낌을 주는 이 곡은 앞서 간단히 언급한 이런 스타일 음악의 전형적인 매력들을 모두 담고 있는데 기타, 일렉 피아노, 신스, 드럼 등이 어우러지는 풍성한 사운드와 그루브, 매끈하게 잘 빠진 캐치하면서도 세련된 멜로디 라인, 알앤비 베이스의 유려한 팝 보컬이 적절한 밸런스로 오디오를 빼곡하게 채우며 넘실댄다. 개인적으로는 이 곡을 들으면서 한국식 시티팝의 모범적 사례라고 생각하는 임재범의 90년대 노래 ‘이 밤이 지나면’을 언뜻 떠올리기도 했다. 여하튼 레트로 알앤비를 좋아하는 리스너들에게도, 시티팝이나 AOR 음악을 사랑하는 리스너들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을한 여지가 충분한 좋은 곡으로 얼마 남지 않은 이 해가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올해의 가장 기분 좋은 발견 중 하나로 녹두를, 그리고 이 노래를 꼽게 될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