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리고 강력한, 그대가 반드시 주목해야 하는 93/94년생 신예 뮤지션
*오늘도 젊은 우리는, 어리고 서툰 만큼 거칠게 빛난다.
아는 것보다 알고 싶은 것이 많은 나는 유통사 생활 2년차의 94년생 막내. 故 유재하, 故 김현식과는 같은 공기를 마셔본 적도 없고, 전자양이 ‘아스피린 소년’으로 무대에 오르고 넬(NELL)이 1집 [Reflection Of]로 데뷔를 알리던 해에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한국 대중음악씬에서 두고두고 회자되는 뮤지션들의 등장을 매번 놓쳐 아쉬운데, 설상가상으로 그나마 살아온 스물 두 해 남짓의 절반을 해외에서 보내고 나니 정서적으로 이만한 국제 미아도 없다.
카세트테이프, CD를 거쳐 디지털 음원의 홍수 속에 살면서도 다시금 바이닐에 기웃거리는 우리. 격변하는 시대 속에서 자란 젊은 뮤지션들의 앨범에 묻어나는 연륜의 맛은 덜할 수 있어도, 과감한 시도와 변화의 흔적은 단연 독보적이다. 좋은 앨범은 추천되어야 마땅하다는 생각에 욕심이 앞서지만, 10여 년에 걸친 업계(유통사) 경력의 대선배들의 어마어마한 데이터베이스, 넓은 식견과 연륜의 깊이를 보면 아직도 마냥 압도되고 만다. 팔불출 정신을 기반으로, 그저 ‘좋다’는 것 이상의 디테일을 앞세우지 못했던 나에게 또래 뮤지션들의 앨범은 나로 하여금 더 좋은 표현, 더 많은 공부를 꿈꾸게 하는 신선한 자극제이다.
1. 신세하 <Timeline>
Egyptian Lover의 리믹스 트랙이 수록된 신세하의 가장 최근 발매작 <Timeline>은 그간 쌓아온 그의 내공을 엿볼 수 있는 싱글이다. 지난 여름, 브루클린에 갔다가 레코드샵 사장님들과 공원에 널브러져있던 사람들로부터 신세하 앨범들에 대한 피드백을 받는 동영상을 찍었었다. ‘라운지 음악’, ‘도도한 빨강이 떠오르는 음악’, ’80년대 훵크(Funk)의 현대판’ 등 각양각색의 코멘트가 나왔다. 그의 앨범 커버 한 장을 가지고도 아날로그부터 디지털 세대까지 모두를 아우르는 현재 음악 시장에 대한 이야기까지 대화가 이어졌고, 고작 20대 초반의 나이에 이런 작품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에 수많은 ‘wow’가 쏟아졌다. 과거 캐스퍼 인터뷰를 통해 고교시절 래퍼 김아일과 함께 Prince, Parliament, Sly & The Family Stone와 같은 뮤지션들의 음악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전한 신세하. 그의 뮤직비디오 한 편만 보아도 그가 받았다는 영향은 현재 그의 캐릭터와 스타일링에도 뚜렷이 드러나는데, <Timeline>도 역시 예외는 아니다.
2. 오존(O3ohn) <[O]>
오존에 대한 나의 첫 기억은 신세하의 밴드 크루 <Xin Seha And the Town>의 기타리스트로써의 모습이다. 자연스레 오존의 음악도 올드스쿨, 훵크(Funk) 혹은 뉴웨이브 사운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웬 걸! 그가 듣고 자랐다는 언니네 이발관이나 한희정, John Mayer 등 국내외 여러 싱어송라이터들의 음악 못지 않은 따뜻함을 가진 데뷔작을 내놓았다. 포근하게 몽롱한 사운드와 거칠지만 정제된 보컬의 조화가 두드러지는 [O]. [O]를 듣게 된다면 그의 친절한 앨범 소개글 또한 놓치지 말 것!
3. 위수 <내일도 또 내일도>
그루비한 리듬에 맞춰 까끌한 음색으로 한껏 멋을 내는 보이스가 오디션 프로그램의 성행과 함께 좋은 보컬의 새 기준으로 통하는 요즘이다. 화려한 애드리브와 폭발적으로 치고 올라오는 성량에 박수를 치는 걸 보면 3분짜리 노래에도 각본이 확실한 드라마가 필수 요소가 된 것만 같다. 이 획일된 유행이 참 못마땅했는데, 마침 옥상달빛의 청아함과 요조의 차분함이 떠오르는 앳되고 맑은 목소리의 위수를 알게 되었다. 조곤조곤 말을 건네듯, 미세한 그 떨림들까지도 고스란히 담긴 앨범 <내일도 또 내일도>. 축가를 모티브로 써내려갔다는 이 노래를 듣고 있자면 결혼을 앞둔 설렘이 정말 나에게까지 울리는 기분이 든다. 어째서 남녀 보컬이 주고받는 듀엣보다 더 달콤한 건지, 더 황홀한 건지. 물론, 그 느낌 그대로 드러나는 커버도 한 몫 하지만 말이다. 단 한 곡의 데뷔 싱글이었지만, 그렇게 나는 앞으로 있을 위수의 발매작들을 기다리게 되었다.
4. 예서 <Bud>
보물같은 신인 뮤지션들의 선공개 트랙이 올라오는 네이버 뮤지션리그에서 얼마 전 시끌시끌했던 예서의 화제의 신보다. 개인적으로는 국내 퓨쳐(Future) 계열의 씬(scene)이 하루 빨리 몸집을 키웠으면 하는 마음이 컸기에 이처럼 젊은 뮤지션들이 조금씩 등장하는 모습이 굉장히 반갑다. 나의 사운드클라우드나 유튜브 재생목록을 훑고 있자면 지독히도 전자음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취향이 그대로 드러나는데, 이상하리만큼 국내 뮤지션을 찾아보기가 어려운 건 항상 의문이다. 일부러 국내 뮤지션들을 제하고 찾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섣불리 판단할 수는 없겠지만 아무래도 현재 음악 시장의 규모에 비해 이쪽 동네의 인구수가 적어서가 아닐까 싶다. 만드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사운드클라우드에서는 이미 익히 알려진 그녀이기도 하고, 칠(Chill) 계열의 아티스트들 중 가장 좋아하던 Odesza의 에스닉한 사운드와 Giraffage의 청량함이 떠올라 내심 반가웠던 <Bud>. 요즘 떠오르는 퓨쳐 베이스 신예 IMLAY(예서와 동갑내기)의 리믹스 트랙은 또 어떤지! 듣는 내내 아득하고 싱그러운 분위기에 취할 수밖에 없는 싱글이다.
5. 이설아 <네가 곁에 있었으면 해>
노래를 듣기 전, 자연스레 눈에 들어오는 것들이 있다. 이를테면 앨범 커버라든가, 아티스트의 프로필 사진 같은 것들 말이다. 이 일시적인 선입견을 바탕으로 막연하게나마 머릿속에 그려놓은 그림이 와장창 깨지던 것 중 하나가 <네가 곁에 있었으면 해>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앞서 싱글로 발매한 <별이 내리는 길목에서> 역시 커버만 보고 간질거리는 발라드를 예상했었다. K팝 스타나 유재하 음악경연대회에서는 듣지 못했던 우리의 소리(?)가 들리던 순간, 같은 이설아가 맞나 싶을 정도로 나름의 파격적인 변화가 느껴지던 앨범. 월드뮤직이나 국악과 같은 장르 등에서나 나올 법한 오리엔탈 요소로 가득 찬 <네가 곁에 있었으면 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신선한 충격이 반가운 것은, 이런 담대한 변화가 어색하기는커녕, 앞으로 이설아가 보여줄 넓은 스펙트럼의 음악이 기대되기 때문이 아닐까.
6. 실리카겔 <실리카겔>
일 년 전 진짜 실리카겔 팩에 CD를 끼워 피지컬로 발매한 EP를 보고 극강의 신선함을 느꼈던 나는 앨범을 기다리며 이 음악을 정의하는 방법에 대해 열심히 고민했다. 우리나라에서 슈게이징과 포스트록은 다른 장르에 비해 비교적 생소한 축에 드는데, 그와 동시에 자칫 어렵게 느껴질 수 있는 이 음악들을 쉽고 간결하게 소개하고 싶은 욕심이 생긴 것이다. 여러 장르나 스타일 등을 인용하는 소개에 대한 욕심(혹은 능력). 하지만 <실리카겔>의 발매 자료를 처음 받던 날, 그 욕심은 단번에 무너졌다. 점심을 먹고 트랙 하나하나를 들어보며 서서히 체하고 있던 것을 기억한다. 앉은 것도 누운 것도 아닌 자세로 의자에 몸을 ‘얹어’ 한 시간 가량 나의 영과 혼을 우주에 맡긴 기분이었다고나 할까. ‘어땠어?’라는 물음에 그저 ‘좋은데요..’라고 답하던 나 자신이 참 답답했다. 지금도 그렇듯, 간결하고 멋지게 표현하는 것이 어려웠던 나의 페이스북에는 결국 (비참하게도) ‘<실리카겔>을 듣고, 누워서 우주로 가버렸다’는 류의 궁핍한 감탄이 올라갔다. 하지만 이런 멋진 앨범들이 꾸준히 나오는 한, 나의 표현도 조금씩 성장할 것을 믿는다. 뮤지션들이 주는 ‘해석’이라는 의도치 않은 숙제는 매번 어렵지만, 또 매번 재밌다는 것을 알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