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URED

[Deep Inside] 마녀. 아름답고 매혹적인, 그러나 치명적인.

발행일자 | 2017-01-04

Deep Inside #1 CIFIKA, A Space Witch Rises


마녀.
아름답고 매혹적인, 그러나 치명적인.
그 치명적인 매력으로 나를 사로잡아 주문과 마술로 내 영혼을 앗아가는 마녀.

정말 드물게 <마술>, 혹은 <주술>의 이미지를 풍기는 음악을 하는 아티스트를 만나게 될 때가 있다. 그리고 그 대상이 여성일 경우, 나는 종종 ‘아, 꼭 마녀 같아’라는 생각을 한다. 아주 오래 전, 네오-소울 아티스트인 ‘에리카 바두(Erykah Badu)’의 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 그때 난생 처음으로 ‘마녀’라는 이미지를 떠올렸던 것 같다.

‘씨피카(CIFIKA)’ 역시 그랬다.
그녀는 돌연 나타났다. 마치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어딘가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가상의 세계(인터넷)에서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가상의 악기로 창조한 가상의 소리 위에서 느슨한 춤사위를 펼치는 몽롱한 목소리는 정말 모처럼 ‘마녀’의 이미지를 연상케 했다.

‘씨피카(CIFIKA)’는 한국의 전자음악가다.

CIFIKA. 뭔가 의미가 있을 듯하지만 사실 아무 의미도 없는, 그저 이름이다. 미국에서 오랜 시간을 지낸 그녀가 Pacifika Avenue(퍼시피카 애비뉴)를 지나가다 문득 ‘퍼시피카’에서 ‘퍼’를 빼보니 그 어감이 마음에 들어 자신의 이름으로 삼았다고 한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고 현재는 서울을 거점으로 창작활동을 하는 그녀는 2015년, 온라인 음악 플랫폼인 ‘사운드클라우드’에서 처음 등장했다. ‘Cali Vibe’, ‘Race’, ‘Ed Rusch’ 등 인상적인 소품들을 연이어 공개했고 한국 전자음악 씬의 라이징 스타 ‘임레이(Imlay)’와 작업한 싱글 ‘Ritual’, 역시 한국의 비트뮤직 프로듀서인 ‘그레이(GRAYE)’와 작업한 미니멀한 사운드의 댄스 트랙 ‘D.A’ 등을 연이어 공개하면서 공격적이다 싶을 정도의 왕성한 창작욕을 드러냈다. 이후 2016년 6월, 현재의 레이블인 ‘써드 컬쳐 키즈(Third Culture Kids)’를 통해 첫 싱글 <OOZOO>를 정식으로 발매했다.

전자음악 씬에서 흔치 않게 비트 메이킹과 보컬을 동시에 하는 싱어송라이터 아티스트다. 그녀의 정체성이 비트를 만드는 보컬리스트인지, 노래를 하는 비트메이커인지 잠시 고민했지만 이내 그녀에게 이 두 가지는 별개의 것이 아닌, 하나로 어우러져 ‘씨피카의 노래’로 귀결되는 매우 동등한 비중의, 그리고 상호적인(interactive) 작업이 아닐까-라고 짐작하게 되었다.

사운드 만큼이나 매력적인 가사를 쓴다. 한국어와 영어를 혼용하는 그녀의 가사는 단순한 듯하지만 어떤 힘이 있다. 직설적이면서 은유적이다. 뚜렷한 이미지가 있는 듯하면서 동시에 추상적이기도 하다. 특히 우리말 표현들이 이따금씩 날카롭게 번득이며 뇌리를 직격하는데 이는 그녀의 음악이 제공하는 일종의 쾌감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나는 원래 파도처럼 휩쓸리는 스타일이라 너처럼 날 이끌어줄 누군가가 필요해”

<CIFIKA / Cali Vibe>

 

어쨌거나 분명한 것은 그녀는 ‘뭔가 있는’ 아티스트라는 거다.

익히 알려졌듯 영국 유명 잡지 ‘Dazed(데이즈드)’가 씨피카의 곡을 비(非)아이돌로는 유일하게 ‘이달의 K-Pop’으로 꼽았다는 사실, 영국의 영향력 있는 음악 채널 ‘Eton Messy(에톤메시)’가 씨피카의 곡을 국내 뮤지션 최초로 소개했다는 사실, 그리고 최근 내한한 서브트랙트(SBTRKT), 블러드오렌지(Blood Orange)의 무대 오프너로 그녀가 연이어 등장했다는 사실까지. 본격적으로 음악을 시작한지 1년이 조금 넘은 이 아티스트에게 이렇게까지 쏟아지는 관심들엔 이유가 있을 터. 해답을 찾고자 한다면 이제 막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 그녀의 첫 미니앨범 <INTELLIGENTSIA>가 하나의 단초가 될 것이다.

총 여섯 곡을 수록한 <INTELLIGENTIA>는 하나의 일관된 컨셉트 아래 기승전결의 구조를 지녔다기보다는 그녀가 작업한 각각의 노래들을 엮은 모은 일종의 ‘소품집’이다. 그녀 스스로도 이 앨범에 대하여 “내가 가지고 있는 가시적인 물음과 비가시적인 물음들을 장르나 컨셉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푼 앨범이자, 나의 첫 번째 음악모음집”이자 “음악가로서의 새로운 시작이자 다음 앨범을 위한 연습의 기록”이라 언급하고 있다. UK개러지(UK Garage), 하우스, 퓨쳐-베이스(Future Bass), PBR&B 등을 넘나들며 장르에 구애 받지 않는 각각의 트랙들은 저마다 확연하게 다른 텍스쳐에도 불구, 그녀 특유의 부유하는 듯한 보컬과 몽환적인 무드가 도드라지는 사운드 하에서 어떤 일관성을 갖는다.

미국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여정을 ‘과거에서 미래로의 여행’으로 비유하며 그 여정에서 느끼는 다양한 감정들을 노래하는 첫 곡 ‘AFTER USA’는 UK개러지(UK Garage) 성향의 트랙으로 신비감을 조성하는 인트로의 신쓰, 미니멀한 사운드와 리듬의 개러지, 복잡하게 중첩되는 전자음, 역시 다양한 형태로 레이어드되는 보컬 등이 다양한 형태로 변주와 충돌을 거듭하며  청각을 자극, 보편적 대중음악을 감상할 때와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청취의 즐거움을 선사한다.

이어지는 ‘I’M AWAKE’는 앞서의 곡보다 보다 뚜렷한 멜로디와 리듬을 지닌, 작품 내에서 가장 팝적인 성향을 지닌 곡이다. 귀에 잘 들어오는 매력적인 멜로디, 심플하지만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이게 되는 경쾌한 하우스 리듬, 몇 겹을 포개 신비로운 무드를 연출하는 보컬이 어우러지는 이 곡은 “거친 편견들에 둘러싸여 멋진 품격들을 우린 놓쳐”라 말하며 ‘허상 밖에 있는 진정한 나’를 누군가가 발견해주길 바라고 있다. 팝의 DNA가 선명해 설령 전자음악에 친숙하지 않더라도 누구나 즐겁게 감상할 수 있는, 캐치한 멜로디와 흥겨운 리듬을 두루 갖춘 잘 만든 댄스 음악이다.

일렉트로닉, 트립합, PBR&B 사이를 넘나드는 트랙 ‘My Ego’는 탐미적, 관능적인 분위기가 일품으로 앨범의 메인 타이틀곡으로 낙점된 곡이기도 하다. 본작의 공동 프로듀서로 참여, 상당수 트랙의 편곡을 담당한 비트메이커 ‘무드슐라(Mood Schula)’가 함께 프로듀싱한 이 트랙은 흡사 ‘FKA Twigs를 연상시키는, 뇌쇄적이며 초현실적인 섹시함으로 가득하다. 마치 ‘몽마(Succubus)’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되는 요염한 주술적 매력, 내가 씨피카에게서 느낀 ‘마녀’의 이미지는 아마도 이 노래에서 비롯된 것 같다. 트랙 만큼이나 강렬한 비주얼을 선사하는 뮤직비디오도 반드시 감상해보길 권한다.

 

 

혼란에 빠진 자기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와도 같은 곡인 ‘Light & Vision’은 테크하우스(Tech House)의 형식과 무드를 적극적으로 차용한다. 앨범 전체를 통틀어 가장 차갑고 기계적인 사운드로 숨가쁘게 내달리는 이 곡은 리들리 스콧의 고전 디스토피아 영화인 ‘블레이드 러너’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하는 음습함, 그리고 불안함으로 가득하다. ‘공각기동대’, ‘아키라'(!!!!), ‘매트릭스’ 등 사이버펑크, 디스토피아 작품들의 장면들을 떠올리며 감상해보는 건 어떨까? 분명 색다른 청취의 재미가 있을 것 같다.

‘OOH-AH-OOH’는 개인적으로 이 소품집의 하일라이트로 꼽는 곡으로 앨범에서 유일하게 ‘사랑’을 주제로 다루고 있는 서정적인 일렉트로닉 알앤비 트랙이다. 달콤하고, 다정하고, 또 섹시하다. 몽글몽글한 일렉트로닉 사운드와 코러스엔 환상적인 분위기가 가득하고 씨피카의 보컬은 특유의 부유감 가득한 목소리로 그 위를 느슨하게 떠돌며 무드를 고조시킨다. 이런 그녀와는 정 반대의 결로, 보다 선명하고 예쁜 음색으로 노래하는 미국 출신의 보컬리스트 ‘두브(DUVV)’의 달콤한 보컬, 그리고 씨피카의 레이블 동료인 래퍼 ‘제이비토(jayvito)’의 멜로딕한 랩의 가세는 이 노래의 알앤비 풍미를 한층 짙게 하는 적절한 스파이스가 되고 있다. ‘지구 밖, 그러니까 달 근처 즈음에서 무중력 상태의 우주를 유영하며 지구를 바라본다면 이런 느낌일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곡이다.

“내가 널 쳐다보면 널 / 깊이 날 보지 않아 넌 / 왜, 왜 보지 않니 넌 왜, 왜 보지 않니 넌”

<CIFIKA / Intelligentsia>

앨범과 동명의, 그리고 앨범의 마지막 악곡인 ‘Intelligentsia’는 계몽적인 메시지를 담은 UK개러지 스타일의 감각적인 댄스 넘버다. 리드미컬하게 진행되는 미니멀한 사운드 속에서 씨피카의 노랫말은 ‘넌 어째서 보려 하지 않지?’라는 물음을 던지며 편협함에 갇힌 사람들의 인지확장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 본인의 음악이 그들의 닫힌 마음을 열게 될 것이라는 의지의 피력. 이제 막 커리어를 시작한 젊고 재능 넘치는 음악가가 갓 세상 밖에 내놓은 처녀작의 마침표로 일말의 손색이 없다.

 

마녀.
아름답고 매혹적인, 그러나 치명적인.
그 치명적인 매력으로 나를 사로잡아 주문과 마술로 내 영혼을 앗아가는 마녀.
마녀는 이제 당신의 꿈 속에 나타나 그녀의 주문으로 당신의 눈과 귀와 마음을 열려고 한다.
<INTELLIGENTSIA>는 그 매직 스펠의 단지 첫 구절일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