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ep Inside #4
신해경. 강렬한 정서적 화학반응의 촉매제를 제조하다.
“좋은 팝을 만드는 건 진짜 대단한 재능 아냐?”
이건 뭐랄까, 술자리에서 내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 중 하나다. 이따금씩 지인들과 음악-그리고 음악을 둘러싸고 있는 여러 가지 것들-에 대한 잡담을 한다. 그들 중엔 음악을 업으로 하는 이들도 많고 또 음악을 좋아하는-더러는 ‘병적으로’ 좋아하는-이들도 꽤나 많다. 아마도 그래서 나랑 친한 거겠지만. 아무튼 이들과 맥주라도 가볍게 한 잔 하다 보면 음악 이야기가 나오는 건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어서 서로가 근래에 좋아하는 음악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고, 공통의 화제인 음악에 대해서 의견 교환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자리에서 종종 얼큰히 취한 나는 목소리에 힘주어 강변하곤 한다. “구조적으로 잘 만들어진 음악은 일정 정도 노력의 영역 내에서 달성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좋은 팝의 선율을 만들어내는 건 그야말로 타고난 ‘재능’의 영역”이라고.
‘어? 이건 누구지?’
‘영기획(YOUNG,GIFTED&WACK)’의 하박국 대표님이 2017년의 릴리즈 계획이라며 메일을 보내주신 것이 올 1월 중순 즈음이다. 발매 계획과 더불어 몇몇 아티스트들의 데모 음원도 함께 담고 있는 메일을 찬찬히 뜯어 읽다 보니 익숙한 이름들, 또 반가운 이름들(몇몇 영기획 아티스트의 열렬한 팬이다) 사이 왠지 생소한 이름 하나가 눈에 띈다. 호기심이 일었다. 그래서 메일에 첨부된 여러 개의 데모 음원 중 하필 그의 음악을 가장 먼저 다운로드했고 재생했다. 지금까지 내가 들어봤던 ‘영기획’ 소속 음악가 그 누구의 것과도 결과 속성이 다른 음악. 이 음악을 만든 낯선 음악가의 이름은 ‘신해경’이라고 했다.
‘신해경’
2014년, ‘이상의 날개’의 리더 ‘문정민’이 주도해 제작한 컴필레이션 <(음악단편집) 2014 가을호>에 ‘The Mirror'(더 미러)라는 예명으로 ‘언젠가’라는 곡을 수록하면서 처음 음악 씬에 등장했다. 이듬해인 2015년, 몇 개의 싱글을 산발적으로 발매했는데 사실 근래 화제가 된 노래인 ‘모두 주세요’의 원형 역시 이 시기에 발매했던 싱글 중 하나다. 귀에 잘 들어오는 선율, 기타 사운드의 활용 등은 이때에도 여전하지만 곡의 곳곳에 장치한 다양한-더러는 과하다 싶을 정도의-디테일들을 보면 ‘The Mirror’는 시퀀싱을 활용하는 방식에서 ‘신해경’과는 사뭇 차이가 있다.
<The Mirror / 너의 살롱> MV
2015년 3월에 공개된 ‘The Mirror’의 첫 싱글이다.
이미 본인이 몇몇 미디어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것처럼 ‘신해경’은 시인 ‘이상’과 다양한 지점에서 연결된다. 우선 ‘신해경’이라는 예명(본명이 아니다)은 이상의 본명 ‘김해경’에서 따온 것이다. 그 전의 예명인 ‘The Mirror'(더 미러) 역시 이상의 시 ‘거울’에서 가져왔다. 하물며 내가 지금 이 글을 쓰게 된 원인이 된 <나의 가역반응>이라는 음반의 제목 역시 이상의 초기 작품 중 하나인 ‘이상한 가역반응’에서 그 제목을 가져온 것이니 여기까지 알고 나면 그가 이상의 열렬한 팬일 것이라 예측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하지만 반전. 정작 본인 스스로는 이상을 그렇게까지 광적으로 좋아하거나 하는 것은 아니란다. 단지 고교 시절에 이상 전집을 읽었을 뿐이라고.
덧붙여 하나 더. 그는 앞서 언급한 ‘이상의 날개’의 리더 ‘문정민’과 깊은 관계가 있는데 두 사람은 음악적 사제지간이다. (‘날개’ 역시 이상의 대표작이며 ‘이상의 날개’의 ‘이상’ 역시 이 의미까지 포함한 중의적 표현이다)
신해경
<나의 가역반응>
이 앨범을 들은 첫인상은 글의 서두에 쓴 문장과 매우 동일하다. ‘좋은 팝을 만드는 건 진짜 대단한 재능’이라는 내 생각은 이 음반에 담긴 노래들을 반복해 들으면서 더욱 공고해졌다. 적당히 자글거리는 노이즈의 퍼즈 기타 톤, 가상의 공간 어딘가를 부유하는 듯한 이미지를 제공하는 공간감과 노스탤지어를 한껏 자극하는 아련한 사운드의 결, 이런 특징들이 노이즈팝, 슈게이징,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My Bloody Valentine), 요 라 텡고(Yo La Tengo) 등의 키워드들을 많은 이들의 머릿속에 자연스레 소환해내는 가운데 정작 나를 가장 매료시키는 이 음반의 미덕은 ‘좋은 선율’이었다. 통속적인, 보편적인 정서에 호소하여 정서적 화학반응을 일으키지만 호소하는 방식이 결코 촌스럽지도, 유치하지도 않은 멜로디의 매력이 또렷한데 사실 이것이야말로 시대를 넘어 꾸준히 사랑 받는 ‘잘 만들어진 대중가요’의 첫 번째 조건 아닐까 싶다 더욱이 이 매력은 시종 ‘그대’를 갈구하는 여리고 애틋한 노랫말에 의해 한층 증폭된다. 온전히 우리말로만 쓰여진 노랫말들엔 근래의 대중가요에서 거의 실종되다시피 한 시적 은유가 가득하다. <나의 가역반응>은 이렇듯 멜로디와 노랫말 모두 섬세히 가다듬어진, 그야말로 ‘잘 만들어진 팝’ 음악의 매력이 가득한 작품이다. 마치 문학소년이 사랑하는 소녀를 위해 단어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 정성스레 세공하여 마침내 써낸 시적이고 로맨틱한 연애편지처럼.
다분히 개인적인 감상이라 동의하지 않는 이들이 더 많을 법도 한데 신해경의 음악에는 언뜻언뜻 ‘유재하’를 떠올리게 하는 지점들이 있다. 마침 올해는 고인의 30주기가 되는 해이기도 하다. 내가 떠올리는 유재하의 음악들은 대체로 한국적인 통속성과 세련된 팝의 어법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아름다운 노랫말도. 유재하의 음악들이 이토록 오랜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추억되고 사랑 받는 이유들이라 생각하는데 개인적으로 신해경의 음악에서 그런 면들을 보았다. 오래도록 사랑 받는 좋은 대중가요, 팝의 속성들 말이다.
<유재하 / 사랑하기 때문에>
이 유려한 선율과 섬세한 편곡이 겨우 1987년 작품이란 것을 믿을 수 있겠는가.
첫 곡 ‘권태’에서부터 이런 면이 잘 드러난다. 부드럽게 귀를 간질이는 달콤한 기타의 선율과 유약한 신해경의 희미한 보컬이 귀에 스미며 자연스레 음반의 시작을 알리는 이 곡은 첫 후렴에서 극적으로 사운드가 고조되는 구성으로 순식간에 몰입도를 끌어올린다. 터져 나오는 기타 사운드와 리듬이 한바탕 몰아친 뒤 다시 고요가 찾아오면 저도 모르게 참았던 숨을 탁 뱉게 될 정도의 텐션. 이런 드라마틱한 구성법은 이 음반 전반에서 반복적으로 사용된다. ‘넌 나의 순간이 돼요 / 잠시 왔다 갔지만’, ‘넌 나의 숨결이에요 / 숨도 쉽지 않지만’ 같은 시적 운율을 갖춘 노랫말 역시 신해경의 음악적인 특징을 명료하게 드러내는 부분이다.
‘권태’의 후반부가 다시금 폭풍처럼 몰아치다 잠잠해진 후 노이즈 가득한 기타 선율의 ‘몰락’이 일관된 정서를 이어간다. (실제로 이 앨범은 타이틀곡 ‘모두 주세요’를 중심으로 구성된 컨셉트 앨범이며 CD로 들으면 여섯 트랙이 간격 없이 이어 재생된다) 자글자글한 기타 노이즈 위로 부유하는 신해경의 노래는 아련함 그 자체인데 대구법을 적극적으로 활용, 크게 세 단락으로 구성된 각각의 절들을 모두 동일한 어조로 구성한 노랫말은 그가 작사 역시 많은 공을 기울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돌연히 치고 들어와 분위기를 환기시키는 간주의 선명한 기타 솔로, 이어지는 리듬의 변화가 재미있는 곡이기도 하다.
“그대와의 혼돈
아니, 그대만의 황혼
꿈은 이젠 아득해요
무뎌진 많은 기쁨엔
그대가 항상 함께였는데
이 공포감, 그댄 아나요?
아니, 모를 거야”– <몰락> 중
이윽고 이 음반의 백미인 ‘모두 주세요’. 제목에 풍기는 뉘앙스처럼 낭만이 넘실대다 못해 콸콸 넘쳐버리는 노래로 온라인에서 목격되는 뜨거운 반응들이 그저 당연하게 느껴질 만큼 너무나 좋은 노래다. ‘좋다’라는 말이 다분히 주관적인 표현임에도 불구하고 달리 어떤 말을 더하는 것이 그저 군더더기로 느껴질 만큼.
이 노래의 후렴구야말로 앞서 언급했던 이 음반 수록곡들의 전반적 특징인 ‘드라마틱한 구성’의 에센스라 할 만하다. 점차 고조되며 후렴구에서 절정으로 휘몰아치는 강렬한 기타 사운드가 “너의 [눈]과 [입]과 [몸]과”를 힘주어 부르는 유약한 팔세토 보컬과 결합되는 순간의 격정, 그러나 이내 사그라들며 다시금 조용히 ‘그대의 슬픔까지 다 내게 줘요’라 읊조리는 꿈결 같은 아련함의 대비는 강렬한 청각적, 감성적 쾌감을 전한다. 곡 자체의 드라마틱함, 그리고 ‘그대’를 갈구하는 화자의 감정의 고조, 모든 면에서 음반의 정점을 이루는 곡이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2017년에 들은 한국 노래들 중 제일 ‘쩐다’. 적어도 내게는 확실히 그렇다.
<신해경 / 모두 주세요> 공식 뮤직비디오
목가적인 분위기가 물씬한 담백한 포크송 ‘잊었던 계절’은 마치 일종의 인터루드(Interlude) 트랙으로 느껴질 만큼 음반 전체에서 다소 이질적인 뉘앙스의 곡이다. 음반의 하이라이트를 이루는 ‘모두 주세요’의 바로 뒤, 그리고 전체 구성 중 중반부에서 후반부로 향하는 지점에 배치된 만큼 일종의 ‘환기’를 위한 장치적 요소로도 기능하는 곡이 아닐까 싶다. 대구, 각운이 명료한 노랫말 속 ‘제라늄의 꽃말을 잊어갈 때’ 같은 가사는 과거 한국 포크 가요들이 품고 있던 풋풋한 낭만을 자연스레 상기시킨다.
“제라늄의 꽃말을 잊어갈 때
만발하는 순간이 지나갈 때
잊었던 계절이 돌아와요”– <잊었던 계절> 중
격정적인 기타 노이즈와 허밍을 동반한 후렴구가 뚜렷한 임팩트를 제공하는 ‘다나에’는 아름다운 선율과 특유의 극적 구성이 가장 먼저 귀를 잡아끌 테지만 노랫말에 반드시 귀 기울이길 권한다. 리버브 잔뜩 걸린 보컬이 전하는 이 노래의 노랫말 속엔 낭만적인 시적 은유가 가득하다.
“차가운 내 몸에 그대는 세상 같아 네 품에 무너질래
이렇게 흔들린 난 찾아온 애틋함에 온몸이 물들었네”– <다나에> 중
아, 음반 <moves>로 2017 한국대중음악상에서 ‘최우수 댄스 & 일렉트로닉 음반’ 부문을 수상한 젊은 전자음악가 ‘키라라’가 이 노래를 경쾌하고 산뜻한 댄스뮤직으로 탈바꿈시킨 리믹스 버젼도 아주 흥미롭다.
<신해경 / 다나에 (Kirara REMIX)>
마지막 노래 ‘화학평형’은 수록곡 중 가장 긴 6분대의 곡으로 겹겹이 쌓아 올린 풍부한 기타 노이즈와 부유감 가득한 보컬이 어우러져 광활한 노스탤지어의 세계를 빚어내는 아름답고 장중한 악곡이다. 중반부와 후반부에서 이 미지의 세계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내달리는 가슴 뭉클한-마치 프로그레시브 록의 그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는-기타 솔로가 이 곡의 백미로 6분여의 재생시간 중 상당한 부분을 여기에 할애하고 있다. 딜레이를 듬뿍 먹어 축축한, 그러나 또렷한 선율을 빚어내는 기타 사운드는 마치 안개 자욱한 숲 속을 꿰뚫는 한 줄기 빛처럼 느껴진다. 그야말로 ‘대미를 장식한다’는 느낌이 확고한, 더할 나위 없는 마침표로 기능하는 곡이다.
<나의 가역반응>은 사운드의 질감과 곡의 구성 등에서 확실히 ‘전자음악’보다는 ‘록’의 어법에 가까운 음악이다. 전자음악 레이블로 알려진 ‘영기획’이기에 어쩌면 이후로도 이 레이블의 카탈로그에서 가장 이질적인 작품으로 기억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영기획 하박국 대표님의 코멘트처럼 이 음반은 ‘다른 영기획 음악가처럼 신해경 혼자 집에서 미디와 시퀀싱을 이용해 만들어’졌다. 더불어 영기획의 많은 아티스트들이 장르적 문법과는 별개로 ‘팝’으로서의 매력도 충분한 작품을 꾸준히 만들어내고 있다는 점을 상기시키고 싶다. (대표적으로 필자가 열렬히 사랑하는 ‘Room306’이 있다) 이 레이블의 팬으로서 이토록 아름다운 선율과 소리를 빚어내는 젊고 재능 있는 음악가의 합류가 그저 반갑고 감사할 따름이다.
끝으로 영기획 소속의 전자음악가 ‘FIRST AID(퍼스트 에이드)’가 리믹스한 ‘모두 주세요’를 링크하며 글을 맺는다.
<신해경 / 모두 주세요 (FIRST AID REMIX)>
P.S.
글을 마무리하는 지금 시간은 오후 11시 45분, 아직 사무실이다. 곧 집으로 가는 택시를 잡아 탈 것이고 양화대교를 건너 동네로 향할 것이다. 늦은 밤의 양화대교를 건너면서 ‘화학평형’을 감상하면 꽤 근사한 기분을 맛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Editor / 김설탕
sugarules@poclanos.com
(‘Deep Inside’ 코너의 모든 글은 에디터의 개인적 주관을 반영한 것으로 본사의 공식적인 입장과는 일절 무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