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기억하는 알앤비는 2000년대 초반의 신파극에 가까웠던 구구절절한 발라드 알앤비다. 사랑이 죄가 되고 순애보가 전설로 남는, 사랑이 뭔지도 몰랐던 초등학생의 나조차 가만히 듣고 있자면 무언가 가슴 깊숙이 뭉글뭉글 올라오던, 알앤비 가요 말이다. SG워너비, 휘성, 거미, 박효신 등 그 특유의 알앤비 창법과 폭발적인 가창력을 갖춘 여러 뮤지션들이 가요 무대에 오르면 구석 어딘가에서는 포그머신이 스모그를 뻐끔거리고, 노래가 끝나면 노래 속에서 못다 이룬 사랑의 한으로 가득 찬 가슴을 부여잡고 노래방으로 달려갔다.
10여 년이 흐르면서 많은 것이 바뀌었다. 시대가, 정서가, 사랑방식이 더 이상 예전과 같지 않다. 밥은 잘 먹는지, 잠은 잘 자는지 소식이 궁금해 애태우던 마음들은 은근슬쩍 ‘떠보기’식의 밀고 당기는 마음들에 자리를 내주었다. ‘쿨’을 지나 ‘칠chill’에 더 가깝다. 힙합과 트랩이 유행하면서 자연스레 알앤비 리듬에 얹히는 가사의 양이나 속도도 눈에 띄게 많고, 빨라졌다. 소재도 더 다양하다.
멜로디와 소울, 그루브, 예전만큼 신파적이지는 않은 스토리텔링까지 모두 갖춘 오늘의 리듬과 블루스를 소개한다.
01. DUVV <WITH YOU IN MIND>
타이틀곡 없이 발매하려 했지만, 결국 한국의 리스너들을 위한 최소한의 가이드로 타이틀 곡 선정을 앞두고 잠시 고민을 하던 그녀는 뉴욕 출신의 알앤비 보컬리스트이자 싱어송라이터 DUVV다. 트랙 하나하나 일곱 팀의 서울 로컬 프로듀서들과 함께하며 그녀만의 대담한 시도는 더욱 빛을 발했다. 전혀 연고가 없는 한국에서, 이제 막 무럭무럭 몸집을 키우기 시작한 언더그라운드 알앤비 씬에서 그렇게 툭 나온 것이 <WITH YOU IN MIND>. 신에게 올리는 사이렌과도 같은 소름끼치는 인트로와 브릴리언트(BRLLNT), 문이랑(MOON YIRANG), 타마 로즈(Tama Rhodes) 등의 프로듀서들과 함께한 트랙들을 지나면 가창이 없는 마지막 트랙에 이른다. 보컬은 두 말 할 것 없고, 각 트랙의 완성도는 그저 감탄스러울 뿐이다. 개인적으로는 올해의 최고 R&B 넘버로 꼽는다.
02. COTT <D2ep>
일년 전에 나온 COTT의 데뷔 싱글이다. 따뜻하고 깊다. 과하지도 넘치지도 않는 두 개의 트랙 뒤에는 과한 여운이 밀려온다. 애써 동요하려하지 않는 듯 보이지만, 사랑과 인간 관계에 늘 크게 흔들리는 듯한 앳된 소년의 목소리는 오늘의 알앤비 정서를 대변한다.
03. 비니셔스(Vinicius) <Sailing>
에스닉한 전주를 지나 본격적인 트랙이 시작되는 구간에서 한 번 흠칫한다. 이런 그루브를 지닌 프로듀서가 또 있었나 싶은 생각이 가장 먼저 스치고, 곧장 다른 디스코그래피를 훑어 보며 기발매 이력이 있는지 확인해본다. 놀랍게도, <Sailing>은 비니셔스(Vinicius)의 이름으로 낸 최초의 음악이었다.
04. Jimmy Brown <She Lovin’ It>
Chris Brown의 성을 따올 정도로 흑인음악에 큰 영향을 받은 그는 흑인 음악 특유의 분위기와 본인의 색깔을 잃지 않으려 하는 따끈따끈한 신인, Jimmy Brown. 대담하게 달려드는 듯한 느낌보다는, 수줍게 툭툭 뱉어내는 모습에 더 가깝다. 티피컬한 힙합 알앤비의 전형이라고 보아도 무방한 이 데뷔 싱글을 뒤로, 또 어떤 음악이 나올지 기대된다.
05. 리코(Rico) <Everything>
국내서 흔치 않은 알앤비의 발라드 성향 하위 장르인 ‘슬로우잼(Slow Jam)’에 특화된(?) 아티스트, 리코(Rico). 제13회 한국대중음악상 최우스 알앤비/소울 앨범부문 및 노래부문에 모두 노미네이트 되기도 했던 <The Slow Tape>의 그다. 최근 제리케아(Jerry.k)의 흑인음악 레이블 ‘데이즈얼라이브(Daze Alive)’에 합류하며 그 동안의 작업물들이 정식 발매작으로 쏟아내기 시작했는데, 그 중 가장 최근 싱글인 ‘Everything’은 리코 (Rico) 특유의 호흡이 인상적인 싱글이다. 리코에 대한 더 자세한 이야기는 얼마 전 김설탕의 ‘Deep Inside’ 연재에 실린 적 있다.
06. 구원찬 <반복>
발매된 지 이틀을 막 지나고 있는 R&B 신인 구원찬의 데뷔 EP <반복>. 밴드 실리카겔의 보컬 김한주가 타이틀곡 ‘행성’의 뮤직비디오에 출연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화제성도, 프로모션 하나 없이 조용히 나온 발매작이지만 벌써부터 반응이 뜨겁다. 음절 하나하나에 또박또박 음을 부여하는 가창도 아니고 랩도 아닌, 멜로디, 소울, 그루브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 요즘식 총체적 알앤비의 전형이랄까. 아차, ‘Sweether’는 ‘sweeter’의 오탈자가 아니다. ‘Sweet’과 ‘Her’를 붙인 단어란다. 역시 알앤비다.
Editor / 김은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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