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CLANOS PICKS _ 여백의 음악
미니멀리즘이 유행처럼 번지던 때는 꽤 지났다. 의도적으로 맥시멀리즘을 좆는 이도 종종 보이는 요즘이다. 음악도 마찬가지 아닐까. 빈틈없이 메워진 3분 가량의 트랙에는 온갖 악기로도 모자라 더 많은 가창, 더 많은 피쳐링, 더 많은 콜라보를 다투듯 싣곤 하니 말이다. 뮤지션들 간의 활발한 교류와 음악의 다채로움은 늘 반갑지만, 어딘가 속 빈 강정과 같은 연말이 다가올 땐 여백에 충실한 음악이 그리워지기도 한다.
이번 편에서는 여백이 두드러지는, 느리고 따뜻한 여섯 개의 앨범을 소개한다.
- 강태구 <그랑블루 / 내 방 가을>
‘자연의 송가’라는 것이 있다면, 아마 그건 강태구의 음악일 것. 늘 자연에 기대어 유한함과 고독을 노래하던 그가 <그랑블루 / 내 방 가을>로 돌아왔다. 언제 들어도 각 트랙 속 배경이 그려지는 입체감 넘치는 가사는 여전하고, 압도적인 몰입감의 깊고 짙은 중저음 보컬 역시 한결같다. 조금씩 파고를 높이는 밀물처럼 더해지는 가사들과 그 뒤 잔물결처럼 이는 기타 소리, 서글피 울리는 바이올린 소리가 멎으면 은은하게 울려퍼지는 하울링이 담긴 ‘그랑블루’. 기교없이 담백한, 한국 정통 포크의 미감을 담은 ‘내 방 가을’. 11월 23일 음반으로 발매되는 강태구의 첫 앨범이 너무도 궁금해진다.
- 시와 <완벽한 사랑>
그 누구도 완벽한 사랑의 무게나 생김새를 알려준 적 없었다. 아마 그것은 ‘앎’의 영역 밖의 것이 아닐까. 그저그런 사랑에도 젬병인 이 세상에서 완벽한 사랑을 꿈꾸는 것은 곧 욕심이요, 망상이니 싶다가도, 간절히 무지개를 좇는 아이마냥 완벽한 사랑을 갈구하는 시와의 목소리를 들으면, 그 어딘가 아직 내가 디디지 않은 곳에 완벽한 사랑이 있을 것이라 믿고 싶다.
- Needle&Gem <34N125E>
에릭 홀로 이끄는 Needle&Gem의 두 번째 싱글 <34N125E>. 귀를 스치는 모든 요소 하나하나들은 뽀얗고 무거운 어딘가에서 부유하고 있을, 오늘도 심연 속에서 숨 쉬는 이들을 위한 것. 그들의 깊은 침묵의 시작과 함께 항해를 멈춘, 가슴 저 아래에 고이 덮어둔 작고 고귀한, 어떤 마음을 간질이는 트랙.
- 사람또사람 <이유는 없다고 했어>
포크 팝 듀오 사람또사람은 간혹 계절 별미와 같은 의외의 싱글들을 발매하고는 한다. 슈게이징에 가까운 몽환적인 ‘우주’가 그랬고, 올망졸망한 신디사이저 사운드가 별처럼 쏟아지는 ‘리셋버튼’이 그랬다. 심심한 도입부를 지나 심장 박동 소리를 연상케하는 구간에 이르면 ‘우주’와 ‘리셋버튼’을 처음 들었을 때의 놀라움 비슷한 무언가가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한다. 아무 이유 없이 이별을 통보 받은 오건훈의 이야기는, 또 이토록 아름답게 승화되어 우리의 귀에 울리게 되었다.
- 홍갑 <감기>
일상이 아닌 이야기를 하는 뮤지션이 어디 있을까 싶을 정도로 소소함 가득한 음악들이 넘쳐나는 요즘이다. 그 중 ‘일상적임’의 갑을 꼽자면 당연 홍갑이다. 이번에는 감기다. 감기에게 말을 건네는 듯한 이 귀엽고 앙증맞은 전개는 홍갑 특유의 미소년스러운 보컬을 더욱 앳되게 만들고, 트랙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지배하는 어떤 권태로움은 그 누구도 당해내지 못할 정도로 단연 압도적이다.
- 김사월 <7102>
김사월의 음악은 늘 감탄스럽고, 어렵다. 전혀 몽환적일 것 없는 악기로 몽환을 만들고 맑은 보컬로 퇴폐를 완성하는 그녀 음악의 메커니즘도 어려웠지만, 문학적 상상력이 뛰어나지 않은 나로서는 그녀가 사뿐사뿐 내뱉는 가사도 어려웠다. 이것들이 그토록 어려웠던 까닭은 김사월의 라이브를 단 한 번도 제대로 본 적 없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7102>를 들으며 떠올랐다. 단 한 번도 한 공간에서 소통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어려웠던 것이다. 그녀가 노래할 때의 표정과 제스처를 본 적 없기 때문에, 노래가 끝나고 나서의 그 수줍은 감사를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깔끔한 믹싱으로 가공된 음원만 붙들고 ‘소통’을 기대했던 나 자신이 민망해지던 앨범. 정말 오랜만에 만나보는 그녀의 신곡들로 가득 채워진 <7102>에서, 나는 또 그렇게 새삼 깨닫고 감탄한다.
Editor / 김은마로
eunmaro10@poclano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