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기동 단편선 [백년](2012) / [처녀](2013) 스트리밍 서비스 시작에 부쳐
“현 세태에 대한 (끼어들지 못하는) 관찰자로서의 메마른 감성을 가득 담고 있다. <이상한 목>의 점증되는 불안정성과 파괴적 이야기로 풀어내는 스토리텔링, 극단적인 변화로 곡의 주제를 효과적으로 전하는 <소독차>의 괴이함은 여태껏 ‘루저의 정서’를 불렀다고 알려진 어떠한 국내 포크 뮤지션보다 더 신선하다. (…) 음악인의 욕심이 효과적으로 전달된 몇 안 되는 앨범 중 하나이며, 이는 과장된 감정 전달로 듣는 이를 불편하게 만드는 주류 팝에서는 기대하기 힘든 수준에 가닿아 있다.” ― 이대희(프레시안), [백년]에 관해
“삶의 고단함과 비애의 정조가 어떠한 여과 없이 돌출된다. 특히 폭탄이 터지는 듯한 그의 목소리는 그 자체의 위력으로 아방가르드한 음악 세계를 뛰어넘어 정치적인 성격마저 띤다. (…) 회기동 단편선의 재능이 일체 망설임 없이 폭발하는 음반이다.” ― 오공훈(weiv), [처녀]에 관해
2006년, 회기동 단편선이란 이름을 짓고 공연을 시작했다. 2007년 3월 입대하기 전까지 1년가량 홀로 통기타를 치며 노래했다. 전역 후인 2009년부터 다시 활동을 재개했다. 2013년부터 단편선과 선원들이란 밴드를 조직, 2017년까지는 주로 밴드로 활동했다. 지금은 개인의 창작활동보다는 스스로 세운 독립음악 프로덕션 오소리웍스를 통한 음반 제작에 주력하고 있다.
[백년]은 2012년 4월 24일에 발매되었다. [처녀]는 이듬해인 2013년 6월 28일에 발매되었다. 2022년은 [백년]이 발매된 지 10년째 되는 해다.
[백년]과 [처녀]는 발매된 이래 국내외의 메이저 유통망을 통해 서비스된 적이 없다. 메이저 플랫폼에 대한 거부감과 배타적 권리로서의 저작권 체계에 대한 비판의식 때문이었다. 현재도 그에 대한 저항감이 없다 할 순 없다. 그러나 사람들이 음악을 향유하는 현재의 주된 방식을 마냥 무시하는 것도 꼭 옳은 방향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마침 [백년]의 LP를 제작하자는 제안이 있었다. 남의 돈으로 하는 일에 폐 끼치기 싫었다. 이 음반을 기억하는 이가 이제는 몇 없을 것 같다는 걱정에 조금이나마 도움되는 일을 하고자 했다. 타협에 대한 초라한 변명이다.
[백년]의 발매 10주년을 맞아 메이저 플랫폼에서의 서비스를 시작한다.
[백년]을 만들던 시점, 갓 이십 대 중반에 접어든 젊은 아티스트였던 나는 그간 살아오며 채집하고 익힌 소리를 모두 담아낸 걸작을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스튜디오에서의 레코딩 경험이 거의 없던 내게는 그 모든 과정을 원하는 수준으로 통제해낼 역량이 없었다. 역량의 부족은 한계로, 그러나 장점으로도 작용했다. 의도를 넘어선 불균질함이 그대로 녹아들며 쾌와 불쾌를 오가는 묘한 색채감이 형성되었다. 걸작은 아니더라도, 대신 괴작에 가까운 무언가가 완성되었다. 음반 전반에 걸친 가족과 유령에 대한 테마와 더불어, 이 색채감은 이후 이어진 작업들의 잠재적 기원이 되었다.
[처녀]는 매우 급하게 만들어진 음반이며, 보다 더 괴작에 가깝다. 《레코드폐허》라는 언더그라운드 음악 페어에 출품하기 위해 반쯤은 농담처럼 만들었다. 제작하기로 처음 결정하고 완성할 때까지 한 달이 채 걸리지 않았다. 은평구 신사동에 위치했던 좆밥합주실(실제 이름이다)에서 일주일 동안 먹고 자면서 마음대로 레코딩하고 믹싱해서 냈다. 대부분의 편곡은 즉흥적으로 만들어졌다. 무언가 달뜬 상태에서 몰아치듯 작업하던 당시의 상황이 음반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 아방가르드한 인디록, 인디포크에 가까웠던 전작에 비해 사이키델릭 록, 포크의 영향이 두드러졌다. 이는 [처녀] 발매와 거의 동시에 결성된 단편선과 선원들의 음악에 매우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비록 조악한 사운드지만 두 음반은 발매 당시 과분한 상찬을 받았다. 드문 괴작이기 때문일 것이다. 두 음반의 한계를 인정하는 동시에, 한편으론 지금 시점에 들어도 기이한 음반을 만들어냈다는 점에 대한 자부를 가진다. 자신이 자신의 작업을 기이하다 평하는 게 자신으로서도 이상하나, 자기 것도 오래 두면 자기 것처럼 안 느껴지기 마련이다. 이 음악들은 당시까지 형성된 취향의 어쩔 수 없는 반영이기도 하다. 괴작으로서의 선명함을 지닌 이 음반들에 나는 어쩔 수 없는 애정을 느낀다.
아티스트라는 직군을, 세계를 만들어내는 사람이라고 아주 오랫동안 정의해왔다. 그런데 그 세계는 없었거나, 없거나, 없어졌거나, 이후로도 없을 세계다. 우리는 픽션을 쓰고 그 픽션은 대부분 현실화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마음에는 남는다. 세계를 바꾸는 것은, 그럼에도 마음이다. 매우 잠재적으로, 그리고 매우 점진적으로. 이 두 음반에 수록된 곡들은 그 과정에서 산화되어 흩어진 픽션 조각들이다. 이 조각들은 단편선과 선원들, 그리고 이후의 작업들과도 알게 모르게 연결되어 있다. [백년]은 자립음악생산조합, 인혁당(인디혁명당의 준말)의 명의로 발표되었다. 나 또는 동료들과의 집합, 특히 사라진 조직인 자립음악생산조합이 만들고자 했던 없던, 없는, 없어진, 없을 세계를 듣는 분들이 조금이나마 이해 또는 양해해주셨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잘못을 바로 잡으며 글을 마무리 짓고자 한다. [백년]과 [처녀]를 포함한 작업 전반에서 섹슈얼한 심상을 여러 방식으로 활용해왔다. 성sex은 인간사의 아주 오래된 테마인 탓에 섹슈얼한 심상을 활용하는 자체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창작자에겐 이를 어떤 방식으로 다룰 것인지 예민하게 살필 책무가 있다. 그 책무를 다하지 못했다.
[백년]에서 가장 알려진 곡 중 하나인 <오늘나는>은 “오늘나는술을마시면꼭여자에게추근덕대는”이란 구절로 끝난다. 노래의 전반적인 맥락에서 이는 ‘치근대지만 그 역시 오늘의 나’라는 식의 자조를 가장한 미성숙함과 폭력에 대한 옹호로 읽힐 여지가 있다. 픽션에선 다양한 캐릭터가 등장할 수 있다. 극의 전개를 위해 때로는 창작자가 추구하고자 하는 가치와 상반되는 인물이 등장할 수 있음을 폭넓게 인정해야 한다는 게 평소의 지론이다. 그러나 <오늘나는>은 자전적인 성격이 강한 곡이며, 때문에 화자를 창작자와 잘라내듯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술을 빙자해 자신의 실책을 정당화하는 행위는 언제건 지양되어야 마땅하다. 당시 인식의 한계가 명백했음을, 이로 인해 책무를 다하지 못했음을 노래와 함께 기록해두고자 한다.
모두에게 고마운 마음이다.
― 단편선 (음악가, 프로듀서)
작곡, 작사 _ 단편선
편곡 _ 단편선, 허민(1, 3, 7)
프로듀서 _ 단편선
공동 프로듀서 _ 정세현, 이재훈
서포트 _ 하박국
레코딩 _ 천학주 @다리밑스튜디오
믹싱 _ 허민, 양정민
마스터링 _ 강승희 @소닉코리아마스터링스튜디오
커버 디자인 _ 단편선
제작 _ 자립음악생산조합, 인혁당, 오소리웍스
음원 배급 _ 포크라노스
노래 _ 단편선
클래식 기타 _ 단편선(1, 3, 8)
포크 기타 _ 단편선(1, 2, 5, 6, 7, 10)
일렉트릭 기타 _ 단편선(1, 7, 10), 미장(2, 5, 7), 류태관(4), 이응태(4)
베이스 기타 _ 최우영(1, 2, 4, 7, 10)
키보드 _ 류지완(4)
드럼 _ 조인철(1, 2, 4, 7, 10)
큰북 _ 단편선(1), 백철(8)
노이즈 _ 용녀(3), 최정훈(3)
프로그래밍 _ 허민(3, 4, 7, 10) 단편선(3, 7)
샘플링 _ 단편선(1, 9)
휘파람 _ 단편선(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