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노스텔지어를 기반으로 업데이트된 정체성, 기쿠하시 정규 2집 [새로운 컴퓨터를 사는 기분] 발매 기념 인터뷰

발행일자 | 2026-09-04

 

노스텔지어를 기반으로 업데이트된 정체성, 기쿠하시 정규 2집 [새로운 컴퓨터를 사는 기분] 발매 기념 인터뷰

 

어린 시절 새로운 전자기기를 갖는 일은 꽤나 큰 사건이었다. 스스로 살 수 없던 물건을 오래 기다리고, 부모님을 설득한 끝에 마침내 손에 넣었을 때의 벅찬 마음. 포장을 뜯고 전원을 켜며 낯선 기능을 하나씩 알아가던 순간에는 마치 새로운 세계 하나를 얻게 된 듯한 설렘이 있었다. 어른이 된 지금은 쉽게 느끼기 어려워졌기에, [새로운 컴퓨터를 사는 기분]이라는 제목은 잊고 있던 그때의 감각을 자연스럽게 불러낸다.

 

기쿠하시의 음악을 듣다 보면 잊고 있던 장면들이 불현듯 떠오른다. 오래된 컴퓨터와 인터넷, 게임과 소설에서 비롯된 기억은 단순한 향수로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이야기와 사운드로 다시 태어난다. 과거를 재현하는 대신, 자신이 좋아했던 기억과 취향을 현재의 감각으로 다시금 조립하며 익숙하면서도 독특한 세계관을 만들어낸다.

 

1집에서 2집으로, 그리고 소년에서 남자로 돌아온 기쿠하시를 만났다. 처음 음악을 만들던 시절의 기억과 오래된 컴퓨터에 얽힌 추억을 되짚고, 두 번째 정규를 완성하는 동안 달라진 마음과 생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코인런드리를 빠져나와 컴퓨터까지 마련한 기쿠와 하시처럼, 실제 기쿠하시 역시 자신만의 다음 장면을 준비하고 있었다.

 


Q. 안녕하세요, 기쿠하시님. 자기소개를 부탁드려요.

 

안녕하세요, 이번에 정규 2집을 발표하며 소년에서 남자로 돌아온 기쿠하시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Q. “소년에서 남자로 돌아온”은 요즘 밀고 계신 자기소개 멘트일까요?

 

제가 나이가 좀 있는데 아직도 소년으로 불러주셔서 이렇게 소개하고 있어요. 그저 감사하고 기쁘지만 한편으론 죄책감이 듭니다. (웃음)

 

 

Q. K-POP 댄스 커버 영상을 인스타그램에 올리신 걸 봤어요. 춤 실력이 상당하시더라고요. 따로 춤을 배운 경험이 있으신가요?

 

아니요. 춤은 배운 적이 없어요. 옛날부터 아이돌 댄스 커버하는 걸 좋아해서, 사실 악기 연주보다 춤으로 먼저 무대에 많이 섰거든요. 중학생 때부터 댄스부와 밴드부를 병행하다가 점점 밴드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던 것 같아요. 당시 SHINee (샤이니)를 거의 최애 수준으로 좋아해서 ‘Lucifer’도 중학생 때, 외웠던 춤이에요. 지인들은 많이 봤던 모습일 텐데 처음 보시는 분들은 충격을 받으시더라고요. (웃음)

 

 

Q. 음악 활동과 더불어 춤추는 모습도 종종 보여주시는 이유가 있나요?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건 다 보여드리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실제로 춤 영상을 보고 저를 알게 된 분도 계시니까, 보여드려서 나쁠 건 없잖아요. 춤도 제 장기라고 생각해서 숨기지 않고 드러내려고 했는데, 요즘에는 조금 자제하고 있어요. 그걸로만 기억되는 건 또 아쉬워서요. 앨범을 낸 시기이기도 하니까 지금은 음악에 조금 더 집중해 주셨으면 하는 마음도 있고요.

 

 

 

Q. 작사, 작곡부터 연주, 편곡, 믹싱까지 대부분 직접 하고 계시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처음 음악을 만들기 시작한 건 언제였나요?

 

처음 음악을 만들기 시작한 건 군대에 입대했을 때였어요. 휴무 날이면 다들 축구를 하거나 게임을 했는데 저는 그런 걸 별로 안 좋아해서, 항상 비어 있던 상담실에 기타를 들고 가서 혼자 가사도 쓰고 음악도 만들었어요. 앨범 구상도 혼자 막 해보고요. 그때 희미하게 있던 ‘뭔가 만들고 싶다, 앨범을 만들고 싶다’는 열망이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 같아요.

 

 

Q. 5월쯤 [코인런드리 밴드연습] 바이닐 또한 발매가 됐는데요, 주변 반응은 어땠나요?

 

앨범 커버도 예쁘고, 알판 색깔도 커버랑 잘 어울려서 예상보다 많은 관심을 받은 것 같아요. 감사한 마음이고, 저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습니다. 주변에 몇몇 지인분들한테는 선물로도 드렸는데 굉장히 좋아하시더라고요.

 

 

Q. 기쿠하시 음악을 두고 ‘여름에 듣기 좋은 음악’이라고 말하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스스로도 본인의 음악에서 여름을 느끼나요?

 

1집이 완전히 여름을 노래하는 앨범이기도 했고, 주요 컬러가 블루였고, 가사에도 ‘여름’이라는 말이 많이 들어가서 그 이미지가 지금까지 이어지는 것 같아요. 그런데 이번 앨범은 여름에 발매했지만 저는 오히려 겨울에 들으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많이 하면서 작업했어요. 앨범 커버의 하얀 배경도 눈밭 같은 느낌을 생각했고, 겨울적인 가사나 포인트도 많이 넣어놨거든요. 여름에만 들어주시기에는 우리나라는 사계절인데 너무 아깝잖아요. (웃음) 지금은 여름 분위기로 즐겨주시고, 쌀쌀해지면 또 그 시기의 분위기에 집중해 들어주시면 좋겠어요.

 

 

Q. 그렇다면 정작 기쿠하시님이 가장 좋아하는 계절은 언제인가요?

 

예전에는 여름을 가장 좋아했어요. 즐거운 일이 많이 일어나기도 했고, 제가 데뷔한 것도 여름이라 그런지 낭만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이번 앨범 후반 작업을 하면서 산책을 정말 많이 했어요. 같은 음악을 계속 듣다 보면 객관성이 흐려지니까 밖에서 걸으면서 들었는데, 그때가 4~5월쯤이었어요. 좋은 날씨에 음악을 들으면서 걷는 게 너무 행복하더라구요. 뭔가 큰 성과를 이루는 것도 좋지만 소박한 일상을 즐기기 좋은 계절이 봄, 가을인 것 같아요. 요즘은 산책하기 좋은 계절을 가장 좋아합니다.

 

 

 

 

Q. 기쿠하시의 음악을 통해 일본을 떠올리는 분들도 계시더라고요. 이런 반응은 어떻게 받아들이고 계시나요?

 

이름이 ‘기쿠하시’라서 더 그렇게 느끼시는 것도 큰 것 같아요. 자연스러운 현상인 것 같지만 사실 저는 ‘기쿠하시’를 일본어라기보다 그냥 하나의 독립적인 단어로 봐주셨으면 하는 마음이 있어요. 유독 일본이라는 부분 하나에만 포커스를 짚어서 보는 반응이 조금은 아쉽달까요. 제 음악을 구성하는 수많은 요소 중 하나가 일본 문화라고 자연스레 인식해 주셨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Q. 실제로 일본에서 교환학생 생활을 하기도 했다고 들었는데, 원래부터 일본 음악이나 문화에 관심이 많았나요? 지금 음악을 만들 때도 당시의 경험이 영향을 준다고 느끼시나요?

 

그렇죠. (부)전공 자체가 일본 관련 학과였고, 교환학생을 가기 전부터 일상적인 회화나 자격증 같은 건 어느 정도 준비된 상태였어요. ‘일본에 가서 한번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다녀왔는데, 그때 여행으로는 느낄 수 없었던 다양한 생활감을 접하게 되면서 그 나라의 정서가 자연스레 스며든 것 같아요. 원래도 일본 콘텐츠를 많이 접하고 즐겼으니까 그런 경험이 음악에도 자연스럽게 묻어 나오는 것 같고요. 다만 록 음악 자체는 서양 음악으로 처음 접하기도 했고, 한국 인디 음악과 K-POP의 영향권에서 자라왔기 때문에, 제 음악이 일본의 영향만으로 만들어졌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Q. 사운드에서는 일본 음악의 색채가 느껴지지만 그동안 가사는 주로 한국어로 써오셨어요. 이번 앨범에서는 언어 사용에 변화가 있었나요?

 

이번 앨범에는 일본어 가사가 들어간 곡도 있어요. 이것 역시 일본을 의식하고 넣은 건 아니고, 여태까지 안 해본 다양한 나라의 언어로 가사를 써보자는 시도였어요. 확장해서 해석하자면 2번 트랙 ‘허니’라는 곡이 1번 트랙 인터넷과 이어지기 때문에 인터넷이라는 매체가 가진 인터네셔널한 특징을 살리자는 의도가 들어있었어요. 그래서 영어, 일본어, 한국어로 가사를 구성했는데 가사에 외국어가 들어가는 건 이번이 처음이어서 작사를 하면서도 외국 친구들이 이 곡을 들으면 무슨 생각이 들까하며 설렜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까 말씀드린 춤 이야기랑 비슷하게 ‘할 수 있는 걸 보여주면 좋은 거 아닐까?’ 하는 마음으로 작업했던 것 같아요.

 

 

 

 

Q. (인터뷰 당일은) 새로운 앨범이 발매된 지 2주 정도 지난 시점인데 어떻게 지내고 계시나요?

 

2집 단독 공연 라이브를 열심히 준비 중이고, CD도 제작 중이에요. 디지털 발매할 때, 같이 나와야 하는 것들을 시간이 없어 동시에 준비하기 어려워 이제 해나가고 있어요. 차근차근 준비하고 있습니다. 최근에 또 이번 2집에 대한 재밌는 반응을 많이 접하고 있어서 지금이 발매 이후 가장 즐기기 좋은 최적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 같아요.

 

 

Q. 이전 인터뷰에서 ‘2집이 있는 아티스트가 되고 싶다’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어요. 실제로 두 번째 정규 앨범을 발매한 지금은 어떤가요?

 

일단 굉장히 후련하고 뿌듯해요. 예전에 인생 첫 앨범을 내려고 유통사에 미팅을 간 적이 있는데, 음악을 본업으로 계속 이어갈 사람이라면 정규 앨범 두 장 정도는 발매해야 한다는 식의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 말이 기억에 남았거든요. 그래서 저한테 정규 2집은 이 신에서 살아남았다는 증거처럼 느껴져요. ‘제 음악 계속해 보겠습니다’라는 결심을 보여드리는 것 같고요.

 

또 앨범을 낸다는 건 아티스트의 업데이트 같아요. 1집을 냈을 때, 저를 알게 된 분들도 그사이 변했고 저도 많이 변했잖아요. 각자 음악 취향도 달라졌고요. 그런데 밖에서 보기에는 2집이 나오기 전까지 저는 계속 1집의 상태로 남아 있는 거잖아요. 이번 앨범으로 새로운 저를 한 번 업데이트해서 보여드릴 수 있다는 게 좋았어요. 리스너와 아티스트의 템포가 항상 같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 와중에 지금 저와 같은 시간을 써주시는 분들이 정말 감사하고 소중해요.

 

 

Q. 첫 앨범부터 정규 형태로 작품을 발표해 오고 있어요. 기쿠하시님에게 정규 앨범은 어떤 의미인가요?

 

첫 앨범을 싱글로 냈다면 지금보다 관심이 훨씬 미미했을 거라고 생각해요. 특히 알려지지 않은 인디 아티스트일수록 자기 색깔을 마음껏 보여줄 수 있는 정규 앨범이 가장 좋은 홍보 수단이라고 생각했어요. 현실적으로는 경제적인 이유도 있어요. 인디 가수는 앨범을 내는 데 돈이 부족하니까, 오히려 정규로 한꺼번에 내는 게 가성비가 좋아요. 사진도 비디오도 한 번만 찍으면 되잖아요. (웃음)

 

그리고 저한테 정규 앨범은 장편소설이나 한 편의 영화 같아요. 안에서 기승전결이 있고, 순서대로 들었을 때 느껴지는 포만감이 좋거든요. 그래서 앨범 단위의 작업을 선호하는 편이에요. 다만 그저 곡이 많거나 러닝타임이 길다고 무조건 좋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앨범에서 중요한 건 그 긴 호흡 안에서 곡들이 어떻게 유기적으로 맞물리느냐인 것 같아요.

 

 

 

 

Q. 1집을 만들 때와 2집을 만들 때, 음악을 대하는 태도나 마음에도 변화가 있었나요?

 

1집을 내기 전에는 오히려 조금 오만했던 것 같아요. 시장이나 밴드 신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몰랐으니까, ‘이 앨범을 내면 세상이 확 바뀌어버리는 거 아니야?’ 같은 근거 없는 자신감이 있었어요. 잘 모르니까 가질 수 있는 패기였던 거죠.

 

이번에는 이미 저를 아는 팬분들도 있고 주변 동료들도 있으니까 ‘사람들이 많이 좋아해 줄까?’라는 걱정이 더 컸어요. 기존의 인식이 있는 상태에서 새로운 앨범을 내면 누군가에게는 그게 부정적인 변화일 수도 있으니까요. 작업 환경도 1집을 내고 나면 많이 달라질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그대로더라고요. 유명한 밈 중에 ‘원래는 5평에서 작업했는데 지금은 4평에서 작업합니다, 감사합니다’ 이런 비슷한 게 있는데, 제가 그러거든요. 세상은 쉽게 바뀌지 않네요. (웃음)

 

 

Q. 그럼에도 1집에서 계속 가져가고 싶었던 부분과, 2집에서 새롭게 보여주고 싶었던 부분은 무엇이었나요?

 

계속 가져가고 싶었던 건 혼자서 하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독립적인 개성이었어요. 모든 악기 소리가 갑자기 어딘가로 빨려 들어간다거나 갑자기 곡 전체의 비트를 부숴버린다거나 하는 아이디어는 만약 밴드였다면 쉽게 나오기 힘들었을 것 같거든요. 음악 안에 있는 소스가 전부 제 것이니까 마음대로 비틀 수 있고, 그것이 혼자 하는 작업의 장점이라고 생각해요. 한 가지 장르나 사운드로 밀고 가기보다는 다양한 장면과 사운드를 보여주고 싶은 것도 1집과 이어지는 부분이고요. 즐거운 멜로디에 슬픈 가사를 쓰는 것도 그렇고요. 다른 점이라면 1집은 조금 더 푸릇푸릇하고 순수하고 달콤한 느낌이었다면, 이번에는 거친 느낌과 에너지를 더 부각하고 싶었어요. 단숨에 소화가 되는 음악보다 씹을수록 맛이 나오는 음악이었으면 했고요.

 

 

Q. 두 장의 정규 앨범을 만들고 나니 스스로 ‘이건 좀 기쿠하시답다’고 느끼는 부분도 생겼나요?

 

일단 음악을 어렵지 않게 만들려고 굉장히 노력하는 편이에요. 1집 때부터 말씀드렸는데, ‘부모님께도 좋게 들릴 수 있는 음악’을 만들고 싶어요. 이번에도 그걸 많이 생각했고요. 가사나 노래를 부르는 데 있어서 성별이 크게 느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도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그리고 ‘솔직 담백한’이라는 말을 정말 좋아하는데요. 보통 솔직하면 담백하기가 어렵고, 담백하면 상투적인 말만 하게 되기도 하잖아요. 그런데 둘을 같이 해내는 건 생각보다 엄청난 개성인 것 같아요. 제가 추구해 나가고 싶은 부분입니다. 거기에 ‘가오 부리지 않아도 되는 태도’ 또한 지켜나가고 싶네요.

 

 

Q. 기쿠하시의 음악은 장르적으로 한쪽에 딱 들어맞기보다는 여러 요소가 섞여 있는 것처럼 들리는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최근에 제 음악이 여러 면에서 ‘경계에 있는 음악’이라는 생각을 했어요. 제가 최근 나가는 페스티벌들의 라인업을 보면 서로 아티스트가 거의 안 겹치거든요. 원래는 이런 어중간한 위치를 가지는 것에 대해 스트레스가 있었는데 문득 제가 그 서로 전혀 다른 곳의 경계에 있다는 게 유니크한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부터 이런 위치가 마음에 들기 시작했어요. 하드코어한 음악을 듣는 사람도, 대중적이고 편안한 음악을 듣는 사람도 들을 수 있는 음악이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가끔 저를 소개할 때 한 장르를 딱 못 박아 소개하는 건 조금 겁이 나요. ‘기쿠하시는 그 장르는 아니지…’ 하시는 분들이 있을까 봐요. (웃음) 그래서 앞으로도 이런 유연한 위치를 조금은 더 유지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Q. 이번 앨범 제목이 [새로운 컴퓨터를 사는 기분]입니다. 기쿠하시님은 처음으로 ‘내 컴퓨터’를 갖게 된 순간을 기억하시나요?

 

가족이 다 같이 쓰는 가정용 컴퓨터를 샀을 때, 기억은 흐릿한데 대학생이 될 때, 처음 제 개인 노트북을 갖게 된 순간은 선명하게 기억나요. 아버지한테 계속 사달라고 졸랐는데 좀처럼 안 사주시더라고요. ‘그냥 PC방 가서 해라’ 하셨어요. (웃음) 그래서 엄마한테 ‘어떻게 하면 아빠가 사줄까?’ 하고 털어놨더니, 엄마가 아빠의 어릴 적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아빠도 어렸을 때, 텔레비전이 너무 갖고 싶어서 돈을 벌던 누나에게 편지를 썼고, 그 편지를 보고 누나가 텔레비전을 사줬다는 거예요. 엄마가 ‘너도 이 전략을 써봐라’ 해서 저도 아빠 가방에 노트북 그림까지 그린 편지를 넣어뒀죠. 얼마 안 가서 정말 노트북을 사 오셨어요. 그러면서 아빠가 ‘나도 어릴 때, 이렇게 텔레비전을 샀는데 너도 똑같다’라고 그 이야기를 다시 하시는 거예요. 엄마가 전수해 준 팁이라는 걸 아빠는 모르고 계셨고, 저랑 엄마는 서로 눈짓으로 ‘잘했다’는 신호를 보냈죠. (웃음) 그렇게 처음 제 노트북이 생겼는데 포장을 뜯고, 스티커를 벗기던 순간의 설렘이 아직도 기억나요. 뭔가 세상을 내 손에 가진 것 같은 느낌이랄까요. 그 기억이 이번 앨범 제목에도 큰 영향을 줬어요.

 

 

Q. 처음 갖게 된 개인 노트북은 당시 어떤 용도로 사용하셨나요?

 

영화도 보고 게임도 하고, 대학 생활에 필요한 이것저것을 많이 했죠. 그러고 보니 제가 처음 만든 노래도 그 노트북으로 만든 것 같아요. 1집 8번 트랙 ‘점근선’이요. 만들 당시에는 이미 노트북이 너무 구형이 돼서 작업 파일이 중간에 날아가기도 했는데, 처음으로 자작곡을 완성했을 때 정말 뿌듯했어요. 지금도 본가에 있는데 이제는 잘 안 켜져요. 그래도 못 버리고 가지고 있습니다.

 

 

Q. 오래된 물건을 계속 가지고 있게 되는 데에는 어떤 이유가 있나요?

 

저는 원래 물건을 잘 버리지 못하는 편인데, 그래서 지금 집이 거의 박물관 수준이에요. 기계도 못 버리고 인형도 잘 못 버리고, 옷도 잘 못 버려요. 물론 추억 때문에 남아 있는 것도 있는데, 사실 그냥 버리기는 아깝고 팔아서 용돈으로 쓰고 싶은데 파는 게 너무 귀찮아서 그런 것도 커요. 이제는 정말 이사를 하거나 뭘 버리거나 해야 할 것 같은 상황입니다.

 

 

 

 

Q. 이번 앨범 컨셉포토에 등장하는 레트로한 컴퓨터 박스는 어떻게 준비하신 건가요?

 

일단 오래된 컴퓨터를 골동품을 파는 사이트에서 구했어요. 작동은 안 하는 제품이고요. 그리고 컴퓨터의 디자인을 토대로 박스를 직접 제작했습니다. 저는 컴퓨터 자체보다 ‘큰 박스를 들고 집으로 돌아가는 마음’을 표현하고 싶은 게 컸거든요. 미술팀에 빙의해서 무지 택배 박스를 구해서 시트지를 직접 디자인하고 커다란 박스에 오려 붙였어요. 완성하고 나니 즐겁고 뿌듯한 작업이었습니다.

 

박스 디자인은 iMac G3 패키지를 많이 참고했어요. 그걸 들고 세운상가, 을지로에서 앨범 사진 촬영차 돌아다녔더니 어르신분들이 다들 쳐다보시더라고요. 한 분이 ‘이거 언제 거예요?’ 하셔서 직접 만들었다고 했더니 ‘100년 전 것처럼 보이네’ 하셨어요. 세운상가 어르신들께 인정받은 거죠. (웃음)

 

 

Q. 구형 컴퓨터에 대한 기억이 없는 10~20대도 [새로운 컴퓨터를 사는 기분]이라는 제목에 공감하고 있는데요. 이런 감각이 세대와 상관없이 통하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컴퓨터가 꼭 아니더라도 요즘 세대의 사람들도 새로운 전자기기를 사면 보통 그날만큼은 그 기계와 하루 종일 하루를 보내게 되잖아요. 초기설정을 한다든지 사용법을 익힌다든지 하는 적응 기간도 필요하고요. 그럴 때 저는 전자기기랑 내가 어느 정도 ‘교감한다’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과정에서 느끼는 설렘이나 즐거움에서 세대와는 상관없이 느껴지는 감각이 통하는 것 아닐까 싶어요.

 

 

 

 

Q. 1집과 2집 모두 인트로 트랙으로 시작하는데요, 앨범의 세계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느낌 또한 의도하신 건가요? 

 

맞아요. 생각해 보니 1집도, 2집도 인트로 트랙을 항상 마지막에 만들었어요. 이 모든 이야기로 들어갈 수 있게 하는 음악을 만들고 싶었거든요. 비슷한 맥락으로 저희 단독공연에서도 입장할 때 항상 입장 음악을 틀면서 입장해요. 그 순간만큼은 다른 세계로 여행하는 느낌이 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어요.

 

 

Q. 저는 인트로 트랙을 들으면서 디지몬이 진화하는 장면도 떠올랐어요. 디지몬 시리즈를 굉장히 좋아하신다고 들었는데 그 영향도 있었나요?

 

디지몬을 의도한 건 아니었어요. 제가 처음 생각한 이미지는 산뜻하게 막을 여는 이미지, 컴퓨터가 부팅되는 이미지, 그러다 인터넷이라는 어마무시한 공간으로 빨려 들어가는 이미지였는데… 확실히 디지몬의 진화 장면에서 항상 굉음의 기타 소리가 들린다는 점에서 공유하는 감상이 있는 것 같고, 컴퓨터나 인터넷 같은 키워드가 있으니까, 디지몬의 디지털 세계와도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는 것 같네요. 좋은 감상 감사합니다.. 참고로 저의 최애 디지몬은 브이몬입니다.

 

 

 

 

Q. 이번 앨범에서는 khc님과 함께 작업한 곡도 있었어요. 혼자 작업할 때와는 어떤 점이 달랐나요?

 

9번 트랙에 수록된 ‘아네모네’는 굉장히 오래전에 만들어둔 노래였는데, 작곡이 완성되어갈 쯤 ‘이 곡은 khc님과 꼭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했어요. 그래서 기본적인 뼈대와 송폼, 메인 멜로디, 가사를 만들고 ‘마음껏 편곡해주세요’라며 보내드렸죠. 얼마 안가서 khc님이 초벌을 해서 보내주셨는데 정말 제가 건드릴 게 거의 없었어요. 아주 미세한 부분만 수정했고, 피드백도 5개 이하였던 것 같아요. khc님이 작업과정에서 어느 정도 고생하신지 아직 정확하게 듣지는 못했지만, 후반 작업에서 이야기를 나눌 때, khc님도 소리를 넣는 과정이 너무 즐거웠다고 말씀해 주셔서 끝까지 편하고 물 흐르듯이 진행됐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마 처음부터 그 사람을 생각하고 만든 노래라 가능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함께한다는게 이렇게 좋은 거였구나~” 느꼈습니다. 여태까지는 너무 혼자 했던 것 같아서, 음악을 만드는 사람들이 주변에 더 생기고 다양한 작업을 해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Q. 최근에는 함께 작업해 보고 싶은 새로운 인연도 생겼나요?

 

AKMU ‘낙하’, iKON ‘사랑을 했다’ 등 참여하신 ‘MILLENNIUM’이라는 프로듀서분이 한 인터뷰에서 저를 눈에 띄는 아티스트로 언급해 주셨더라고요. 제가 그분에게 어떤 자극을 드렸다는 게 너무 신기하고 재밌었어요.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만나서 차라도 한잔하면 좋을 것 같아요. (웃음) 앨범을 내고 그런 일들이 생긴다는 게 너무 좋은 것 같고, 이런 일들이 앞으로 더 많아지면 정말 그게  꿈꾸던 음악 생활이 아닐까 싶어요. 

 

 

Q. 기쿠하시는 기본적으로 혼자 음악을 만드는 프로젝트지만, 공연에서는 밴드 셋을 선보이고 있어요. 혼자 만든 곡을 밴드로 옮길 때는 어떤 과정을 거치나요?

 

앨범을 만들 때는 최대한 자유롭게 하는 편이에요. ‘이 음악은 무조건 밴드 라이브로 구현 가능해야 한다’고 제한을 걸면 음원이 가질 수 있는 재밌는 포인트가 사라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곡을 만들거나 편곡할 때, ‘라이브에서 신났으면 좋겠다’ 정도는 생각하지만, 무조건 연주 가능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일단 음악을 다 만든 다음 공연 준비를 할 때, 절충점을 찾아요. 제가 밴드 합주에서는 통제력이 좀 있는 편이라 세션 멤버분들에게는 제가 만든 걸 최대한 지켜달라고 말씀드리는 편인데, 실제 라이브로 구현할 수 없는 부분은 합주하면서 원래 음원에서 받았던 느낌과 라이브의 짜릿함을 동시에 살릴 수 있는 방법을 고려하면서 같이 찾아갑니다.

 

 

Q. 반대로 ‘이건 꼭 내가 직접 해야 한다’ 싶은 부분도 있나요?

 

사실 대부분 작업 전반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건 제가 해야 직성이 풀리는 편이에요. 다른 사람들이 많이 참여하더라도 마지막 결정은 제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가끔 혼자 하는 게 너무 많아서 힘들지만 이 고집을 잘 못 버리는 것 같아요. 처음에는 곡에 있어 중요한 작업을 다른 사람에게 무작정 맡겨본 적도 있는데 제가 마음에 드는 결과가 나오기까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더라고요. 그때는 ‘같이 한다는 게 편하고 즐거운 것만은 아니구나’라는 점도 배웠어요. 고집에는 좋은 점과 안 좋은 점이 항상 있는 것 같아요. 그럼에도 혼자 가는 길에는 한계가 있으니까 협업에는 더 많은 도전을 해 나가고 싶습니다. 

 

 

 

 

Q. ‘기쿠하시’라는 이름은 무라카미 류의 소설 <코인로커 베이비스>에 등장하는 ‘기쿠’와 ‘하시’에서 따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활동명으로 사용하게 되셨나요?

 

군대에서 기타를 치면서 노래를 만들던 시기에 읽었던 책의 주인공들이었어요. 그때 유튜브 채널도 만들었는데 그냥 본명으로 하기는 조금 민망하고, 새로운 이름을 하나 정하고 싶었거든요. 별생각 없이 등장인물 두 명의 이름을 합쳐 ‘기쿠하시’로 올리기 시작했는데 구독자분들이 어느새 그렇게 불러주시더라고요.

 

데뷔할 때는 이름을 바꿀까 고민도 많이 했어요. 왜색이 너무 짙다는 평가를 받을까 걱정도 됐고, 조금 더 서정적이거나 쿨한 이름이었으면 좋았을까 싶기도 했고요. 아직도 가끔 ‘너무 오타쿠 같나?’ 싶어서 부끄럽기는 해요. (웃음) 그런데 이름을 바꾸는 순간 그동안 이어온 흐름이 너무 많이 바뀔 것 같았어요. 지금은 기쿠하시라는 이름으로 나름의 캐릭터가 생긴 것 같아서, 애정이 가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한 이름입니다.

 

 

Q. 소설 <코인로커 베이비스> 속 ‘기쿠’와 ‘하시’는 어떤 인물인가요?

 

1970년대 코인로커에 버려진 신생아들에 대한 뉴스를 기반으로 출발한 소설인데, 그 안에서 살아남은 두 아이가 보육원에서 함께 자라면서 형제처럼 지내요. 한 아이는 운동에 소질이 있고, 한 아이는 음악에 소질이 있는데 둘 다 정상적인 어른으로 성장하기엔 태생적 어려움이 있죠. 그런 두 형제가 겪게 되는 운명적인 이야기예요. 배경도 완전히 무덥고 끈적끈적한 여름인데 그런 이미지가 1집에도 어느 정도 오마주로써 반영된 것 같아요. 

 

 

Q. 1집과 2집에서 ‘기쿠와 하시’의 이야기를 계속 이어가고 있어요. 두 앨범의 세계관을 연결하게 된 이유가 있나요?

 

1집 제목을 지을 때는 한 단어로 할까, 신비로운 단어를 쓸까 고민도 했는데 [코인런드리 밴드연습]처럼 조금은 길지만 이미지가 확 떠오르는 제목이 마음에 들더라요. 이번 2집도 비슷한 결을 이어 나가고 있고, ‘그럼 스토리도 이어가면 재밌겠다’라는 생각했어요. 사실 이 이야기 자체에 엄청 큰 의미가 있는 건 아니에요. 제가 좋아하는 <개그만화 보기 좋은 날>이라는 만화가 있는데, 권마다 이전 이야기를 소개하는 글에 별 상관없는 이상한 이야기를 써놔요. 그걸 볼 때마다 묘하게 웃게 돼서 ‘나도 이런 걸 써보고 싶다’라는 생각이 있었어요. 1집 때도 그런 마음으로 소개 글을 썼고, 이번에는 코인런드리에 갇혀 있던 두 친구가 탈출해서 밴드를 결성했다는 식으로 이어갔죠.

 

 

Q. 앨범 소개 글도 작품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편인가요?

 

음악은 귀로 받아들이지만 저희 눈에 남는 건 커버와 가사, 앨범 소개잖아요. 그런 점에서 앨범 소개라는 게 은근 중요하면서도 아닌 느낌이라, 이왕이면 재미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무게를 잡으며 이 앨범에 대해 진지하게 설명하거나 긴 크레딧으로 앨범 소개 글을 채우기보다는 음악을 본격적으로 듣기에 앞서 호기심을 한껏 자극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앞서 말했듯이 의도적으로 이야기들을 굉장히 느슨하게 연결해 뒀어요. 굳이 하나의 정답 같은 서사를 강요하기보다, 리스너들이 음악을 들으면서 저마다의 상상력으로 그 빈 공간을 자유롭게 채워보는 과정 자체가 재밌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실제로 앨범 소개글에 적힌 단서들을 보고 직접 그림을 그려서 보내주신 분도 계셨어요. 제 글이 누군가의 창작으로 이어지는 걸 보면서 이런 여백이 있기에 더 흥미로운 소통이 가능하다 느꼈죠.

 

 

Q. ‘기쿠’와 ‘하시’는 코인런드리에서 밴드 연습을 하다가 이제 녹음에 필요한 컴퓨터까지 마련했어요. 두 사람이 겪게 될 다음 미션은 무엇이 될까요?

 

일단 탈출도 했고, 장비도 구비했으니까, 이제 음악 생활을 해 나가면서 다른 동료들을 만나게 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어요. 아까 실제 저도 다른 사람들과 협업하면서 음악 세계를 넓혀가고 싶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세계관 안에서도 기쿠와 하시뿐 아니라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하면 재밌을 것 같아요. ‘TRPP’나 ‘술탄 오브 더 디스코’처럼 재밌는 자아와 콘셉트를 만들어 활동하는 분들을 좋아하거든요. 저도 제가 지킬 수 있는 건 최대한 지키면서 이 세계관을 계속 이어가고 싶어요.

 

 

 

 

Q. 발매 이후, 예정된 공연이나 스케줄도 소개해 주세요.

 

롤링홀에서 진행하는 아티스트 발굴 및 지원 프로젝트 CMYK TOP 10에 진출해 <사운드 플래닛 페스티벌 2026> 무대에 설 예정이고, 전자양과 합동 공연도 준비하고 있어요. 전자양은 원래 좋아하고, 존경하던 아티스트라 정말 영광이에요. 공연에서 보여주는 에너지가 제가 생각했던 이미지와 완전히 다르더라고요. 고정돼 있던 걸 계속 깨부수는 모습이 멋있어서, 이번 공연에서도 선배님들한테 많이 배우고 싶습니다.

 

 

Q. 마지막으로 팬분들께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데뷔하고 음악을 처음 시작했을 때부터 좋아해 주셨던 분들에게는 정말 감사해요. 굉장히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아직 곁에 남아주셨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 감사하고요. 이번 앨범으로 저를 새롭게 알게 된 분들에게도 정말 감사드려요. 음악을 좋아한다는 건 생각보다 굉장히 많은 요소가 겹쳐야 가능한 기적 같은 일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수많은 음악 중에서 제 음악과 취향이 겹치고, 음악 안에서 공명할 수 있다는 게 정말 소중한 경험인 것 같아요. 특히 새 앨범이 막 나온 지금의 제 음악을 좋아해 주시는 분들은 지금의 저와 더 닮아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만나게 돼서 정말 좋고, 앞으로도 여러 곳에서 자주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Interview | 구은영

사진제공 | 기쿠하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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