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그러함을 받아들이는 뚝뚝한 여정, 여유와 설빈 3집 발매 인터뷰
여유와 설빈이 정규 3집을 준비하고 있다는 소식을 처음 전해 들은 것은 올해 4월이다. 그날은 제주에서 올라온 여유와 처음 인사를 나눈 날이기도 한데, 본격적으로 농도를 높여가던 봄기운 덕에 라운지 문을 활짝 열어두고 앨범에 대한 청사진을 공유받으며 이 포크 듀오가 도착해 있을 늦가을 어느 날을 어렴풋하게나마 상상해 보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지난 정규 2집으로부터 4년, 본격적인 작업 기간으로 따져도 1년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을 거쳐 탄생한 여유와 설빈의 3번째 정규 앨범은, 그리하여 이들이 관통해 온 기억과 감정을 사려 깊게 수놓으며 새로운 형태의 위로를 건네준다. 전작에 비해 한층 내밀해진 언어로 꾸려진 아홉 곡의 노래가 꾸밈없는, 아니 구태여 꾸미지 않아도 부족함 없는 ‘나’의 이면을 내어 보이며 찬찬한 공감으로 이어지는 덕이다.
제주에 터를 잡은 여유와 설빈 본연의 모습을 녹여내기 위해 대부분의 작업이 제주에서 이루어지기도 했던 이번 앨범은 이렇듯 음과 음 사이, 그리고 단어와 단어 사이마다 넘침 없는 ‘자연스러움’을 담고 있다. 비로소 후회나 미련이 남지 않았던 앨범을 선보이게 되었다며 밝혀온 두 사람의 소회처럼 여러모로 지금 가장 ‘여유와 설빈스러운’ 소리를 담고 있는 셈이다. 어느새 저녁공기에서 제법 한기가 느껴지던 늦가을 어느 날, 제주와 강남을 잇는 화상 인터뷰로 함께 한 여유, 그리고 설빈과 이번 작품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다.
Q: 인터뷰 시작에 앞서 간단한 소개 부탁드립니다.
여유: 네 안녕하십니까. 저희는 포크 듀오 여유와 설빈입니다. 보통은 단출하게 둘이서 기타 한 대와 함께 노래를 부르고 있어요.
설빈: 이름은 여유와 설빈인데 요즘 여유롭지는 않은 것 같아요. 원래는 여유가 진짜 여유롭고 저는 성향상 좀 바쁜 편이었는데 이제는 둘 다 여유가 점차 사라지고 있던 상태예요.
Q: 이번 정규 3집 [희극]이 4년 만에 발표하신 작품이라는 점에서 아무래도 준비 과정이 여러모로 많이 바쁘셨을 것 같아요.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보니 오랜만에 음악을 발표하신 것에 대한 소회도 궁금합니다.
여유: 후회와 미련이 없는 작업이었어요. 전작들도 물론 다 소중하고 귀한 앨범들이었지만 약간의 미련을 남기고 타협하면서 발표해 왔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전혀 그런 찝찝함이 없는 상태로 후련하게 발표했기 때문에 더 좋아요. 덕분에 다행히 바로 일상으로 복귀를 했고요. 앨범 발매할 때쯤 제가 일을 하나 시작했는데 지금 중국집에서 일을 하고 있거든요. 규칙적인 생활 덕분에 빠르게 일상으로 복귀가 됐던 것 같습니다.
설빈: 저는 앨범 발매되고 나서 일주일 동안 매일매일 인터넷에 저희 검색해 보고 사람들은 어떻게 들었는지 반응을 엄청 열심히 살폈고요. (웃음) 학교에서 근무를 하고 있어서 평소와 다름없이 왔다 갔다 하면서 지냈고 바빴던 일들이 정리되고 있어서 점차 안정을 찾게 될 것 같아요.
Q: 그러면 이제 앨범과 관련한 질문부터 하나씩 드려볼게요. 사실 제가 이번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설빈 님이 브런치에 연재하셨던 작업기를 많이 참고했는데요, 전반적으로 이번 작품에서 유독 제주라는 지역성이 전작들보다 남다른 의미를 갖고 있는 것 같다고 느껴지더라고요.
설빈: 제주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보자면, 제주라고 했을 때 일반적으로 떠오르는 휴양지의 느낌이라든지, 아니면 섬이 주는 비밀스러우면서도 독립적이기도 한 여러 인상들이 있잖아요. 그걸 내세우려고 의도했던 건 아니고요. 다만 저희가 제주도에 산 지 7년째가 되어가고 있는데 지금 살고 있는 곳이 제주도다 보니까 이곳의 특성들이 작업하는 데도 되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같더라고요. 사람들이 제주 하면 떠올리는 고즈넉하고 평화로운 인상도 있지만 섬이 주는 홀로 되는 감상이 있어요. 한편으론 제주가 땅은 넓지만 사람들 사이가 굉장히 촘촘해서 한 다리 건너면 다 알고, 같은 지역에서 사는 사람들끼리는 서로의 집에 숟가락이 몇 개인지도 알게 되는 그런 복합적인 관계성도 있고요. 이런 경험들이 노래하는 데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어서, 이걸 풀어내는데 서울에서 작업을 하게 되면 뭔가 선명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일차적으로 들었어요.
여유: 덧붙이자면 ‘제주에서’라는 표현은 어쨌든 저희 둘의 손길이라는 뜻이기도 해요. 저희 둘이서 그동안 작업했던 어떤 앨범보다 정성을 많이 들였고 앨범 작업 전반에 있어서 저희 둘이 스스로 한 것들이 정말 많아요.
Q: 제주에 있는 레코딩 스튜디오 ‘램프 스튜디오’와의 작업도 이러한 맥락의 일환이었을까요?
실빈: 제가 제주에서 작업하고 싶다는 마음을 먹었을 때 여유한테 좀 고집을 부렸어요. 램프 스튜디오는 2집 작업할 때부터 하고 싶었던 곳인데 이제 본격적으로 함께해 보자고 얘기를 했었죠.
여유: 그때 저는 이미 머릿속에 서울에 계신 많은 분들이 후보로 있었어요. 근데 설빈이 이번 앨범은 우리가 제주도에 뿌리를 내리듯이 작업적으로도 완전하고 명확하게 제주에서 출발했으면 좋겠다고 강력히 이야기했었어요. 그렇게 몇 달 정도는 계속 그런 소통을 나누면서 작업이 진행되었고요. 마스터링이나 디자인, 그리고 몇몇 연주자분들의 도움을 제외하곤 서울에 계신 분들의 손길이 아주 적게 들어갔죠. 많은 것들이 제주에서 이루어진 앨범인 건 분명해요.
램프 스튜디오 (왼쪽부터 설빈, 엔지니어 강경덕, 들국화 최성원, 여유)
Q: 램프 스튜디오와 작업 과정은 어떠셨나요?
여유: 지금 생각해도 너무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램프 스튜디오의 강경덕 형이 가능성을 많이 열어줬는데, 제가 마치 실험실의 과학자가 실험을 하는 것처럼 스튜디오에 있는 거의 모든 악기를 사용해 봤거든요. 제가 잘 다루지 못하는 악기들조차도 실험적으로 다 넣어봤는데 경덕이 형이 그렇게 펼칠 수 있게 많이 도와줬죠. 믹싱 부분에 있어서도 제가 믹싱의 디테일한 지점들을 마음에 들어 할 때까지 계속 시간을 줬고 때로는 저한테 컴퓨터를 넘겨주기도 했어요. 그런 부분들이 공부가 많이 되었고 거의 1년 가까운 시간 동안 덕을 많이 봤어요.
설빈: 엔지니어님 이름도 강경’덕’이에요. (일동 웃음)
여유: 특히 경덕이 형한테 고마운 게 있는데 2번 트랙 ‘너른 들판’에 삽입된 바람 소리나 8번 트랙 ‘하얀’이라는 노래의 파도 소리 같은 엠비언트 사운드가 제주 토박이인 형이 그동안 수집해 왔던 필드 레코딩 소스였거든요. 덕분에 그런 사운드를 저희 작업에 녹여낼 수 있었어요.
Q: 램프 스튜디오의 경덕 님과 더불어 이번 앨범에 함께 해주신 여러 작업자분과의 인연도 인상 깊더라고요.
설빈: 물론 이전 작업 때도 그랬지만, 이번 3집 같은 경우에는 특히나 함께하는 사람들을 크게 조명했던 작업이었던 것 같아요. 함께 만나는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들을 살펴보고 싶었던 마음이 있었고요. 제 작업기에도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지 않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이번에 새롭게 만나게 된 분은 강경덕 엔지니어님을 통해 만난 코프로듀서(co-producer) 이대봉 님이 있는데, 올해 여름쯤 저희 둘 다 작업적으로 너무 에너지를 많이 쏟아서 점점 지쳐가고 있을 때 새로운 사람이 필요하겠다 싶어서 초대한 분이에요. 안면도 없다 보니 처음에는 전화나 이메일로 연락하다가 실제로 만나게 된 경우인데, 만들어지고 있는 저희의 노래를 굉장히 사랑해 주시고 섬세한 부분까지 제안을 많이 해주셨거든요. 저희 둘 다 지쳐가는 마당에 그렇게 따뜻하게 그 노래들을 안아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되게 감사한 일이었어요.
트럼페터 장보석
여유: 드러머 김창원, 베이시스트 노선택 님은 2집에 이어 이번 3집까지 같이 해주신 분들이에요. 그리고 아주 우연한 기회에 합류하게 된 장보석이라는 트럼펫 연주자가 있어요. 제주도에 왔다가 태풍 때문에 비행기가 결항해서 제주에 발이 묶이는 바람에 지인이었던 창원한테 연락을 했었는데요. 그때 마침 저희가 곡 작업 중이었어서 즉흥적으로 녹음을 함께하게 되었어요. 말 그대로 여행 왔던 거다 보니 제주에 계신 이웃 뮤지션 전찬준 님께 트럼펫을 빌려서 임시로 녹음을 했죠. 아무래도 너무 즉흥적으로 진행된 면이 있어서, 나중에 보석이 자기 악기를 바리바리 챙겨가지고 내려와서 추가 녹음을 했었어요.
Q: 정말 말 그대로 신기한 인연이었네요. 저도 이번 앨범을 들으면서 관악기 사운드를 되게 인상적으로 들었는데 그게 전부 보석 님의 연주였군요.
여유: 네, 트럼펫, 베이스 트럼펫, 그리고 플루겔혼이라는 악기와 뮤트(트럼펫 홀에 끼우는 약음기)를 이용해서 되게 다양한 트럼펫 사운드를 연주해 주셨어요. 그런데 또 빼놓을 수 없는 관악기 소리가 설빈이 연주한 클라리넷이에요. 클라리넷과 트럼펫의 협연으로 만들어진 부분도 있고요.
Q: 연주자분들 이야기가 나온 김에 자연스럽게 악기 관련된 내용도 조금 나눠보겠습니다. 이번 앨범에서 특히 다양한 악기들의 조합이 눈에 띄어요. 때론 단출하게, 때론 웅장하게 운용되는 여러 악기 구성에 있어서 특별히 염두에 두신 부분이 있을까요?
여유: 작사 작곡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이미 저는 머릿속으로 항상 웅장하고 풍성한 편곡, 말하자면 오케스트라까지 그리고 있어요. 그런데 그게 현실적으로 구현하기 쉽지 않기도 하고 노래 자체가 그 정도까지의 편곡을 요하지 않는 경우도 있죠. 그래서 진행하다 보니 그 곡에 맞는 편곡으로 또 흘러가게 되는데 어쨌든 이번에는 정말 해보고 싶은 걸 다 해본 작업이었어요.
설빈: 1집은 거의 프로듀싱을 맡겼던 앨범이고, 2집은 저희가 직접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세션 연주자들의 감각에 따라 흘러가는 대로 바라봤던 그런 앨범이었어요. 그에 비해 3집은 악기 구성이나 편곡적인 부분까지도 하나하나 디테일하게 잡아갔던 작업이었죠. 1년 동안 작업 한 거니까 사계절 동안 넣어봐야겠다 싶은 부분은 과감하게 다 시도를 했고, 그중에 살릴 건 살리고 쳐낼 건 쳐내고 하다 보니까 여기까지 온 것 같아요. 전에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부분에 있어서 타협을 해야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이번에는 우회하지 않고 제주에서 들려줄 수 있는 소리들로 구체적인 심상을 구현해 보자고 생각했던 게 가장 큰 차이인 것 같아요.
Q: 그럼 이번 앨범들의 많은 소리들은 처음 만들고자 했던 것에 거의 근접한 결과물로 나왔다고 봐도 되겠네요.
설빈: 네, 저는 너무 만족해요.
여유: 근데 사실 어떤 의도가 명확했던 건 아니에요. 그림으로 비유하자면 도화지에 스케치를 해놓고 거기에 색칠을 하고 또 계속 덧입히는 작업을 1년 동안 한 거죠. 그렇게 완성된 그림이 지금은 마음에 드는 거예요.
Q: 이어서 작업 과정에 대해서도 질문드리고 싶어요. 앞서 말씀해 주신 것처럼 초기 작곡 단계에서는 여유 님이 많은 부분을 맡고 계신데 그것들이 결과적으로 설빈 님과 동기화 되는 과정이 신기하더라고요. 설빈 님께서 말씀해주신 앨범에 대한 정서가 여유 님께서 말씀하신 내용과 일맥상통한다고 느껴지는데 어떤 식으로 이런 정서적인 합이 맞춰지는 건지 궁금합니다.
여유: 지긋지긋하게 들어서 그런가. (웃음)
설빈: 이것도 일정 부분 맞고요. (웃음) 일단 여유가 만들어 내는 이야기들의 맥락을 알고 있는 부분이 큰 것 같아요. 어쨌든 같이 1, 2집을 거쳐왔기 때문이라는 게 중요한 지점이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특히나 이번 3집은 저도 여유 못지않게 앨범에 마음을 많이 들였고, 여유의 노래를 이해하려고 하는 마음가짐이나 노래에 스며드는 정도가 커지면서 이 사람을 더 잘 이해하게 되는 게 있는 것 같아요. 그렇다보니 사용하는 언어가 다르더라도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항상 가지고 있는 것 같네요.
Q: 어떻게 보면 이상적인 협업의 형태라고도 느껴져요. 사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말하지 않아도 동기화가 되면 정말 좋겠다고 느껴지는 순간들이 되게 많잖아요.
설빈: 사실 별로 동기화되고 싶지 않은 것도 동기화되기 때문에 별로 추천하고 싶진 않아요. (웃음)
여유: 말하자면 설빈은 저한테 직장으로 치면 상사예요. 노래는 제가 많이 만드니까 설빈에게 들려주면 ‘여유와 설빈 앨범 수록곡으로 쓸 수 있음’이라고 결재를 해주는 거죠. (웃음) 그렇게 해서 탈락하는 곡들이 생각보다 되게 많아요. 물론 저한테는 다 똑같이 귀한 노래들이어서 언제 한 번 기회가 되면 모아서 내야 할 것 같아요.
Q: 트랙 단으로 대화 주제를 넘기기 전에 앨범 전반에 관한 이야기를 마저 나눠볼게요. 제가 이번 3집을 처음 듣고 느낀 점이 2집에 비해서 분위기가 훨씬 묵직해지고 감정의 이면을 조금 더 가감 없이 담고 있다는 것이었어요. 희망을 기반으로 한 2집과 상반된 분위기가 인상적이었던 만큼 이번 앨범의 표현 방식이나 정서적인 측면에서 달라진 부분이 있다면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여유: 이번 노래들은 만들어진 시기가 되게 다양해요. 5년 전에 만든 노래도 있고 한 1년 전에 만든 노래도 있고, 그렇게 모인 9곡이에요. 노래들의 대부분이 내면적으로 가장 침잠해 있었을 때 창작됐던 곡이기 때문에 그렇게 느끼신 지점이 있을 거예요.
Q: 그렇다면 그렇게 서로 다른 시기에 만들어진 곡들을 작곡 당시가 아닌, 이번 3집을 통해 엮어내시게 된 의도나 배경이 있을까요?
여유: 평소에 어떻게 보여지고 싶다는 생각을 아예 못하는 성격이긴 한데요. 일단 만들어 놓고 세상에 나왔을 때 일어나는 일들은 전부 흐름에 맡기는 편이죠. 다만 분명하게 이 노래들이 하나의 앨범으로 묶이게 된 데에는 확실히 의도성이 있었던 것 같아요.
설빈: 1집과 2집은 말씀하셨듯이 좀 더 희망적인 느낌, 그러니까 아프긴 하지만 어찌 되었든 성장하려고 하는 과정 속에서 느끼는 통증이라고 잘 이해해 주셨던 것 같아요. 그에 비해 3집은 잠깐 멈출 수밖에 없는 나의 상태, 그러니까 정말 홀로가 되어서 여기서 어떠한 의지도 없이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는 그런 상태를 반영한 앨범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근데 그렇게 살면서 여러 겹의 다층적인 감정들이 무력하게 몸 안에 쌓여가는 과정도 나의 삶이고, 알고보니 나뿐만 아니라 너도 그렇고 우리 모두가 그렇다고 느끼게 된 경험들이 집약된 앨범이 아닌가 싶어요. 그래서 이번 앨범을 두고 저는 분명하게 섬의 정서를 다루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너와 나 모두 섬이라는 이야기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해요. 여유가 이런 부분을 분명하게 의도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여유의 작업들을 차근차근 듣다 보면 그런 정서가 많이 느껴지거든요.
Q: 의도하지 않은 것들이 모여서 자연스럽게 어떤 맥락을 이루는 과정이 참 신기해요. 앨범이 그리고 있는 정서들도 그렇고 그것들을 표현하는 방식도 그렇고 뭔가 애쓰지 않는 자연스러움이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여유: 말씀을 듣다 보니 방금 떠오른 것이 있어요. 말씀하신 것처럼 이 노래들을 2집에 수록하지도 않았었고 밖으로 꺼내 보이는 데에도 시간이 좀 필요했던 과정이 있었어요. 새로 만든 노래라고 해서 바로 앨범으로 내지는 않지만 공연장에서 부를 때도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저는 항상 1, 2집에 비해 너무 무거운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있었어요. 희망 같은 긍정적인 메시지를 내포하고 있던 전작들에 비해서 절망 같은 마음을 이렇게 있는 그대로 표현해도 괜찮을까, 이게 과연 좋은 노래가 맞을까 하는 자기 의심이 있었던 거죠. 그런데 그럴 때마다 이런 노래만이 줄 수 있는 위로가 분명히 있을 거라는 주변 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제 저도 마침내 그런 마음이 좀 정리가 됐어요. 조금은 아프고 서늘한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마냥 따뜻하고 다정한 위로는 줄 수 없는 위로’가 되어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앨범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Q: 사실 오늘 이 대화를 나누기 전까지는 각 곡들의 작곡 연도를 몰랐다 보니 3집의 음악들이 여유와 설빈의 현재를 대변하는 것이 아닐지 하는 생각을 했는데요, 오히려 이제야 마침내 그것들을 꺼내놓으실 준비가 된 거라고 이해하는 것이 더 정확하겠네요.
여유: 아주 정확하고요, 이 앨범을 통해서 그 상태를 극복하고 싶었던 거죠.
Q: 그렇다면 이제는 그런 마음들이 극복되신 것 같나요?
여유: 그런 것 같아요. 극복이라기 보다는 포용? 일단은 후련한 게 너무 크죠. 아무래도 가장 무거운 시기에 꺼내놓은 것들인데 어쨌든 잘 익은 열매처럼 내보낸 거니까 이제는 가벼운 마음이기도 하고 또 다른 작업을 해볼 수 있을 것 같다는 마음도 생겨요.
Q: 이어서 트랙에 대한 질문도 몇 가지 드려볼게요. 이번 3집은 더블 타이틀곡 설정도 눈에 띄더라고요.
여유: 네, 2번 트랙 ‘너른 들판’이랑 6번 트랙 ‘밤하늘의 별들처럼’이라는 두 곡인데요. 저희는 처음부터 ‘밤하늘의 별들처럼’이 타이틀 곡이라고 생각했어요. 근데 대봉 님이 ‘너른 들판’에 꽂히셔서 무조건 타이틀로 넣어야 한다며 너무 좋아해 주셨어요. 그렇게 두 곡을 전부 타이틀곡으로 두게 되었고요. 만약 LP 같은 매체로 만들어진다면 A 사이드, B 사이드 각각 하나씩 타이틀곡으로 하기도 좋을 것 같더라고요.
설빈: 또 이렇게 더블 타이틀로 결정을 하고 나서 생각을 해보니까 이 앨범에서 ‘너른 들판’과 ‘밤하늘의 별들처럼’이 가지고 있는 장소성이라고 해야 할까요? ‘너른 들판’이 가지고 있는 심상은 들판에 바스락거리는 풀들이 바람에 나부끼고 그곳에 동떨어져있는 느낌을 주는데, ‘밤하늘의 별들처럼’은 되게 광활한 공간에서 홀로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거든요. 그런 두 가지 장면의 결이 비슷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이번 앨범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구체적인 장면들이 두 곡 안에 잘 담겨있다는 생각이 들어서 더블 타이틀로 선정하길 잘했다 싶었어요.
여유: 맞아요. 그리고 ‘너른 들판’ 마지막 가사는 “밤하늘엔 아직 별들이 있고”로 끝나는데 ‘밤하늘의 별들처럼’은 “밤하늘의 별들처럼 밝지 않아도”라고 시작하거든요. 두 곡만 따로 떼어놓고 들어도 메시지적으로 연결돼요.
Q: 특히 6번 트랙 ‘밤하늘의 별들처럼’ 후반부에 2집 수록곡인 ‘길고 긴 밤’의 한 구절이 레이어드 되어있는 것도 눈에 띄더라구요.
여유: 그 부분은 동물적인 감각 같은 거였어요. 머리로 생각해서 만들어지는 것도 있지만 그럴 겨를도 없이 본능적으로 진행되는 작업도 있거든요. 그런 맥락이에요.
Q: ‘밤’이라는 공통된 키워드도 그렇고 6번 트랙에서 이야기하는 후회의 대상이 ‘길고 긴 밤’에서 노래하는 대상과 일맥상통한다고도 느껴졌다 보니 치밀하게 설계된 부분인가 싶었어요. 이렇게 여유 님의 본능으로 얹혀진 부분에 대해 설빈 님도 만족하셨나요?
설빈: 네, 처음 가이드 녹음을 할 때는 없었던 부분인데, 어느 날 여유가 갑자기 기타 한 대 덜렁 들고 나타나더니 마지막 부분에 ‘길고 긴 밤’ 넣는 거 어떠냐면서 막 연주를 하는 거예요. 그때 처음 들려줬는데 너무 좋았어요. 잘 어울렸고 확 끌린다고 해야 하나. 구체적인 단어로 표현하기 힘든, 그런 좋다는 감각이랄까요.
Q: 이어서 4번 트랙 ‘희극’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나눠보겠습니다. 앨범명과 동명의 트랙인 만큼 눈이 가는 트랙인데 앨범명에 대한 이야기까지 함께 소개 부탁드립니다.
여유: 곡 제목이 먼저 지어졌고 앨범 제목으로까지 ‘희극’을 쓰는 것에는 고민이 좀 있었어요. 인생이나 세상 같은 것들을 한 편의 연극으로 빗대서 은유적으로 표현해 보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이 ‘비극’이라는 반대되는 단어가 연상되는 부분에서 괜찮을지 대봉 님이랑 같이 고민을 했었거든요. 그런데 사실은 ‘희극’이라는 말 자체가 반어법처럼 쓰였고, 여기서 비극이 떠오르는 게 좀 더 양면적인 감상이 될 것 같아 은유적인 표현으로 ‘희극’이라는 제목을 쓰게 된 거죠.
설빈: 네, 비극이라는 단어는 너무 호소적이기도 하고 그 자체로는 설명할 수 없는, 꼬집고 싶은 포인트가 있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저희는 결과적으로 희극이 맞겠다는 생각을 했던 거고요.
Q: 저도 이 제목을 처음 보고 나서 바로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라는 찰리 채플린의 명언이 떠오르더라고요.
여유: 맞아요. 앨범 디자인에서도 찰리 채플린의 영향이 조금 있었어요. 앨범 커버가 흑백으로 되어있는데 찰리 채플린의 흑백 영화 이미지를 따온 게 있거든요. 디자이너 혜리 님이나 설빈은 또 의견이 다를 텐데 저 혼자서는 그렇게 상상하면서 만족했습니다. 제목도 그렇고 전체적으로 넓게 상상할 수 있는 앨범이었으면 좋겠어요.
Q: 곡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볼게요. 마지막 트랙 같은 경우에는 설빈 님이 작곡하신 곡이더라고요. 아무래도 정규 단위 작업인 만큼 1번 트랙부터의 기승전결을 짜는 과정도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트랙 순서를 정하시면서 이 곡으로 마지막 트랙을 장식하시게 된 배경이 궁금합니다.
설빈: 일단은 사전 질문지를 전달해 주셨을 때 트랙 순서에 대한 언급이 있어서 반가웠어요. 왜냐하면 이 앨범을 만드는 과정에서 트랙 순서가 굉장히 중요했거든요. 어떤 날은 여유가 9곡의 수록 순서를 1안, 2안, 3안, 4안까지 짜왔어요. 아직 완성되지도 않은 노래들의 순서를 두고 조금씩 조금씩 바꿔가면서 이게 낫니, 저게 낫니 했을 정도로 트랙 순서가 이번 작업에서 되게 중요한 주제였고요.
그리고 1, 2집 때도 각각 ‘먼 훗날 당신과 나’, ‘선인장’이라는 제 노래가 수록되어 있는데요. 이번 3집에서도 ‘푸른’이라는 노래의 순서를 어느 곳에 위치시킬까도 큰 고민이었어요. 아무래도 여유가 만들어 내는 노래와 제가 만들어 내는 노래의 색이 다르게 느껴질 수 있거든요. 평소에 사용하는 표현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다는 점, 그리고 구상하고 있는 공간감 같은 것들도 약간은 차이가 있어서 어떻게 앨범에 전체적으로 녹여낼 수 있을지 마지막 순간까지 고민했던 것 같아요. 작업 중반기까지는 8번 트랙 ‘하얀’이 곡이 첫 번째 트랙이었는데, ‘하얀’으로 도입부에서 세상을 펼쳐내는 방식으로 구상했었거든요. 그러다 작업 말미에 ‘하얀’이라는 곡을 통해서 오히려 이 세계를 점차 정리하는 느낌을 주고 맨 마지막에 여유가 만들어 내는 음악보다는 무게감이 덜하고 느낌도 다른 ‘푸른’으로 마무리하면 좋겠다고 생각하게 됐죠.
Q: 말씀을 듣고 보니 ‘푸른’이 마치 엔딩 크레딧 같은 그런 느낌을 주기도 하는 것 같네요.
여유: 네, 그렇게 볼 수도 있죠. 작업이 처음 시작될 때부터 끝날 때까지 사계절에 걸쳐 트랙 리스트 고민이 계속됐었어요. 근데 그게 제가 작업하는 방식인 것 같아요. 그동안 정규 앨범 밖에 작업해 보지 않아서 그쪽의 감각만 갖고 있기도 하구요. 친한 친구들은 병적이라고 이야기할 정도로 트랙 리스트에 많이 집착하는 편인데 의도에 잘 맞는 순서로 배치하려고 노력을 많이 하고, 특히 이번 3집은 유난히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같은 곡이어도 어떤 순서로 듣느냐에 따라서 너무 다른 이야기가 되니까요.
덧붙여서 이번 앨범과 관련한 감상을 하나 공유하자면, 1번과 2번, 3번과 4번, 5번과 6번, 7번과 8번이 각각 봄, 여름, 가을, 겨울 같다고 느껴지기도 하더라고요. 그리고 다시 ‘푸른’에서 겨울이 끝나고 봄으로 이어지는 느낌을 받았던 것 같아요. 하루로 치면 아침부터 시작해서 밤과 새벽을 다 지나고 다시 아침이 밝아오는 느낌을 주는 곡이 ‘푸른’이라서 마지막 곡으로 잘 배치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Q: 작업 기간도 4계절에 걸쳐있다 보니 비단 감정선이나 사운드뿐만 아니라 오늘 대화 나눈 모든 이야기에서 의도하지 않아도 대입되는 자연스러움이 느껴져요. 여러모로 다양하게 감상할 수 있는 여지가 많은 앨범인 것 같습니다. 어느덧 인터뷰도 막바지에 이르고 있는데요, 이번 3집과 발매와 함께 계획하고 계신 활동들이 있다면 이 자리를 빌려서 소개 부탁드릴게요.
설빈: 우선은 가장 가까운 11월 25일 6시에 제주도 ‘반짝반짝 지구상회’에서 앨범 발매 기념 공연이 예정되어 있고요.
여유: 기회가 되면 서울에서 또 열 수도 있겠지만, 인터뷰 초반에 나눴던 제주도에 대한 맥락 그대로 발매 기념 공연까지 우선은 제주도에서 잘 마무리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이 앨범 작업이 처음 출발했을 때 설빈이 이야기했던(제주에서 시작해서 제주에서 완성하는) 맥락과 잘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다음에 차근차근 일상을 잘 살아내면서 또 좋은 기회로 노래를 들려드릴 수 있는 자리를 만들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설빈: 물론 서울과 다른 지역에서도 성실하고 활발하게 활동을 이어 나갈 예정입니다. (웃음)
Q: 지난 작업 기간 사이에도 꾸준히 공연을 통해 팬분들과 소통해 주셨던 만큼 앞으로의 활동도 기대가 많이 되네요. 두 분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으신 이야기 있으시면 마지막 인사와 덧붙여 이번 인터뷰 마무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여유: 저는 요새 중국집에서 일을 하고 있거든요. 요즘의 저한테 아주 중요한 일상이에요. 주로 홀에 있기 때문에 정말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데, 최근에 한 노부부가 오신 적이 있어요. 드시고 난 후에 맛있었다고 따뜻하게 얘기해주시고 먹은 자리까지 티끌 하나 없이 말끔하게 정리해두고 가셨는데 감동이었어요. 사람을 대할 때 비록 생판 모르는 남이더라도 따뜻하고 진실되게 대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저도 어디서 밥을 먹든 그릇을 한 곳으로 모아두는 정도의 작은 배려는 잃지 않으려 합니다. 감사합니다.
설빈: 모두 건강하게 지내시면 좋겠고요. 요즘 들어서 뭔가 사는 것 자체가 가만히 멈춰서 있는다고 멈춰 있는 것도 아닌 것 같고, 멈춰있는 것 조차도 에너지가 필요한 행위라는 생각이 들어요. 어쨌든 다들 무탈하시고 또 좋은 기회로 만나뵐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Interview | 월로비
사진제공 | 여유와 설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