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끄럼틀’을 통해 드러나는 술탄의 레트로가 단순히 과거 음악의 ‘흥미로운 이미지’만 빌려온, 겉보기만 그럴싸한 카피에 그치지 않고 장르가 가진 본질적인 아름다움과 멋을 제대로 포착하고 이를 근사하게 재현하고 있으며 동시에 그저 재현으로만 그치지 않기 위해 고민한 흔적이 십분 느껴지는, 밴드의 오리지널리티와 시대감각까지 담보하려는 시도마저 함께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술탄 오브 더 디스코
미끄럼틀 (feat. SUMIN)
2018.09.11.
‘술탄 오브 더 디스코’(이하 술탄)라는 이름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들의 이름을 듣는 순간 단박에 떠오르는 어떤 이미지들이 있을 것이다. 예컨대 70년대 소울, 디스코, 훵크(funk) 풍의 강력한 댄스음악, 그리고 이 댄스음악을 단박에 뇌리에 각인시키는 파격적인 안무와 무대의상을 동반한 라이브 퍼포먼스 같은 것들 말이다. 확실히 한 번이라도 보고 나면 ‘술탄 오브 더 디스코’라는 긴 이름을 다시는 잊지 못할 만큼 그들의 퍼포먼스가 주는 이미지는 대단히 강력하다. 그러나 이런 이미지들 때문에 술탄을 단지 키치함과 코믹함만을 무기로 대중의 주목을 갈구하는 뜨내기 밴드 정도로 생각한다면 그건 정말 큰 착각이다. 비록 그들의 시작이 ‘한국 인디씬 최초의 립싱크 댄스그룹’(??)이었다 한들 현재의 ‘술탄 오브 더 디스코’는 디스코, 소울, 훵크, 알앤비 등 흑인음악의 유산들에 단단하게 뿌리를 두고 독창적인 스타일과 탁월한 그루브를 만들어내는 한국 대중음악의 유일무이한 캐릭터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저 신나는 퍼포먼스 하나만으로 세계 최고의 음악 축제로 꼽히는 ‘글래스톤베리 페스티벌’에, 심지어 두 번이나 초청될 리는 없는 것이다.
올 가을 대망의 정규 2집 발매를 예고한 술탄이 지난 7월의 첫 선공개 싱글 ‘Super Disco (수퍼디스코)’에 이어 최근 새로 선보인 두 번째 싱글 ‘미끄럼틀’은 아주 진득하고 소울풀한 알앤비/소울 넘버다. 혹자는 ‘술탄의 알앤비’가 낯설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지난 2015년에 이미 싱글 ‘니온 라이트(Neon Light)’를 통해 정통파 알앤비 발라드를 제대로 선보였던 술탄이기에 이를 너무 생경하게 여기거나 딱히 외도, 혹은 새로운 시도 등으로 확대해석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오히려 조금 시야를 넓혀 이들의 음악이 어디에 뿌리를 두고 있는가-를 상기하면 이런 작업은 어떤 의미로는 ‘필연적’인 것으로도 바라볼 수 있겠다.
2018년 한국에서 #알앤비 태그를 달고 태어난 모든 노래들 중 가장 알앤비적인 곡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문득 했을 만큼 제대로 된 알앤비를 선보이는 이 곡은 현재 한국 흑인음악 씬에서 단연 눈에 띄는 행보를 보이고 있는 음악가 중 한 명인 ‘SUMIN’(수민)이 노랫말과 곡을 썼고 편곡에도 참여했다. 그간 술탄의 모든 곡을 ‘나잠 수’가 썼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것만으로도 상당히 이례적인 시도인 셈인데 이 의외의 조합이 만들어낸 결과물은 그야말로 기대 이상이다. 수민의 솔로가 불쑥 튀어나오는 중반부 이전까지는 낭만적인 선율, 느긋한 그루브, 두툼한 브라스 섹션이 가미된 풍부한 사운드가 이끄는 클래식한 소울 악곡의 모습으로 전개되는 이 곡은 수민의 등장과 함께 급격히 변주되는 리듬, 그리고 신스가 주도하는-왠지 놀이동산의 회전목마를 연상시키기도 하는-사운드가 갑자기 시공간을 현대로 불쑥 옮겨오며 분위기를 극적으로 반전시킨다. 그리고 이 반전된 무드는 곡의 최후반부에 이르러 다시 과거와 뒤섞이고 이제 곡은 마치 소울 밴드 콘서트의 피날레처럼 모든 악기들이 힘껏 소리를 쏟아내며 장중한 엔딩으로 내달린다. 이처럼 독특한 대비를 만들어내는 곡의 구성, 적절한 완급을 동반한 풍부한 사운드의 편곡 등 이 노래는 모든 면에서 도무지 흠잡을 데 없이 근사하다.
사실 개인적으로 최근의 ‘레트로’ 붐이 슬슬 지겹다는 생각이 들고 있던 참이다. 과하다 싶을 정도로 여기저기서 비슷비슷한 장르, 사운드의 음악들이 별다른 차별성 없이 쏟아지고 있다는 인상을 종종 받고 더러는 이런 ‘레트로의 홍수’가 다소 피로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그런 관점에서 이 노래에 또 다른 의미를 하나 더 부여하고 싶다. ‘미끄럼틀’을 통해 드러나는 술탄의 레트로가 단순히 과거 음악의 ‘흥미로운 이미지’만 빌려온, 겉보기만 그럴싸한 카피에 그치지 않고 장르가 가진 본질적인 아름다움과 멋을 제대로 포착하고 이를 근사하게 재현하고 있으며 동시에 그저 재현으로만 그치지 않기 위해 고민한 흔적이 십분 느껴지는, 밴드의 오리지널리티와 시대감각까지 담보하려는 시도마저 함께 담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긴 시간 동안 알앤비, 소울 음악의 충실한 팬이었던 내게 무척 반가운 선물인 이 곡은 (적어도 현재까지) 2018년에 만난 가장 인상적인 순간들 중 하나다.
Editor / 김설탕
sugarules@poclano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