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상하는 동안 케이팝 앨범을 듣고 있는 듯한 감각을 이따금씩 느꼈다. 그런 관점에서 다시 생각해보니 실제로 어떤 지점들이 꽤나 케이팝과 닮았다 여겨진다. ‘멋짐’을 뽐내는 장르적인 색채 강한 트랙들과 편하게 들을 수 있는 팝 성향의 트랙들이 적당한 비율로 블렌딩된 밸런스 잡힌 구성이 일단 그렇고, 마치 노련한 프로듀서의 손길이 닿은 듯 곳곳에서 세련된 솜씨가 느껴지는 매끄러운 만듦새가 또한 그렇다.
leanon(리논)
BLOSSOM
2021.04.27
여전히 ‘플레이리스트’, ‘큐레이션’이 화두인 요즈음의 음악 시장이다. 대부분의 음악 서비스들이 고감도의 귀로 좋은 음악을 큐레이팅하는 좋은 에디터들을 보유하고, 그들을 앞세워 구독자들, 또 잠재적 구독자들에게 “우리가 너의 취향을 가장 잘 알아!”라며 열렬한 구애를 보내는 시대인 것이다.
최근 흥미롭게 느낀 사건(?)이 있었다. 애플뮤직이 제공하는 주요 플레이리스트들 중 몇 군데에 신예인 ‘leanon(리논)’(이하 ‘리논’)의 노래 ‘drownin’이 동시에 선곡된 것이다. 딱히 알려진 이력도 없고, 당연히 그 시점에서 어떠한 크레딧도 없었을 – 사실상 무명에 가까운 – 음악가의 데뷔작 수록곡이 ‘선곡 선수’들인 에디터들의 레이더에 포착되었다는 것, 그건 그의 음악이 오롯이 음악 그 자체만으로도 그들의 귀를 잡아 끌 만한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일 거다.
‘리논’에 관한 정보는 많지 않다. ‘콜드’의 레이블 Wavy 소속 프로듀서 Stally와 함께 아이돌 음악의 곡 작업을 해왔다는 것, PAUL이란 이름으로 하나의 싱글을 냈고 알앤비 아티스트 Nieah의 곡을 쓰고 피쳐링한 적이 있다는 것, 그리고 래퍼 서출구의 2020년 정규앨범 [Spill]의 공동 프로듀서로 앨범의 프로듀싱 전반에 관여하고 대부분의 트랙들을 직접 만들었으며 그 즈음부터 ‘리논’이란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는 것. 이 정도가 지금 시점에서 공유 가능한 일말의 정보들이다.
지난 4월에 공개된 아직 따끈따끈한 데뷔작 [BLOSSOM] EP는 그간 그의 작업물들이 주로 힙합, 알앤비 계열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다소 뜻밖인, 의외성 있는 컨셉트와 구성의 작품이다. 이제는 한국식 흑인음악의 특징적인 색채로 자리잡은 듯한, 소위 ‘K-알앤비’적인 무드 속에 Anderson .Paak의 그것처럼 느껴질 만큼 멋진 그루브를 엮어낸 오프너 ‘drowinin (feat. 서출구)’이 그의 장르 음악가적 일면이라면, 그룹 ‘구구단’ 출신의 해빈과 함께한 ‘TGIF’, 앨범 타이틀과 동명의 곡 ‘blossom’, 아웃트로인 ‘어떻게 알아요’까지 앨범의 중심에 놓인 곡들은 모두 어쿠스틱 사운드를 전면에 내세운 감미로운 팝 넘버들로 그의 음악적인 범위가 단지 힙합/알앤비 음악에만 국한되지 않음을 은근히 드러낸다. 특히 ‘어떻게 알아요’는 이 곡만 따로 들었다면 기타 기반의 싱어송라이터가 쓴 곡이 아닐까-생각이 들 만큼 영롱하고도 그윽한 기타 선율이 인상적인 곡. (크레딧을 보니 ‘고형열’ 님의 연주라고 한다) 끝으로 보너스 트랙 ‘Hypnotized’에 이르면 다시 알앤비 음악가 ‘리논’의 모습을 만나게 되는데 그가 평소에 좋아한다는 OVO Sound(래퍼 Drake의 레이블) 소속의 ‘PARTYNEXTDOOR’나 ‘dvsn’ 등이 연상되는, 토론토 냄새 물씬한 트랩 알앤비 곡이다.
감상하는 동안 케이팝 앨범을 듣고 있는 듯한 감각을 이따금씩 느꼈다. 그런 관점에서 다시 생각해보니 실제로 어떤 지점들이 꽤나 케이팝과 닮았다 여겨진다. ‘멋짐’을 뽐내는 장르적인 색채 강한 트랙들과 편하게 들을 수 있는 팝 성향의 트랙들이 적당한 비율로 블렌딩된 밸런스 잡힌 구성이 일단 그렇고, 마치 노련한 프로듀서의 손길이 닿은 듯 곳곳에서 세련된 솜씨가 느껴지는 매끄러운 만듦새가 또한 그렇다. (어디까지나 뇌피셜이지만) 그는 아마 이런 구성을 통해 자신이 특정 장르의 스페셜리스트이기 이전에 이에 얽매이지 않는 음악적 다양성, 광범위함, 그리고 가능성을 지닌 음악가임을 사전에 알려두고 싶었던 것 아닐까-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마침 오늘 새 싱글 ‘Friend Zone’이 막 공개되었다.
데뷔작으로 제법 괜찮은 쇼케이스를 해낸 그가 이번엔 과연 어디로 경로를 택했을지, 이 글을 통해 리논의 음악에 조금이라도 호기심이 생긴 분들이라면 지금 바로 직접 확인해보길 바란다.
Editor / 김설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