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 아홉 트랙을 수록한 이 정성스런 EP는 시로스카이 특유의 따스한 정서가 비트 곳곳에 가득 배어있어 반가운 작품이다. 정서적으로 여전하다고 해서 음악적으로 변화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앨범 작업을 중간에 한 번 엎으며 50곡이 넘는 그간의 작업물들을 모두 버렸다고 했다. 스스로에게 ‘올드’하게 느껴지는, 과거의 작업을 답습한 듯한 작업물들과 미련없이 결별하고 스스로의 창작 세계를 다음 스테이지로 과감하게 옮겨가고자 시도한 것이다.”
시로스카이
The Seed
2019.01.11
꽤 오래 랩/힙합 음악을 좋아해오면서 가끔씩 의아함이 들곤 한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유독 ‘힙합’ 카테고리 내에선 프로듀서, 혹은 비트메이커 포지션에 있는 여성 음악가를 찾기가 힘들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없는 걸까? 이 점은 비단 국내뿐 아니라 해외 어디나 마찬가지인 거 같지만 그나마 해외에서는 한 시대를 화끈하게 풍미했던 ‘미시 엘리엇(Missy Elliott)’ 같은 슈퍼스타도 있었고 최근엔 ‘원다걸(wondagurl)’이나 ‘크리스탈 케인즈(Crystal Caines)’ 등 신진 여성 비트메이커들의 약진도 꽤 눈에 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성비는 여전히 말도 안 되는 수준이라고 생각하지만) 반면 한국에는 여성 힙합 비트메이커가 누가 있나-하고 한참을 생각해봐도 대번에 떠오르는 이름은 여전히 단 하나뿐이다. ‘시로스카이(Shirosky)’. 2010년 첫 EP <The Orbit>으로 데뷔한 이래 현재까지도 재즈힙합, 멜로우비트에 기반을 두고 꾸준히 창작활동을 펼치고 있는 시로스카이는 한국에서 거의 유일무이한 여성 ‘힙합 비트메이커’다.
2015년 정규작 <La Lecture> 이후 3년이 넘는 시간 동안 별다른 활동이 없다 싶었던 시로스카이가 2019년의 시작과 함께 새 EP <The Seed>를 공개했다. 총 아홉 트랙을 수록한 이 정성스런 EP는 시로스카이 특유의 따스한 정서가 비트 곳곳에 가득 배어있어 반가운 작품이다. 정서적으로 여전하다고 해서 음악적으로 변화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녀는 앨범 작업을 중간에 한 번 엎으며 50곡이 넘는 그간의 작업물들을 모두 버렸다고 했다. 스스로에게 ‘올드’하게 느껴지는, 과거의 작업을 답습한 듯한 작업물들과 미련없이 결별하고 스스로의 창작 세계를 다음 스테이지로 과감하게 옮겨가고자 시도한 것이다. 보컬리스트인 ‘HAKI(하키)’와 ‘RIPLEY(리플리)’를 비롯해 ‘NJ’, ‘차여울’, ‘Jolly V(졸리브이)’ 등 많은 음악가들이 이 작업에 참여했고 무엇보다 한국 힙합의 초창기부터 현재까지 꾸준히 활약하고 있는 베테랑 비트메이커 ‘Pe2ny(페니)’가 다방면으로 조력하며 완성도를 높이는데 일조했다. 신스를 비롯한 전자음들의 향연으로 미래적이고 신비한 무드를 조성하는 ‘Set Me’를 시작으로 808 사운드로 만든 리듬과 신스, 피아노, ‘하키’의 보컬 등 다양한 소리들이 어우러져 한껏 멜랑콜리한 무드를 조성하는 ‘Closer’, 보컬 샘플링의 활용이 돋보이는 재지한 멜로우비트 ‘하현’, 피아노가 중심이 되는 예쁜 선율 위로 보컬리스트 ‘리플리’의 예쁜 보컬이 더해져 왠지 과거 시부야케이 전성시대에 좋아했던 어떤 노래들이 문득문득 떠오르는 ‘Feel Inside’, 근사한 재지 비트 ‘Beat 1’ 등이 연이어 흐르는 25분 남짓의 재생시간은 참으로 정적이고, 또 평온하다.
어둑한 밤, 은은한 조명이 커진 거실 혹은 침실, 그리고 잠시 일상의 모든 것들로부터 벗어나는 고요한 안식의 순간, ‘시로스카이’의 음악은 이전에도, 그리고 현재에도 바로 그런 장면, 순간들을 자연스레 연상시킨다. 그녀의 비트가 품고 있는 따사로움과 다정함이야말로 어쩌면 그 순간에 가장 필요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Editor / 김설탕
sugarules@poclano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