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개의 트랙을 수록한 TRPP의 야심찬 정규 앨범에는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인디즈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하지만 이를 단순히 레퍼런스 혹은 차용이라고 속 편히 에둘러 설명하기에는 조금 곤란하다. 영미 락의 찬란한 순간들을 자양분 삼아 쌓아 올린 뼈대에 TRPP만의 아이덴티티를 입힌 본작의 만듦새는 트렌드를 따라가기에 급급한 부실 공사보다는 탄탄한 내진 설계에 가깝다.
TRPP
TRPP
2021.07.05
마미손이 쏘아 올린 작은 공은 한국의 일만이천 음악가들에게 용기와 동기부여를 안겨주었다. ‘부캐’라는, 그럴싸한 프레임은 일정 수준의 궤도에 오른 뮤지션들에게 큰 리스크 없이도 새로운 음악적 시도를 가능케 했다. 음악 시장에 불어닥친 부캐 신드롬은 세대와 장르를 넘나들었다. 힙합에서 R&B/Soul로 (딩고 프리스타일 <새끈보이즈>), K-POP에서 트로트로 (‘삼식이’, ‘성원이’) 다층적인 매력을 선사했다. 부캐 열풍은 서울 마포구 와우산로에서 조용히 음악에 정진하던 세 뮤지션의 가슴에 불씨를 지폈다. 셀프 타이틀 데뷔 앨범을 발표한 TRPP에 관한 이야기다.
TRPP는 중국계 프랑스인 치치 클리셰(Chi-Chi Cliché), 일본인 후루카와 유키오(Furukawa Yukio), 소재 불명의 엘리펀트 999(Elephant 999)로 이루어진 다국적 3인조 밴드- 라고 한다지만, 이는 거대한 농담과도 같다. 한국의 인디 씬을 착실히 체크해 온 리스너들이라면 이들의 정체를 쉽게 추론할 수 있으리라. 본캐로 추정되는 인물들이 SNS를 통해 끊임없이 TRPP의 소식을 퍼나르는 등 그 어떤 의문조차 제공하지 않는다는 점 역시 실소를 짓게 한다.
12개의 트랙을 수록한 TRPP의 야심찬 정규 앨범에는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인디즈의 모든 것이 담겨 있다. ‘BILLY’와 ‘Home dance’에서는 비치 하우스(Beach House)와 더 페인스 오브 빙 퓨어 앳 하트(The Pains of Being Pure at Heart)로 대변되는 2000년대의 인디/드림팝을 만끽할 수 있으며 유일한 피쳐링 아티스트인 요괴(Yogoe)가 참여한 ‘a Joke’는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My Bloody Valentine)과 슬로우다이브(Slowdive)의 그것을 연상케 하고, 수록곡 중 가장 리프가 돋보이는 댄서블한 넘버 ‘MEdia’는 오아시스와 진흙탕 싸움을 벌이던 호기로운 90년대의 블러(Blur)를 소환한다. 하지만 이를 단순히 레퍼런스 혹은 차용이라고 속 편히 에둘러 설명하기에는 조금 곤란하다. 영미 락의 찬란한 순간들을 자양분 삼아 쌓아 올린 뼈대에 TRPP만의 아이덴티티를 입힌 본작의 만듦새는 트렌드를 따라가기에 급급한 부실 공사보다는 탄탄한 내진 설계에 가깝다.
파란노을의 세계적 성취를 기하여, 한국의 언더그라운드-서브컬처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슈게이징 붐은 온다”는 텍스트 밈이 성행하던 때가 있었다. 실제로 그 붐이 도래한 지는 사실 아무도 알 수 없다. 심지어 그 밈을 널리 알린 인물 역시 슈게이징 아티스트(Piano Shoegazer)라는 것 또한 흥미로운 사실이다. 다만, 천천히 또 서서히 슈게이징은 그 세를 넓히며 우리의 플레이리스트 곳곳을 잠식해나가고 있으며 TRPP 역시 그 파도 위에 올라타 있다.
Editor / 키치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