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명
- Artist 선명(sunmyeong),
- Release2026-04-22
- Genre Rock,
- Labelsunmyeong
- FormatEP
- CountryKorea
- 1.폭설
- 2.여름
- 3.그네
- 4.일기
- 5.편지
『선명』(선명, 2026)의 라이너노트
『선명』은 듣는 이를 얼떨떨하게 만들 성싶은 몸짓을, 아주 단호하면서도 그렇기에 근사한 몸짓을 취한다. 스스로에 대해 얼마나 낯설어질 수 있는가를 시험해보려는 몸짓, 자기로부터 얼마나 멀리 달아날 수 있는지 시험해보기 위해 갈 수 있는 한 멀리 가보려는 몸짓이 있다고 할 텐데, 이는 특히나 『선명』의 양 끝을 대조할 때 아주 또렷이 드러난다. 음반의 출발점, 곧 「폭설」의 도입부에서, 우리는 아직 아무도 밟지 않은 눈밭을 조심스레 디디며 나아가는 발소리를 듣는다. 두껍게 쌓인 눈이 포근히 내리눌리고, 그 곁에서는 아이들이 서로 부르며 노는 소리가 기분 좋게 들려온다. 모든 것은 그 평화로운 정경을 사려 깊게 보존하여 전달하기 위해 작동하는 듯하며, 조심스레 노래하기 시작하는 목소리도 그 정경의 고요함을 강조하는 듯하다. 아르페지오를 시작한 기타가 부드러운 음색을 울리고, 곧이어 목관 악기가 따스한 온기를 더한다. 이 온유한 소리들을 생각하자면, 이 EP가 끝나갈 때 쏟아내는 우악스럽고 난폭한 소리들은 놀랍다고 할 만한 것이겠다. 마지막 곡인 「편지」의 종결부 45초 동안, 우리는 공격적으로 과장된 음압의 저음이 다른 모든 소리들을 짓밟아 구겨버리는 양 강제로 침묵시키는 것을 듣게 된다. 저역대가 노래 안의 다른 요소들을 모두 밀어내 버린 채 홀로 노래를 터뜨릴 듯 날뛸 제에 덮쳐오는, 음소거와는 전혀 다른 방식의, 너무도 시끄러운 침묵. 당신은 위세를 구가하는 저역대의 거대한 몸집과 그 육중한 발걸음 탓에 다른 소리들을 들을 수 없다. 여기에 이르러 음반이 재생을 마치고 멈추었을 때, 첫 곡을 듣기 시작하던 때의 기분을 되짚어 본다는 것은 대단히 곤란한 일이 되어 있을 것이다. 『선명』의 처음과 끝 사이에는 이렇듯 비교를 방해하는 차이가 놓여있다.
『선명』이 자기에게 부과하는 시험은 첫 곡에서부터 치러진다. 「폭설」은 어느새 다정하던 표정을 바꾸어 점차 스산해져가는 분위기로 저 자신을 감싼다. 무언가를 긁어대는 듯 끼긱대는 소리들과 심벌의 잔향, 지저분하게 덧붙어 오는 글리치가 천천히 노래의 성격을 바꾼다. 「폭설」은 애초의 온기를 보존한 채로도 그렇듯 자기가 자아내던 분위기를 뒤집어 놓는다. 그렇듯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변화의 기운은 저 노래의 제목에도 서려 있는 것이 아닐까? 소복이 쌓이기 시작할 때 눈은 마치 얇은 이불처럼 땅이나 지붕 혹은 나뭇가지 위를 부드럽게 덮을 것이다. 그러나 계속해서 쌓여가고 있노라면, 눈은 다른 모든 것들 위에 자기를 덧씌워 그 자취며 윤곽조차 식별불가능하게 만들 것이고, 그런 까닭에 어딘가 무서운 구석을 지닌 것으로 변해갈 것이다. 바로 그와 같은 식으로, 이 노래가 흘러감에 따라, 똑같이 새하얀 눈발에 사뭇 다른 종류의 분위기가 깃들게 된다.
「여름」은 시시각각 제 표정을 표변해가는 노래다. 도입부에서 복스 샘플들만 연신 되풀이될 때, 뒤이어 전기 기타가 화성 진행을 들여올 때, 그 다음 어쿠스틱 기타가 스트러밍 리프를 더할 때 등등, 노래가 시작한 직후 얼마 안 되는 시간 동안에도 이런저런 구간들을 나누어볼 수 있을 것이다. 리프의 리듬 패턴이 완전히 달라지며 긴장감이 감돌게 되는 때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물론 드릴 앤 베이스 풍의 드럼 패턴이 맹렬하게 기습해오는 때에 이루어진다. 이것은 「폭설」에서의 점진적인 변화, 마치 탈피와도 같은 연속적인 변화가 아니라, 아주 급작스레 이루어지는 긴박한 변화다. 저 시끄러운 드럼이 1분 가까이 노래를 헤집어놓음에 따라, 「여름」이 취해 온 이런저런 형태들이 모두 솎여 나가고, 전혀 다른 종류의 형태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
첫 두 곡에서부터 이 EP는 덜하거나 더한 정도의 비일관성을 자기 안에 도입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음반이 양식상의 일관성에 무관심한 것은 전혀 아니다. 양식의 일관성을 방기하거나 깨끗이 단념한다고 한다면 이 EP는 도리어 자기 안의 비일관성조차 강조할 수 없을 것이다. 자기로부터의 이탈이 어떻게, 또 어느 정도로 이루어질 수 있는가를 시험하기 위해서는, 노래들이 하나의 흐름 안에 그대로 머물 때에 그것들이 어떻게 완성될 것인가 역시도 확인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서로 반대되는 항들 사이의 대조가 가능해질 테고, 시험의 성과 역시 가늠할 수 있게 될 테니 말이다.
「일기」는 훌륭한 대조의 기회를 제공한다. 이 노래는 반듯한 리듬을 타고 나아간다. 베이스의 평탄한 8비트 근음 연주를 골조로 삼아, 이 곡은 이 EP에서 가장 표준적인 구조를 갖춘 곡으로 완성된다. 세 개의 보컬 벌스가 있고, 그 사이에서는 리드 기타 멜로디가 강조되는 간주가 두 번에 걸쳐 나오며, 두 번째 간주에서는 기타 솔로가 연주된다. 이 노래에서 우리는 「여름」이나 「편지」에서와 같은 급진적 이탈의 대립항을, 곧 일관된 양식과 분위기 안에서 제 흐름을 지켜가는 노래를 듣게 된다.
「일기」보다는 훨씬 장난기가 가득하지만, 「그네」 역시 그와 같은 일관성을 드러내기는 마찬가지다. 간단하고 진솔하면서도 십중팔구 수신자를 (좋은 답변을 준비해 둔 수신자라 하더라도) 곤혹스럽게 만들 짓궂은 물음 “왜?”로부터 시작해 도로 그 물음으로 끝나는 「그네」는, 처음과 끝에 동일한 요소를 배치하여 재귀적 구조를 취하되, 곳곳에서 갖은 재치를 부림으로써 제 내용을 아기자기하게 채워간다. 틈틈이 해맑은 목소리들이 장식처럼 배치되기도 하고, 이따금 빠르게 종을 흔든다거나 방울을 터뜨리는 듯한 소리들이 울리기도 한다. 보컬이 까무러치듯 숨을 들이마시기도 하고, 또 언제는 울음소리를 흉내 내기도 한다. 연주는 경쾌하게 활기를 띄고 있으며, 그 쾌청한 분위기를 해칠만한 음향은 모두 피해가고 있다.
가장 과격한 이탈을 들려주며, 그럼으로써 가장 도드라지는 구간을 연출하는 곡은 물론 「편지」다. 이는 「편지」가 구태여 비정형적이 되고자 노력한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편지」는 하나의 정형화된 장르를 따라 자기를 조직하고, 그 장르적 습성을 마지막 순간 일거에 폐기함으로써 자기를 배반한다. 이 노래가 자기를 배반하기 위해서라도, 이 노래에는 하나의 형태와 흐름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편지」는 그런 점에서 반장르적이다. 왜냐하면 「편지」는 자기 장르에 고유한 성패의 척도를 무효화함으로써 그 장르의 쟁점을 기각하는 데에 이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구간에서 「편지」는 분명 포스트록 트랙이다. 차분히 시작된 연주는 축축하게 잔향이 퍼뜨리는 드럼이 들어오면서 점차 가열되어가고, 재생시간이 3분을 지나갈 즈음부터 여러 가지 음색들이 복잡하게 엮인 음향적 급류가 강렬한 기세로 몰아친다. 곡의 규모가 커지고, 이에 따라 곡의 길이도 길어진다. 포스트록의 쟁점은 이 가운데에서 저 음향적 급류의 복잡성과 구체성을, 그리고 그 음향이 몰아칠 때의 강렬함을 즐기도록 하는 데에 있을 것이고, 그것이 성취될 때 그 장르가 성공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편지」에서는 어느새 킥 드럼의 저역대 음압이 남모르게 커져가며 주변의 소리들에 대해 훼방을 놓기 시작한다. 그리고 노래가 끝으로 치달을 때면, 이제 저 과장된 저역대가 다른 모든 요소들을 노골적으로 짓눌러버린다. 그 제에 이르면 더 이상 음색에 있어서의 다기한 특징들을 식별한다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 된다. 기실 그런 내용들은 이미 뭉개져있기 때문이다. 종결부에서, 「편지」는 장르에 반하는 몸짓의 성패를 자기의 쟁점으로 삼게 되고, 이로써 자기의 첫 모양새로부터 가장 먼 곳까지 이르게 된다. 첫 트랙이 출발했을 때의 모양새로부터 헤아리자면 더욱 더 먼 곳에 도달한 셈이다. 그 간격이 달성되는 순간이, 『선명』이 가장 과감해지는 순간일 것이다.
이 EP를 처음 들은 사람에게 새겨질 인상은 어떤 것일까? 혹은, (『선명』은 선명의 첫 EP이므로,) 그가 앞으로 선명의 음악에 대해 돌이키게 될 첫인상은 어떤 것일까? 누군가는 첫 트랙의 중간 즈음, 추운 날 더운 입김을 부는 듯 숨을 몰아 내쉴 때의 적요함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누군가는 「여름」의 도입부에서 차갑게 반복되는 복스 샘플 사이를 청량한 톤의 기타 스트로크가 뚫고 나아갈 때의 고양감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누군가는 「그네」의 천진한 생기와 기쁜 예감에 찬 율동감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또 누군가는 「일기」의 간주에서 아스라이 들려오는, 파도가 백사장에 닿아 포말로 부서지는 듯한 바로 그 소리를 떠올릴 수도 있겠으며, 어쩌면 누군가는 「편지」의 전반부에서 기타 아르페지오 위로 보컬의 잔향이 퍼져나가며 글리치가 아스라이 메아리칠 때의 이완감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그러나 누군가는 「여름」의 후반부, 강한 스터터 효과와 디스토션이 걸린 스네어가 성마르게 독무를 출 때의 격정을 떠올릴 수도 있겠으며, 마지막 곡이 끝날 때의 흉폭함과 중량감을 떠올릴 수도 있겠다. 여기 다 나열할 수 없을 그 모든 면면들의 합치와 충돌, 조응과 대립이 갈마들어 이 음반의 성격을 이룰 것이다.
『선명』은 상이한 (때로는 상충하는) 자질을 띠는 부분들을 제 안에 두루 지니면서도, 그 다종성에 집중하느라 각각의 부분들에 대해 요구되는 만큼의 만듦새를 결격하게 되는 일은 피해가고 있다. 재료들을 세심히 조합하려는 노고를 기울이되, 세심함의 파기를 결심한 때에는 주저하지 않는다. 재생시간이 지나가는 동안, 각각의 구간들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당신의 관심을 끌어당길 것이다. 그에 이끌려가 볼 것을 권하고 싶다.
조지환 / 웹진 온음 필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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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myeong
Hii Su & Ji Su
All songs composed, produced, arranged & played by sunmyeong
All lyrics by Cho Ji Su
Vocal Recorded by QRIM(이규림) @mirq Studio
Other Recorded by Hii Su @Poison Frog Studio & Side Room
Mixed by Hii Su
Mastered by Pishu
Cover & Album Art by Cho Ji Su
Special Thanks to Pishu, khc, Cho Ji Hwan, QRI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