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n Amer [Loop 1]

 

그의 데뷔작은 그렇게 기대감과 개운함을 동시에 취하는 열린 결말로 이어진다.

 


 

Non Amer
Loop 1
2022.06.18

 

신예 뮤지션의 번뜩이는 데뷔작을 만날 때면 여느 때보다도 눈을 반짝이며 재생 버튼을 누르곤 한다. 마치, 적당한 선에서 떡밥을 회수하며 자연스럽게 열린 결말로 마무리되는 잘 만든 영화 한 편을 감상하는 기분이랄까. 그리고 그것이 싱글 단위를 넘어 EP 이상의 규모 있는 작품이라면 그만큼의 영감을 주는 대상을 찾기 힘들 정도로 흥미로운 감상이 가능하다.

 

올해 6월 데뷔한 싱어송라이터 Non Amer의 음악은 이러한 측면에서 흥미로운 작품이다. 그의 데뷔작이자 첫 번째 EP [Loop 1]은 총 네 곡으로 구성되어 담백한 멋을 자랑하는데, 미니멀한 신스 사운드와 더불어 무심하게 툭툭 내뱉듯 하지만 디테일이 살아있는 독특한 창법의 조화로 초장부터 귀를 사로잡는다. 도입부를 지난 후에도 과하지 않은 수준에서 리듬 위주로 쌓이는 악기들 덕분에 되려 리듬 위로 부상하는 담담한 보컬은 어딘가 익살스러운 느낌을 풍기는 멜로디와 어우러져 Non Amer라는 뮤지션의 첫인상을 설정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그러나 이렇게 설정된 첫 곡에서의 첫인상은 트랙이 넘어감에 따라 연이어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다. 이번 EP가 포크 앨범이었나 싶을 만큼 위화감 없는 기타 연주와 목소리만으로 감정선을 이어가는 두 번째 트랙 ‘cardigans’을 지나, 흡사 여유로운 여름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는 칠(chill)한 분위기의 ‘bottom parade’, 그리고 이제껏 없었던 공간감과 레이어드를 중심으로 성스러운 기분마저 느껴지게 하는 마지막 트랙 ‘MESSIAH’까지. 서로 다른 사람의 곡인 것 같이 느껴질 정도로 다채로운 각각의 소리들은 한 아티스트의 캐릭터를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다양한 여지를 제공한다.

 

여기서 재미있는 점은, 이 다채로움을 하나의 작품으로 엮어주면서도 각각의 트랙이 독립된 작품으로서 존재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핵심적인 요소가 바로 ‘목소리’라는 사실이다. 때로는 여러 사운드 소스 가장 위에서 곡의 리듬을 진두지휘하기도, 때로는 절제된 반주 위에서 묵묵하게 감정을 쌓아 올리기도 하는 Non Amer의 보컬은 앞단에서 서술했던 것처럼 언뜻 무심해 보일 수도 있지만, 어절과 어절 사이를 미묘하게 연결하는 디테일한 창법을 통해 각각의 트랙이 가진 장르적 특성을 십분 살려준다.

 

 

그 덕분일까, [Loop 1]을 전곡 반복 재생으로 듣고 있다 보면 트랙과 트랙 사이의 상반된 분위기가 인상적으로 느껴짐과 동시에, 목소리가 가진 고유한 질감 덕에 전체적으로 하나의 곡을 듣고 있는 것 같아 끝없이 반복해서 들어도 어색하지 않은 신기한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마치 사계절이 순환하듯 전혀 다른 네 곡이 유기적으로 어우러지고 있는 이번 작품은 실제로 앨범의 제목이기도 한 ‘Loop’, 즉 반복과 사이클을 그 주제로 삼고 있기도 하다. 물론 그것이 노골적인 작법을 통해 전면에 드러나는 것은 아니지만, 음악이 가지는 반복적인 구조에서 뽑아내어졌다는 이 ‘Loop’라는 키워드가 은연중에 작품 내외적으로 이번 앨범을 관통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Non Amer’는 이름이 없었으면 좋겠다는 뮤지션 본인의 막연한 생각에서부터 착안한 ‘no namer’라는 표현에서 만들어진 예명이라고 한다. 어떻게 보면 ‘이름이 없다’라는 뜻의 아이러니한 이름인 셈인데, 이 ‘이름이 없다’라는 것, 다시 말해 하나의 고정된 무언가로 불리울 수 없다는 것은 반대로 어떠한 표현으로도 수식될 수 있는 가능성을 뜻한다고도 볼 수 있지 않을까. 이 질문의 끝은, 이미 서로 다른 양상으로 완성된 네 개의 트랙 안에서 팔색조다운 면모를 선보인 Non Amer라는 뮤지션의 카멜레온 같은 확장성으로 인해 즐거운 상상으로 마무리된다. 데뷔작이 가지는 가능성이라는 측면에서, 그의 첫 번째 EP [Loop 1]는 그렇게 기대감과 개운함을 동시에 취하는 열린 결말로 이어진다.

 

 


Editor / 월로비

Silly Silky [SIN데렐라]

 

‘SIN데렐라’는 자신이 동화와 느와르의 세계 양쪽을 같은 평면에 배치하며 두 장르소설을 하나로 모아왔다는 걸 분명히 인지하고 있는 매력적인 픽션이다.

 


 

Silly Silky
SIN데렐라
2022.05.18

 

트랙의 첫 구절, “자정에 갇혀버린 나의 달콥씁쓸한 악몽 (My bittersweet nightmare / Stuck on a midnight)”은 고전적인 잔혹동화이기보다, 오히려 현대풍의 느와르에 더 가깝게 들린다. 신데렐라에게 죄악(SIN)을 부여한 말장난 같은 이름의 화자가 후렴구에서부터 지속적으로 자신이 악당에 더 가깝다고(“Like a villain / More like a Villain”) 속삭이는 것을 생각해보면 말이다. 그럼에도, 실리 실키의 ‘SIN데렐라’는 화려한 동화 같은 이미지를 여전히 연상시키면서도 결국에 이를 스산한 흑백 풍의 악당 이야기로 풀어내야 한다. 물론 소리들만을 활용해서. 과연 어떻게?

 

두툼하고 뭉툭한 음색으로 웅웅거리는 베이스음이, 사운드스케이프에 축축하고 우중충한 대기처럼 내내 가라앉아있다. 이 소리는 반복적으로 강조점을 찍는 클랩이 자그맣게 딸깍거리는 하이햇과 함께 그루브를 맞추는 것처럼, 비트를 만드는데 일조하기보다는 저음부의 음계를 타고 분위기를 조성하는 편이다. 짙은 연기처럼 형체가 확연하진 않으나 어떠한 색채만큼은 분명하게 떠도는 저음부 주위에 존재하는 몇 개의 소리들이, 이제 ‘SIN데렐라’의 보다 핵심적인 특징들이 된다. 비구름처럼 거의 시종일관 우르릉대는 베이스음이 브릿지에서 잠시 잦아들 때 등장하는 소리들을 들어보자: 먼 곳에서부터 가까워지듯, 중후한 브라스 리프가 로우파이한 질감에서부터 끌어올려져, 후렴구로 돌입할 때 구경 넓은 총을 쏘듯 음을 빵, 터뜨리며 들어온다. 빛이 바랜 듯한 음질로 제시되는 브라스의 음색은, 후렴의 높다란 곳 저편에서 파르르 떨리는 소리들과 합쳐져 존 배리(John Barry)의 제임스 본드 시리즈 사운드트랙이 잠깐씩 모습을 드러내듯 들려온다. 여기에 도입부부터 바로 튀어나와 기본적인 박자에 엇나가게 배치되는 소리들이, 샘플링된 것 같은 질감 속에서 나타나는 것도 함께 둘 수 있겠고 말이다. 트랙에 농후하게 깔린 베이스음에 숨어 암약하는 이 소리들, 그 중에서도 이 사운드가 전달되는 음질은 분명한 과거의 것으로 받아들여질 LP 같은 매체들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렇게 ‘SIN데렐라’의 옛 느와르 영화와 같은 분위기는, 무엇보다도 원본에서 영리하게 떼어온 조각들을 현대적인 품질로 다듬되 여전히 ‘과거’의 기운이 남아있도록 재구성하여 형성된다. 90-00년대의 여러 뛰어난 트립합 양식의 팝송들이 그랬듯이.

 

 

그렇지만, 다른 매개를 한 번 거쳐 온 듯 등장하는 소리는 낡은 매체에서 샘플링된 질감의 브라스 음뿐만이 아니다. 텁텁하게 울려 퍼지는 피아노 건반 소리와 반짝반짝 빛나듯 흩뿌려진 철금 소리가 넣어지기도 했으니까. 추적추적 낀 베이스음이 잠시 조용해진 새를 타고 햇빛이 들어오는 것처럼 군데군데 틈을 타 들어오는 이런 소리들은 ‘SIN데렐라’가 오로지 어둡고 묵직한 분위기의 트랙만이 되지 않도록, 잠시 잊힐 때마다 등장하면서 전체와 긴장감 있게 어우러진다. 특히나 두 번째 후렴에서 랩 구간으로 돌입할 때 이 소리들은 오르골이나 하프처럼 오르내리면서 “SIN”보다는 “데렐라”의 느낌을 양껏 더하기도 한다. 해당 랩 구간이 인상적인 조옮김과 함께 장면을 전환하는 것처럼 시곗바늘 소리에 이어 따르릉 울리는 경보벨 소리를 삽입하며 다시 한 번 느와르의 세계로 빠져들 때에, 감초처럼 등장하는 이들 소리는 전체적인 풍경에 있어 대비 강한 흑백사진에 드문드문 나타나는 원색의 점 같은 역할을 할 테다. 그리고 이 자그마한 흔적들만으로도 ‘SIN데렐라’는 잠깐 동화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느와르의 음향적 세계를 출중히 만들어내기도 하고 말이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이 모든 동화-느와르 같은 조합이 정말로 먹혀들 수 있게 양쪽을 묶어주는 건 실리 실키의 목소리일 것이다. 속삭이듯 많은 숨을 넣어 부르는 편인 목소리는 각 세계에 알맞게 해석될 수 있겠고, 바로 그렇기에 양쪽 세계가 하나의 형상으로 겹쳐진 “SIN데렐라”라는 인물상과도 무척 어울릴 것이다. 이러한 목소리의 사용을 좀 더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물론, 지근거리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들을 다양하게 처리해 여기저기에 배치한 구성 덕이기도 하다. 대부분 특정 노랫말을 더욱 조곤조곤 숙덕이듯이 삽입하거나, 한 줄기의 목소리를 미완의 코러스처럼 번뜩 스쳐지나가게 하며 화자의 존재는 좀 더 파편화되면서 흐릿해진다. 크고 넓은 소리들을 무겁게 깔아 전반적인 느와르 분위기를 내고, 이것에 잠시 생겨난 틈새에 동화 같은 작은 소리들을 집어넣으며, 목소리를 다양하게 깔아 양쪽을 묶어주는 이러한 접근은 랩 구간으로 슬슬 들어가는 브릿지 구간에서 하나로 모인다. 시커먼 베이스음이 사라진 텅 빈 공간에서 후렴구의 멜로디를 계속 흥얼거리며 시작되는 이 짧은 구간은, 이윽고 샘플링한 듯 잘라내진 보컬이 조각조각 흩날리는 것과 함께 두꺼운 소리들 이외의 다른 모든 자그마한 전자음을 콜라주처럼 함께 뿌려놓는다. 그 몇 초만큼이나, 동화 같은 볕이 회색빛 느와르 세계에 직접적으로 쬐이는 순간도 없을 것이며, ‘SIN데렐라’는 이런 복선 회수를 위해 그 때까지의 경로에 조금씩 동화의 단서를 심어놓았을지도 모른다.

 

다양하게 녹음되고 합성된 수많은 소리들을 하나의 층위에 구성하는 행위를 일종의 세계제작으로, 그렇기에 이렇게 들려오는 모든 음악을 하나의 픽션으로 둘 수 있다면, ‘SIN데렐라’라는 트랙은 자신이 동화와 느와르의 세계 양쪽을 같은 평면에 배치하며 두 가지 장르소설을 하나로 모아왔다는 걸 분명히 인지하고 있는 매력적인 픽션이다. “실리 실키”라는 이름 자체부터가 철자도 발음도 비슷하지만 그 자그마한 차이 덕에 의미가 확 달라지는 단어를 끌어왔듯이 말이다. 그렇게, 조금은 엉뚱하면서도 동시에 부드러운 비단 같은 사운드와 목소리, 그리고 이들로 제작된 동화-느와르 픽션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멋진 데뷔 싱글로서 실리 실키의 캐릭터를 분명하게 설정한다.

 


Editor / 나원영 (대중음악비평가)

해서웨이 (hathaw9y) [Sweet Violet Flame]

여전히 아름답고 군더더기 없는, 가장 현재의 부산을 드러내는 음악.

 


 

해서웨이 (hathaw9y)
Sweet Violet Flame
2022.05.21

 

포크라노스에서의 마지막 리뷰를 어떤 앨범으로 쓸 수 있을까 고심하던 끝에 결정된 것은 부산의 3인조 밴드 해서웨이(Hathaw9y)의 새 앨범이었다. 해서웨이를 처음 알게 된 것은 부산음악창작소 덕분이었고, 그 당시에도 해서웨이는 유독 빛나는 밴드였다. 첫인상부터 심상치 않았고, 나만 그렇게 느낀 것도 아니었다. 음악의 지역색을 크게 믿지는 않지만, 매력적인 이 밴드는 가장 현재의 부산을 드러내는 듯했다. 과거의 부산은 펑크와 헤비니스의 땅이었고 그 이후 한동안은 힙합에서도 강세를 드러냈다. 물론 김일두처럼 언제나 부산 하면 생각나는 이들도 있다. 이후 세이수미부터 보수동쿨러, 검은잎들 등 부산은 꾸준히 좋은 밴드를 선보여왔다. 그래서 부산이라는 곳을 음악적으로 쉽게 단정지을 수는 없다. 더불어 부산이 주는 이미지, 서울과 다른 곳에서 만들어지는 분위기와 영향은 무시할 수 없다. 그러한 가운데 해서웨이 또한 부산을 기반으로 활동을 시작해 이제는 서울에서도 많이 알려졌고, 서울로 천천히 강제진출을 당하는 중이다.

 

 

해서웨이는 지금까지 세 곡 단위로 두 번 EP를 발매한 바 있다. 세 곡의 제목을 붙여서 EP 이름을 만드는 편인데, 이번 앨범 역시 “Sweet”, “Violet”, “Flame” 세 곡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의 음악은 여전히 아름답고 군더더기 없는 팝 음악이다. 세련된 동시에 밋밋하지 않은, 귀를 잡아 끄는 멜로디와 구성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멋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감각적이라는 찬사가 왜 나오는지를 알 수 있다. 보통 한 쪽을 가지면 다른 한 쪽을 잃거나 놓치는 경우가 많은데 세 곡 모두, 아니 지금까지 나온 곡들 대부분이 그런 점에서 좋은 균형을 이루고 있다. “Violet”처럼 상대적으로 긴 호흡을 풀어낸다 해도 결코 지루하거나 단조롭게 느껴지지 않는다. 두 보컬이 교차하여 곡을 풀어내는 과정도 자연스럽고, 매력적인 톤과 리프의 중요성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점차 호흡이 짧아지는 시대 속에서 이렇게 긴 호흡의 좋은 곡이 나오면 기분 좋게 감상하게 된다. 세 곡 모두 해서웨이 특유의 매력이 가득하다. 기분 좋은 긴장과 느슨함이 공존하고, 그 묘한 느낌은 사실 라이브에서 좀 더 잘 드러난다. 혹여나 이 글을 통해 해서웨이를 처음 본 이들이라면 반드시, 꼭 공연을 봤으면 한다. 그만큼 매력적이기도 하지만, 음원과는 또 다른 에너지와 연주를 느낄 수 있다.

 

이미 조금씩 많은 사랑을 받는 중인 해서웨이이기 때문에 크게 덧붙일 수식어는 없지만, 아직 더 알려져야 하고 알려졌으면 하는 밴드임에도 확실하다. 꾸준히 좋은 곡을 선보이는 이들이 이후에는 어떤 곡이 나올지, 그리고 더 긴 호흡에서는 어떤 연출을 선보일지 기대된다.

 

https://youtu.be/BI1L56UnHIA


Editor / 블럭

사람12사람 [꽃이 지듯 피지]

 

그 불분명한 사람 목소리는 여전히 분명하게 사람12사람의 것이다.

 


 

사람12사람
꽃이 지듯 피지
2022.04.21

 

22년의 트랙들 중, [빗물구름태풍태양]으로 익숙할 사람12사람과 더 많이 닮았다 느껴질 곡은 ‘꽃이 지듯 피지’보다도 사츠키($ATSUKI)의 ‘Neo World’일지 모른다. 이는 물론 사람12사람이라는 이름으로 솔로 활동을 재개한 지음뿐 아니라, 프로듀싱을 맡았던 은천(eunchurn)까지 모두가 트랙에 참여한 덕이다. 풍성하게 낮은 신스 음색이 반복적으로 움찔대는 동안, 사츠키는 전자음 풍경과 맞물리는 오토튠을 목소리에 걸어 훨씬 더 멜랑콜리한 가창을 선보인다. 이를 받아 다음 벌스를 이어가는 지음은 목소리와 노랫말을 통해, 사람12사람의 지문과도 같던 특징을 중얼거리면서 밝힌다: “조금은 더 바래 / 잔인한 치찰음.”

 

“입안에서 조물조물하면서 숨소리, 치찰음 같은 거에 집중 (유지성 인터뷰, 「이야기 속으로」, 상상마당 웹진)”할 때, 온전한 ‘소리’로 환원될 수 없는 잡음들이 목소리에 스며들어 고유한 질감을 만들어낸다. 입 밖으로 온전히 나오지 않은 채 속삭이고, 웅얼대고, 숙덕이고, 우물대는 이 소리들은 불분명함을 높여주고, 단어들이 똑바로 발화될 때 달라붙는 의미 값들을 수월히 벗겨낸다. 이런 마찰음들이 곧 일종의 노이즈로서 “통제될 수 없는 소리”가 될 때, 사람 목소리를 사용하는 데에 있어 “기계/컴퓨터로 지배 가능한 투명한 세계에서 작동하는 예술적 감각이란 바로 이 (상대적인) 의외성, 모호함에 있다. (「투명한 세계와 모호한 음색」, 온스테이지)” 그런 식으로, 통제 불가능한 의외성, 불분명한 모호함으로 사운드를 이끄는 지음의 목소리에 은천의 뛰어난 비트와 맞물릴 때 사람12사람의 전체적인 질감과 트랙의 전개가 형성되었다. 입속에서 발생하는 치찰음과 전자음의 오류를 활용한 글리치가 맞부딪히고, 일그러진 채 의미 사이를 흘러 다니는 발음들로 그런 불안정함을 옮겨오면서. 이러한 조합은 조금 이전 시기의 못이나 카프카, 아니면 두 EP들이 발매되던 시기의 룸306이나 75A가 들려줘온 매력적인 쌍에 있어서도 특히나 모호한 목소리의 역할과 불분명하게 통제된 전자음의 질감을 섬세하게 이용하며 사람12사람만의 분명한 성문(聲紋)을 만들어냈다.

 

 

그렇지만, 잠시간의 공백기동안 사람12사람에게 생겨난 “더 많은 이야기”는 “성숙과 완전함”에 대한 것이다. 이번 트랙에 주된 프로듀싱으로 참여한 St.void의 비트는 [빗물구름태풍태양]의 다운템포 팝 분위기나 이를 바탕으로 어쿠스틱한 접근을 하는 [feels too letter]와는 사뭇 다른 “팝”을 따라 진행된다. 도입부에서 현악기 소리가 자그마한 배경음이 되어주고 그 위로 건반 소리가 울려 퍼진 후, 후렴구를 대체하듯 트로피컬 하우스 풍의 드롭이 찾아오니까. 물론 빌드업-드롭 구조의 많은 댄스 팝 트랙들이 구성되는 것과는 조금 다르게, ‘꽃이 지듯 피지’의 “드롭”에는 베이스와 드럼의 “뒷켠”에서 앰비언트한 신스음이 차오르며 도입부에서 현악기가 맡았던 배경의 역할을 자연스럽게 옮겨 받는다. 이를 바탕으로 사람12사람의 목소리는 훨씬 더 고양되는 멜로디를 따라 움직이면서 “빌드업” 기능을 한다. 이 첫 드롭을 통과하면서, 스트링 편성 덕에 여리게 떨리듯 들리던 음색은 이윽고 좀 더 밝고 단단한 소리들에 둘러싸인다. 이 인상적인 드롭은 사실 일찌감치 등장한 후 마지막 1분 동안에 마무리로 나올 뿐이지만, 사람12사람만의 “성장”이 어떤지 밝히는 데에는 꽤나 효과적이다. 작년의 사운드클라우드 싱글들에서도 들을 수 있듯 훨씬 익숙한 문법과 사운드의 비트에서도 지음의 목소리를 활용하여 사람12사람스러운 분위기가 충분히 만들어질 수 있다는 걸 들려줬으니 말이다.

 

더욱이나 좀만 더 자세히 들어보면, ‘꽃이 지듯 피지’가 지난 두 EP의 특색이었던 불안정한 감각을 완전히 몰아내지는 않는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이는 다시 한 번, 여전히 곳곳에서 모호함과 불분명함을 띠고 있는 음색 덕일 것이다. 이를테면, 드롭의 중심에 오는 명확한 신스음 주위로 치찰음처럼 스치는 잡음들이 흩뿌려지고, 그 앰비언트한 뒷켠에 사람12사람의 코러스가 희미하게 퍼질 때가 그렇다. 또 이와는 반대로, 꽤나 청량하게 고양되는 비트와 대치되게 들릴 수도 있는 목소리가 첫 드롭을 통과한 후 비트의 일부로 편입되듯 툭툭 끊기며 새로운 빌드업으로 진출하는 과정도 마찬가지다. ‘꽃이 지듯 피지’에서 정말로 인상적인 구간은 첫 드롭을 통과하고 마지막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사람12사람이 통제 불가능한 요소들로 “투명함”과 “모호함” 양쪽 모두를 움켜쥐는 풍경이다. 드롭을 연장하듯 쿵쿵대는 베이스음과 길게 끌어지는 신스음으로 이뤄졌던 인스투르멘탈이 조금 갑작스럽게 처음의 건반과 현악기 쌍으로 툭 넘어갈 때, 음색상의 불분명함을 갖고 있는 목소리가 선율의 분명함으로 이 급박한 전환이 휘청거리지 않도록 꽉 붙들어주듯 말이다. 이런 식으로, 지금의 사람12사람이 추구하고자 하는 “완전함”은 불안정함에도 불구하고, 아니면 바로 그 불안정함을 통해 달성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빗물구름태풍태양]이 들려줬듯, 하나의 사운드가 투명하면서도 모호할 수 있고, 또 불안정한 소리들을 모아 꽤나 안정적인 구조와 전개의 팝을 만들어낼 수 있듯이 말이다. ‘꽃이 지듯 피지’는, 어떻게 보자면 소리의 불분명함을 쌓아올려 분명함을 만들었던 사람12사람의 기존 방식을 뒤집어, 팝적인 분명함이 소리의 불분명함으로 이뤄졌다는 걸 벅차오르는 전개로 들려주는 트랙일 것이다.

 

 

“넌 너무 달라져 있지 다시 오를 쯤에 / 기대를 걸어봐 많은 시간들이 보여”가 말해주듯, 트랙에서는 과거에 대한 회고와 미래에 대한 전망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다. 사람12사람의 변화는 예고되지 않고 불시에 즉시 일어나며, 그 모습은 제목처럼 “지듯이 피어나는” 과정과도 무척이나 닮아있다. 이는 끝과 시작에 놓인 사람12사람이 트랙 자체에서 확실한 방향을 향해가며 스스로를 재구성하는 방식이기도 할 것이다. 그 모든 경로가 억지스럽지 않게 느껴지는 건 역시나 사람12사람의 사람 목소리가 전면으로 나서 주어진 소리들의 주도권을 잡았기 때문일 테다. 도입부에서는 수려하게 연약함을 들려줬던 전작과 닮아있던 소리들이 주저하지 않고 드롭으로 뛰어든 후 차근차근 솟아올라가면서, 처음에는 불안정하거나 모호했을 소리 조각들이 어느새 투명하고 분명한 합을 만들어낸다. 그를 따라 다시 한 번 직선으로 흘러가는 시간을 따라 마지막 드롭이 시작되고, 도입부를 장식했던 피아노 소리가 합쳐지며 마무리의 종합을 향해 나아간다. 시작할 때만 해도 “작은 햇빛에 그을려” “숨 쉬는 것도 조금 벅차 보”였던 “너”가, 긴 시간을 지나온 이 끝에서 “빛이 많은 너”가 되어있다. 이전과 “똑같은 것도 조금 있었는지”, 새로이 찾아온 빛이 “아무렇지 않게 밝았었는지”는 모르는 일이겠지만, 그 불분명한 사람 목소리는 여전히 분명하게 사람12사람의 것이다.

 


Editor / 나원영 (대중음악비평가)

Sojeso [Sonatine]

마냥 편하게 웃지 못하는 코미디가 있고, 마냥 리듬을 탈 수 없는 하우스 음악이 있다. 영화의 정서를 잘 가져온 덕에 그것의 어두운 면모가 그대로 반영된다.

 


 

Sojeso
Sonatine
2022.04.27

 

마냥 편하게 웃지 못하는 코미디가 있고, 마냥 리듬을 탈 수 없는 하우스 음악이 있다. 소제소(Sojeso)가 만든 앨범 [Sonatine]가 그렇다. 보통의 하우스 음악은 즐겁게 춤을 추기 좋거나 흥겹게 즐길 수 있지만, 이 앨범은 영화의 분위기와 정서를 잘 가져온 덕에 영화가 지니고 있는 어두운 면모가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영화 [소나티네]는 오키나와라는 특수한 공간을 배경으로 삼으며, 그 안에서 강한 폭력성을 드러내는가 하면 삶과 죽음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일본의 한 영화평론가는 영화를 두고 “감독 기타노가 코미디언 비트 다케시를 살해하는 영화”라는 평을 남기기도 했는데, 그만큼 유머는 있지만 그 유머가 잔혹함과 처절하게 공존하며 영화를 보고 남는 것은 허무함과 우울한 정서뿐이다. 이제는 의류 브랜드 이름이기도 한, ‘기타노 블루’라 불리는 특유의 색채 때문에 영화는 더욱 그 진한 감도를 유지하며 작품은 한 가지 방향으로 뚜렷하게 간다. 오키나와 특유의 아름다움, 공간이 드러나는 순간 그 안에서 등장하는 순수함은 그래서 더욱 대비되는 효과를 지닌다.

 

 

앨범 역시 마찬가지다. [Sonatine]는 간결한 구성의 하우스 음악으로 구성되어 있다. 얼핏 들으면 가볍고 재미있게 즐길 수 있을 것 같지만, 영화를 모르더라도 그 안에 담긴 어두운 분위기나 서정적인 면모는 듣는 내내 눈치채지 못하는 것이 어려울 정도다. 그 안에는 영화를 연상케 하는 퍼커션 리듬과 멜로디 악기들이 자리하고 있다. 두 가지 토대가 영화의 느낌을 잘 살리면서도 긴장과 여유가 공존하게끔 만들어 놓는다면, 곡마다 다른 리듬과 전개가 앨범이 진행되는 내내 분위기를 바꿔가며 묘한 감상을 준다. 소개글처럼 레게부터 애시드 하우스까지 다양한 장르의 요소가 등장하면서도 “Sonatine”보다 더 기타노 다케시의 영화 음악 같은 “HANA”가 있고, 영화의 결말이 눈 앞에서 그려지는 듯한 “Heaven”도 있다. 부산국제영화제 남동철 프로그래머가 “천국의 아이가 되기에 너무 늦은, 세상을 너무 빨리 알아버린 어른을 위한 비가”라고 표현한 것처럼, 이 곡 역시 그러한 여운을 전달한다.

 

물론 이 앨범은 영화의 OST가 아니다. 영화로부터 영감을 얻어, 영화 장면을 보며 만든 음악이다. 하지만 영화의 새로운 OST라고 해도 충분히 수긍이 갈 만큼 작품이 지닌 아이러니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히사이시 조의 음악이 있기는 하지만, 영화 [소나티네]를 알고 있거나 감상하는 이들이라면 이 앨범에 담긴 여덟 곡에 크게 공감할 것이다.


Editor / 블럭

남경운 [earth]

 

[seoul cloud]라는 후일담에 대한 뒤늦은 재상상, 혹은 뒤늦은 재상상에 대한 후일담.

 


 

남경운
earth
2022.04.05

 

작년의 [seoul cloud]는 2000년대의 댄서블한 기타 팝에 대한 일종의 대체역사를 상정해 들어가는 음반이었다. 분화의 분기는 물론 첫 곡이었던 ‘빅토리아’의 직접인용에서 시작한다. 그 재료로 사용되었던 ‘꿈의 팝송’ 자체부터가 이미 두 개의 다른 버전으로 존재한다는 걸 생각해보면, 동일하게 시작된 8마디의 도입부가 다른 멜로디로 갈라지는 광경은 당대의 쟁글거리는 기타 팝과 많이 다르지 않은 평행우주로 슬며시 옮겨가는 느낌을 줄 것이다. [seoul cloud]에서의 남경운은 특히나, 이석원이 매 음반마다의 방식으로 지향했던 “춤추는 게 가능한” 인디 록이 이능룡과 전대정의 힘을 빌려 기어이 실현된 이후에 주로 접속한다. ‘빅토리아’라는 가능세계에서는, [꿈의 팝송]의 (데이트리퍼 시절 류한길의 참여로 주조된) 풍부한 전자음이나 [순간을 믿어요]의 (이상문과 정무진 각각의 베이시스트가 큰 영향을 끼친) 다채로운 파워 팝 등이 보다 미니멀한 구성으로 완결된 버전의 ‘꿈의 팝송’이 존재한다. 그 상상에서는, 스튜디오식 정밀함을 위해 다수의 제작진과 엔지니어들이 갖은 공을 들여 완결된 사운드가 [seoul cloud]에선 나잠수의 믹싱·마스터링과 기타 연주로 참여한 파고(PAGO)의 소상규만을 제외하면 오로지 남경운의 솜씨로 제작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석원보다도 더 많은 통제권이 일임됐을지 모를) 이런 원맨밴드의 제작방식은 “대체역사”를 오롯이 홀로 상상해내는 것에 대한 이야기일 것이며, 그것은 이번의 EP [earth]도 동일하게 추동한다. [seoul cloud]와 비슷하게, 음반은 ‘에코’의 첫 음으로 “나…” 한 마디를 툭 던지면서 시작되니까. 그렇지만 분화의 분기점은 훨씬 더 이르게 찾아오며, 그만큼 트랙은 평행우주의 이발관에서부터 더 멀어져간다. 감정적인 섬세함을 포착하려는 이석원식의 보컬에는 종종 가성의 코러스가 짙게 겹쳐 올라가고, 춤추기에 충실한 경쾌함을 무게감 있게 제시하는 전대정식 드럼의 치밀함은 더 여유롭게 풀리며, 특히나 꼼꼼하게 자글거리는 이능룡식의 전기기타 톤은 블루스의 더 찐득한 그루브로 교체된다. 그러한 남경운만의 음색이 오로지 “오마주보다 오히려 파스티슈에 가까”울만큼 “직접적인 인용으로 범벅 (정병욱, [음악취향 Y])”이지만은 아닌 이유가 아마 거기에 있을 테다. 2000년대 기타 팝의 대체역사를 홀로 재상상하는 과정에 블루스를 더하며, 남경운은 도리어 원본에서 부차적으로 파생되지만은 않은 존재가 된다. [seoul cloud]에서도 레퍼런스에 가장 충실할 ‘이발관’에서마저도 ‘아름다운 것’의 멜로디를 로우파이하게 삽입해 직접인용의 정점을 찍었다가, 상징적인 “그렇게 사라져 가는데 / 아무것도 할 수 없었네”에 다른 멜로디를 부여하며 새어나가니 말이다. 이러한 과정을 따라서, 남경운은 평행우주의 옆길을 따라 좀 더 다른 세계로 산들산들 옮겨간다.

 

 

[earth]를 여는 ‘에코’가 제목대로 [seoul cloud]로부터의 메아리를 타고 뒤늦은 고백의 서정과 함께 시작된다면, 이후에 찾아오는 곡들은 음반명과 곡명에서 넌지시 끌어낼 수 있을 전원풍의 분위기에 집중한다. 진하게 조율됐던 블루스에서 여유 있는 그루브가 따와져 어쿠스틱한 톤으로 이식되고, 남경운의 전기기타는 트랙마다의 맥락에 따라 블루지한 톤을 조절한다. 귀뚜라미를 비롯한 자연 소리를 배경에 깔아둔 ‘여름비’는 보사노바풍의 기타와 셰이커를 통해 그에 상응하는 차분한 분위기를 만들며, 이에 따라 기타 솔로 또한 재지하게 맞춰져 편안한 음색에 일조한다. 한편 ‘구름’은 소상규의 나일론 기타와 오르내리는 코러스의 화성을 강조하며 [seoul cloud]의 가장 블루지했던 순간들을 더 가볍게 옮겨오는데, 여기에서의 기타 솔로는 슬라이드 주법을 통해 나른함을 최대치로 뽑아내 덧붙인다. 스윙 리듬의 잼을 선사하는 ‘별’을 지나 돌아온 보사노바 박자에 신스음의 흐름을 몇 줄기 올린 ‘바람’까지, 드럼은 이 네 곡 내내 브러시로 스치며 살랑거리는 리듬을 선사한다. [earth]의 중간을 통과하며, ‘에코’에 울려 퍼지던 [seoul cloud]의 잔향은 훨씬 차분하게 다듬어진 음색으로 재구성된다. 그에 따라 EP의 지반에서는 지난 음반의 ‘왕가위’처럼 직접 인용된 레퍼런스들이 대부분 떼어지고, 블루스가 박자 사이에서 빈틈을 만들듯 어쿠스틱한 여유로움이 들어온다.

 

일종의 가벼운 스케치와도 같던 앞선 트랙들보다 재생시간이 더 긴 뒤쪽의 두 트랙으로 가며, ‘유토피아’는 [earth]에서 그 제목처럼 [earth]의 풍경들을 이상적이게 합쳐낸다. 나일론 기타와 전기기타는 스테레오를 타고 양쪽에서 블루지한 프레이즈를 가볍게 튕기고, 드럼은 훨씬 더 든든한 무게감을 갖고 박 간의 거리를 좁히고 넓히며 반복되며, 댄서블함은 속도가 느려진 만큼 몸을 까닥일 수 있을 호흡으로 풀린다. 하지만, 그 안정감과 달리 전작에서 돋보였다던 일종의 “염세”가 문득 “언제라도 도망갈 수 있게 / 짐을 싸두자”는 도피주의로 꺾여 들어온다. [earth]에서 마련되었다고 느껴지던 이 땅이 ‘유토피아’가 아니라 “모든 게 싫증이 나면 / 정 없이 떠나”게 되는 곳인가 싶을 찰나, ‘내 안엔 내가 없었네’가 시작된다. “겨우 든 잠에서 깼네”라는 첫 마디가, 일장춘몽이라도 되는 듯 지금까지의 경로를 툭 끊는다. ‘에코’에서 “이곳에 처음 왔을 때”로 시작되었던 회고가 곧장 이어지기라도 한 듯 “모처럼 널 떠올렸네”하는 중얼거림이 되돌아온다. [earth]를 채운 나일론 기타나 드럼 브러시, 재지한 그루브, 심지어 블루지한 기타 톤까지 모조리 거둬진 소리들은 오직 “가장 보통”으로, 그 중에서도 “100년 동안의 진심”을 담은 듯 조율된 전기기타와 목소리만으로 공간을 소박히 채운다. 그렇다면 마지막에 와서야 [earth]의 땅이 [seoul cloud]의 직접인용들이 남긴 울림 안쪽에 잠시 마련된 구운몽,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유토피아라도 된다는 의미인 걸까.

 

 

이에 나는 어쩔 수 없이, 직간접적인 인용들의 영향력을 변주하는 것으로 구성된 그 몸체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러니까, 이번 EP에서도 끊임없이 호명되는 “너”를 연모하는 개인이 아니라 상당한 비율로 인용된 언니네 이발관이라는 이름과, 이제는 과거의 잔재라 판단되는 “모던 록”과 같은 장르착오적인 이름, 무엇보다 밴드와 장르 전체를 과다하게 대표하게 된 [가장 보통의 존재] 같은 이름으로 둬본다면? 그들이 2010년대 대부분 동안 존재하되 실재하지는 않다가, 너무 오래 기다린 마무리 이후 정말로 존재하지 않게 된 주제에도 존재감을 뽐냈던 걸 떠올려보면, 이 밴드가 동시기에 남긴 흔적들은 사뭇 복잡다단하다. 그 한가운데를 파고들어가면서 스스로를 형성한 남경운은 이들의 부재를 실감하는 동시에, 과거에 영영 고정된 그 존재를 되새기는 셈이다. 이 모든 “의외의 사실”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는 자조와, 과거를 재구성하며 “다시 그곳을 찾지만 / 그때 같을 순 없었”다는 허탈함과 함께.

 

그의 이름자를 그대로 뜻풀이한 음반명인 [seoul cloud]에는 어쨌든 그 말마따나 “원맨”으로서 남경운의 비율이 높았고, [earth] 또한 그러하다. 전작에서 확연히 거리를 두고 걸어가던 도중 불현듯 떠오른 이 “내 안엔 내가 없었네”라는 깨달음은, 줄곧 자기 자신으로만 이뤄진 줄 알았던 지반이 실은 “나”가 아닌 것들로 이뤄졌을지도 모른다는 무척이나 “섬뜩한 자각”이 된다. 그렇다면 “나”의 안쪽은 대체 무엇으로 이뤄진 것인가? 그에 대한 이야기들은 언제나 한 사람을 구성하는 조각난 과거들을 되짚어 가보는 후일담, 역사를 다시 상상하는 일이 될 수밖엔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earth]는 [seoul cloud]라는 후일담에 대한 뒤늦은 재상상, 혹은 뒤늦은 재상상에 대한 후일담인 걸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계속 걸어가다 보면 언젠가는, 그러한 “예전”의 잊을 수 없을 것만 같던 순간도 희미해져 갈 수 있지 않을까.

 


Editor / 나원영 (대중음악비평가)

장아름 [Lullaby]

그럼에도 [Lullaby]처럼 목소리와 우쿨렐레 단 둘만으로, 이렇게 담백하면서도 아름다운 작품을 선보였다는 것은 더 큰 매력이다.

 


 

장아름
Lullaby
2022.02.22

 

장아름이라는 음악가에 관한 정보가 많지는 않다. 물론 찾으면 어떤 학교를 나왔는지, 그리고 음악을 하면서 서핑 샵에서나 베이비시터로 일했고, 다양한 일을 했다는 정보를 만날 수는 있었다. 그러면서 본래 음악을 전공으로 하지 않고 회사를 다니다 늦게 음악을 공부하게 되었다는 이야기, 그리고 지금까지 발표한 곡을 한꺼번에 들어보며 다양한 음악을 선보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과거에 선보였던 라이브 클립도 보게 되었다. 그러면서 장아름이라는 음악가가 만든 노래들에 자연스레 푹 빠지게 되었고, 여러 곳에서 긱을 하는 모습을 찾아보며 더 많은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재즈부터 팝, 록 등 그 경계를 크게 가리지 않고 음악을 한다는 점도 매력적이었지만, 그럼에도 [Lullaby]처럼 목소리와 우쿨렐레 단 둘만으로, 이렇게 담백하면서도 아름다운 작품을 선보였다는 것은 더 큰 매력이었다.

 

 

수록된 네 곡은 모두 그렇게 길지 않다. 그리고 대단히 극적인 것도 아니다. 하지만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을 울린다. 나지막한 휘파람 연주로 간주를 만든, 사랑하는 사람을 이야기하는 “우연히”부터 간결한 곡 구성과 반복되는 구조로 사랑에 관한 고찰과 상대방을 향한 마음을 담은 “사랑이라 부르는 것”을 지나 비유로 가득하지만 가장 직접적인 “you are my *”, 네 곡 중 가장 따뜻한 가사를 지닌 “Lullaby”까지 곡은 나지막하게 사랑하는 마음을 풀어내고 있다. 한글로 된 가사가 두 곡, 영어로 된 가사가 두 곡인데, 한글 가사가 좀 더 이해하기 쉬울 것 같지만 그런 것도 아니다. 하지만 따뜻한 마음, 진심으로 찬 듯한 표현만큼은 모든 곡에서 전달이 된다. 무엇보다 이만큼 하고 싶은 말을 잘 눌러 담은 듯한 한 줄은 그걸 표현하는 장아름이라는 음악가가 곡 안에서 보여주는 에너지와도 닮아 있다. 때로는 자신이 지닌 에너지와 표현력을 모두 발산해야 하는 순간이 오기도 하지만, 이처럼 그것을 압축한 듯, 혹은 덜어내며 써야 할 때도 있다. 당연히 애초부터 그 힘이 약한 것과, 섬세하고 여린 표현과, 그 섬세함까지 다룰 줄 아는 에너지는 들었을 때부터 다르게 느껴진다. 또한 이 앨범을 듣고 최근에 발표한 “파도는 이곳에”부터 “We don’t need anything but love”, “No Gravity”, “Voyager”까지 들어보면 왜 이러한 이야기를 했는지, 그리고 장아름이라는 음악가를 더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앨범이 나온 지 시간이 지나기는 했지만, 늦었지만 좋은 작품을 소개할 수 있어서 기쁘다. 앞으로 나올 작품을 기대한다는 식상한 말보다는 이미 나온 작품을 좀 더 들어봐 달라고 음악가 대신 이야기하고 싶다. 이미 세상에 나와 있는 작품도 좀 더 빛을 봤으면 할 만큼 충분히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Editor / 블럭

FRankly (프랭클리) [Frankly I…]

 

가요사의 과거와 현재, 동시기의 국내와 국외, 그리고 록/팝의 양식 사이에서 그들에게 가장 알맞은 지점에서 완성된 기억할만한 데뷔 EP.

 


 

FRankly (프랭클리)
Frankly I…
2022.03.17

 

제32회 유재하 음악 경연 대회에서 동상을 타 작년의 컴필레이션 음반에 처음 실렸던 ‘철’은 상의 명성에 걸맞게, 훌륭한 보컬 멜로디 진행을 전면적으로 내세운 트랙이다. 하지만 [Frankly I…]에 수록된 버전에 (2022)가 덧붙여졌듯, 두 트랙이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다. 그 차이에서 프랭클리의 첫 EP에 작동하는 두 힘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철’에서 ‘철 (2022)’로 향하는 과정에서, 전체적인 사운드는 훨씬 더 오밀조밀한 무게감을 띠고 집중된다. 이것이 가장 확연히 드러나는 부분은 리드기타의 톤에 있다. ‘철’에서 상대적으로 높이 찰랑거렸던 톤이 특히나 ‘철 (2022)’의 마지막 후렴구에서 훨씬 더 찌그러져 있으며, 목소리에는 코러스까지 들러붙어 더 두터워진다. 이것을 현대적인 발라드 양식으로 화성·편성의 중요성을 들려줬던 유재하의 가요사적인 맥락에서 생각해보자. 그러한 선율적인 유산을 기릴 음악 경연 대회 컴필에서는 하늘하늘한 톤이 두드러지는 “전기기타 중심의 인디 팝”이라 해도 무방했을 ‘철’이, [Frankly I…]에서는 더 지글거리는 기타 사운드가 강조된 후렴구 멜로디까지 도입부에 추가되며, 완연한 “인디 록”의 모양새에 더 가까워지는 셈이다.

 

 

이러한 전기기타 사운드로의 접근법에서 [Frankly I…]에 작용하는 두 힘을 뽑아낼 수 있다: 주로 멜로디를 타고 “라이트-멜로우”하게 부유하려는 동시기 인디 팝의 힘과, 같은 선상에서 왜곡되고 증폭된 전기기타 음색에 집중하는 인디 록의 힘. ‘철’의 이동방향은 유재하 음악 경연 대회가 근 30년 내내 꾸준히 공급하고 있는 멜로디 중심의 팝/가요에서부터, 각 부분들이 두꺼운 사운드로 짜 맞춰지는 록 밴드의 그것으로 옮겨진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이 변환은 [Frankly I…]의 프로듀싱을 맡은 조 레인(Joe Layne)이 유재하보다 강하게 영향력을 발휘한 덕일지도 모른다. 가요의 부품 사용법을 개선해 양식 전체를 정립했던 과거의 혁신가인 유재하와 비교하자면, 조 레인은 현대적인 인물상으로서 각 부품을 공유하는 양식들이 융화되는 양상을 들려주니까. (“언더그라운드 락스타”를 표방했던 창모의 음반에 유사한 종합성을 선보이는 안다영과 함께 그의 이름이 있었단 걸 떠올려보면 더욱 그러하고 말이다.)

 

이때 [Frankly I…]의 첫 트랙 ‘TR’이 로우파이하게 녹음된 전기기타 리프로 시작하거나, 노랫말에서 “(당신의) 록 스타”를 강조하는 트랙이라는 것을 함께 떠올려보면 좋을 것이다. 리드 기타와 리듬 기타 양쪽 모두가 각자의 개러지함을 내뿜고 제법 시끌벅적하게 조절된 드럼 구간과 기타 솔로가 존재감을 뽐내듯, 프랭클리의 사운드는 부단히 록적인 음색을 지니고자 한다. 멤버들이 복고적 팝 멜로디의 “록 스타” 이미지로 국내에 옮겨와진 이른바 “브릿팝” 스타일을 애호한다는 것과 조 레인의 영국 유학 경력이, 어쩌면 ‘TR’을 비롯해 [Frankly I…]가 지향하는 이 록적인 무드와도 연결될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트랙 후반부의 결정적인 순간을 만드는 것은 전기기타 사운드를 강조한 짜릿한 연주 구간이 된다. 꽉 찬 무게감으로 질주하며 매듭짓는 ‘TR’의 마무리 기술은 다른 트랙들에서도 동일하게 사용된다. 보컬에 있어 발라드적인 탑 라인을 가장 강조하는 편일 ‘Back to Love’의 앞뒤로 지글거리는 기타 소리가 배경에서 은근한 공간감을 형성하며 삽입된다거나, 느린 정박의 리듬으로 찰랑거리는 리프를 차근차근 이어가는 ‘버거’가 짙게 일그러진 소음으로 대단원을 장식하는 구성이, 프랭클리가 EP에서 잡아둔 인디 팝의 록적 균형감각을 효과적이게 들려준다.

 

 

그러므로 [Frankly I…]의 안팎으로 작용하는 두 이름과 힘, 유재하(고전적인 가요)와 조 레인(동시기의 인디 록/팝 결합체) 중에서는 후자가 아무래도 강하다 단언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EP는 국내의 가요나 영국적인 팝 록 이외에도 의외의 방식으로 동시기 아시아권의 인디 팝/록과 직접 연결되기도 한다: ‘飛車 (Roller Coaster)’는 대만의 밴드 선셋 롤러코스터(낙일비차, 落日飛車)에게서 “선셋/落日”을 떼어둔 것 같은 곡명이다. 개인적으로는, 대만이나 태국의 인디 팝/록이 앞서 언급한 “라이트-멜로우”함, 특히 나른하거나 청량하게 떠다니는 기타 톤으로 승부하는 쪽을 국내의 밴드들보다 능력껏 발휘한다고 느껴진다. 흥미롭게도, 프랭클리가 그러한 밴드들로 대표되는 양식을 참조할 때에는, 흐느적거리는 음색 대신 쫀쫀한 그루브만을 가져와 록적인 트랙 편성에 이식한다. 이번에는 적재적소에서 리듬을 밀고 당기는 베이스를 중심으로, 쫄깃하게 삽입되는 전기기타와 기본기를 다잡은 드럼이 밀도 높은 합을 맞춘다. 그 덕에 트랙은 미세하게 분화되는 양식들이 점차 융합되어가는 동시기 인디 팝/록의 특성을 유감없이 들려준다. 조금만 비약하자면, 그러한 ‘飛車 (Roller Coaster)’에서는 인디 팝/록 간의 명민한 조합을 특유의 그루브로 선보였던 과거의 또 다른 “롤러코스터”, [Absolute]로 하우스적인 완벽함을 추구하기 전까지의 그들이 연상될지도 모르겠다.

 

그나마 적법하게 유재하와 조 레인을, 비약을 살짝 담아 낙일비차와 롤러코스터를 끌어들이긴 했지만, [Frankly I…]는 단순히 그러한 이름과 힘들의 교차점에 있는 것만은 아니다. 가요사의 과거와 현재, 동시기의 국내와 국외, 그리고 록/팝의 양식 사이에서 그들에게 가장 알맞은 지점을 찾아 나서면서, 여러 갈래로 뻗어나가는 회로 간에 겹쳐진 구간들이 기억할만한 데뷔 EP로 구성된다. 더 넓게 보자면, 이는 2010년대 중후반 이래로 포크라노스라는 플랫폼에서 발매하는 일정 비율의 “동시기 국내 인디”의 특색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교차지대에서 취해온 다양한 요소들을 각각 살리면서도 하나로 합쳐내는 방식은 햄버거라는 음식이 맛을 내는 것과도 비슷할지 모르며, 솔직히 나는 마지막 트랙이 햄버거에 대한 이야기가 거의 아님에도 어쨌든 제목이 ‘버거’라는 이유만으로 EP를 좋아하게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육즙 가득한 패티부터 신선한 야채들과 풍미를 더하는 소스까지의 재료들이 두 장의 빵 사이에 알맞게 담긴 버거를 크게 한 입 베어 먹는 느낌은, [Frankly I…]를 비롯한 요 몇 년 동안의 팝적인 인디 록 또 록적인 인디 팝과 꽤나 닮아있으니까.

 

 


Editor / 나원영 (대중음악비평가)

진수영 [창문을 통해 어렴풋이]

사울 레이터(Saul Leiter) 회고전의 1950년대 뉴욕을 표현하기에는 세밀함과 치열함이 공존하는 진수영의 연주가 더없이 잘 어울릴 수밖에 없다.

 


 

진수영
창문을 통해 어렴풋이
2022.03.17

 

피크닉(piknic)에서 열리는 사울 레이터(Saul Leiter) 회고전이 5월 29일까지 연장한다. 국내 최초의 사울 레이터 회고전으로 흑백 사진, 컬러 사진을 비롯해 상업 사진은 물론 사진에 회화를 더한 작업까지 그가 남기고 간 문화적 유산을 오롯이 만날 수 있다. 무엇보다 그가 20대에 뉴욕으로 발을 딛은 이후 찍은 여러 사진이, 특히 컬러 사진에 있어서 훨씬 앞선 그의 작품을 통해 아주 먼 뉴욕의 모습을 생생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1940년대부터 50년대를 넘어 이미 그때부터 분주하면서도 화려한, 눈부시게 발전하면서도 쓸쓸하고 어딘가 낭만과 현실이 지독하게 공존하는 모습을 작품 곳곳에서, 특히 전시 초반에 더욱 만날 수 있다.

 

 

전시는 관찰과 관망, 그 사이 어딘가에 있는 사울 레이터의 자연스러운 시선을 보면서 단순히 구도나 색감 뿐만 아니라 그에 동화되어 세상을 바라보는 경험을 하게 된다. 처음부터 목적을 가지고 찍은 것이 아니기에 후대에 작품을 보는 사람에게는 더 많은 것이 다가오게 된다. 건조한 듯 따뜻하게 느껴지는 그의 작품과 함께 만날 수 있는 것이 바로 재즈 피아니스트 진수영의 음악이다. 이미 자신의 앨범에서도 감성적이면서도 수려한 표현을 선보인 바 있는 진수영이 전시의 음악을 맡은 것은 최고의 선택이 아니었나 싶다. 특히 1950년대 뉴욕을 표현하기에는, 단색과 컬러가 교차하는 이 시점의 모습을 담아내는 데에는 재즈 음악이 더없이 잘 어울릴 수밖에 없다. 대공황 시기를 지나 시카고에서 뉴욕으로 상륙한 재즈는 50년대에 이곳에서 한 차례 꽃을 피웠다. 그러한 가운데 진수영의 독주는 세 곡이지만 30분에 가까운 러닝 타임을 아름답게 풀어 놓는다. 과하거나 단조로움 없이, 놀라우리만큼 무드와 섬세함을 유지하며 진행되는 연주는 얼핏 들으면 서정적이지만 그 안에는 세밀함을 위한 치열함도 있다. 어쩌면 그래서 사울 레이터의 작품과 더없이 잘 맞아 떨어지는 것일 수도 있다.

 

BTS의 RM도 SNS에 업로드한 적 있는 이 앨범은 전시와 함께 즐긴 뒤 그 여운을 안고 다시 들으면 더욱 크게 다가온다. 물론 전시를 감상하지 않아도 충분히 좋은 감상을 할 수 있는 작품이지만, 전시와 함께 접하고 또 다시 접하며 들어볼 것을 추천한다. 사울 레이터에 더 큰 관심이 생긴다면 다큐멘터리 [사울 레이터: 인 노 그레이트 허리]까지 접해보는 것도 좋다.

 


Editor / 블럭

BrokenTeeth [당신의 사랑이 늘 행복하기를]

 

‘당신의 사랑이 늘 행복하기를’이 지향하는 “달콤쌉싸름함”은 그 스스로의 정서를 하나의 고정 값으로 삼기보다는 그를 들어볼 수 있는 한 가지 제안을 하면서도, 단순히 그것만이 월등해지지 않도록 분명한 슈게이즈 노이즈와 서정적인 멜로디에 담긴 불분명한 정서라는 패러독스를 완충장치로 활용한다.

 


 

BrokenTeeth
당신의 사랑이 늘 행복하기를
2022.04.02

 

붐은 이미 왔다. 익숙한 얼굴들의 반가운 복귀로, 잔뼈 굵은 이들이 합심해 결성한 밴드들로, 오래간 기다려온 첫 번째 발매작들로, 무엇보다 벅차게도 많이 등장하는 새로운 이름으로, 따로 또 같이 모이는 기획 공연과 컴필레이션 음반과 스튜디오 라이브 영상들로. 로우 파이의 잡음으로 둘러지고 전기 기타의 소음으로 채워진 후 오랜 시간동안 세밀하게도 양식들이 갈라져온 록은 (굳이 멀리까지 거슬러 올라가자면) [Our Nation] 때부터 국내 인디 록의 한 부분을 차지해왔으며 어느 시기에나 어떻게든 고유한 방식으로 존재했다. 장르 특유의 자가발전 무한동력원이 그 지속을 이루던 과정은 더 나아가 그 나름대로의 “씬”을 지시해볼 수 있을 느슨한 규모를 유지하다가 급기야 2020년대에 들어서니 무슨 캄브리아기 대폭발 같은 양적인 번성기를 맞는 것으로 이어졌고, 작년을 통과하면서는 온라인상에서 큰 규모로까지 주목(혹은 주목받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주목하는 편에서의 더욱 큰 주목)을 받게 되었다. 세상에 대체 그것이 “붐”이 아니라면 또 언제가 “붐”이 될 수 있는지는 도통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스스로를 축복하는” 크고 작은 움직임들은 언제든 “스스로만을 자화자찬하는” 되먹임이 되어버린 채, 피드백-루프 같은 폐쇄회로에 갇혀버릴 가능성을 가진다. 그렇다면, 이렇게 찾아온 붐을 어떻게 이어나갈 수 있을까?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지속의 방법들을 다양한 작품들에서 찾아낼 수 있다는 점이다. ([편지]의 음반 소개문에서 살짝 언급했듯) 나는 슈게이즈와 인접한 양식들에서 넓은 의미의 팝적인 안정감을 가져다주는 멜로디/리프와, 그러한 “팝”으로 분류되거나 사용되지 못한 채 침투하는 소음/잡음 간의 (부)조화로운 광경을 듣는 걸 좋아한다. 브로큰티스가 나아가는 갈래를 설정하자면 로우파이의 잡음보다는 전기기타를 비롯한 여러 증폭장치들의 소음에 집중하는 만큼, 기본적으로 소리들의 부피가 큰 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솔직히 밝히자면, 나는 아무래도 두꺼운 소음들에 매우 손쉽게 말려드는 편이긴 하다. [편지]의 연속선상에서 들어볼 수 있는 ‘당신의 사랑이 늘 행복하기를’은, ‘불꽃놀이’와 ‘Whitebird’처럼 빽빽하게 공간을 채운 노이즈와 그 속에서 희미하게라도 울려 퍼지는 목소리를 섞은 트랙이다. 이때 소음과 잡음은 로우파이와 가상악기의 ‘찢어지는’ 음질들을 전면적으로 내세웠던 작년의 [Cull Ficle]이나 [To See the Next Part of the Dream]처럼, 청자가 소리들 간의 분열적인 성질을 분명히 느끼도록 “사용”되었다기보다, 언제나 존재하고 있는 배경처럼 집채만 하게 “심어져” 있다. 이는 파란노을의 작업들처럼 대안적이었다던 8-90년대의 정전들부터 동시기 밴드캠프의 온라인 성공신화들까지 그러모은 영미권 로우파이 인디 록과 함께, 웹상에서 크고 작은 컬트를 형성해온 여러 일본과 국내 밴드들로 뻗어나가는 수많은 레퍼런스들을 직간접적으로 한가득 종합했다기보다는, 지난 25년 정도 동안 장르상에서 나름의 정전이 되어버린 국내의 여러 음반들과 연결 지을 수 있는, 고전적이게 느껴지는 방식이기도 하다.

 

재미있게 느껴지는 것은 그 과정에서 정서가 어떻게 드러나는지 같다. 소음 속에 묻혀 들어가는 멜로디와 어느새 그 멜로디가 들러붙어버린 소음처럼, 브로큰티스는 슈게이즈의 사운드를 구성하는 양쪽 요소들이 고루 섞이게 그 농도를 조절하며, 어느 정도의 분명함을 추구한다. 이때 멜로디를 매개하는 목소리가 명확히 전달하는 음계들의 진행과 그를 둘러싸는 리프를 후경과 전경을 오가며 매개하는 전기기타 노이즈 양쪽은 하나의 정서적 목표를 향해 협업한다. (파란노을이 워낙에 분명한 정서를 노랫말과 가창법을 비롯해 로우파이의 분명치 못한 소리들까지 동원해 전달하는 것이나, 아니면 그 로우파이의 분명치 못함을 훨씬 더 파열적으로 활용하며 틈새들을 만든 아시안 글로우라거나, 또 다시 신경원의 수많은 프로젝트 중 노이즈의 팝적 용도를 가장 선명하게 써먹은 FOG와 함께 이를 듣자면 더욱 재밌을 것이다.) ‘당신의 사랑이 늘 행복하기를’의 어느 구간에서는 목소리를 드러내기 위해 소음들을 잠깐 잠깐씩 끊어 리듬감을 만들고, 이후에는 목소리가 멋지게 찰랑이는 기타 솔로 구간을 위해 잠시 들어가 있기도 하며, 트랙은 익숙하게 따를 수 있을 감정선으로 소음의 흐름들을 옮겨낸다. 다만 그러한 음색과 선율에 담기는 정서들은, 분류 가능하게 확연히 표현되기보다는 정확히 특정되지 않은 채 조금은 간접적으로 에둘러 전달되는 편 같다. 다시 한 번, 이것이 “고전적”이라고 느껴지는 것은 트랙이 2010년대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온라인상의 여러 로우파이한 인디 록들이 그렇듯 어떠한 이모(emo)스러움에 입각한 감정적 토로의 우선순위가 높다기보다, 결국 사운드를 다듬어가는 과정 자체가 고유한 정서를 형상화한다고 느껴져서인 듯싶다. 무엇보다도 브로큰티스의 슈게이즈는 다른 것들보다도 우선, 간만에 주저 없이 시끄러워지는 걸 최우선으로 두는 유형이기도 하니 말이다.

 

이는 곧 음반 소개문에서 이야기하듯 “달콤한 헤이즐넛 시럽 같으면서 끝에 남는 쌉싸름한 맛”의 맥주 혹은 “흔해빠진 말들처럼 가벼운, 그리고 또 무엇보다 무거운 말들” 같이, 상충하는 요소들이 하나의 단위 속에서 공존하며 발생하는 그 “모순과 갈등”과 꽤나 닮아있다. 복잡다단한 청취 과정 속에서 정서는 결국 사운드나 노랫말보다도 훨씬 더 주관적이게 매개되며, 한 번 트랙을 떠난 이상 창작자는 오직 자신의 것만을 보낼 수 있을 뿐, 이를 받아듣는 청자의 몫이 급격하게 불어난다. 어떠한 음악들이 그 전달에 있어 오차 없는 정확도를 기하거나 최대한의 수용 가능성을 추구한다면, 소음과 잡음을 팝적 멜로디와 함께 사용하는 이 양식들은 소리의 분명함과 불분명함 간 경계를 따라 서정의 지평을 양방향으로 밀어붙인다. 과도하게 증폭되거나 열화된 소리들에서 낯설지 않은 화성의 진행을 알아차릴 때의 반가움이나 반대로 익숙하다 느껴졌던 선율들의 구성에도 불구하고 불안정함을 가져다주는 잡음들의 뜨악함으로. 그 양쪽 편의 정서들은 물론 단 하나로 흘러가지 않은 채 합쳐지면서 다채롭게 구체화될 수 있다. 그러한 과정들에서 한편으로는 스스로들에 대한 자조적인 “응원”과 “축복”을 우선적으로 뽑아낼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내가 슈게이즈에서 가장 강하게 느껴온 정서는 소음과 팝 간의 종합적 세계 너머까지 뻗어나갈 수 있는 충만한 기쁨이었다.

 

‘당신의 사랑이 늘 행복하기를’이 지향하는 “달콤쌉싸름함”은 그 스스로의 정서를 하나의 고정 값으로 삼기보다는 그를 들어볼 수 있는 한 가지 제안을 하면서도, 단순히 그것만이 월등해지지 않도록 분명한 슈게이즈 노이즈와 서정적인 멜로디에 담긴 불분명한 정서라는 패러독스를 완충장치로 활용한다. 그것은 편지라는 브로큰티스의 또 다른 분명한 형식을 따라, 과거형의 회상과 미래형의 바람을 담고 두 방향의 시간을 타면서 청자에게 전해진다. 글쓰기 양식으로서 편지는 오로지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이를 받아 읽을 대상들을 언제나 염두에 둘 수밖에 없으며, 특히나 발송인에게는 수신인에게 무언가 반응이 돌아올 때까지 관조할 수밖에 없다는 체념의 감정이 필연적으로 서려있을 것이다. 그러한 불능감에도 불구하고 브로큰티스의 슈게이즈-편지는 스스로의 사연을 구구절절이 써내려가기보다 그것이 가닿을 “당신”의 사랑이 늘 행복하기를 바란다. 그 바람을 받아들을 청자에게 “이 세상이 무너지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꿈에서 만날 수 있길” 바라는 그는, 연결과 매개에 대한 믿음을 쉽사리 놓지 않고 편지 작성과 소음 형성을 계속 이어간다. 나는 그것에 많은 의미를 두게 된 편이다. 우리에게 찾아온 “붐”의 다음 장을 찾아나서는 것에 있어서도.

 


Editor / 나원영 (대중음악비평가)

Soul Delivery [FOODCOURT]

한국은 더 이상 프리 내셔널스(Free Nationals) 같은 밴드를 부러워할 필요가 없다. 이제 소울 딜리버리 보유국이 되었기 때문이다.

 


 

Soul Delivery
FOODCOURT
2022.03.18

 

잼은 참 흥미롭다. 일상적이면서도 특별하게 느껴지고, 각자의 무기를 계산 없이 꺼내들면서도 함께 하는 서로가 자유롭고 편안하게 소통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잼이라는 대화 방식을 관찰하는 것을 좋아한다. 여기에 구성원이 놀라울 만큼 각자의 영역에서 능력을 발휘하고 있는 이들이라면, 그리고 저마다 조금씩 다른 음악을 지향하거나 좋아한다면 그 잼은 훨씬 더 풍성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진다. 소울 딜리버리(Soul Delivery)는 자타공인 최고의 세션, 최고의 연주자를 넘어 각자 자신의 음악을 만들어가는 이들이 모였다. 그리고 ‘음악으로 대화한다’는 상투적 표현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걸 앨범을 통해 알려준다.

 

 

선공개된 “Driving into Magic Hour”를 지나면 앨범의 타이틀곡인 “넋 NUGS”이 등장한다. 소울을 한국어로 하면 넋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동시에, 보통 넋이라고 하면 스피리추얼한 걸 떠올리기도 하니 호기심이 가득해질 것이다. 사실 곡은 ‘소울풀하다’는 표현 외에 더없이 적합한 단어를 찾지 못했다. 소울 음악 특유의 여유는 따마의 보컬이라는 소리가 하나 더해졌음에도 오히려 더욱 크게 만들어졌다. 곡을 구성하는 소리가 하나 더 채워지면 좀 더 타이트해질 법도 한데, 함께 곡을 끌고 나가는 모두가 자연스럽게 그 여유를 만들어낸다. 서로 눈치 보는 게 아니라, 정말 모두가 그 바이브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는 것을 굳이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곡 하나만으로 알 수 있다. 이어 등장하는, 마찬가지로 먼저 공개된 “노가리”를 지나 “Fresh Air”와 “Dirty Table”, 그리고 “Colombia”까지 들으면 이 밴드 안에는 소울을 기반으로 힙합, 알앤비뿐만 아니라 재즈, 훵크 등 다양한 장르와 다양한 표현 방식이 공존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어 “하늘정원”, “Breaktime”, “The Last Day”가 이어지는데, 하나의 테마를 가지고 세 곡이 이어져 있어 함께 감상하면 각각의 곡을 감상했을 때와 또 다른 느낌을 전달받을 수 있다. 이어 슬레타(Sletta)와 함께 한 “Life Soup” 역시 소울 충만한데, 뒤에 등장하는 “Delivery to Soul”은 더 만만치 않다. 소울 음악이 지니고 있는 여러 갈래를 유연하게 담아내면서도 2022년의 네오 소울까지 담아내고 있다. 여기에 앨범을 마무리하는 “Rhythm, Hope, Love”는 앨범 곳곳의 소리를 재해석하여 만든 샘플링 곡이라고 하는데, 소스를 직접 만들고 직접 샘플링이라는 방식을 통해 작업하여 더욱 흥미롭다. 앨범 전체를 유심히 들은 이들이라면 더욱 재미있게 느껴질 마무리다.

 

한국은 더 이상 프리 내셔널스(Free Nationals) 같은 밴드를 부러워할 필요가 없다. 이제 소울 딜리버리 보유국이 되었기 때문이다. 보통 트랙 바이 트랙으로 앨범 리뷰를 쓰면 개인적으로는 아쉬움이 남을 때도 있다. 앨범 전체가 가진 매력을 다 담아내지 못한다는 아쉬움이 있어서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각각의 곡이 정말 매력적인 만큼 하나 하나 귀를 기울여 들어봤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와 같이 썼다. 앨범 전체에 관한 감상은 이 글을 읽거나 앨범을 듣는 각자의 몫으로 돌리는 것으로 하겠다. 요즘 알앤비, 요즘 재즈, 요즘 음악에 귀가 밝은 편이라고 자부한다면 꼭 체크해보자. 후회는 절대 없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Editor / 블럭

보일 [나쁜 마음]

 

소리들을 분명하게 정렬하려는 팝/가요의 체계적인 힘과 그럼에도 언제나 기이한 외형을 띠고 나타나는 소리들 간의 “주도권” 다툼은 [나쁜 마음]에서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지지 않고 결론을 유예하길 선택한 걸지도 모른다.

 


 

보일
나쁜 마음
2022.02.07

 

[나쁜 마음]이 꽤나 기이한 음반인 것은 재생시간의 거의 30%를 차지하는 10분짜리 앰비언트 트랙이 마무리를 담당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몽실한 신스음으로 이뤄진 짧은 구간이 느린 루프에 따라 서서히 음향 효과에 덮인 채 늘어지듯 서서히 퍼져나가는 ‘다음에는’은, 색과 선의 형상들이 뭉개진 듯 보이는 음반 커버와 가장 닮았고 그러므로 ‘나쁜 마음’과의 더블 타이틀 값어치를 톡톡히 하는 트랙이니까. 사실, ‘다음에는’에서 제시된, 원형을 잃은 채 떠다니는 소리의 형상은 [나쁜 마음] 곳곳에 은근히 혹은 불현듯 나타나게 심어져있다. ‘살구’같은 트랙이 사운드를 맑고 흐리게 전환시켜 만드는 인공적인 로우파이 음질이나, ‘0’과 ‘여기서부터 꿈입니다’에 자그마한 잡티처럼 포함된 녹음환경의 주변음들, 그리고 ‘카드’의 찰칵대고 치직거리는 비트에 입히고 ‘해피엔딩’의 군데군데에 삽입되는 무수한 잡음들까지. 음반에는 “음악”으로는 확연히 분류되지 못할 “기이한” 소리들이 꽤나 다양한 방식으로, 어느 정도 의도적이게 담겨있다. 하지만 내게 가장 “기이하게” 느껴졌던 건 그와 함께 공동 프로듀싱과 제작을 맡았던 오소리웍스의 가요적인 존재감이었다. 그러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쁜 마음]은 꽤나 분명하게 팝 혹은 가요 음반으로 들린다. 어느 정도까지는.

 

 

텀블벅 작업기에서 단편선이 밝혔듯, 지난 몇 년 간 오소리웍스는 “주로 밴드 음악, 또는 포크 기반의 싱어송라이터가 연주하는” 성향의 음반들을 발매해왔다. 다만 이 작업들은 그러한 “기반”을 틀로 삼아 전기기타를 능숙히 이용하는 팝과 가요를 겨냥하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여유롭고 나른한 후하와 명쾌하게 찰랑거리는 전복들의 기타 팝이나 이펙트를 강조한 전기기타 사운드로 “자연적인” 풍경을 그리는 전유동, 특히 과거를 도구 삼아 작가주의적인 가요사의 중앙으로 뛰어든 천용성의 음악은 스튜디오에서 세심하게 다듬어진 분명한 음색들로 주어진 보컬 라인과 기타 리프의 친근한 멜로디를 전달하곤 했다. 팝 음반으로서의 [나쁜 마음]도 유사한 목표를 설정하겠지만, 출발지점이 조금 다르다. 지근거리에서 속삭이듯 비음과 숨소리가 두드러지는 보일의 목소리와 이를 두드러지게 하는 음색은 “가요”의 그것과는 사뭇 거리가 있을 테니 말이다. 전작에서 분명치 않은 음정으로 조절된 악기소리들처럼 나지막한 허밍과 속삭임이 사용된 “Yuri”나, 진수영의 뮤트 피아노 연주 뒤편으로 고음질의 잡음이 부스럭대는 다른 소리들과 깔리던 “그리고 여기로 오세요”처럼 말이다. 꽤나 기이하게 들릴 수 있을 소리를 익숙한 팝적 화성과 멜로디의 배경에 끼우는 보일의 세계는 명확한 스튜디오 작업을 바탕으로 한 “가요”의 그것으로 번안되기에 사뭇 까다로운 편 같다. 때문에 촉촉한 색채가 분명한 전자음과, 알맞게 합쳐지는 특유한 보컬들에 강세를 두어 F.W.D, Room306, blent. 등의 재지한 다운템포 팝 프로젝트를 꾸준히 진행해온 허민(FIRST AID)의 프로듀싱으로, 어쩌면 양측의 교집합을 위한 자리가 마련된 걸지도 모르겠다.

 

 

[나쁜 마음]에서 안정감과 명확함을 추구하는 형색의 가요와 기이한 소리들을 숨겨 담은 앰비언트 팝이 각자 발휘하는 힘은 꽤나 집단적인 프로듀싱과 편곡으로 묘한 합의점을 찾는다. 음반을 여는 ‘Park’에서 그것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도 같은데, 보일의 가창은 분명한 음색으로 들었다면 상대적으로 좀 더 익숙하게 느껴질 수 있을 멜로디를, 문장 끝에서 날숨을 끊고 대신 짧은 효과음처럼 잘라낸 목소리를 뿌리면서 그 분명함을 흐린다. Room306의 근작들이 차차 실제 악기들의 재지한 연주 합을 강조해온 것보다는 조금 이전으로 돌아가듯, 리버브를 잔뜩 담아 몽글해진 신스음을 적재적소에서 조절하는 허민의 솜씨가 맞물린다. 더불어 은근한 그루브를 만드는 기타/베이스가 탄탄하게 받쳐지면서, ’Park‘에는 팝적 리듬의 명료함과 목소리/사운드의 불명료함이 함께 생겨난다. ‘나쁜 마음’ 또한 낮게 읊조리는 천용성의 목소리를 보일과의 듀엣으로 대비되게 배치해, 전자음들이 후면에서부터 전면으로 스멀스멀 올라오는 전개로 이들을 집어삼킨다. 이후 트랙에서 우리존재와 이태훈의 목소리가 유사한 한 쌍으로서 사용되는 것 또한 이와 맥을 같이 할 것이다. 이러한 식으로 [나쁜 마음]은 팝/가요가 추구할 사운드적인 분명함과, 이에 불순물처럼 끼어들어 주어진 시공을 일순 흔드는 소리의 불분명함 간에 놓인 “주도권을 가진 기분”을 집중 공략하며, 0의 원점에 놓인 무게중심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긴장관계를 만든다. 앞 문단에서 언급했던, 여러 잡음들이 빼꼼히 드러난 트랙들에서도 여전히 재즈적으로 다듬어진 악기 소리들이 전개를 이끌지만, 바로 그 잡음들 덕에 팝과 가요의 힘이 철저히 우세할 수는 없는 것처럼 말이다.

 

 

‘해피엔딩’에서는 보일의 목소리가 한 줄기의 신스 멜로디와 들숨이 자세히 들릴 정도로 조용하게 움직이며 곡을 이끈다. 한편 오르골처럼 아른거리는 선율과 피아노 연주에, 스쳐 올라오는 화이트 노이즈와 자그맣게 짤깍거리는 잡음들이 같이 삽입되고, 앞으로가 “더 이상 궁금하지/기대되지 않아”버리는 결말이 이어진다. 호기심과 기대치가 이 다음으로 계속 이어지지 않을 때 찾아오는 단념의 “다음에는”, 그러므로 제대로 맺어지지 않고 하염없이 이어지는 후일담만이 남을 것이다. 소리들을 분명하게 정렬하려는 팝/가요의 체계적인 힘과 그럼에도 언제나 기이한 외형을 띠고 나타나는 소리들 간의 “주도권” 다툼은 [나쁜 마음]에서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지지 않고 결론을 유예하길 선택한 걸지도 모른다. 그러한 지연의 감각은, 라이너노트에서 제시되듯 음반 내내 나른하게 가라앉은 체념의 정서와도 맞닿아있다. 이윽고 ‘다음에는’에서는 이 모든 잡다함과 불분명함의 틈입에도 불구하고 늘 특정 수치 이상으로 팝/가요의 명확함을 띠었던 음색이, 후처리된 효과들 속에서 마침내 분명함을 잃어가며 열화된다. 이때 소리들 사이의 주도권과, 주도권을 가진 듯한 화자와 청자의 기분은 어디로 갔을까? 지연과 체념은 느리게 퇴색하는 정경의 속도로 찾아오고, 나쁜 마음에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건 결국 분명치 않은 불안함의 잔여물뿐이다. [나쁜 마음]의 기이함, 어쩌면 “섬뜩함”은 이렇게 음반 내내 출렁거렸던 팝/가요의 신경전에 대한 기대감이 정말로 져버린 이후, 또 다른 유형의 소리들이 늘상 잠재되어 있다는 걸 알리듯, 느리게 엄습해온다.

 

 


Editor / 나원영 (대중음악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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