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ankly (프랭클리) [Frankly I…]

 

가요사의 과거와 현재, 동시기의 국내와 국외, 그리고 록/팝의 양식 사이에서 그들에게 가장 알맞은 지점에서 완성된 기억할만한 데뷔 EP.

 


 

FRankly (프랭클리)
Frankly I…
2022.03.17

 

제32회 유재하 음악 경연 대회에서 동상을 타 작년의 컴필레이션 음반에 처음 실렸던 ‘철’은 상의 명성에 걸맞게, 훌륭한 보컬 멜로디 진행을 전면적으로 내세운 트랙이다. 하지만 [Frankly I…]에 수록된 버전에 (2022)가 덧붙여졌듯, 두 트랙이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다. 그 차이에서 프랭클리의 첫 EP에 작동하는 두 힘을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철’에서 ‘철 (2022)’로 향하는 과정에서, 전체적인 사운드는 훨씬 더 오밀조밀한 무게감을 띠고 집중된다. 이것이 가장 확연히 드러나는 부분은 리드기타의 톤에 있다. ‘철’에서 상대적으로 높이 찰랑거렸던 톤이 특히나 ‘철 (2022)’의 마지막 후렴구에서 훨씬 더 찌그러져 있으며, 목소리에는 코러스까지 들러붙어 더 두터워진다. 이것을 현대적인 발라드 양식으로 화성·편성의 중요성을 들려줬던 유재하의 가요사적인 맥락에서 생각해보자. 그러한 선율적인 유산을 기릴 음악 경연 대회 컴필에서는 하늘하늘한 톤이 두드러지는 “전기기타 중심의 인디 팝”이라 해도 무방했을 ‘철’이, [Frankly I…]에서는 더 지글거리는 기타 사운드가 강조된 후렴구 멜로디까지 도입부에 추가되며, 완연한 “인디 록”의 모양새에 더 가까워지는 셈이다.

 

 

이러한 전기기타 사운드로의 접근법에서 [Frankly I…]에 작용하는 두 힘을 뽑아낼 수 있다: 주로 멜로디를 타고 “라이트-멜로우”하게 부유하려는 동시기 인디 팝의 힘과, 같은 선상에서 왜곡되고 증폭된 전기기타 음색에 집중하는 인디 록의 힘. ‘철’의 이동방향은 유재하 음악 경연 대회가 근 30년 내내 꾸준히 공급하고 있는 멜로디 중심의 팝/가요에서부터, 각 부분들이 두꺼운 사운드로 짜 맞춰지는 록 밴드의 그것으로 옮겨진다. 그렇게 생각해보면, 이 변환은 [Frankly I…]의 프로듀싱을 맡은 조 레인(Joe Layne)이 유재하보다 강하게 영향력을 발휘한 덕일지도 모른다. 가요의 부품 사용법을 개선해 양식 전체를 정립했던 과거의 혁신가인 유재하와 비교하자면, 조 레인은 현대적인 인물상으로서 각 부품을 공유하는 양식들이 융화되는 양상을 들려주니까. (“언더그라운드 락스타”를 표방했던 창모의 음반에 유사한 종합성을 선보이는 안다영과 함께 그의 이름이 있었단 걸 떠올려보면 더욱 그러하고 말이다.)

 

이때 [Frankly I…]의 첫 트랙 ‘TR’이 로우파이하게 녹음된 전기기타 리프로 시작하거나, 노랫말에서 “(당신의) 록 스타”를 강조하는 트랙이라는 것을 함께 떠올려보면 좋을 것이다. 리드 기타와 리듬 기타 양쪽 모두가 각자의 개러지함을 내뿜고 제법 시끌벅적하게 조절된 드럼 구간과 기타 솔로가 존재감을 뽐내듯, 프랭클리의 사운드는 부단히 록적인 음색을 지니고자 한다. 멤버들이 복고적 팝 멜로디의 “록 스타” 이미지로 국내에 옮겨와진 이른바 “브릿팝” 스타일을 애호한다는 것과 조 레인의 영국 유학 경력이, 어쩌면 ‘TR’을 비롯해 [Frankly I…]가 지향하는 이 록적인 무드와도 연결될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트랙 후반부의 결정적인 순간을 만드는 것은 전기기타 사운드를 강조한 짜릿한 연주 구간이 된다. 꽉 찬 무게감으로 질주하며 매듭짓는 ‘TR’의 마무리 기술은 다른 트랙들에서도 동일하게 사용된다. 보컬에 있어 발라드적인 탑 라인을 가장 강조하는 편일 ‘Back to Love’의 앞뒤로 지글거리는 기타 소리가 배경에서 은근한 공간감을 형성하며 삽입된다거나, 느린 정박의 리듬으로 찰랑거리는 리프를 차근차근 이어가는 ‘버거’가 짙게 일그러진 소음으로 대단원을 장식하는 구성이, 프랭클리가 EP에서 잡아둔 인디 팝의 록적 균형감각을 효과적이게 들려준다.

 

 

그러므로 [Frankly I…]의 안팎으로 작용하는 두 이름과 힘, 유재하(고전적인 가요)와 조 레인(동시기의 인디 록/팝 결합체) 중에서는 후자가 아무래도 강하다 단언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EP는 국내의 가요나 영국적인 팝 록 이외에도 의외의 방식으로 동시기 아시아권의 인디 팝/록과 직접 연결되기도 한다: ‘飛車 (Roller Coaster)’는 대만의 밴드 선셋 롤러코스터(낙일비차, 落日飛車)에게서 “선셋/落日”을 떼어둔 것 같은 곡명이다. 개인적으로는, 대만이나 태국의 인디 팝/록이 앞서 언급한 “라이트-멜로우”함, 특히 나른하거나 청량하게 떠다니는 기타 톤으로 승부하는 쪽을 국내의 밴드들보다 능력껏 발휘한다고 느껴진다. 흥미롭게도, 프랭클리가 그러한 밴드들로 대표되는 양식을 참조할 때에는, 흐느적거리는 음색 대신 쫀쫀한 그루브만을 가져와 록적인 트랙 편성에 이식한다. 이번에는 적재적소에서 리듬을 밀고 당기는 베이스를 중심으로, 쫄깃하게 삽입되는 전기기타와 기본기를 다잡은 드럼이 밀도 높은 합을 맞춘다. 그 덕에 트랙은 미세하게 분화되는 양식들이 점차 융합되어가는 동시기 인디 팝/록의 특성을 유감없이 들려준다. 조금만 비약하자면, 그러한 ‘飛車 (Roller Coaster)’에서는 인디 팝/록 간의 명민한 조합을 특유의 그루브로 선보였던 과거의 또 다른 “롤러코스터”, [Absolute]로 하우스적인 완벽함을 추구하기 전까지의 그들이 연상될지도 모르겠다.

 

그나마 적법하게 유재하와 조 레인을, 비약을 살짝 담아 낙일비차와 롤러코스터를 끌어들이긴 했지만, [Frankly I…]는 단순히 그러한 이름과 힘들의 교차점에 있는 것만은 아니다. 가요사의 과거와 현재, 동시기의 국내와 국외, 그리고 록/팝의 양식 사이에서 그들에게 가장 알맞은 지점을 찾아 나서면서, 여러 갈래로 뻗어나가는 회로 간에 겹쳐진 구간들이 기억할만한 데뷔 EP로 구성된다. 더 넓게 보자면, 이는 2010년대 중후반 이래로 포크라노스라는 플랫폼에서 발매하는 일정 비율의 “동시기 국내 인디”의 특색이기도 할 것이다. 그렇게 교차지대에서 취해온 다양한 요소들을 각각 살리면서도 하나로 합쳐내는 방식은 햄버거라는 음식이 맛을 내는 것과도 비슷할지 모르며, 솔직히 나는 마지막 트랙이 햄버거에 대한 이야기가 거의 아님에도 어쨌든 제목이 ‘버거’라는 이유만으로 EP를 좋아하게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 육즙 가득한 패티부터 신선한 야채들과 풍미를 더하는 소스까지의 재료들이 두 장의 빵 사이에 알맞게 담긴 버거를 크게 한 입 베어 먹는 느낌은, [Frankly I…]를 비롯한 요 몇 년 동안의 팝적인 인디 록 또 록적인 인디 팝과 꽤나 닮아있으니까.

 

 


Editor / 나원영 (대중음악비평가)

진수영 [창문을 통해 어렴풋이]

사울 레이터(Saul Leiter) 회고전의 1950년대 뉴욕을 표현하기에는 세밀함과 치열함이 공존하는 진수영의 연주가 더없이 잘 어울릴 수밖에 없다.

 


 

진수영
창문을 통해 어렴풋이
2022.03.17

 

피크닉(piknic)에서 열리는 사울 레이터(Saul Leiter) 회고전이 5월 29일까지 연장한다. 국내 최초의 사울 레이터 회고전으로 흑백 사진, 컬러 사진을 비롯해 상업 사진은 물론 사진에 회화를 더한 작업까지 그가 남기고 간 문화적 유산을 오롯이 만날 수 있다. 무엇보다 그가 20대에 뉴욕으로 발을 딛은 이후 찍은 여러 사진이, 특히 컬러 사진에 있어서 훨씬 앞선 그의 작품을 통해 아주 먼 뉴욕의 모습을 생생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1940년대부터 50년대를 넘어 이미 그때부터 분주하면서도 화려한, 눈부시게 발전하면서도 쓸쓸하고 어딘가 낭만과 현실이 지독하게 공존하는 모습을 작품 곳곳에서, 특히 전시 초반에 더욱 만날 수 있다.

 

 

전시는 관찰과 관망, 그 사이 어딘가에 있는 사울 레이터의 자연스러운 시선을 보면서 단순히 구도나 색감 뿐만 아니라 그에 동화되어 세상을 바라보는 경험을 하게 된다. 처음부터 목적을 가지고 찍은 것이 아니기에 후대에 작품을 보는 사람에게는 더 많은 것이 다가오게 된다. 건조한 듯 따뜻하게 느껴지는 그의 작품과 함께 만날 수 있는 것이 바로 재즈 피아니스트 진수영의 음악이다. 이미 자신의 앨범에서도 감성적이면서도 수려한 표현을 선보인 바 있는 진수영이 전시의 음악을 맡은 것은 최고의 선택이 아니었나 싶다. 특히 1950년대 뉴욕을 표현하기에는, 단색과 컬러가 교차하는 이 시점의 모습을 담아내는 데에는 재즈 음악이 더없이 잘 어울릴 수밖에 없다. 대공황 시기를 지나 시카고에서 뉴욕으로 상륙한 재즈는 50년대에 이곳에서 한 차례 꽃을 피웠다. 그러한 가운데 진수영의 독주는 세 곡이지만 30분에 가까운 러닝 타임을 아름답게 풀어 놓는다. 과하거나 단조로움 없이, 놀라우리만큼 무드와 섬세함을 유지하며 진행되는 연주는 얼핏 들으면 서정적이지만 그 안에는 세밀함을 위한 치열함도 있다. 어쩌면 그래서 사울 레이터의 작품과 더없이 잘 맞아 떨어지는 것일 수도 있다.

 

BTS의 RM도 SNS에 업로드한 적 있는 이 앨범은 전시와 함께 즐긴 뒤 그 여운을 안고 다시 들으면 더욱 크게 다가온다. 물론 전시를 감상하지 않아도 충분히 좋은 감상을 할 수 있는 작품이지만, 전시와 함께 접하고 또 다시 접하며 들어볼 것을 추천한다. 사울 레이터에 더 큰 관심이 생긴다면 다큐멘터리 [사울 레이터: 인 노 그레이트 허리]까지 접해보는 것도 좋다.

 


Editor / 블럭

BrokenTeeth [당신의 사랑이 늘 행복하기를]

 

‘당신의 사랑이 늘 행복하기를’이 지향하는 “달콤쌉싸름함”은 그 스스로의 정서를 하나의 고정 값으로 삼기보다는 그를 들어볼 수 있는 한 가지 제안을 하면서도, 단순히 그것만이 월등해지지 않도록 분명한 슈게이즈 노이즈와 서정적인 멜로디에 담긴 불분명한 정서라는 패러독스를 완충장치로 활용한다.

 


 

BrokenTeeth
당신의 사랑이 늘 행복하기를
2022.04.02

 

붐은 이미 왔다. 익숙한 얼굴들의 반가운 복귀로, 잔뼈 굵은 이들이 합심해 결성한 밴드들로, 오래간 기다려온 첫 번째 발매작들로, 무엇보다 벅차게도 많이 등장하는 새로운 이름으로, 따로 또 같이 모이는 기획 공연과 컴필레이션 음반과 스튜디오 라이브 영상들로. 로우 파이의 잡음으로 둘러지고 전기 기타의 소음으로 채워진 후 오랜 시간동안 세밀하게도 양식들이 갈라져온 록은 (굳이 멀리까지 거슬러 올라가자면) [Our Nation] 때부터 국내 인디 록의 한 부분을 차지해왔으며 어느 시기에나 어떻게든 고유한 방식으로 존재했다. 장르 특유의 자가발전 무한동력원이 그 지속을 이루던 과정은 더 나아가 그 나름대로의 “씬”을 지시해볼 수 있을 느슨한 규모를 유지하다가 급기야 2020년대에 들어서니 무슨 캄브리아기 대폭발 같은 양적인 번성기를 맞는 것으로 이어졌고, 작년을 통과하면서는 온라인상에서 큰 규모로까지 주목(혹은 주목받지 못했다는 것에 대한 주목하는 편에서의 더욱 큰 주목)을 받게 되었다. 세상에 대체 그것이 “붐”이 아니라면 또 언제가 “붐”이 될 수 있는지는 도통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스스로를 축복하는” 크고 작은 움직임들은 언제든 “스스로만을 자화자찬하는” 되먹임이 되어버린 채, 피드백-루프 같은 폐쇄회로에 갇혀버릴 가능성을 가진다. 그렇다면, 이렇게 찾아온 붐을 어떻게 이어나갈 수 있을까?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 지속의 방법들을 다양한 작품들에서 찾아낼 수 있다는 점이다. ([편지]의 음반 소개문에서 살짝 언급했듯) 나는 슈게이즈와 인접한 양식들에서 넓은 의미의 팝적인 안정감을 가져다주는 멜로디/리프와, 그러한 “팝”으로 분류되거나 사용되지 못한 채 침투하는 소음/잡음 간의 (부)조화로운 광경을 듣는 걸 좋아한다. 브로큰티스가 나아가는 갈래를 설정하자면 로우파이의 잡음보다는 전기기타를 비롯한 여러 증폭장치들의 소음에 집중하는 만큼, 기본적으로 소리들의 부피가 큰 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솔직히 밝히자면, 나는 아무래도 두꺼운 소음들에 매우 손쉽게 말려드는 편이긴 하다. [편지]의 연속선상에서 들어볼 수 있는 ‘당신의 사랑이 늘 행복하기를’은, ‘불꽃놀이’와 ‘Whitebird’처럼 빽빽하게 공간을 채운 노이즈와 그 속에서 희미하게라도 울려 퍼지는 목소리를 섞은 트랙이다. 이때 소음과 잡음은 로우파이와 가상악기의 ‘찢어지는’ 음질들을 전면적으로 내세웠던 작년의 [Cull Ficle]이나 [To See the Next Part of the Dream]처럼, 청자가 소리들 간의 분열적인 성질을 분명히 느끼도록 “사용”되었다기보다, 언제나 존재하고 있는 배경처럼 집채만 하게 “심어져” 있다. 이는 파란노을의 작업들처럼 대안적이었다던 8-90년대의 정전들부터 동시기 밴드캠프의 온라인 성공신화들까지 그러모은 영미권 로우파이 인디 록과 함께, 웹상에서 크고 작은 컬트를 형성해온 여러 일본과 국내 밴드들로 뻗어나가는 수많은 레퍼런스들을 직간접적으로 한가득 종합했다기보다는, 지난 25년 정도 동안 장르상에서 나름의 정전이 되어버린 국내의 여러 음반들과 연결 지을 수 있는, 고전적이게 느껴지는 방식이기도 하다.

 

재미있게 느껴지는 것은 그 과정에서 정서가 어떻게 드러나는지 같다. 소음 속에 묻혀 들어가는 멜로디와 어느새 그 멜로디가 들러붙어버린 소음처럼, 브로큰티스는 슈게이즈의 사운드를 구성하는 양쪽 요소들이 고루 섞이게 그 농도를 조절하며, 어느 정도의 분명함을 추구한다. 이때 멜로디를 매개하는 목소리가 명확히 전달하는 음계들의 진행과 그를 둘러싸는 리프를 후경과 전경을 오가며 매개하는 전기기타 노이즈 양쪽은 하나의 정서적 목표를 향해 협업한다. (파란노을이 워낙에 분명한 정서를 노랫말과 가창법을 비롯해 로우파이의 분명치 못한 소리들까지 동원해 전달하는 것이나, 아니면 그 로우파이의 분명치 못함을 훨씬 더 파열적으로 활용하며 틈새들을 만든 아시안 글로우라거나, 또 다시 신경원의 수많은 프로젝트 중 노이즈의 팝적 용도를 가장 선명하게 써먹은 FOG와 함께 이를 듣자면 더욱 재밌을 것이다.) ‘당신의 사랑이 늘 행복하기를’의 어느 구간에서는 목소리를 드러내기 위해 소음들을 잠깐 잠깐씩 끊어 리듬감을 만들고, 이후에는 목소리가 멋지게 찰랑이는 기타 솔로 구간을 위해 잠시 들어가 있기도 하며, 트랙은 익숙하게 따를 수 있을 감정선으로 소음의 흐름들을 옮겨낸다. 다만 그러한 음색과 선율에 담기는 정서들은, 분류 가능하게 확연히 표현되기보다는 정확히 특정되지 않은 채 조금은 간접적으로 에둘러 전달되는 편 같다. 다시 한 번, 이것이 “고전적”이라고 느껴지는 것은 트랙이 2010년대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온라인상의 여러 로우파이한 인디 록들이 그렇듯 어떠한 이모(emo)스러움에 입각한 감정적 토로의 우선순위가 높다기보다, 결국 사운드를 다듬어가는 과정 자체가 고유한 정서를 형상화한다고 느껴져서인 듯싶다. 무엇보다도 브로큰티스의 슈게이즈는 다른 것들보다도 우선, 간만에 주저 없이 시끄러워지는 걸 최우선으로 두는 유형이기도 하니 말이다.

 

이는 곧 음반 소개문에서 이야기하듯 “달콤한 헤이즐넛 시럽 같으면서 끝에 남는 쌉싸름한 맛”의 맥주 혹은 “흔해빠진 말들처럼 가벼운, 그리고 또 무엇보다 무거운 말들” 같이, 상충하는 요소들이 하나의 단위 속에서 공존하며 발생하는 그 “모순과 갈등”과 꽤나 닮아있다. 복잡다단한 청취 과정 속에서 정서는 결국 사운드나 노랫말보다도 훨씬 더 주관적이게 매개되며, 한 번 트랙을 떠난 이상 창작자는 오직 자신의 것만을 보낼 수 있을 뿐, 이를 받아듣는 청자의 몫이 급격하게 불어난다. 어떠한 음악들이 그 전달에 있어 오차 없는 정확도를 기하거나 최대한의 수용 가능성을 추구한다면, 소음과 잡음을 팝적 멜로디와 함께 사용하는 이 양식들은 소리의 분명함과 불분명함 간 경계를 따라 서정의 지평을 양방향으로 밀어붙인다. 과도하게 증폭되거나 열화된 소리들에서 낯설지 않은 화성의 진행을 알아차릴 때의 반가움이나 반대로 익숙하다 느껴졌던 선율들의 구성에도 불구하고 불안정함을 가져다주는 잡음들의 뜨악함으로. 그 양쪽 편의 정서들은 물론 단 하나로 흘러가지 않은 채 합쳐지면서 다채롭게 구체화될 수 있다. 그러한 과정들에서 한편으로는 스스로들에 대한 자조적인 “응원”과 “축복”을 우선적으로 뽑아낼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내가 슈게이즈에서 가장 강하게 느껴온 정서는 소음과 팝 간의 종합적 세계 너머까지 뻗어나갈 수 있는 충만한 기쁨이었다.

 

‘당신의 사랑이 늘 행복하기를’이 지향하는 “달콤쌉싸름함”은 그 스스로의 정서를 하나의 고정 값으로 삼기보다는 그를 들어볼 수 있는 한 가지 제안을 하면서도, 단순히 그것만이 월등해지지 않도록 분명한 슈게이즈 노이즈와 서정적인 멜로디에 담긴 불분명한 정서라는 패러독스를 완충장치로 활용한다. 그것은 편지라는 브로큰티스의 또 다른 분명한 형식을 따라, 과거형의 회상과 미래형의 바람을 담고 두 방향의 시간을 타면서 청자에게 전해진다. 글쓰기 양식으로서 편지는 오로지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이를 받아 읽을 대상들을 언제나 염두에 둘 수밖에 없으며, 특히나 발송인에게는 수신인에게 무언가 반응이 돌아올 때까지 관조할 수밖에 없다는 체념의 감정이 필연적으로 서려있을 것이다. 그러한 불능감에도 불구하고 브로큰티스의 슈게이즈-편지는 스스로의 사연을 구구절절이 써내려가기보다 그것이 가닿을 “당신”의 사랑이 늘 행복하기를 바란다. 그 바람을 받아들을 청자에게 “이 세상이 무너지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꿈에서 만날 수 있길” 바라는 그는, 연결과 매개에 대한 믿음을 쉽사리 놓지 않고 편지 작성과 소음 형성을 계속 이어간다. 나는 그것에 많은 의미를 두게 된 편이다. 우리에게 찾아온 “붐”의 다음 장을 찾아나서는 것에 있어서도.

 


Editor / 나원영 (대중음악비평가)

Soul Delivery [FOODCOURT]

한국은 더 이상 프리 내셔널스(Free Nationals) 같은 밴드를 부러워할 필요가 없다. 이제 소울 딜리버리 보유국이 되었기 때문이다.

 


 

Soul Delivery
FOODCOURT
2022.03.18

 

잼은 참 흥미롭다. 일상적이면서도 특별하게 느껴지고, 각자의 무기를 계산 없이 꺼내들면서도 함께 하는 서로가 자유롭고 편안하게 소통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잼이라는 대화 방식을 관찰하는 것을 좋아한다. 여기에 구성원이 놀라울 만큼 각자의 영역에서 능력을 발휘하고 있는 이들이라면, 그리고 저마다 조금씩 다른 음악을 지향하거나 좋아한다면 그 잼은 훨씬 더 풍성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진다. 소울 딜리버리(Soul Delivery)는 자타공인 최고의 세션, 최고의 연주자를 넘어 각자 자신의 음악을 만들어가는 이들이 모였다. 그리고 ‘음악으로 대화한다’는 상투적 표현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걸 앨범을 통해 알려준다.

 

 

선공개된 “Driving into Magic Hour”를 지나면 앨범의 타이틀곡인 “넋 NUGS”이 등장한다. 소울을 한국어로 하면 넋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동시에, 보통 넋이라고 하면 스피리추얼한 걸 떠올리기도 하니 호기심이 가득해질 것이다. 사실 곡은 ‘소울풀하다’는 표현 외에 더없이 적합한 단어를 찾지 못했다. 소울 음악 특유의 여유는 따마의 보컬이라는 소리가 하나 더해졌음에도 오히려 더욱 크게 만들어졌다. 곡을 구성하는 소리가 하나 더 채워지면 좀 더 타이트해질 법도 한데, 함께 곡을 끌고 나가는 모두가 자연스럽게 그 여유를 만들어낸다. 서로 눈치 보는 게 아니라, 정말 모두가 그 바이브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는 것을 굳이 구구절절 설명하지 않아도 곡 하나만으로 알 수 있다. 이어 등장하는, 마찬가지로 먼저 공개된 “노가리”를 지나 “Fresh Air”와 “Dirty Table”, 그리고 “Colombia”까지 들으면 이 밴드 안에는 소울을 기반으로 힙합, 알앤비뿐만 아니라 재즈, 훵크 등 다양한 장르와 다양한 표현 방식이 공존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어 “하늘정원”, “Breaktime”, “The Last Day”가 이어지는데, 하나의 테마를 가지고 세 곡이 이어져 있어 함께 감상하면 각각의 곡을 감상했을 때와 또 다른 느낌을 전달받을 수 있다. 이어 슬레타(Sletta)와 함께 한 “Life Soup” 역시 소울 충만한데, 뒤에 등장하는 “Delivery to Soul”은 더 만만치 않다. 소울 음악이 지니고 있는 여러 갈래를 유연하게 담아내면서도 2022년의 네오 소울까지 담아내고 있다. 여기에 앨범을 마무리하는 “Rhythm, Hope, Love”는 앨범 곳곳의 소리를 재해석하여 만든 샘플링 곡이라고 하는데, 소스를 직접 만들고 직접 샘플링이라는 방식을 통해 작업하여 더욱 흥미롭다. 앨범 전체를 유심히 들은 이들이라면 더욱 재미있게 느껴질 마무리다.

 

한국은 더 이상 프리 내셔널스(Free Nationals) 같은 밴드를 부러워할 필요가 없다. 이제 소울 딜리버리 보유국이 되었기 때문이다. 보통 트랙 바이 트랙으로 앨범 리뷰를 쓰면 개인적으로는 아쉬움이 남을 때도 있다. 앨범 전체가 가진 매력을 다 담아내지 못한다는 아쉬움이 있어서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각각의 곡이 정말 매력적인 만큼 하나 하나 귀를 기울여 들어봤으면 하는 바람으로 이와 같이 썼다. 앨범 전체에 관한 감상은 이 글을 읽거나 앨범을 듣는 각자의 몫으로 돌리는 것으로 하겠다. 요즘 알앤비, 요즘 재즈, 요즘 음악에 귀가 밝은 편이라고 자부한다면 꼭 체크해보자. 후회는 절대 없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Editor / 블럭

보일 [나쁜 마음]

 

소리들을 분명하게 정렬하려는 팝/가요의 체계적인 힘과 그럼에도 언제나 기이한 외형을 띠고 나타나는 소리들 간의 “주도권” 다툼은 [나쁜 마음]에서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지지 않고 결론을 유예하길 선택한 걸지도 모른다.

 


 

보일
나쁜 마음
2022.02.07

 

[나쁜 마음]이 꽤나 기이한 음반인 것은 재생시간의 거의 30%를 차지하는 10분짜리 앰비언트 트랙이 마무리를 담당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몽실한 신스음으로 이뤄진 짧은 구간이 느린 루프에 따라 서서히 음향 효과에 덮인 채 늘어지듯 서서히 퍼져나가는 ‘다음에는’은, 색과 선의 형상들이 뭉개진 듯 보이는 음반 커버와 가장 닮았고 그러므로 ‘나쁜 마음’과의 더블 타이틀 값어치를 톡톡히 하는 트랙이니까. 사실, ‘다음에는’에서 제시된, 원형을 잃은 채 떠다니는 소리의 형상은 [나쁜 마음] 곳곳에 은근히 혹은 불현듯 나타나게 심어져있다. ‘살구’같은 트랙이 사운드를 맑고 흐리게 전환시켜 만드는 인공적인 로우파이 음질이나, ‘0’과 ‘여기서부터 꿈입니다’에 자그마한 잡티처럼 포함된 녹음환경의 주변음들, 그리고 ‘카드’의 찰칵대고 치직거리는 비트에 입히고 ‘해피엔딩’의 군데군데에 삽입되는 무수한 잡음들까지. 음반에는 “음악”으로는 확연히 분류되지 못할 “기이한” 소리들이 꽤나 다양한 방식으로, 어느 정도 의도적이게 담겨있다. 하지만 내게 가장 “기이하게” 느껴졌던 건 그와 함께 공동 프로듀싱과 제작을 맡았던 오소리웍스의 가요적인 존재감이었다. 그러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쁜 마음]은 꽤나 분명하게 팝 혹은 가요 음반으로 들린다. 어느 정도까지는.

 

 

텀블벅 작업기에서 단편선이 밝혔듯, 지난 몇 년 간 오소리웍스는 “주로 밴드 음악, 또는 포크 기반의 싱어송라이터가 연주하는” 성향의 음반들을 발매해왔다. 다만 이 작업들은 그러한 “기반”을 틀로 삼아 전기기타를 능숙히 이용하는 팝과 가요를 겨냥하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여유롭고 나른한 후하와 명쾌하게 찰랑거리는 전복들의 기타 팝이나 이펙트를 강조한 전기기타 사운드로 “자연적인” 풍경을 그리는 전유동, 특히 과거를 도구 삼아 작가주의적인 가요사의 중앙으로 뛰어든 천용성의 음악은 스튜디오에서 세심하게 다듬어진 분명한 음색들로 주어진 보컬 라인과 기타 리프의 친근한 멜로디를 전달하곤 했다. 팝 음반으로서의 [나쁜 마음]도 유사한 목표를 설정하겠지만, 출발지점이 조금 다르다. 지근거리에서 속삭이듯 비음과 숨소리가 두드러지는 보일의 목소리와 이를 두드러지게 하는 음색은 “가요”의 그것과는 사뭇 거리가 있을 테니 말이다. 전작에서 분명치 않은 음정으로 조절된 악기소리들처럼 나지막한 허밍과 속삭임이 사용된 “Yuri”나, 진수영의 뮤트 피아노 연주 뒤편으로 고음질의 잡음이 부스럭대는 다른 소리들과 깔리던 “그리고 여기로 오세요”처럼 말이다. 꽤나 기이하게 들릴 수 있을 소리를 익숙한 팝적 화성과 멜로디의 배경에 끼우는 보일의 세계는 명확한 스튜디오 작업을 바탕으로 한 “가요”의 그것으로 번안되기에 사뭇 까다로운 편 같다. 때문에 촉촉한 색채가 분명한 전자음과, 알맞게 합쳐지는 특유한 보컬들에 강세를 두어 F.W.D, Room306, blent. 등의 재지한 다운템포 팝 프로젝트를 꾸준히 진행해온 허민(FIRST AID)의 프로듀싱으로, 어쩌면 양측의 교집합을 위한 자리가 마련된 걸지도 모르겠다.

 

 

[나쁜 마음]에서 안정감과 명확함을 추구하는 형색의 가요와 기이한 소리들을 숨겨 담은 앰비언트 팝이 각자 발휘하는 힘은 꽤나 집단적인 프로듀싱과 편곡으로 묘한 합의점을 찾는다. 음반을 여는 ‘Park’에서 그것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도 같은데, 보일의 가창은 분명한 음색으로 들었다면 상대적으로 좀 더 익숙하게 느껴질 수 있을 멜로디를, 문장 끝에서 날숨을 끊고 대신 짧은 효과음처럼 잘라낸 목소리를 뿌리면서 그 분명함을 흐린다. Room306의 근작들이 차차 실제 악기들의 재지한 연주 합을 강조해온 것보다는 조금 이전으로 돌아가듯, 리버브를 잔뜩 담아 몽글해진 신스음을 적재적소에서 조절하는 허민의 솜씨가 맞물린다. 더불어 은근한 그루브를 만드는 기타/베이스가 탄탄하게 받쳐지면서, ’Park‘에는 팝적 리듬의 명료함과 목소리/사운드의 불명료함이 함께 생겨난다. ‘나쁜 마음’ 또한 낮게 읊조리는 천용성의 목소리를 보일과의 듀엣으로 대비되게 배치해, 전자음들이 후면에서부터 전면으로 스멀스멀 올라오는 전개로 이들을 집어삼킨다. 이후 트랙에서 우리존재와 이태훈의 목소리가 유사한 한 쌍으로서 사용되는 것 또한 이와 맥을 같이 할 것이다. 이러한 식으로 [나쁜 마음]은 팝/가요가 추구할 사운드적인 분명함과, 이에 불순물처럼 끼어들어 주어진 시공을 일순 흔드는 소리의 불분명함 간에 놓인 “주도권을 가진 기분”을 집중 공략하며, 0의 원점에 놓인 무게중심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긴장관계를 만든다. 앞 문단에서 언급했던, 여러 잡음들이 빼꼼히 드러난 트랙들에서도 여전히 재즈적으로 다듬어진 악기 소리들이 전개를 이끌지만, 바로 그 잡음들 덕에 팝과 가요의 힘이 철저히 우세할 수는 없는 것처럼 말이다.

 

 

‘해피엔딩’에서는 보일의 목소리가 한 줄기의 신스 멜로디와 들숨이 자세히 들릴 정도로 조용하게 움직이며 곡을 이끈다. 한편 오르골처럼 아른거리는 선율과 피아노 연주에, 스쳐 올라오는 화이트 노이즈와 자그맣게 짤깍거리는 잡음들이 같이 삽입되고, 앞으로가 “더 이상 궁금하지/기대되지 않아”버리는 결말이 이어진다. 호기심과 기대치가 이 다음으로 계속 이어지지 않을 때 찾아오는 단념의 “다음에는”, 그러므로 제대로 맺어지지 않고 하염없이 이어지는 후일담만이 남을 것이다. 소리들을 분명하게 정렬하려는 팝/가요의 체계적인 힘과 그럼에도 언제나 기이한 외형을 띠고 나타나는 소리들 간의 “주도권” 다툼은 [나쁜 마음]에서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지지 않고 결론을 유예하길 선택한 걸지도 모른다. 그러한 지연의 감각은, 라이너노트에서 제시되듯 음반 내내 나른하게 가라앉은 체념의 정서와도 맞닿아있다. 이윽고 ‘다음에는’에서는 이 모든 잡다함과 불분명함의 틈입에도 불구하고 늘 특정 수치 이상으로 팝/가요의 명확함을 띠었던 음색이, 후처리된 효과들 속에서 마침내 분명함을 잃어가며 열화된다. 이때 소리들 사이의 주도권과, 주도권을 가진 듯한 화자와 청자의 기분은 어디로 갔을까? 지연과 체념은 느리게 퇴색하는 정경의 속도로 찾아오고, 나쁜 마음에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건 결국 분명치 않은 불안함의 잔여물뿐이다. [나쁜 마음]의 기이함, 어쩌면 “섬뜩함”은 이렇게 음반 내내 출렁거렸던 팝/가요의 신경전에 대한 기대감이 정말로 져버린 이후, 또 다른 유형의 소리들이 늘상 잠재되어 있다는 걸 알리듯, 느리게 엄습해온다.

 

 


Editor / 나원영 (대중음악비평가)

lavndr [forget-me-not]

“나를 잊지 말아요”는 물망초의 꽃말이다. “8월의 크리스마스”나 “비포 선라이즈”와 같은 영화로부터 영감을 얻은 곡도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관계에서 오는 사랑의 감정을 세밀하게 담아냈다.

 


 

lavndr
forget-me-not
2022.03.02

 

싱어송라이터 라벤더(lavndr)는 우연한 계기로 알게 되었다. 사실 으네(une)의 인스타그램 계정을 통해 처음 보았다. 처음 보았던 드레이크의 “Passionfruit”를 자신만의 색으로 편곡한 그 음악이, 매력적인 음색과 표현이, 그리고 표현하고자 하는 감성을 가득 담은 영상이 모두 인상적이었다. 그를 먼저 알아봤다고 자랑하는 것 맞다. 그만큼 좋은 음악가이고, 언제든 어디서든 자신 있게 추천하고 소개해왔다. 이후 그는 때로는 자신의 오리지널 곡으로, 때로는 생각지도 못한 편곡과 표현으로 꾸준히 음악을 선보여 왔다. 그 사이에 바이너리 넘버라는 밴드에 합류하여 자신의 음악과는 또 다른 영역을 선보였다. 먼저 두 차례 싱글을 발매한 뒤 지난 해 12월 3일에 먼저 “summer”라는 곡을 공개했고, 이번에 [forget-me-not]이라는 앨범을 발표했다. 그의 인스타그램 계정이나 유튜브 계정에 가면 그가 어떤 느낌을 선보여 왔는지 바로 알 수 있다.

 

 

학교 동기인 프로듀서 noso와 함께 만든 이번 앨범은 그래서인지 라벤더가 혼자서 구현해 온 것과는 묘하게 같은 결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 표현이 조금씩 다르다. 훨씬 섬세하고 차분해진 전개와 미니멀하면서도 악기의 성격이 잘 드러나는 프로덕션은 앞서 이야기한 그의 음색과 표현에 더없이 잘 어울리고, 세련된 동시에 알앤비라는 장르의 문법을 짙게 가져가며 앨범의 색을 더욱 짙게 구축한다. 2000년대 알앤비 음악을 연상케 하면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코러스를 쌓은 “you mean so much to me”를 지나 “nobody like you”를 들으면 그가 가사로 사용하는 언어가 한글이든 영어든 그 감성을 전달하는 데에는 전혀 차이가 없음을 느낄 수 있다. 꽉 차 있지 않으면서도 적절한 타이밍에 등장하는 변주는 앨범을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하게 듣게 만드는, 한 순간도 놓치기 싫게 만드는 포인트다. 재즈부터 힙합까지 고루 영향을 받은 듯한 음악은 네오소울을 연상케 하면서도 팝의 색채까지 담았다. 고전적인 곡 구성부터 여러 이펙트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얼터너티브 알앤비 느낌의 곡까지, 얼핏 멀리서 보면 라벤더라는 음악가의 캐릭터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곡 같지만 조금만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정말 다양한 변화와 색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를 잊지 말아요”는 물망초의 꽃말이다. “8월의 크리스마스”나 “비포 선라이즈”와 같은 영화로부터 영감을 얻은 곡도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관계에서 오는 사랑의 감정을 세밀하게 담아냈다. 구체적인 상황을 설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감정만 앞세운 것도 아니기에 오히려 듣는 사람이 더 공감하고 몰입하기 쉽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좋은 작품을 텀블벅을 통해 CD로 소장할 수 있고 또 작업기, 제작 비하인드가 있는 가사집도 만날 수 있다고 하니 며칠 안 남은 펀딩에 함께 동참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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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 / 블럭

시와 [잠 못 이루는 당신에게]

 

그러므로 시와라는 이름에 접속조사 “와”가 이미 품어진 것은, 그 뒤로 오는 무엇이든 그 이상으로 이어낼 수 있단 뜻이기도 할 것이다. 시와 소리, 시와와 정현서, 그리고 시와와의 또 다른 우연한 만남으로.

 


 

시와
잠 못 이루는 당신에게
2022.02.06

 

시와의 새 EP에 작년 트랙들뿐만 아니라, ‘리메이크’된 과거의 트랙들에 오랜 협연자였던 베이시스트 정현서의 이름이 나란히 붙여져 실린 모습은 어째 세 장의 정규 음반을 비롯해 ‘시와 무지개’의 두 음반 등으로 쉼 없이 이어졌던 2010년대 상반기의 시와부터 떠올리게 한다. 이는 당대의 가장 훌륭한 포크와 인디 팝에 덧대진 “전형적인 여성 싱어송라이터” 같은 정형화된 비평적 어구에 ([逍遙]의 프로듀서였던 오지은과 함께) 조용히 반문하는 작업이기도 했다. 이를테면, ‘길상사에서’에서 천천히 끌어올려진 “바람에…”의 선율이 서서히 솟아오른 신스음과 조응해 자그마한 풍경소리로 수렴될 때, 그런 신스음과 목소리가 함께 두런거리면서 시작된 ‘Dream’이 전기기타 솔로가 돋보이는 밴드 연주로 차차 나아갈 때처럼 말이다. 공기의 불안한 떨림이 들어갈 여지없이 견실하게 ‘대지에 내려와 있는’ 낮은 목소리와, 나일론 기타와 피아노 건반이 만들어내는 느린 정취 사이에 생겨나는 빈 공간, 그 틈에 채워 넣어진 RAINBOW99의 지글거리는 전기기타부터 정현서의 묵직하고 든든한 프렛리스 베이스, 아니면 이규호(Kyo)의 작곡을 박용준이 실내악으로 편성한 관현악기들에, 목소리와 맞물리는 서늘함을 머금고 심어진 전자음까지. 분명한 무게감을 지닌 재료들을 저마다의 자리에 서두르지도 머뭇거리지도 않고 차분히 정돈하면서, 시와는 포크와 팝에 걸친 “평범함”의 유별난 구석에 내재된 균형점들을 정갈히 이끌어내 이 시공들을 관제해왔다.

 

 

청소년기의 청취 경험이었던 80년대 후반의 가요 테이프들을 떠올리며 “내 음악의 기원은 발라드였어! (“[아니 어떻게 이렇게 9-1] 시와 편 / 발라드야 나?”)”라고 외쳤던 모습이 멜로디와 화성의 진행이나 이를 뒷받침해주는 풍성한 편성으로까지 비춰져 [머무름 없이 이어지다]와 [다녀왔습니다]의 시간적 간격을 이어줬다면, [잠 못 이루는 당신에게]는 최소적인 구성 속에서 소리들 간의 배치와 왈츠 박자의 활용으로, 일찌감치 정립됐던 시와의 형상을 갈무리해온다. 21년도에 발표된 세 트랙은, 목소리가 나타나는 시간과 나타나지 않는 시간을 건반으로 연결 지어 동등하게 배치하고(‘곁에 있어도 될까’), 세 박자 속에 “하나 둘 셋 넷”을 슬며시 끼워 넣으며(‘waltz at night’), 건반과 목소리 사이 또 홀수박의 강약에 주어진 거리를 좁히고 넓히며(‘숨’) 어떻게 소리들이 안정적인 세모꼴로 지어질 수 있는지를 들려준다. 이는 물론, 시간이 그리 배치된 소리들 사이로 “서서히 스밀 수 있”고, 제 자신의 속도로 “천천히 흐를 수 있게” 하는 일이기도 하다. ‘곁에 있어도 될까’가 후렴구 없이 한 단위의 (혹은 반쪽짜리처럼 느껴질 수 있을) 절로 마무리되어도 사뭇 불완전하거나 미완성된 느낌이 들지 않는 것도, ‘숨’과 ‘waltz at night’가 트랙 안에서 속도를 슬쩍 조절해도 느린 산책 같은 걸음이 비틀거리지 않는 것도 그 덕일 테다.

 

 

정현서와 함께 한 두 개의 트랙은 낮은 소리의 존재감을 활용해, 적은 수의 부품들만으로도 성긴 틈새 없이 소리의 아귀를 맞물려놓는 시와의 트랙들에 무게감 있는 말동무를 달아놓는다. 이전에 발표한 트랙들에 대한 “일종의 정본(正本) 작업 (김병우, [음악취향 Y])”으로서 스튜디오 작업으로 리메이크된 ‘잠 못 이루는 당신에게’는, 라이브 버전과 달리 오로지 시와의 목소리로만 시작된다. 분명한 질감의 목소리 저변에서 베이스음이 현현하듯 시공을 채워 넣는 모습은 순식간에 곡의 “채도를 높이고 명확히 선을 그리 (김병우)”면서 형상을 부여한다. 박자에 대한 그 어떤 표지 없이 시작된 트랙이 세 개의 소리들을 차곡차곡 엮어가며 이전 곡들과 같은 세 박자의 뼈대를 서서히 드러내고, 어느덧 세 개의 확연한 선분들이 서로와 나란히 교차된 무늬를 만들며, 그 마무리가 완성된다. [다녀왔습니다]의 예고로 발매되었으나, 마찬가지로 이번 EP에 다시 녹음되어 실린 ‘완벽한 사랑’에서 또한, 정현서의 베이스음을 들이며 그 “명확한 채도”가 올라간다. ‘잠 못 이루는 당신에게’의 도입부와 조금은 반대되듯, 이번에는 시와의 목소리 없이 두 대의 악기로만 트랙이 시작된다. 여기서도 베이스음는 원테이크라는 환경에 담겼던 2017년 판 ‘완벽한 사랑’의 단출함에 두터운 겹을 하나 깔아놓는다. 두 소리 사이에서 나타난 하나의 관계에 또 다른 소리 하나가 더해진 것만으로도, 두 관계들이 새로이 나타난다. 둘에서 셋으로, 또 하나에서 셋으로, 그렇게 셋에서 여섯으로. 그 중앙이자 밑바닥에서 미끄러지는 베이스음은 나머지 소리들과 멜로디를 주고받듯 오르내리며, 더욱 많은 이야기를 트랙에 더해놓는다.

 

 

3이라는 숫자가 안정성을 상징한다면, 이는 시와와 [잠 못 이루는 당신에게]에 더할 나위 없이 어울려 보인다. 21년도의 두 곡이 삼박자를 따르는 세 개의 소리들을 세 방향으로 교차해 그 구심점 주위를 돌고 돈다면, 뒤쪽의 두 곡은 두꺼운 소리를 부드럽게 추가한 삼각형의 소리 꼴에서 달라진 무게중심을 차근차근 찾아 나선다. “숨소리를 내어보면 사이가 생각나”는 것처럼, 시와의 셋은 무언가와 다른 무언가, 이 둘만큼의 값을 띄고 나타난 그 사이와 함께 한다. 양쪽 소리 간의 거리를 유유히 소요하는 정적이거나, 두 소리가 원래 놓인 땅에 내려앉은 저음이라거나, 너와 나를 머무름 없이 잇는 관계쌍이거나. 그러므로 시와라는 이름에 접속조사 “와”가 이미 품어진 것은, 그 뒤로 오는 무엇이든 그 이상으로 이어낼 수 있단 뜻이기도 할 것이다. 시와 소리, 시와와 정현서, 그리고 시와와의 또 다른 우연한 만남으로.

 

 


Editor / 나원영 (대중음악비평가)

BLUE ROOM [badbutgood]


마치 비빔밥의 모든 재료가 각각의 맛과 식감을 잃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맛의 조화를 이루듯 모든 요소가 한 곡 안에서 치열하게 부딪히며 영감의 스파크를 만들어내는 모습은 마디 단위로 청자의 귀를 자극하며 재미난 음악 한 그릇을 선사한다.

 


 

BLUE ROOM
badbutgood
2022.02.14

 

마치 비빔밥과 같은 음악이다. 물론, 마침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 저녁 메뉴가 비빔밥이었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하게 된 탓도 조금은 있지만, BLUE ROOM (이하 ‘블루룸’)의 이번 신곡은 오늘 저녁 메뉴를 제쳐두고서라도 다양한 요소의 버무려진 폼이 가히 일품 비빔밥에 버금간다 할 수 있을 만큼 갖가지 흥미로운 요소를 가득 품고 있다.

 

 

따뜻한 연주와 담백한 보컬의 조화가 기분 좋은 시너지를 불러일으켰던 지난 12월의 데뷔 싱글 [Not So Far]을 거쳐 더욱더 촘촘한 음악성으로 돌아온 블루룸은 총 7명의 멤버로 구성되어 있다. 밴드 리더이자 기획자이며 트럼페터이자 싱어송라이터이기도 한 bluebird, 그와 함께 밴드의 시작을 함께 한 재즈 기반의 비트메이커 hueil, DJ겸 프로듀서이자 그룹 ‘CHANNEL 201’의 멤버이기도 한 DAUL과 회사원 출신이라는 특이한(?) 이력의 싱어송라이터이자 팀 내 보컬을 담당하고 있는 dvckii, 더불어 bluebird의 학교 동료인 흑인 음악 기반의 베이시스트 hoyoung, 재즈 기타리스트 SiHov,드러머이자 비트메이커인 feel9ood까지. 이렇듯 블루룸 멤버들은 총 7명의 간단한 팀원 소개만으로도 문단 하나를 꽉 채울 만큼 무척이나 다양한 이력과 전문 분야를 자랑한다.

 

이렇게 결코 평범하지 않은 7명의 인원이 한 팀 아래 모였다는 사실 자체도 대단하지만, 누구 하나 묻히는 사람 없이 전부 자기 색깔을 뚜렷하게 내세우면서도 어수선하지 않은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는 점은 놀라울 정도다. 먼저, 재즈 및 흑인 음악을 기반으로 활동하던 멤버들이 만들어내는 능청스러운 그루브는 타이틀곡 ‘badbutgood’과 수록곡 ‘flatline’ 모두에 걸쳐 블루룸의 음악적 무드를 잡아준다. 그 밑단에서 묵직하게 리듬을 이끌어가는 드럼 비트는 은근한 힙합의 향기를 풍기는데, 이러한 느낌을 더욱 짙게 만드는 보컬 dvckii의 작사법과 개성 있는 창법은 랩과 가창의 경계를 미묘하게 넘나들며 자칫 익숙할 수 있는 사운드에 신선함을 더한다. 더불어, 이 모든 것을 하나로 아우르는 프로듀싱의 노련함 또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마치 비빔밥의 모든 재료가 각각의 맛과 식감을 잃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맛의 조화를 이루듯 모든 요소가 한 곡 안에서 치열하게 부딪히며 영감의 스파크를 만들어내는 모습은 마디 단위로 청자의 귀를 자극하며 재미난 음악 한 그릇을 선사한다.

 

 

참고로 팀명 ‘BLUE ROOM’은 리더인 bluebird의 이름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가까이에 있는 행복을 상징하는 파랑새가 머무는 방’이라는 뜻으로, 단어 그대로의 뜻과 다르게 행복한 방을 의미하는 이들의 음악은 그 이름처럼 생동감 넘치는 에너지로 듣는 사람의 기분을 기분 좋게 끌어올리는 힘을 가지고 있다. 여담이지만, 밴드의 시작을 함께한 hueil과 bluebird가 좋아하는 아티스트라 전해온 쳇 베이커의 곡 중에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행복하고 이상적인 공간에 대해 노래하는 ‘blue room’이라는 곡이 있다. 물론 미리 짜기라도 한듯 이어지는 이 흐름이 우연의 일치인지는 직접 이야기를 들어봐야 하겠지만, 적어도 음악을 통해 묻어나오는 희망과 행복에 관한 블루룸의 메시지가 진정성 가득한 설득력을 가지는 이유는 이들이 음악을 대하는 태도에서부터 자연스럽게 스며 나오는 맥락의 일환이리라.

 

단순히 듣기 좋은 음악이기만 했다면 블루룸의 음악을 ‘모든 재료를 한 데 모아 푹 끓인’ 스튜에 빗대어 글을 이어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멤버 모두의 소리가 존중 받으며 이루어내는 살아 숨쉬는 조화는 그저 ‘듣기 좋다’라는 수식 만으로는 부족했을 것이 틀림없다. 마지막으로, 이들의 음악을 조금 더 확실히 만끽하고 싶다면 유튜브를 통해 공개된 두 편의 라이브 비디오를 추천한다. 괜시리 웃음이 지어지는 멤버들 간의 편안한 분위기와 중반부터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의 맛깔스러운 조합에 자연스레 이들의 다음 스탭을 기대하게 될 것이다.

 


Editor / 월로비

Kenichiro Nishihara [empath]

아시아 투어 등을 통해 한국에도 찾아온 바 있는 그가 이번에 2년이라는 시간이 걸려 정규 앨범을 발매했다. 여전히 현역 디제이로, 그리고 음악을 만드는 사람으로 활동 중인 그의 음악은 여전하지만 또 약간의 변화가 있다.

 


 

Kenichiro Nishihara
empath
2022.01.26

 

아마 한국에서 힙합 음악, 특히 일본 힙합에 관심 있는 이들이라면 켄이치로 니시하라의 이름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만큼 그는 일본 내에서도, 밖에서도 입지전적의 인물로 통한다. 누자베스(Nujabes)로 대표되었던 재즈와 힙합의 조합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으며, 긴 시간 음악을 해오면서 에스노(ESNO)라는 또 다른 이름을 쓰며 자신의 이름으로 냈던 것과 조금은 다른 결도 선보였다. 아시아 투어 등을 통해 한국에도 찾아온 바 있는 그가 이번에 2년이라는 시간이 걸려 정규 앨범을 발매했다. 여전히 현역 디제이로, 그리고 음악을 만드는 사람으로 활동 중인 그의 음악은 여전하지만 또 약간의 변화가 있다.

 

 

우선 자신이 가장 아껴온 재즈라는 장르에 있어 그 표현을 더욱 강화했다. 헬싱키의 재즈 퀸텟인 파이브 코너스 퀸텟(The Five Corners Quintet)의 역할이 컸다. 확실하게 재즈를 담아내기 위해 그는 자신의 프로덕션에 연주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였고, 그 결과 그루브 강한 재즈 곡이 탄생할 수 있었다. 물론 여전한 부분도 있다. 서브스텐셜(Substantial)이나 팻 존(Fat Jon), 제이라이브(J-Live)와 같은 래퍼의 이름은 오랜 시간 힙합 음악을 즐겼던 이들이라면 반가울 수밖에 없다. 누군가에게는 과거의 스타일로 들릴 수도 있지만, 재즈 힙합이라 불리는 랩 음악이 지니고 있던 미덕을 그대로 간직하고 새롭게 만들어내는 것도 분명한 매력이다. 여기에 훨씬 더 입체적으로 만들어진 프로덕션, 좀 더 다양해진 BPM은 일본의 재즈 힙합은 천편일률적이라는 과거의 인식을 바꾸기에 어느 정도 효과가 있지 않을까 싶다. 실제로 그는 정규 앨범에는 없지만 시럽(SIRUP)부터 다오코(daoko)까지 일본에서 핫한 이들과 꾸준히 작업하고 있고, 옛사람이라는 이미지보다는 꾸준히,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걷는 그런 느낌이 더욱 가깝지 않나 싶다.

 

편안하게 감상해 보자는 접근해도 좋지만, 의외로 듣다 보면 배신감을 느낄 때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느낌이 나쁘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음악을 찾는 이들이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에 입체적이면서도 고유의 스타일을 어느 정도 함께 묶은 이번 앨범은 그를 좋아했던 사람에게는 물론, 좋아하지 않았던 사람에게도 과감하게 권해본다. 그만큼 들인 공이 드러나는 작품이다.

 


Editor / 블럭

이설아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살아요]

 

어쩌면,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살아요’의 바다는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바라다보는 바다이기에, 정지되어있는 것 마냥 느린 속도감을 띠고 나타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노랫말에서 ‘상상은 우리가 더 많이 믿는 것’이라고 하듯이 말이다. 이렇게 트랙은 ‘겁낼 것이’ 또 ‘급할 것이’ 전혀 없는 바다를 그러하게 믿어보며, 그렇게 나타난 상상을 이러하게 풀어낸다.

 


 

이설아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살아요
2022.01.08

 

1991년에 최초로 발견되어 호주의 대보초 해역에서 드물게 모습을 드러내는 “미갈루”는 현 시점까지 세계에서 유일무이하게 알려진 백색증 혹등고래다. 검푸른 바다빛깔의 해류를 타고 유유히 헤엄치는 거대한 흰 몸뚱이의 그 모습을 상상해보면, 그것은 이설아의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살아요’가 그리는 소리들과도 무척 닮아있기도 하다. 반대로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살아요’의 이야기에 잠시 등장하는 미갈루가 그 소리들과 닮았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물이라도 먹인 것처럼 느린 속도를 따라 둔중하게 울려 퍼지듯 조절된 베이스음이 트랙 전체에 짙게 깔려있는 형상은, 깊숙한 수심의 흐름과 닮아있다. 먼발치에서 머나먼 바다를 내다볼 때에, 바다가 거의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안쪽에서부터 천천히 흐르듯,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살아요’의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소리 또한 상대적으로 느린 제 속도를 따라 울려 퍼져나간다. 이런 베이스처럼 리버브 효과로 처리된 전기기타 소리가 느린 물살을 함께 거들어주며, 트랙의 느낌은 깊은 바다의 그것, 혹은 깊은 바다에서 유영하고 있는 그것, 어쩌면 깊은 바다에서 유영하고 있는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는 그것과 자연스럽게 맞아떨어진다. 울림소리의 큰 잔향에 의해 전체적인 사운드에 대체로 무게감이 걸려있게 된다. 그렇다 해서 그 음색은 거대한 수압에 짓눌리듯 둔탁해지기보다는, 매질을 타고 느리게 전파되는 고래의 울음소리처럼 부드럽게 조절되어, 거대한 부피의 물이 부유하는 느낌을 충분히 이끌어낸다. 때문에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살아요’에서의 이 바다는, 심한 풍랑이나 높은 파고가 그렇게 자주 일지 않는, 거대하고 잔잔하며 느릿느릿한 곳이다.

 

하지만 이 트랙은 미갈루와 바다의 이야기가 아니라, 미갈루가 어디선가 천천히 잠영하고 있을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그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이야기다. 이설아의 목소리가 베이스와 전기기타의 바다 같은 효과음에 동일하게 덮이지 않고, 그보다는 상대적인 고음역대에서 조금 분리된 채 좀 더 분명히 나타나는 것이 그 때문 아닐까. 대신에 이 목소리에는 멀리 보이는 바다에 대해 대화를 나누듯, 코러스들이 쌓아올려지며 그만의 깊이감을 더한다. 모든 게 그 자신의 속도로 찬찬히 흘러가는 여기선 급할 것이 없기에, 이 목소리들 또한 바다 같은 낮은 소리들이 흘러가는 것에 발을 맞추며 그를 바라본다.

 

어쩌면,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살아요’의 바다는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바라다보는 바다이기에, 정지되어있는 것 마냥 느린 속도감을 띠고 나타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노랫말에서 ‘상상은 우리가 더 많이 믿는 것’이라고 하듯이 말이다. 이렇게 트랙은 ‘겁낼 것이’ 또 ‘급할 것이’ 전혀 없는 바다를 그러하게 믿어보며, 그렇게 나타난 상상을 이러하게 풀어낸다.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부터 상상된 바다가 사운드를 통해 천천히 파도를 이끌며 넘나든다. 그곳은 물론 언제나 고요하고 유유히 흘러가는 곳이 절대로 아니며, 특히나 백색증이 있는 생물들은 이런 적대적인 환경 속에서는 오랜 기간 동안 생존하기가 더 힘든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살아요”의 바다는, 바다에 대한 많은 것들을 함께 믿어보기에 나타날 수 있는 모습의 바다가 된다. 그 바다에서 백색증의 혹등고래인 미갈루는 급하지도, 겁내지도 않으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진짜로 저 머나먼 대보초 인근의 넓고 깊은 바다에서, 미갈루가 지금 이 순간에만큼은 여전히 존재하는 채로 유영하고 있듯이 말이다.

 


Editor / 나원영 (대중음악비평가)

사공 [Here, mr.reindeer]


“쓸쓸한 겨울 앨범”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지만, 전곡을 감상한 뒤에 느껴지는 따뜻함은 위에서 언급한 모든 내용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고유의 음악성 덕분일 것이다. 음악을 통해 이야기를 전하는 방식에서 상냥함 마저 느껴지는 사공의 사려 깊은 따뜻함은 그렇게 뜨겁지 않지만 뭉근한 울림으로 오래도록 이어진다.

 


 

사공
Here, mr.reindeer
2021.12.25

 

학창 시절 당시 인상 깊게 들었던 수업 중 동화책, 정확히는 그림 위주로 구성된 그림 동화책에 관한 수업이 있었다. 그림 동화책의 역할과 의미를 갖가지 예시 작품들과 함께 알아보는 흥미로운 강의가 한 학기 동안 이어졌는데, 그중에서도 아직까지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이 바로 ‘좋은 동화는 아이와 어른 모두의 시선으로 읽어낼 수 있는 두 가지 층위를 가지고 있다’라는 내용이었다. 아기자기한 그림 표면에서 아이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교훈적인 내용과 더불어, 그 밑 단에서 어른의 시선으로만 이해할 수 있는 진중한 주제를 읽어내는 일련의 과정은 다층적인 시선에 관한 흥미로운 경험으로 기억된다.

 

 

이번에 소개할 사공의 EP [Here, mr.reindeer]를 처음 받아 들었을 때의 인상은 그림 동화책의 그것과 굉장히 흡사하다. 2019년 데뷔 후, 계절이 바뀔 때마다 어김없이 새로운 작품을 선보이며 누구보다 꾸준히 디스코그라피를 쌓아온 사공은 이미지적이면서도 문학적인 노랫말과 함께 노스텔지어를 자극하는 풍성한 악기 연주를 통해 서사적인 분위기를 강하게 풍기는 뮤지션이다. 그중에서도 작년 겨울에 발표한 [Here, mr.reindeer]는 서사적인 동시에 ‘동화적’이라고 까지 느껴지는 독특한 뉘앙스를 풍긴다.

 

[Here, mr.reindeer]는 “떠돌이 음악가 순록 아저씨를 받아준 마을에서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써온 곡들이 사후에 마을 사람들에 의해 발견된다.”라는 가상의 이야기를 통해 음악을 향한 사공 본인의 자전적인 마음을 투영한 작품이다. 여기서 동화 같다는 느낌을 받은 것은 의인화된 동물이 주인공으로 설정된 낭만적인 배경의 역할도 물론 있었지만, 앞 단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그 배경을 중심으로 다층적인 감상을 제공하고 있는 스토리텔링의 힘이 크다.

 

여기서의 ‘다층적’이라는 표현은 물론 앞 단에서 언급한, ‘어른과 아이의 시선’이라는 단편적인 기준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음악을 업으로 삼는 것에 대한 현실적인 고민과 작품성에 대한 열망 등, 음악가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해볼 수밖에 없는 생각들에서 출발한 이번 작품은 그러한 내용을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대신 순록 아저씨라는 페르소나를 통해 오랜 시간 통과해왔을 감정의 맥락만을 공유한다. 음악을 ‘음악’이라 적지 않은 사공의 음악 이야기는, 그렇게 음악이자 사랑이며 인생일 수도 있는 각자의 소중한 무언가가 되어 저마다의 서사를 완성한다.

 

 

물론 이러한 메커니즘은 예술의 형태를 띠는 모든 작품의 기본적인 구조이지만, 이것을 두고 영화 같다거나 소설 같다는 표현 대신 굳이 ‘동화 같다’라는 표현을 사용한 이유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음악을 ‘음악’이라 표현하지 않은 데에 있다. 본래의 의도를 그림 같은 이야기 뒷단에 심어놓은 덕에, 마치 순수한 시선으로 그림 동화책을 읽어내려가는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음악을 감상할 기회가 주어지는 셈이다. 거기에 더해, 앨범 소개 글과 함께 한층 더 깊어진 이해를 통해 사공의 진솔한 마음을 엿볼 수 있는 180도 다른 감상 또한 가능하다. 그리고 이러한 다층적인 분리가 전혀 작위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그 사이에서 윤활유 역할을 해주는 음악의 힘 덕분이다.

 

내용적인 부분을 떠나 형식적인 측면에서도 사공의 이번 작품은 그림 동화책의 매력을 떠올리게 만드는 요소들을 품고 있다. 연주곡으로 구성된 1, 3, 5번과 그 사이 사이에 배치된 가창 트랙이 만들어내는 흐름은 마치 글과 글 사이에 한 면 가득 펼쳐진 그림 페이지를 연상케 하며 진한 여운을 남긴다. 뿐만 아니라, 사공의 전매특허라 할 수 있는 연주 파트는 마치 우쿨렐레나 벤조 같은 이국의 악기를 떠올리게 하며 현실과 동떨어진 어딘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야기를 듣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쓸쓸한 겨울 앨범”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지만, 전곡을 감상한 뒤에 느껴지는 따뜻함은 위에서 언급한 모든 내용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고유의 음악성 덕분일 것이다. 음악을 통해 이야기를 전하는 방식에서 상냥함 마저 느껴지는 사공의 사려 깊은 따뜻함은 그렇게 뜨겁지 않지만 뭉근한 울림으로 오래도록 이어진다. 2번 트랙 ‘겨울의 노래’ 속에서 “붉어진 볼을 두 손으로 녹여주”며 사랑의 존재를 확인시켜주는 아이들처럼, 때로는 말없이 건네는 이야기의 힘이 우렁찬 아우성보다도 강할 때가 있으니 말이다.

 


Editor / 월로비

Meejah [Queen of Spring]

 

내면의 평화부터 한의 정서까지 교차하는 듯한 이 작품은 어쩌면 한국인의 모습을 하고 덴마크에서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겪는 감정일수도 있고, 정체성에 관한 갈망과 투쟁일수도 있다.

 


 

Meejah
Queen of Spring
2022.01.13

 

2008년 신문 기사에 따르면 덴마크 내 성인이 된 한국 입양인의 수는 그 당시 대략 8700명 정도라고 나와있다. 드러나지 않은 숫자까지 합치면 만 명 가량 있다는 것인데, 다행이도 국외 입양은 08년 이후 꾸준히 감소세이기 때문에 아마 비슷한 정도의 숫자가 덴마크에 살고 있으리라 짐작된다. 그래서인지 에바 틴드(Eva Tind)부터 마야 리 랑와드(Maja Lee Langvad), 요안 랑 크리스텐슨(Joan Rang Christensen)까지 국외 입양에 관하여 비판적인 입장을 담은 문학 작품과 정체성 탐구에 나선 작품이 국내외 여러 형태로 소개되었다. 말렌 최(Malene Choi)의 다큐멘터리 [회귀]를 봐도 덴마크인 중 한국에서 온 이들이 결코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이제 그러한 작품의 목록에 음악 작품도 추가할 수 있게 되었다. 바로 미자(Meejah)의 [Queen of Spring]이다.

 

 

아시아계 여성 최초로 덴마크에서 권위 있는 음악 시상식인 스테프울벤(Steppeulven)에 후보로 이름을 올린 미자의 중심에는 마이 영 외블리센(Mai Young Øvlisen)이 있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나서며 한국의 전통적인 음악과 문화를 연구했고, 거기에 한국의 철학은 물론 도가 사상에도 깊이 있게 빠져들었다고 한다. 그 결과 나온 것이 바로 팔괘를 전면에 드러낸 이 작품이다. 앨범에는 명성황후부터 도교의 관음신앙까지 다양하게 담겨 있으면서 샤머니즘, 판소리, 시조 낭송은 물론 힙합, 메탈, 포스트록까지 북유럽 특유의 어둡고 음울한 감성이 절묘하게 섞여 있다. 그 결과 어둡고 짙은 앨범이 탄생하게 되었다. 도가 사상이라고 하여 평온할 것이라 예상하면 오산이다. 이 작품은 정체성을 표출하고자 하는 욕구에서 탄생되었다고 하는 만큼 다채롭다. 첫 번째 곡 “Youth (Heaven)”에서 흔히들 이야기하는 동양의 아름다움이 간접적으로 전달된다면, 바로 이어지는 곡 “Jing (Thunder)”에서는 다양한 소리 구성으로 동양의 분위기를 내지만 랩과 함께 강렬한 느낌을 준다. 그래서 이 흐름을 쉽게 예측하기 어렵지만, 그래서 더 흥미롭다. 내면의 평화부터 한의 정서까지 교차하는 듯한 이 작품은 어쩌면 한국인의 모습을 하고 덴마크에서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겪는 감정일수도 있고, 정체성에 관한 갈망과 투쟁일수도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당사자의 정체성을 만든 것은 한국이라는 국가의 시스템이었지만, 문화적 뿌리와 정체성에 관한 탐구의 결과 또한 결국은 한국이다. 그 안에 담긴 정서와 이야기는 결코 일차원적이지 않다. 그래서 이 앨범을 들을 때 많은 것을 미리 생각하며 감상하면 더욱 좋다. 그 안에 담긴 음악적 갈래와 표현적 갈래, 정서적 맥락 모두 복잡하게 교차하여 있지만 결국은 그 자체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작품 자체로도 이 앨범은 좀 더 주목받을 가치가 있다.

 


Editor / 블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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