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flow [노랑]

이 앨범을 누군가는 네오 소울로 부를 수도 있고, 누군가는 재즈의 발라드 넘버를 떠올릴 수도 있고 누군가는 힙합, 알앤비의 범주로 분류하겠지만 그보다는 제이플로우라는 사람이 긴 여정을 거쳐 획득한 지금의 작법과 그 과정이 만든 결과라는 측면에 집중해서 들어봤으면 싶다.


 

Jflow
노랑
2021.10.29

 

제이플로우가 지나온 음악적 여정은 꽤 길었다. 머니메이커즈라는 듀오부터 와비사비룸에 히피는 집시였다까지, 래퍼로서도 프로듀서로서도 오랜 시간 꾸준히 음악을 해왔고 민제, 소마, 오션검, 짱유, EK, 제이통까지 많은 이들의 앨범에 참여하기도 했다. 그의 음악적 여정을 쭉 관찰하다 보면 특히 음악의 구성적 측면에서 점점 더 담백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으며 히피는 집시였다는 그 누구와도 비슷하지 않은 두 사람만의 색채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이번 앨범 [노랑]은 그가 실로 오랜만에, 프로듀서로서 사실상 처음으로 발표하는 작품이다. 그래서 랩이 아닌 곡을 통해 자신의 색채를 드러낸다. 제이플로우의 첫 앨범 [노랑]은 따뜻한 느낌을 주는 노란빛을 닮아 있다. 노란빛은 따뜻한 이미지를 지니고 있는데, 이는 자연 곳곳에서도 찾을 수 있다. 바다, 밤공기, 발자국, 품처럼 곡의 제목에 있는 단어가 주는 심상도 노랑과 닮아 있다. 온도와 상관없이 연상할 수 있는 이미지만큼은 자연스럽고 편안하며 각자의 일상이나 마음 한켠을 바라볼 수 있다.

 

함께 호흡을 맞춘 이들은 모두 제이플로우와 연관 있는 이들이다. 특히 짱유와는 오랜 시간 호흡을 맞춰 온 만큼 짱유만이 할 수 있는 것을 최대한 끌어내면서도 이 앨범이 지닌 분위기에 잘 담겨 있다. 반대로 진저와의 호흡은 서로에게 조금씩 각자의 음악적 자리를 내어주며 기분 좋게 들을 수 있는 곡을 만든 듯하다. 이미 오랜 시간 호흡을 맞춰온 지바노프와 만든 곡의 탄탄함을 어느 정도 익숙하게 받아들일 무렵, 브라운이 참여한 두 곡은 짙은 서정성을 자랑하며 감탄을 불러온다. 진저와 함께 한 ‘밤공기’ 정도를 제외하면 모든 곡에 리듬이 크게 없다는 것도 특징인데, 특히 ‘품’의 경우 짧지 않은 호흡이지만 곡 중간에 들리는 동물의 소리와 일상을 담은 듯한 소리, 현악기가 조성하는 분위기와 기타 연주의 자연스러운 연결까지 감상할 수 있는 부분도, 그 안에 빠져들어 생각할 수 있는 여지도 많다.

 

자연, 심성, 분위기만으로도 충분히 다가오는 이번 앨범의 매력은 온전히 제이플로우의 음악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그래서 참여진의 가창은 역설적으로 정말 중요하지만 중요하지 않기도 하다. 이 앨범을 누군가는 네오 소울로 부를 수도 있고, 누군가는 재즈의 발라드 넘버를 떠올릴 수도 있고 누군가는 힙합, 알앤비의 범주로 분류하겠지만 그보다는 제이플로우라는 사람이 긴 여정을 거쳐 획득한 지금의 작법과 그 과정이 만든 결과라는 측면에 집중해서 들어봤으면 싶다. 물론 담백하고 아름다운 일곱 곡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도 좋다. 그가 인터뷰에서 직접 이야기한 것처럼 평소 쉽게 지나치는 작은 돌멩이 위로 빛이 떨어지면 주인공이 되듯, 우리가 평소 무심하게 넘기거나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들도 눈을 두면 소중함이 발견되고는 한다. 앨범은 이런 이야기를 높은 완성도의 음악으로 설득력 있게 풀어낸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Editor / 블럭

OoOoot(최규철) [Soil]

[Soil]이라 명명된 최규철, 아니 OoOoot의 이 데뷔작은 드러머 중심의 연주 앨범이 아니라 오히려 프로듀서/비트메이커가 연주자들의 조력을 더해 완성한 비트뮤직 앨범에 가까운 성질을 지니고 있을뿐더러 장르적으도 꽤나 다채로운 구성을 취하고 있다.

 


 

OoOoot(최규철)
Soil
2021.10.25

 

몇 년 전, 인디펜던트 음악에 빠삭한 몇몇 지인들이 “딱 네가 좋아할 음악을 하는 밴드가 있다”며 너도 나도 추천을 해줘서 알게 된 밴드가 있는데 바로 –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라면 틀림없이 알고 있을 이름인 – ‘까데호’였다. 그리하여 처음 들어본 이들의 음악은 실제로도 딱 내 취향이었던 지라 이 발견이 더할 나위 없이 반갑던 와중, 또 하나 개인적으로 반가운 지점을 발견했는데 그건 당시 이 밴드의 드러머가 다름아닌 ‘최규철’이었다는 점이다.

 

[Live] SGLIVE EP.8 ‘CADEJO’ Live Session
당시 처음 접했던 까데호의 라이브 영상.
심플하고도 단단한 리듬을 수놓는 최규철의 연주를 감상할 수 있다.

 

내가 처음 인디펜던트/언더그라운드 씬에 발을 들였던 2000년대 초반의 인디록 씬은 주로 펑크, 하드코어, 모던록 부류의 음악들이 큰 갈래를 이루고 있었는데 당시에 하드코어 씬을 대표했던 밴드 중 하나가 ‘쟈니로얄(Johnny Royal)’이고 최규철은 바로 이 쟈니로얄 출신이다. 거의 20년 전에 좋아했던 밴드 출신의, 하지만 그 뒤로 전혀 근황을 알지 못 했던(솔직히 까맣게 잊었던) 아티스트의 근황을 이렇게 알게 되니 아무래도 반가울 수밖에. 이후 차차 알게 된 것은 사실 그가 쟈니로얄 이후로도 꾸준히 음악 활동을 영위해오고 있었다는 것. 최규철은 상기한 까데호의 결성멤버였을 뿐 아니라(첫 믹스테입 발표 이후 제주도로 거처를 옮기면서 밴드를 탈퇴했다) ‘삐삐밴드’, ‘H2O’, 3호선버터플라이’ 등 걸출한 밴드를 거친 박현준, ‘넘넘 (numnum)’의 허키 시바세키(이승혁)와 함께한 밴드 ‘LEMON (레몬)’, 김오키 주축의 재즈 콤보인 ‘김오키 뻐킹매드니스’의 일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최근 ‘OoOoot’이라는 예명으로 본인의 첫 솔로 작품을 내놓았다. 게다가 무려 열세 트랙을 빼곡하게 눌러 담은 정규앨범. 작품의 라이너노트에서도 같은 지점을 언급하고 있는데 일반적으로 드러머의 앨범이라고 하면 주로 재즈에서 접할 수 있듯, 드러머가 중심이 되고 여기에 베이스, 피아노, 색소폰 등 여타 악기 연주자들이 협연하는 구성의 특정 장르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예컨대 아트 블래키(Art Blakey)와 재즈 메신저스의 위대한 하드-밥 명작 [Moanin’]처럼.

 

OoOoot 로고
이 로고로 미루어보건대 아마 ‘우웃’이라 읽어야 하는 걸까요?

 

하지만 [Soil]이라 명명된 최규철, 아니 OoOoot의 이 데뷔작은 드러머 중심의 연주 앨범이 아니라 오히려 프로듀서/비트메이커가 연주자들의 조력을 더해 완성한 비트뮤직 앨범에 가까운 성질을 지니고 있을뿐더러 장르적으도 꽤나 다채로운 구성을 취하고 있다. 큰 맥락에서 바라보면 주로 힙합, 재즈의 영향력이 가장 크게 느껴지는 가운데 앱스트랙트 힙합, 앰비언트, 다운템포, 모던 재즈, 소울, 훵크 등의 요소를 두루 아우르고 있는 작품으로 허키 시바세키, 까데호의 이태훈과 김재호, 김오키, 진수영, 강상훈, 이규재, 허아민, 이승규 등 여러 동료 음악가들이 각각의 트랙에서 적재적소에 등장해 근사한 시너지를 만들어내고 있다.

 

다양한 스타일의 음악들을 한데 모은 만큼 예측 불가한 – 나쁘게 얘기하면 들쑥날쑥 산만한 – 진행이 필연적일 듯하지만 뜻밖에 기승전결이 꽤 선명한 작품이다. 몽환적인 무드의 신스 사운드와 스산한 기타 리프가 어우러지는 인트로 ‘Branch’를 지나 연이어지는 ‘Harvest’, ‘Mustard’까지의 초반부는 LA 비트씬 류의 추상적인 힙합, 앰비언트 성향의 곡들로 초현실적인 무드의 사운드와 힙합 비트의 조합이 돋보이는 구간. 한편 듣는 순간 ‘까데호 재질’이 느껴지는 ‘Norankang’은 예상대로 까데호의 김재호, 이태훈이 협연한 곡으로 분위기를 전환하며 중반부로 넘어가는 기점이다. 앨범의 중반은 델로니어스 몽크를 연상시킬 정도로 그윽한 진수영의 피아노가 근사한 ‘Consider’, 김오키의 색소폰이 짙은 멜랑콜리를 자아내는 ‘WatchTower’, 허아민의 해먼드 오르간과 김재호의 베이스 사운드가 곁들여지며 근사한 펑키 그루브를 조성하는 ‘Appointed’까지 재즈적인 곡들이 연이어지며 편안한 감상을 유도하는 구간이다. (전통적인 장르 문법에 가장 충실한 곡들이 모여있는 구간으로도 볼 수 있겠다) 이윽고 등장하는 앨범 타이틀과 동명의 곡 ‘Soil’은 국내에선 좀처럼 만나기 힘든 멋진 재지 브레이크(Jazzy breaks). 해외에선 브레이크, 레어 그루브(Rare Groove) 씬이 따로 존재할 정도로 팬덤이 있는 장르지만 국내 음악가가 이쪽 장르를 시도하는 건 정말 흔치 않기에 특히나 반갑고, 또 값지게 느껴지는 곡이다. 한편 이 곡은 구성적으로는 ‘Appointed’의 펑키한 분위기를 자연스레 이어 받으면서 후반부를 여는 장치로 기능한다. 심플한 리듬이 돋보이는 다운템포 성향의 ‘Adullam’, ‘Throughout’을 지나 IDM(intelligent dance music)과 프리재즈 사이 어딘가에 있는 듯 실험적인 곡인 ‘Day and Night’, 탭댄스와 드럼의 조합만으로 강렬한 리듬의 향연을 펼쳐내는 ‘LakeWood’, 다양한 소리들의 불규칙한 조합으로 불길하고 음습한 분위기를 만드는 아웃트로 ‘Life’까지 이 앨범의 종반은 작품 내에서 가장 전위적인 태도를 취하는 곡들을 연이어 만나게 되는 구간이다.

 

 

앨범을 감상하는 동안 어떤 곡에선 제이딜라를, 어떤 곡에선 몽크를, 또 어떤 곡에선 에이펙스 트윈을 떠올렸을 만큼 광범위한 영역을 넘나들며 결이 다채로운 음악들을 선보이는 작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조금도 억지스럽지 않다는 점, 각 곡의 훌륭한 완성도와 더불어 앨범 전체로도 자연스러운 맥락을 지니며 뚜렷한 기승전결을 지닌 구성을 취하고 있다는 점 등은 최규철이라는 음악가가 긴 음악 활동 동안 쌓아온 내공의 깊이를 가늠케 한다. 대중적인 작품이라곤 도저히 말할 수 없지만 가끔은 익숙한 대중음악의 문법 밖으로 벗어나 새로운 경험을 해보고 싶은 리스너들에게 꼭 한 번 감상해보라 권하고 싶다. 분명 꽤나 흥미롭고도 신선한 경험이 될 거다.

 


Editor / 김설탕

hiko [police]

그가 솔로 앨범을 내겠다고 결정한 것은 알앤비 애호가에게는 천만다행과 같은 소식이다. 올해에 오티스 림(Otis Lim)이나 히코처럼 자신만의 감성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시작점부터 세련된 표현을 선보이며 동시에 과하거나 뻔하지 않은 음악을 하는 이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반갑고 행복하다.


 

hiko
police
2021.10.22

 

히코(kiho)의 첫 EP [police]는 그가 섹 폴(sec paul)과 어 홈 비디오(a home video)를 할 때와는 명확하게 다른 색채를 지니고 있다. 그가 솔로 앨범을 내겠다고 결정한 것은 알앤비 애호가에게는 천만다행과 같은 소식이다. 올해에 오티스 림(Otis Lim)이나 히코처럼 자신만의 감성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시작점부터 세련된 표현을 선보이며 동시에 과하거나 뻔하지 않은 음악을 하는 이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반갑고 행복하다.

 

 

히코의 음악을 들으면서 자연스럽게 한국형 알앤비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정확하게는 한국의 알앤비를 자양분으로 삼아 만들어진 음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곡의 생김새만 놓고 보면 깔끔하게 잘 만들어진 트랙에 전체적으로 담백한 프로덕션을 지니고 있으며, 과거 90년대 팝 알앤비부터 70년대 소울 음악까지를 관통하고 있어서 장르 음악을 좋아하는 이들에게 사랑받을 수밖에 없는 조건을 지니고 있다. ‘Run With You‘에서 등장하는 히코의 음색과 창법에 푹 빠질 무렵 짧은 러닝타임이 끝나고 ‘시간이 지나서‘가 등장한다. 죠지와의 호흡을 듣고 있으면 90년대 감미로움을 가득 제공했던 이름난 보컬 그룹들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Bad News‘는 오직 이 장르에서만 들을 수 있는 편성과 질감을 만날 수 있으며, 실제 세션 못지 않게 자연스럽다. 여기에 90년대 한국의 발라드만큼 솔직하면서도 서정적인 가사가 기억에 남으며, ‘For a While‘을 비롯해 곳곳에서 등장하는 매력적인 신스 사운드가 인상에 남는데, 후반부 편곡과 앨범 전체의 흐름에서 가장 무거운 느낌이 있는 ‘Room 402‘의 등장, 그리고 발라드 넘버 ‘요즘 나는‘이 주는 깊은 여운까지, 작품은 여섯 곡으로도 탄탄한 구조와 완성도를 선보인다. 쿤디판다의 등장을 ‘요즘 나는‘의 앞에 배치한 것은 대비되는 분위기로 더 확실한 효과를 가져간다.

 

가장 편안하게 들을 수 있는 노래부터 가장 실험적인 측면까지 고루 선보일 줄 아는 히코의 첫 앨범 [police]. 아마 이 글이 아니더라도 많은 사람이 알아줄 것 같지만 다들 편하게 감상해보며 직접 느껴보길 권한다.

 


Editor / 블럭

Suwon Yim (임수원) [When It Falls]

임수원의 [When It Falls]는 각 곡이 지닌 매력이 큰 작품이다. 결코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흐름과 호흡 속에서 다양한 편성을 감상할 수 있다는 점도 좋지만 임수원의 독주 역시 빛나는 순간이다. 올해 한국 재즈는 이렇게 또 하나의 빛나는 순간을 얻게 되었다.

 


 

Suwon Yim (임수원)
When It Falls
2021.10.15

 

이 앨범을 듣다 보면 두 가지 측면에서 굉장히 감탄하게 된다. 우선 하나는 서정이다. 자연에서 오는 영감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 작품은 “나무와 바람, 하늘, 달, 바다 등 소리와 느낌, 보여지는 색들을 보며 써 내려간 앨범”이라는 소개글에 부합하게 뚜렷한 분위기를 넘어 분위기 이상으로 한 사람이 지니고 있는 감성을 온전하게 전달한다. 재즈 피아니스트인 동시에 동요 작곡가이기도 한 그의 음악은 단순히 순수함이라는 단어 하나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아름다움이 있다. 마냥 어린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순진한 것이 아닌, 그렇다고 순수한 척하는 것도 아닌 자신의 시선과 마음을 잘 간직해온 단단하면서도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이 존재한다. 물론 임수원이라는 음악가가 실제로 그러한 사람인지, 혹은 그러한 모습을 보이기 위해 노력했는지 나로서는 알 길이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의 결과로 드러나는 앨범은 그러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자연으로부터 우리가 느낄 수 있는 표현이나 마음을 이 작품을 통해서도 느낄 수 있으며, 앨범을 듣다 보면 억지로 자연의 소리를 넣지 않아도 충분히 곡을 통해 그러한 감상을 할 수 있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임수원이라는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 밴드리더가 들려주고 싶은 모습은 자연의 모습이지만, 동시에 그걸 통해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건 임수원이라는 음악가만이 풀어낼 수 있는 감성이다.

 

 

서정적인 음악 뒤에 또 다른 감탄의 요소가 있으니, 바로 비대면 세션이다. 앨범은 모든 곡이 비대면 홈 레코딩으로 제작되었다고 하며, 코로나-19에 더없이 잘 맞는 작업 방식이다. 2020년부터 봉쇄령을 비롯해 세계적으로 락다운을 겪으며 몇 음악가는 혼자서, 그러니까 나의 피아노 연주와 나의 베이스 연주가 합을 맞추는 식으로 음악을 제작하고는 했다. 베드룸 팝이라고 해서 한 사람이 랩탑과 악기 한, 두 가지 연주를 기반으로 곡을 쓰는 것이 자연스러워지기는 했지만, 재즈 내에서는 한동안 혼자서 모든 악기를 연주하고 녹음하여 만드는 것이 점차 늘어나는 추세였다. 그 추세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데, 이 앨범은 비대면 홈 레코딩을 통해 제작되었다고 하니 그 방식 자체가 흥미롭고 재미있게 다가온다. 정확히 어떤 식으로 연주를 주고받았는지, 또 녹음된 것을 받았는지 등의 과정이 궁금하지만 어쨌든 이 작품은 그러한 방식으로도 충분히 좋은 합을 만들 수 있다는 걸 알려줬다. 물론 좀 더 불처럼 타오르는 성격의 앨범은 이러한 방식으로 연주 간의 합을 맞추는 것이 쉽지 않을 수도 있지만, 코로나-19 시국 속 생겨나는 여러 풍경 중 또 하나의 방식을 제시하여 의미 있다고 생각했다.

 

지면 상 가장 크게 느낀 두 가지만 썼지만, 임수원의 [When It Falls]는 각 곡이 지닌 매력이 큰 작품이다. 결코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흐름과 호흡 속에서 다양한 편성을 감상할 수 있다는 점도 좋지만 임수원의 독주 역시 빛나는 순간이다. 올해 한국 재즈는 이렇게 또 하나의 빛나는 순간을 얻게 되었다.

 


Editor / 블럭

김라마, Khundi Panda [송정맨션]

 

비현실적이거나 혹은 지극히 현실적인, 어쩌면 모순적일 수도 있는 양 끝 단의 성질을 모두 머금은 [송정맨션]은 그리하여 영화 같기도, 소설 같기도 한 오묘한 작품이다. 더불어 이러한 내용을 살아 숨 쉬게 하는 여러 서술적 장치들과 사운드적인 완성도는 말 그대로 ‘외강내강’에 가까운 마감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김라마, Khundi Panda
송정맨션
2021.10.03

 

무언가를 수식할 때 “영화 같다”라는 표현이 동반되는 경우, 우리는 그것이 시각적인 강렬함을 동반하며 현실에서 벌어지지 않을 법한 장면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그에 비해 어떤 사건의 전말이 믿기 어려울 만큼 절묘하게 맞아떨어져 무릎을 ‘탁’ 치게 되는 경우를 두고 우리는 마치 “소설 같다”고 표현한다. 비슷해 보이는 두 표현은 이렇게 전혀 다른 뉘앙스를 풍기면서도 현실과 가상의 언저리에 걸쳐있는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쿤디판다와 김라마의 합작품인 [송정맨션]은 영화 같기도, 동시에 소설 같기도 한 오묘한 인상을 풍긴다. ‘송정맨션’이라는 가상의 공간을 통해 마치 카메라 구도를 바꾸듯 서로 다른 인물들을 집요하리만치 디테일한 묘사를 통해 그려내고 있는 [송정맨션]은 그 과정에서 탄생하는 선명한 이미지들로 인해 마치 옴니버스 영화를 감상하는 듯한 착각을 준다. 뿐만 아니라 수록곡 간의 유기성과 그로 인해 탄생한 앨범 전반에 걸친 맥락의 완성도는 잘 짜인 소설을 읽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이러한 완성도는 물론 하루아침에 완성된 것이 아니다. 이 프로젝트의 시작은 무려 2년 전인 201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래서인지 결코 짧은 시간 내에 완성될 수 없는 탄탄한 마감을 자랑하는데, 여기에는 전 트랙을 프로듀싱한 미지의 아티스트 김라마의 디렉팅과 함께 이미 장르 씬에서 철두철미한 디테일로 손꼽히는 쿤디판다의 노련미가 기반이 되었을 것이다. 

 

참고로 쇼미더머니를 통해 본격적으로 대중에게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쿤디판다는 이미 장르 음악 팬이 아니더라도 들어봤을 법한 인지도를 가지고 있지만, ‘김라마’라는 이름의 아티스트는 생소할 사람들이 적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그 또한 2016년에 데뷔하여 주기적으로 작품 활동을 이어온 경력자이며, 가장 최근에 발표한 EP [외톨이갱을 기다리며]를 한 번이라도 들어본 사람이라면 이번 [송정맨션]에서 김라마가 차지하는 지분에 관해 결코 토를 달 수 없으리라 장담한다.

 

 

여기서 ‘디테일’이라 한다면 먼저 사운드적인 절묘한 균형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데, 특유의 탁성으로 뭉근하게 바탕을 깔아주는 김라마의 보컬과 날카로운 발성으로 어떠한 비트에서도 존재감을 잃지 않는 쿤디판다의 랩은 실과 바늘처럼 달라붙으며 부족함 없는 균형을 선사한다. 뿐만 아니라 1명의 보컬리스트와 1명의 래퍼가 함께 등장하는 곡에서 흔히들 예상하는, 벌스와 후렴을 번갈아서 차지하는 식상한 전개를 탈피하고 있는 점도 흥미롭다. 때로는 주거니 받거니, 때로는 한 사람이 주도권을 가지고 곡을 이끌어가거나 두 사람의 목소리를 중첩시켜 오묘한 분위기를 형성하는 등, 단순히 랩과 보컬이라는 이분법적인 구분을 넘어 두 사람의 목소리 자체를 여러 사운드 소스 중의 하나로 치환하여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있는 방식은 청자의 몰입감을 끊지 않으며 감정선을 유지하는 데에 일등 공신으로 작용한다.

 

귀로 들리는 물리적인 부분을 넘어 내용적인 부분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이들의 치밀한 설계는 감탄을 자아낸다. 앞서 언급했듯 ‘송정맨션’이라는 가상의 공간에서 마치 씬과 씬을 연결하듯 옴니버스식으로 연결된 각각의 수록곡은 때로는 가사적으로, 때로는 청각적으로, 때로는 내용적으로 은근한 연결고리를 내보이며 감상의 재미를 더한다. 연결된 트랙에서 특정 단어를 반복하거나(1번 트랙, 2번 트랙) 특정 멜로디 라인을 교묘히 변주하여 흐름을 이어가는 등(6번 트랙, 7번 트랙) 노골적으로 내용을 이어가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청자로 하여금 곡 간의 연결성을 상상하게 만드는 이러한 장치들은 음악적 유기성이라는 측면에서 앨범 전체를 하나의 작품으로 인지하게끔 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다. 특이하게도 이번 앨범은 10곡 전부가 타이틀곡으로 지정되어 있는데 이 모두를 트랙 순서대로 듣고 있자면 전곡 타이틀곡 지정이라는 파격적인 결정을 수긍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를 통해 쿤디판다와 김라마가 궁극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은 우리를 둘러싼 현실의 모습이다. 이들이 묘사하고 있는, 퇴폐적이거나 본능적이거나 혹은 병적으로 번져가는 사랑의 어두운 모습들, 혹은 돈이라는 절대적인 기준 앞에서 무력해지는 등의 삶의 그림자 같은 장면들은 결코 모른 척할 수 없는, 아니 어떻게 해서든 모른 척하고 싶은 우리 모두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송정맨션]은 현실 속 한순간 한순간을 너무나도 노골적이고 너무나도 ‘현실적’으로 묘사하여 오히려 그것을 가상의 것인 양 낯설게 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이로 인해 우리는 외면하고 싶은 현실의 단편을 한 발짝 떨어져 관찰하게 되고 그것은 곧 그 대상들을 전혀 다른 각도로 바라보게 되는 생경한 경험으로 이어진다.

 

앞 단에서 이 작품을 두고 ‘현실과 가상의 언저리’에 있다고 표현한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비현실적이거나 혹은 지극히 현실적인, 어쩌면 모순적일 수도 있는 양 끝 단의 성질을 모두 머금은 [송정맨션]은 그리하여 영화 같기도, 소설 같기도 한 오묘한 작품이다. 더불어 이러한 내용을 살아 숨 쉬게 하는 여러 서술적 장치들과 사운드적인 완성도는 말 그대로 ‘외강내강’에 가까운 마감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같은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익살스러운 모습을 선보였던 밴드 ‘플랫샵’의 쿤디판다는 또 한 번 진중한 스토리텔러로서의 자아를 폭발시키며 스펙트럼 확장을 이어간다. 뿐만 아니라 이번 작품을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작업자로서의 흔적을 남기기 시작한 김라마는 자연스럽게 그의 차기작뿐만 아니라 과거 행적에 대한 궁금증까지도 덩달아 증폭시키고 있다. 쿤디판다와 김라마의 만남이 다시 한번 성사될지에 대한 여부는 물론 본인들에게 달려있겠지만, 일단 송정맨션에 발을 들여놓은 이상 이 둘의 조합을 쌍수 들고 환영하는 바이다.

 


Editor / 월로비

오영 [피카레스크]

오영의 음악에서 가장 인상을 남기는 것은 단연 가사다. 그의 가사는 한 줄 한 줄에 묘사와 함께 압축된 의미가 담겨 있는 듯하고, 구체적인 상황을 묘사하지 않더라도 화자의 감정만큼은 고스란히 전달한다. 때로는 거친 단어 선택을 쓰지만 역설적으로 그 안에 담긴 마음은 아름다운 음악과 만나 더욱 크게 와 닿는다.

 


 

오영
피카레스크
2021.10.11

 

피카레스크라고 하면 보통 악한 사람이 메인으로 등장하는 이야기를 의미한다. “우연히 태어나 지독히 얽히는 모든 것, 숨죽인 채 도사리는 수많은 괴물과 악당들을 그리며 쓴 앨범”이라는 직접 쓴 소개를 보면 알 수 있기도 하다. 오영은 로션펑크, 프레드와 함께 공공카펫이라는 팀을 하고 있으며, 자신의 SNS 채널을 통해 포크 외의 음악도 가끔씩 들려준다. 여기에 직접 작사, 작곡, 편곡은 물론 녹음, 믹싱, 마스터링까지 직접 해내고 있다. 이러한 음악가를 한때 베드룸 팝이라는 단어로 묶고는 했는데, 이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특정 장르 한, 두 가지만을 곡에 투영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취향이나 들어온 음악, 한 사람의 세계와 감성을 온전히 담아낸다는 특징이다. 오영의 음악 역시 그렇다. 기본적으로 그의 음악은 포크 음악이지만, 그가 소리를 담아내는 방식이나 디테일을 듣고 있으면 기타 한 대와 목소리라는 심플한 공식을 담고 있으면서도 확장된 소리를 들려주고는 한다. 두 번째 곡인 “판도라”는 보사노바의 형태를 띠고 있기도 하며 전반적으로 보컬과 코러스, 기타 사운드로 공간감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오영의 음악에서 가장 인상을 남기는 것은 단연 가사다. 그의 가사는 한 줄 한 줄에 묘사와 함께 압축된 의미가 담겨 있는 듯하고, 구체적인 상황을 묘사하지 않더라도 화자의 감정만큼은 고스란히 전달한다. 때로는 거친 단어 선택을 쓰지만 역설적으로 그 안에 담긴 마음은 아름다운 음악과 만나 더욱 크게 와 닿는다. 어딘가 움츠러든 듯한 “세이렌” 속 화자는 슬픔이 가득하지만, “판도라”는 앞선 이야기에서 그래도 나아가고 이겨내려는 듯한 마음을 보게 된다. “혼혈”의 가사 배열이 담긴 운율에서는 더욱 감정의 깊이가 느껴지며, 짧은 문장과 심플한 곡의 구성은 한 편의 시를 만나는 것처럼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사실 누군가의 감성을 다른 글로 담아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을 글로 옮기는 것 자체도 어려운 일이지만, 그것을 다른 방식의 묘사로 쓰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오영의 앨범을 설명하는 것은 어려웠다. 하지만 심연에 가까운, 깊으면서도 슬픈 가운데 그 안에 담긴 이야기는 우울하다는 단어 하나로 설명할 수는 없다. 비록 길지 않은 호흡의 네 곡이지만 그 안에는 서사와 운율이 있다. 곡의 형태이지만 의미적 기능, 음악적 기능, 회화적 기능을 모두 지니고 있으니 한 편의 시라고 봐도 무방할 것 같다.

 


Editor / 블럭

박제신 [Deep Mind]

모든 곡에서 드럼을 담당한 김종국 드러머와 기타 세션으로 참여한 송준호, 안상준 두 사람까지 앨범은 박제신의 리드 아래 탄탄하게 채워졌다. 여기에 각 곡의 호흡이나 러닝타임도 유연하며 일곱 곡 모두 세련된 표현으로 음악적 자극을 원하는 이들에게 귀감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나도 이 앨범을 좀 더 오래, 진득하게 들을 예정이다.

 


 

박제신
Deep Mind
2021.10.07

 

박제신은 훌륭한 재즈 음악가이지만 재즈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밴드 향니의 멤버였고 재달, 한요한과 같은 힙합 음악가부터 폴킴, 정승환과 같은 음악가까지 다양한 이들과 작품에서, 또 라이브 무대에서 호흡을 맞춰 왔다. 뿐만 아니라 “싱어게인 – 무명가수전”을 비롯해 TV 프로그램에서 하우스 밴드 멤버로 활약했고, 많은 곳에서 그의 베이스 연주를 들을 수 있었다. 그는 동시에 훌륭핸 재즈 음악가다. 클럽 에반스 잼 데이를 이끌었고, 호스트 멤버들과 함께 매드 볼타 클럽(Mad volta club)이라는 이름으로 싱글을 발표하기도 했다. 플루티스트 박지은을 비롯해 여러 동료의 앨범과 연주에 참여했고, 2020년에는 <재즈피플> 라이징스타에 선정되기도 했다. 그가 뛰어난 역량을 지녔다는 것에는 많은 이들이 동의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그가 이번에 자신의 첫 작품 [Deep Mind]를 발표했다. 이미 자신의 이름을 걸고 정규 앨범을 발표한 바 있는 이영우가 앨범의 또 다른 주축을 맡았는데, 이영우는 피아노뿐만 아니라 신스를 적극적으로 활용해서 앨범을 선보인 바 있는 만큼 [Deep Mind]에서는 특히 전반부에 신스를 전면적으로 내세우며 작품의 자유분방한 측면을 드러내는 데 일조한다. 신스를 적극적으로 가져간다고 해서 무조건 퓨전 재즈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Some)Keepers’나 ‘Purple Wave’는 재즈의 성격을 띠고 있지만 전자음악이나 얼터너티브 R&B에 가깝다. 여기에 다른 곡과 다르게 편성이나 구성에 변화를 준 ‘Color Dropping’이나 ‘Goodbye-Goodhi’는 좀 더 재즈를 느낄 수 있는데, ‘Awakening’은 이러한 구성들 사이의 한가운데 있으면서도 음악적 성과의 정점으로 느껴진다. 여기에 베이스 독주로 짧게 구성한 마지막 곡 ‘im’까지 듣고 나면 박제신의 세계 중 극히 일부만을 본 것 같아 어딘가 아쉬우면서도 호기심이 더 생긴다.

 

모든 곡에서 드럼을 담당한 김종국 드러머와 기타 세션으로 참여한 송준호, 안상준 두 사람까지 앨범은 박제신의 리드 아래 탄탄하게 채워졌다. 여기에 각 곡의 호흡이나 러닝타임도 유연하며 일곱 곡 모두 세련된 표현으로 음악적 자극을 원하는 이들에게 귀감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나도 이 앨범을 좀 더 오래, 진득하게 들을 예정이다.

 

 


Editor / 블럭

PAR [PC음악]

누구도 할 수 없는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를 중심에 두고 그것을 작품으로 승화시켜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음악으로 재탄생시키는 일련의 과정은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라는 마틴 스코세이지의 명언을 떠오르게 한다.

 


 

PAR
PC음악
2021.09.06

 

12곡을 꾹꾹 눌러 담아 완성된 이번 정규앨범 [PC음악]은 PAR의 데뷔작이다. 발매 이력 하나 없는 신인이 정규 앨범으로 데뷔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시선을 끌기 충분했지만 그 안의 모든 수록곡이 저마다의 색깔을 띠며 한데 뭉쳐있던 모습은 근래에 느껴본 적 없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 충격은 곧 ‘도대체 어디서 무얼 하다 나타난 사람인가’ 하는 궁금증으로 이어졌고 그것이 PAR라는 뮤지션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PAR의 음악은 기본적으로, 통통 튀는 신디사이저 소스와 중저음의 음색이 대비되며 만들어내는 독특한 조화를 자랑한다. 물론 그 와중에 일렉트로닉 사운드를 기반으로 한 연주곡으로 완급조절을 하기도 하며 돌연 예상치 못한 가창력을 선보이며 앨범의 감정선을 쥐락펴락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어쿠스틱 악기와의 궁합으로 색다른 매력을 발산하기도, 지극히 팝적인 접근을 통해 타켓층의 무수한 취향을 12곡에 걸쳐 다방면으로 만족시킨다. 곡 하나하나를 찬찬히 뜯어보기 전부터라도 이미 청각적으로 다채로운 멋을 뽐내며 음악적 스펙트럼의 다양성을 증명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이것만으로도 신인으로서 충분히 대단한 성과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번 앨범을 단순히 듣기 좋은 음악으로 치부하기엔 아직 이야기해야 할 내용이 많이 남아있다. 지극히 사적인 개인의 이야기로 운을 떼고 있는 1번 트랙 ‘너 혹시’에서 시작하여 꾸준히 개인의 고뇌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 [PC음악]은 자칫 너무 사적으로 비추어질 수도 있는 내용을 유머러스하게 포장하여 ‘일기장’과 ‘작품’ 사이의 아슬아슬한 균형을 유지한다. 그 균형 위에 듣기 좋은 사운드를 첨가하여 결과적으로 이것을 ‘좋은 음악’으로 주조해내는 실력은 분명 하루아침에 완성된 것이 아니리라.

 

더군다나 앨범의 후반부로 갈수록 ‘음악’과 ‘작업자’ 라는 조금 더 거대한 주제로 조금씩 시선을 옮겨 가고 있는 전체적인 서사 구조 또한 인상적이다. 결과적으로 앨범 전반에 걸쳐 소위 말하는 ‘컨셔스함’, 즉 동시대를 살아가는 누군가로서의 의식 있는 태도를 지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이번 앨범의 메인 장르가 ‘포크’라고 표기되어 있는 이유와도 그 맥락을 함께한다.

 

한편, 앨범의 제목 ‘PC음악’의 ‘PC’는 개인용 컴퓨터를 뜻하는 ‘Personal Computer’의 약자이자 정치적 올바름을 뜻하는 ‘Political Correctness’의 약자이기도 하다. 실제로 이 두 가지 의미를 전부 포함하고 있는 이번 앨범은 두 ‘PC’가 공유하고 있는 ‘가능성’이라는 키워드를 핵심으로 두고 있다. 실제로 이번 앨범은 PAR가 가진 가능성을 있는 그대로 대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테다. 생산성의 혁명을 불러일으킨 PC의 무한한 가능성과, 당연하다고 여겨지던 수많은 것들에 대한 또 다른 가능성을 상징하는 PC의 교집합은 자연스럽게 PAR가 지향하는 음악과 오버랩되기 때문이다.

 

 

PAR의 ‘가능성’은 비단 음악으로 끝나지 않는다. 누군가의 초상을 왜곡하여 음악적 맥락을 재구성하고 있는 아트워크 디자인은 전부 그의 손을 거쳐 탄생했으며 아스키 코드로 적힌 앨범 소개글은 마치 그만의 세계관을 구성하듯 음악을 중심으로 한 추가적인 의미의 확장을 유도한다. (코드를 해석한 결과는 감상의 재미를 위해 더 언급하지 않기로 한다) 앞으로 더욱 다양한 방향으로 뻗어 나갈 그의 ‘가능성’을 기대해보게 되는 대목이다.

 

물론 모든 아티스트의 작품이 비슷한 속성을 가지고 있겠지만 그의 이번 정규 1집은 그 자체로 PAR라는 아티스트를 요목조목 알아갈 수 있는 종합선물세트나 다름없다. 누구도 할 수 없는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를 중심에 두고 그것을 작품으로 승화시켜 모두가 즐길 수 있는 음악으로 재탄생시키는 일련의 과정은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라는 마틴 스코세이지의 명언을 떠오르게 한다.

 

그래서 PAR는 도대체 ‘어디서 무얼 하다 나타난’ 사람일까? 신인이기에 알 수 없는 과거의 행적은 지금으로선 어찌할 수 없겠지만 한 가지 만큼은 확실하다. 이 뮤지션이 ‘앞으로 어디서 무엇을 하게 될 것인가’ 하는 기대감이 커지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신선함 가득한 사운드로 꽉꽉 채워진 종잡을 수 없는 가능성은 과연 PAR의 다음 행보가 어떤 식으로 확장되어갈지에 대한 무궁무진한 상상으로 이어진다.

 


Editor / 월로비

pleasepleaseplease [Please Pray for the Pigs]

독특하게도 그의 음악은 러닝타임이 길수록 그만의 독창성이 드러난다. 그만큼 그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감성을 풀어낼 줄 아는 음악가다. 그의 음악에는 밴드 음악도 있고, 전자음악도 있고 소울 음악도 있다. 그가 선보이는 창법 역시 어느 한 장르만으로도 설명할 수 없다. 힙합, 알앤비의 리드미컬한 감각보다는 상대적으로 멜로디와 서정성으로 승부를 보면서도 다양한 장르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을 은연 중에 드러낸다.

 


 

pleasepleaseplease
Please Pray for the Pigs
2021.09.23

 

고백하면 플리즈플리즈플리즈(Pleasepleaseplease)에 관한 배경 정보가 많지는 않다. 그의 SNS를 통해 알 수 있는 것들, 그리고 그의 음악을 통해 짐작할 수 있는 것들이 전부다. 진저(g1nger)의 친구라는 점, 기본적으로 뛰어난 가창력을 지니고 있으며 자신만의 사운드스케이프를 확실하게 구현한다는 점, 멋진 비주얼을 하고 있다는 점 정도만 알 수 있을 뿐이다. 플리즈플리즈플리즈의 첫 싱글 [담아야]는 연여인의 인상적인 아트워크는 물론, 영화 <타락천사>의 영상을 활용한 비디오도 그의 감성을 담고 있다. [담아야]의 연장선이지만 전혀 다른 비주얼을 하고 있는 [Tribute]는 상대적으로 본격적인 음악 행보의 시작처럼 느껴졌다. 충분히 넓고 크게 사운드를 펼쳐내면서도 담백함을 유지하는, 그러면서도 음색을 충분히 드러낼 수 있는, 넓은 폭을 쓰면서도 수려하게 이어 나가는 보컬 라인은 그 매력에 빠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조차 이어 나온 싱글 [Dive]에 비하면, 그리고 이번 EP에 비하면 맛보기에 불과했다. 특히 [Dive]는 뮤직비디오와 함께 공개했는데, 애니메이션이 결합되어 있으면서도 자신만의 느낌을 훌륭하게 선보였다. 이번 앨범에서도 ‘Mediploz’의 뮤직비디오를 공개했는데, 꼭 한 번씩 볼 것을 권한다. 그의 음악적 표현이 시각과 일치하는 듯하며, 무엇보다 그의 음악이 어딘가 이국적임에도 한국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담겨 있다.

 

 

그의 앨범을 들으면 가장 첫번째로는 음색과 가창력이 귀에 들어온다. 다시 생각해보면, 그만큼 보컬 라인 자체가 매력적이라는 이야기다. 여기에 그 라인 아래 탄탄하게 존재하는 것이 바로 트랙이다. 독특하게도 그의 음악은 러닝타임이 길수록 그만의 독창성이 드러난다. 그만큼 그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감성을 풀어낼 줄 아는 음악가다. 그의 음악에는 밴드 음악도 있고, 전자음악도 있고 소울 음악도 있다. 그가 선보이는 창법 역시 어느 한 장르만으로도 설명할 수 없다. 힙합, 알앤비의 리드미컬한 감각보다는 상대적으로 멜로디와 서정성으로 승부를 보면서도 다양한 장르로부터 영향을 받았음을 은연 중에 드러낸다. 그것을 촌스럽게 직접적으로 드러내진 않지만, 아마 이미 듣는 사람은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영어로 된 가사를 무분별하게 지향하는 경우가 요즘 들어 많이 보이지만, 플리즈플리즈플리즈의 경우에는 영어의 발음이 지닌, 특히 연음에서 발생하는 전개와 음악이 더없이 잘 어울린다. 이번 앨범에서는 한국어로도 그러한 표현을 자연스럽게 선보이며, 부드럽게 멜로디를 이어가면서도 디테일을 쌓아가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물론 그의 가장 큰 매력은 트랙의 모습이라 생각하지만, 개인적으로는 그의 보컬에 푹 빠져들었다. 앞서 세 작품은 한 곡이었기 때문에 아쉬웠는데, 이번 EP 덕분에 더욱 긴 호흡으로 즐길 수 있어서 좋았다. 이 즐거움을 여러분도 알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Editor / 블럭

protonebula [Biophilia]

앨범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곡씩 나열하며 이야기한 이유는 우선 앨범의 구성이 그만큼 탄탄하기 때문이고, 각 곡이 각자 조금씩 다른 색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프로듀서의 앨범인 만큼 중심이 되는 프로토네뷸라의 음악이 가장 전면에 드러나면서 자신과 가장 어울리는 음악가를 선택한 것도 매력적이다.

 


 

protonebula
Biophilia
2021.09.20

 

프로토네뷸라가 긴 침묵을 깨고 자신의 두 번째 앨범 [Biophilia]를 공개했다. 한국어로 번역하면 ‘생명애’라고도 하고, ‘녹색갈증’이라고도 한다. 지난 작품을 소개할 때 편안하면서도 새로운, 안정적이면서도 완성도 높은 프로듀서로서의 역량을 언급한 바 있는데, 이제 프로듀서로서의 역량은 어느 정도 당연하게 느껴진다. 작품이 지닌 장점을 이야기할 때 기술적인 언급으로 채우기에는 얘기해야 할 다른 장점이 훨씬 더 많기 때문에 이번에는 생략하기로 한다. 하지만 아마 앨범을 들으면 그러한 기술적 역량은 가장 먼저 다가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첫 곡이자 앨범명과 같은 이름의 “biophilia”는 현악기의 연주를 비롯한 소리 배치가 인상적이다. 어느 정도 극적인 요소를 담으면서도 아름다운 표현, 편안하면서도 귀를 끄는 구성을 더해 만들어낸 이 곡의 장르를 무엇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알앤비와 재즈, 전자음악이 고루 담긴 이 곡 안에는 완성도를 위한 욕심과 고민, 그리고 음악가가 지닌 역량의 밀도가 그대로 담겨 있다. 여기에 죠지와 함께한 “Flower”에서는 앞선 곡의 무드를 곡의 초반에 얹은 뒤 죠지의 다양한 매력 중 자주 보여주지 않았던 모습을 풀어놓는다. 리드미컬한 곡을 하나 맞이하고 나면 다시금 “brook”을 통해 차분하게 만들고, 그 뒤에는 오랜만에 구원찬의 목소리를 만날 수 있는 “행복으로 떠나자”가 등장한다.

 

“brook”은 첫 곡 “biophilia”보다는 조금 더 차분하고 간결하게 진행되며, 뒤에 등장하는 “행복으로 떠나자”, 그리고 “ghosty”와 하나의 흐름을 이룬다. 피쳐링으로 참여한 다른 음악가도 모두 프로토네뷸라와 이상적인 호흡을 선보이지만, 구원찬과의 호흡은 기존의 구원찬이 선보였던 감성의 결과도 워낙 잘 맞아 떨어져서 아름답게 느껴진다. 아마 구원찬의 보컬이 지닌 특징과 프로토네뷸라의 프로덕션 사이의 교집합이 많아서 좋은 곡이 나온 것이 아닐까 싶다. “ghosty”까지 듣고 나면 “Telescope2”를 통해 앨범의 결과 잘 맞아 떨어지면서도 마치 다른 세계로 인도하는 듯한 착각까지 준다. 김아일과 제이클래프가 만드는 새로운 공기는 최근 슬롬과 함께 뛰어난 앨범 [Miniseries]를 발표한 수민과의 “Imagination”까지 이어진다. 조금은 강하게, 앨범에서 가장 높은 긴장을 줬던 두 곡이 지나면 미고(Meego)의 보이스를 소리의 구성으로 잘 활용하여 다시금 차분하게 분위기를 만드는, 동시에 앞서 선보였던 곡과 다르게 또 다른 장르를 만나는 듯한 착각을 주는 “Pilgrim”이 등장하고, 앨범 전체와 잘 맞아 떨어짐에도 전혀 다른 장르라는 느낌을 주는 “Oslo”로 마무리된다.

 

앨범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곡씩 나열하며 이야기한 이유는 우선 앨범의 구성이 그만큼 탄탄하기 때문이고, 각 곡이 각자 조금씩 다른 색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프로듀서의 앨범인 만큼 중심이 되는 프로토네뷸라의 음악이 가장 전면에 드러나면서 자신과 가장 어울리는 음악가를 선택한 것도 매력적이다. 무엇보다 가장 멋진 건 앨범 전체가 가사가 없는 곡을 통해서도 하나의 이야기를 하고 있고, 뛰어난 스토리텔링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오직 이 음악가만의 감성을 느낄 수 있는, 이 작품에서만 만날 수 있는 것이 분명히 존재한다. 더 많이 주목 받아야 할 앨범이다.

 


Editor / 블럭

D’allant [PROLOGUE]

콘셉트가 설득력을 갖추고 대중에 의해 소구되려면 결국엔 결국엔 충실한 알맹이, 즉 잘 만들어진 콘텐츠가 동반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흥미로운 캐릭터와 세계관을 좋은 결과물들로 영리하게 풀어내고 있는 달란트의 지금까지의 행보는 충분히 훌륭하고 멋지게 느껴진다.

 


 

D’allant
PROLOGUE
2021.09.09

 

WWF(지금은 WWE) 프로레슬링을 꽤나 좋아했다. 저마다 뚜렷한 개성을 지닌 캐릭터들이 등장해 화려한 필살기를 뽐내며 좌충우돌 싸우는 이 엔터테인먼트는 언제나 ‘재미’ 그 자체였고 유년기에 처음 접한 이후 제법 나이를 먹을 때까지도 나에게 적잖은 즐거움을 선사했는데, 사실 어릴 떄부터 이미 대충은 알고 있었다. 그들의 싸움이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진 캐릭터, 즉 ‘기믹’이라는 것을. 하지만 아무렴 어떠랴, 그토록 짜릿하고 흥미진진한데. 나는, 그리고 우리는 어쩌면 아마 이때부터 기믹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즐기는 법을 자연스레 체득해온 것이 아닐까? (지금도 내 명함에는 90년대를 대표하는 대스타 ‘스톤콜드 스티브 오스틴’의 얼굴이 떡하니 박혀있다)

 

 

산뜻함과 그윽함을 두루 갖춘 매력적인 음색의 보컬리스트 ‘Daye’(다예), 프로듀서이자 멀티 인스트루멘탈리스트인 다재다능한 ‘Pizzafairy’(피자페어리)로 구성된 그룹 ‘D’allant’(달란트)는 꽤나 흥미로운 기믹, 세계관을 전면에 내세워 리스너들의 흥미를 자극한다. 일단 이들은 지구인이 아닐지도 모른다. 두 사람은 우주선 안에서 깨어났으며 그 이전의 기억이 없어 자신들의 출생지도, 이전의 과거도 전혀 알 수 없다. 단지 우주정찰대로서 여러 행성을 여행하고 탐사하던 중 태양계에 진입하여 지구에 오게 되었고, 하필 우주선이 고장나는 바람에 현재 지구에 머무르고 있을 뿐이다. 심지어 피자페어리는 여러 인격체의 집합으로 필요에 따라 증식, 융합을 하는 일종의 프로그램이라고 한다.

 

힙합 듀오를 자처하지만 그간의 발표작들의 면면을 보면 사실 힙합과는 다소 거리가 있다. 오히려 특정 장르의 문법에 국한됨 없이 알앤비, 뉴잭스윙, 펑크(funk), 일렉트로닉 등 다양한 장르의 요소들을 자유롭게 섭렵, 소재로 활용하여 우주적 콘셉트에 부합하는 흥미롭고도 감각적인 음악을 만들어내고 있으며 동시에 그에 걸맞게 근사한 비주얼, 패션을 동반해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

 

[MV] D’allant – SPACESHIP (feat. 윤담백)

 

최근에 발표된 EP [PROLOGUE]는 태양계 탐사를 콘셉트로 했던 이전 정규작 [COSMOS]의 프리퀄격 작품으로 우주선 안에서 처음 눈을 떠 미지의 세계를 향한 여정을 시작하는, ‘달란트’의 시작을 담은 작품이다. 올해 초에 리드-싱글로 선공개되었던 ‘SPACESHIP’은 경쾌한 그루브의 뉴잭스윙으로 다예의 산뜻한 팝보컬, 독특한 플로우로 분위기를 환기하는 윤담백의 랩이 밸런스 좋게 어우러져 기분 좋은 무드를 만들어낸다. 넘실대는 기타 리프와 신스 사운드, 차진 리듬워킹이 합을 이뤄 멋진 분위기를 연출하는 ‘SUN’은 과거 다프트펑크(Daft Punk)와 나일 로저스(Nile Rodgers)의 협연을 상기시키고, 이어지는 타이틀곡 ‘GRAVITY’는 우주 유영을 연상케 하는 몽환적인 사운드스케이프의 일렉트로닉 팝 넘버로 달란트의 컬러를 오롯이 맛볼 수 있는 곡이다. 마지막 트랙으로 배치된 ‘ORBIT’은 앞서 ‘SPACESHIP’과 마찬가지로 싱글로 선공개되었던 곡으로 동화적인 인트로를 지나 그윽한 재즈 발라드로 전환되어 약간의 의외성을 선사한다. 앞선 곡들과는 전혀 다른 음색과 창법으로 곡의 무드에 녹아드는 다예의 보컬에 감탄하고 있노라면 어느새 김오키의 색소폰이 슬며시 내려앉으며 곡에 은은한 우수를 더한다.

 

기믹이 그저 기믹에 그치고 만다면 잠시나마 대중의 흥미를 끌지언정 궁극적으로 그들의 선택을 받지는 못 할 것이다. 콘셉트가 설득력을 갖추고 대중에 의해 소구되려면 결국엔 결국엔 충실한 알맹이, 즉 잘 만들어진 콘텐츠가 동반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흥미로운 캐릭터와 세계관을 좋은 결과물들로 영리하게 풀어내고 있는 달란트의 지금까지의 행보는 충분히 훌륭하고 멋지게 느껴진다. 이들의 우주 탐사가 – ‘스타트랙’에 버금가게 – 오래도록, 흥미진진하게 이어지길 바란다.

 

[Official Audio] D’allant – ORBIT (feat. 김오키)

 


Editor / 김설탕

실리카겔 [Desert Eagle]

누구도 가지 않은 미지의 사막을 횡단하듯 ‘얼터너티브’의 대명사로서 묵묵히 전진해온 실리카겔의 여정은 마치 홀로 걷는 사막이 너무나도 외로워 자기 발자국을 보기 위해 뒷걸음질로 걸었다는 오르텅스 블루의 시 ‘사막’을 떠올리게 한다. 물론 이들이 실제로 외로움에 몸서리쳤을 리 만무하지만, 이제 매직스트로베리사운드라는 든든한 지원군이 생겼으니 걱정 없다.

 


 

실리카겔
Desert Eagle
2021.08.15

 

실리카겔의 ‘새로운 데뷔’ 선언 이후 1년이 흘렀다. 사실상 새로운 데뷔곡이나 마찬가지였던 <kyo 181>을 시작으로 아홉 달에 걸쳐 총 3장의 싱글을 발표한 실리카겔의 행보는 아직 보여줄 것이 차고 넘친다는 듯 매번 새로운 충격을 동반했다. ‘실리카겔식 메탈’로 대변되는 <Hibernation>과 24분에 달하는 <S G T A P E – 01>로 이어지고 있는 이들의 새로운 음악적 시도는 본인들조차도 실리카겔의 음악을 특정 장르로 규정하기 어려울 만큼 (물론 그럴 생각도 없을 테지만) 다양한 표정을 지어왔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이렇게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무한한 가능성이야말로 실리카겔이 실리카겔일 수 있는 가장 명확한 속성일 것이다.

 

물론 충격이라는 키워드는 이번 작품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실리카겔의 음악은 두말하면 입이 아플 만큼 여전히 충격적이니까. 그러나 이번 <Desert Eagle>가 선사하는 ‘충격’의 맥락은 지금까지 주를 이루었던 새롭고 낯선 것에 대한 본능적인 반응과 달리, 오히려 예상치 못한 곳에서 맞닥뜨린 익숙함, 그리고 그 익숙함이 서서히 낯설어지는 새삼스러운 경험에 기반하고 있다.

 

복귀 이후로 팝 음악의 포맷을 조금씩 차용해오던 실리카겔은 <Desert Eagle>를 통해 조금 더 적극적으로 형식 간의 융화를 시도한다. 얼마 전 진행된 모 인터뷰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번 작품 또한 곡의 초중반 부는 팝 음악의 그것처럼 보컬 중심으로 편곡되어 있으며 전체적인 곡의 구성 또한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진행 순서를 따르고 있다. 인트로, 벌스1, 후렴, 벌스2, 후렴, 브릿지, 하이라이트, 아웃트로로 이어지는 진행은 대부분의 기성 음악이라면 크게 벗어나지 않는 전형적인 포맷이다. 집요하다고 느껴질 만큼 반복적인 구성이 돋보였던 <kyo 181>을 떠올려본다면 오히려 실리카겔의 음악에서 마주한 이 ‘전형적인’ 구성이 오히려 신선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이 신선함은 단순히 ‘기성의 방식을 따르고 있다’라는 표현에서 끝나지 않는다. 전형적이라는 것은 다시 말해 다수가 선택할 만큼 효율적이라는 뜻이며, 실리카겔은 그 효과를 극한까지 뽑아내며 이번 작품의 서사적인 분위기를 밀도 있게 쌓아 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나지막한 저음으로 시작해 서서히 상승하는 멜로디와 함께 후반부를 향해 치닫는 격정적인 연주는 자연스럽게 음악적 기승전결을 확보할 수 있는 진행 방식으로 인해 설득력을 얻는다. 뿐만 아니라, 기본적인 형식 안에서도 노골적으로 구분된 각각의 파트와 그 사이 사이를 메우는 잠깐의 정적들은 마치 막과 막 사이의 인터미션을 연상시키며 장대한 뮤지컬을 감상하는 듯한 느낌을 들게 한다. 청자와 밀당이라도 하듯 신들린 완급조절로 곡의 긴장감을 쥐었다 폈다 하는 이번 작품은, 결국 실리카겔에게 있어 다수에게 선택받은 ‘기성의 포맷’ 조차 원하는 대로 취사선택하여 본인들만의 색깔로 덧칠해버릴 수 있는 수많은 선택지 중 하나라는 사실을 다시금 일깨워주고 있다.

 

소위 ‘실리카겔 음악의 특징’이라 불리곤 하는 몇 가지 요소 또한 같은 맥락에서 이들 색깔의 농도를 더욱 진하게 만든다. ‘사막’, ‘섬광’, ‘죽은 분들의 세계’ 등, 언뜻언뜻 귀를 스치는 몇 가지의 묵직한 단어들이 마치 별자리처럼 연결되어 곡 전체의 서사를 뒷받침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비록 이들이 가사 하나하나에 심오한 의미를 부여하는 팀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더라도 도리어 가사가 가진 힘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보게 된다.

 

 

더불어,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이미 집요하리만치 반복적인 사운드가 가진 멋을 선보인 바 있는 실리카겔은 이번 작품의 하이라이트를 통해 다시 한번 그 효과를 입증해 보이고 있다. 장장 32마디에 걸쳐 반복되는 구절로 꽉 차있는 곡의 후반부에서는 차근차근 쌓아 올린 감정선이 폭발하며 절정에 이르는데 “지금까지의 실리카겔 곡 중 가장 화려한 연주가 녹음되어 있다”고 전해온 멤버 김한주의 말처럼 비할 바 없는 웅장한 사운드로 자기도 모르게 이어폰의 볼륨을 올리게 된다. 이후 모든 소리가 잦아들며 마무리되는 곡의 아웃트로는 5분간의 러닝타임을 감히 ‘여정’이라 부를 수 있을 만큼의 진하고 또 진한 여운을 남긴다.

 

매번 새로운 시도로 음악적 영역을 확장해가고 있는 실리카겔은 그렇게 누구에게나 새로울 수밖에 것들을 넘어 누군가에겐 새롭지 않을지도 모르는 것들마저 모조리 흡수하는 중이다. 앞선 세 작품을 통해 잇따라 보여준 신선한 시도에 이어 선보이는 <Desert Eagle>는 검증된 형식 위에서 그 모든 시도를 자양분 삼아 완성되었으니, 그리하여 팝 음악의 형식을 차용하면서도 결코 그 흐름에 휩쓸리지 않는 “유아독존의 세계”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누구도 가지 않은 미지의 사막을 횡단하듯 ‘얼터너티브’의 대명사로서 묵묵히 전진해온 실리카겔의 여정은 마치 홀로 걷는 사막이 너무나도 외로워 자기 발자국을 보기 위해 뒷걸음질로 걸었다는 오르텅스 블루의 시 ‘사막’을 떠올리게 한다. 물론 이들이 실제로 외로움에 몸서리쳤을 리 만무하지만, 이제 매직스트로베리사운드라는 든든한 지원군이 생겼으니 걱정 없다. 공식적으로 매직스트로베리사운드 식구들과 한솥밥을 먹기 시작한 후 발표하는 첫 번째 작품이기도 한 이번 싱글은 그렇게 여러모로 이들의 다음 행보를 가늠케 할 중요한 이정표가 되어줄 것이다.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또 한 번 그 영역을 넓혀갈 실리카겔의 음악을 기대하며, 앞으로 무수한 발자국이 더해질 광활한 사막에 덩달아 몸을 맡겨본다.

 


Editor / 월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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