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일 [나쁜 마음]

 

소리들을 분명하게 정렬하려는 팝/가요의 체계적인 힘과 그럼에도 언제나 기이한 외형을 띠고 나타나는 소리들 간의 “주도권” 다툼은 [나쁜 마음]에서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지지 않고 결론을 유예하길 선택한 걸지도 모른다.

 


 

보일
나쁜 마음
2022.02.07

 

[나쁜 마음]이 꽤나 기이한 음반인 것은 재생시간의 거의 30%를 차지하는 10분짜리 앰비언트 트랙이 마무리를 담당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몽실한 신스음으로 이뤄진 짧은 구간이 느린 루프에 따라 서서히 음향 효과에 덮인 채 늘어지듯 서서히 퍼져나가는 ‘다음에는’은, 색과 선의 형상들이 뭉개진 듯 보이는 음반 커버와 가장 닮았고 그러므로 ‘나쁜 마음’과의 더블 타이틀 값어치를 톡톡히 하는 트랙이니까. 사실, ‘다음에는’에서 제시된, 원형을 잃은 채 떠다니는 소리의 형상은 [나쁜 마음] 곳곳에 은근히 혹은 불현듯 나타나게 심어져있다. ‘살구’같은 트랙이 사운드를 맑고 흐리게 전환시켜 만드는 인공적인 로우파이 음질이나, ‘0’과 ‘여기서부터 꿈입니다’에 자그마한 잡티처럼 포함된 녹음환경의 주변음들, 그리고 ‘카드’의 찰칵대고 치직거리는 비트에 입히고 ‘해피엔딩’의 군데군데에 삽입되는 무수한 잡음들까지. 음반에는 “음악”으로는 확연히 분류되지 못할 “기이한” 소리들이 꽤나 다양한 방식으로, 어느 정도 의도적이게 담겨있다. 하지만 내게 가장 “기이하게” 느껴졌던 건 그와 함께 공동 프로듀싱과 제작을 맡았던 오소리웍스의 가요적인 존재감이었다. 그러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쁜 마음]은 꽤나 분명하게 팝 혹은 가요 음반으로 들린다. 어느 정도까지는.

 

 

텀블벅 작업기에서 단편선이 밝혔듯, 지난 몇 년 간 오소리웍스는 “주로 밴드 음악, 또는 포크 기반의 싱어송라이터가 연주하는” 성향의 음반들을 발매해왔다. 다만 이 작업들은 그러한 “기반”을 틀로 삼아 전기기타를 능숙히 이용하는 팝과 가요를 겨냥하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여유롭고 나른한 후하와 명쾌하게 찰랑거리는 전복들의 기타 팝이나 이펙트를 강조한 전기기타 사운드로 “자연적인” 풍경을 그리는 전유동, 특히 과거를 도구 삼아 작가주의적인 가요사의 중앙으로 뛰어든 천용성의 음악은 스튜디오에서 세심하게 다듬어진 분명한 음색들로 주어진 보컬 라인과 기타 리프의 친근한 멜로디를 전달하곤 했다. 팝 음반으로서의 [나쁜 마음]도 유사한 목표를 설정하겠지만, 출발지점이 조금 다르다. 지근거리에서 속삭이듯 비음과 숨소리가 두드러지는 보일의 목소리와 이를 두드러지게 하는 음색은 “가요”의 그것과는 사뭇 거리가 있을 테니 말이다. 전작에서 분명치 않은 음정으로 조절된 악기소리들처럼 나지막한 허밍과 속삭임이 사용된 “Yuri”나, 진수영의 뮤트 피아노 연주 뒤편으로 고음질의 잡음이 부스럭대는 다른 소리들과 깔리던 “그리고 여기로 오세요”처럼 말이다. 꽤나 기이하게 들릴 수 있을 소리를 익숙한 팝적 화성과 멜로디의 배경에 끼우는 보일의 세계는 명확한 스튜디오 작업을 바탕으로 한 “가요”의 그것으로 번안되기에 사뭇 까다로운 편 같다. 때문에 촉촉한 색채가 분명한 전자음과, 알맞게 합쳐지는 특유한 보컬들에 강세를 두어 F.W.D, Room306, blent. 등의 재지한 다운템포 팝 프로젝트를 꾸준히 진행해온 허민(FIRST AID)의 프로듀싱으로, 어쩌면 양측의 교집합을 위한 자리가 마련된 걸지도 모르겠다.

 

 

[나쁜 마음]에서 안정감과 명확함을 추구하는 형색의 가요와 기이한 소리들을 숨겨 담은 앰비언트 팝이 각자 발휘하는 힘은 꽤나 집단적인 프로듀싱과 편곡으로 묘한 합의점을 찾는다. 음반을 여는 ‘Park’에서 그것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도 같은데, 보일의 가창은 분명한 음색으로 들었다면 상대적으로 좀 더 익숙하게 느껴질 수 있을 멜로디를, 문장 끝에서 날숨을 끊고 대신 짧은 효과음처럼 잘라낸 목소리를 뿌리면서 그 분명함을 흐린다. Room306의 근작들이 차차 실제 악기들의 재지한 연주 합을 강조해온 것보다는 조금 이전으로 돌아가듯, 리버브를 잔뜩 담아 몽글해진 신스음을 적재적소에서 조절하는 허민의 솜씨가 맞물린다. 더불어 은근한 그루브를 만드는 기타/베이스가 탄탄하게 받쳐지면서, ’Park‘에는 팝적 리듬의 명료함과 목소리/사운드의 불명료함이 함께 생겨난다. ‘나쁜 마음’ 또한 낮게 읊조리는 천용성의 목소리를 보일과의 듀엣으로 대비되게 배치해, 전자음들이 후면에서부터 전면으로 스멀스멀 올라오는 전개로 이들을 집어삼킨다. 이후 트랙에서 우리존재와 이태훈의 목소리가 유사한 한 쌍으로서 사용되는 것 또한 이와 맥을 같이 할 것이다. 이러한 식으로 [나쁜 마음]은 팝/가요가 추구할 사운드적인 분명함과, 이에 불순물처럼 끼어들어 주어진 시공을 일순 흔드는 소리의 불분명함 간에 놓인 “주도권을 가진 기분”을 집중 공략하며, 0의 원점에 놓인 무게중심에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긴장관계를 만든다. 앞 문단에서 언급했던, 여러 잡음들이 빼꼼히 드러난 트랙들에서도 여전히 재즈적으로 다듬어진 악기 소리들이 전개를 이끌지만, 바로 그 잡음들 덕에 팝과 가요의 힘이 철저히 우세할 수는 없는 것처럼 말이다.

 

 

‘해피엔딩’에서는 보일의 목소리가 한 줄기의 신스 멜로디와 들숨이 자세히 들릴 정도로 조용하게 움직이며 곡을 이끈다. 한편 오르골처럼 아른거리는 선율과 피아노 연주에, 스쳐 올라오는 화이트 노이즈와 자그맣게 짤깍거리는 잡음들이 같이 삽입되고, 앞으로가 “더 이상 궁금하지/기대되지 않아”버리는 결말이 이어진다. 호기심과 기대치가 이 다음으로 계속 이어지지 않을 때 찾아오는 단념의 “다음에는”, 그러므로 제대로 맺어지지 않고 하염없이 이어지는 후일담만이 남을 것이다. 소리들을 분명하게 정렬하려는 팝/가요의 체계적인 힘과 그럼에도 언제나 기이한 외형을 띠고 나타나는 소리들 간의 “주도권” 다툼은 [나쁜 마음]에서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지지 않고 결론을 유예하길 선택한 걸지도 모른다. 그러한 지연의 감각은, 라이너노트에서 제시되듯 음반 내내 나른하게 가라앉은 체념의 정서와도 맞닿아있다. 이윽고 ‘다음에는’에서는 이 모든 잡다함과 불분명함의 틈입에도 불구하고 늘 특정 수치 이상으로 팝/가요의 명확함을 띠었던 음색이, 후처리된 효과들 속에서 마침내 분명함을 잃어가며 열화된다. 이때 소리들 사이의 주도권과, 주도권을 가진 듯한 화자와 청자의 기분은 어디로 갔을까? 지연과 체념은 느리게 퇴색하는 정경의 속도로 찾아오고, 나쁜 마음에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건 결국 분명치 않은 불안함의 잔여물뿐이다. [나쁜 마음]의 기이함, 어쩌면 “섬뜩함”은 이렇게 음반 내내 출렁거렸던 팝/가요의 신경전에 대한 기대감이 정말로 져버린 이후, 또 다른 유형의 소리들이 늘상 잠재되어 있다는 걸 알리듯, 느리게 엄습해온다.

 

 


Editor / 나원영 (대중음악비평가)

lavndr [forget-me-not]

“나를 잊지 말아요”는 물망초의 꽃말이다. “8월의 크리스마스”나 “비포 선라이즈”와 같은 영화로부터 영감을 얻은 곡도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관계에서 오는 사랑의 감정을 세밀하게 담아냈다.

 


 

lavndr
forget-me-not
2022.03.02

 

싱어송라이터 라벤더(lavndr)는 우연한 계기로 알게 되었다. 사실 으네(une)의 인스타그램 계정을 통해 처음 보았다. 처음 보았던 드레이크의 “Passionfruit”를 자신만의 색으로 편곡한 그 음악이, 매력적인 음색과 표현이, 그리고 표현하고자 하는 감성을 가득 담은 영상이 모두 인상적이었다. 그를 먼저 알아봤다고 자랑하는 것 맞다. 그만큼 좋은 음악가이고, 언제든 어디서든 자신 있게 추천하고 소개해왔다. 이후 그는 때로는 자신의 오리지널 곡으로, 때로는 생각지도 못한 편곡과 표현으로 꾸준히 음악을 선보여 왔다. 그 사이에 바이너리 넘버라는 밴드에 합류하여 자신의 음악과는 또 다른 영역을 선보였다. 먼저 두 차례 싱글을 발매한 뒤 지난 해 12월 3일에 먼저 “summer”라는 곡을 공개했고, 이번에 [forget-me-not]이라는 앨범을 발표했다. 그의 인스타그램 계정이나 유튜브 계정에 가면 그가 어떤 느낌을 선보여 왔는지 바로 알 수 있다.

 

 

학교 동기인 프로듀서 noso와 함께 만든 이번 앨범은 그래서인지 라벤더가 혼자서 구현해 온 것과는 묘하게 같은 결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그 표현이 조금씩 다르다. 훨씬 섬세하고 차분해진 전개와 미니멀하면서도 악기의 성격이 잘 드러나는 프로덕션은 앞서 이야기한 그의 음색과 표현에 더없이 잘 어울리고, 세련된 동시에 알앤비라는 장르의 문법을 짙게 가져가며 앨범의 색을 더욱 짙게 구축한다. 2000년대 알앤비 음악을 연상케 하면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코러스를 쌓은 “you mean so much to me”를 지나 “nobody like you”를 들으면 그가 가사로 사용하는 언어가 한글이든 영어든 그 감성을 전달하는 데에는 전혀 차이가 없음을 느낄 수 있다. 꽉 차 있지 않으면서도 적절한 타이밍에 등장하는 변주는 앨범을 처음부터 끝까지 집중하게 듣게 만드는, 한 순간도 놓치기 싫게 만드는 포인트다. 재즈부터 힙합까지 고루 영향을 받은 듯한 음악은 네오소울을 연상케 하면서도 팝의 색채까지 담았다. 고전적인 곡 구성부터 여러 이펙트를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얼터너티브 알앤비 느낌의 곡까지, 얼핏 멀리서 보면 라벤더라는 음악가의 캐릭터가 뚜렷하게 드러나는 곡 같지만 조금만 가까이서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정말 다양한 변화와 색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나를 잊지 말아요”는 물망초의 꽃말이다. “8월의 크리스마스”나 “비포 선라이즈”와 같은 영화로부터 영감을 얻은 곡도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관계에서 오는 사랑의 감정을 세밀하게 담아냈다. 구체적인 상황을 설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감정만 앞세운 것도 아니기에 오히려 듣는 사람이 더 공감하고 몰입하기 쉽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좋은 작품을 텀블벅을 통해 CD로 소장할 수 있고 또 작업기, 제작 비하인드가 있는 가사집도 만날 수 있다고 하니 며칠 안 남은 펀딩에 함께 동참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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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 / 블럭

시와 [잠 못 이루는 당신에게]

 

그러므로 시와라는 이름에 접속조사 “와”가 이미 품어진 것은, 그 뒤로 오는 무엇이든 그 이상으로 이어낼 수 있단 뜻이기도 할 것이다. 시와 소리, 시와와 정현서, 그리고 시와와의 또 다른 우연한 만남으로.

 


 

시와
잠 못 이루는 당신에게
2022.02.06

 

시와의 새 EP에 작년 트랙들뿐만 아니라, ‘리메이크’된 과거의 트랙들에 오랜 협연자였던 베이시스트 정현서의 이름이 나란히 붙여져 실린 모습은 어째 세 장의 정규 음반을 비롯해 ‘시와 무지개’의 두 음반 등으로 쉼 없이 이어졌던 2010년대 상반기의 시와부터 떠올리게 한다. 이는 당대의 가장 훌륭한 포크와 인디 팝에 덧대진 “전형적인 여성 싱어송라이터” 같은 정형화된 비평적 어구에 ([逍遙]의 프로듀서였던 오지은과 함께) 조용히 반문하는 작업이기도 했다. 이를테면, ‘길상사에서’에서 천천히 끌어올려진 “바람에…”의 선율이 서서히 솟아오른 신스음과 조응해 자그마한 풍경소리로 수렴될 때, 그런 신스음과 목소리가 함께 두런거리면서 시작된 ‘Dream’이 전기기타 솔로가 돋보이는 밴드 연주로 차차 나아갈 때처럼 말이다. 공기의 불안한 떨림이 들어갈 여지없이 견실하게 ‘대지에 내려와 있는’ 낮은 목소리와, 나일론 기타와 피아노 건반이 만들어내는 느린 정취 사이에 생겨나는 빈 공간, 그 틈에 채워 넣어진 RAINBOW99의 지글거리는 전기기타부터 정현서의 묵직하고 든든한 프렛리스 베이스, 아니면 이규호(Kyo)의 작곡을 박용준이 실내악으로 편성한 관현악기들에, 목소리와 맞물리는 서늘함을 머금고 심어진 전자음까지. 분명한 무게감을 지닌 재료들을 저마다의 자리에 서두르지도 머뭇거리지도 않고 차분히 정돈하면서, 시와는 포크와 팝에 걸친 “평범함”의 유별난 구석에 내재된 균형점들을 정갈히 이끌어내 이 시공들을 관제해왔다.

 

 

청소년기의 청취 경험이었던 80년대 후반의 가요 테이프들을 떠올리며 “내 음악의 기원은 발라드였어! (“[아니 어떻게 이렇게 9-1] 시와 편 / 발라드야 나?”)”라고 외쳤던 모습이 멜로디와 화성의 진행이나 이를 뒷받침해주는 풍성한 편성으로까지 비춰져 [머무름 없이 이어지다]와 [다녀왔습니다]의 시간적 간격을 이어줬다면, [잠 못 이루는 당신에게]는 최소적인 구성 속에서 소리들 간의 배치와 왈츠 박자의 활용으로, 일찌감치 정립됐던 시와의 형상을 갈무리해온다. 21년도에 발표된 세 트랙은, 목소리가 나타나는 시간과 나타나지 않는 시간을 건반으로 연결 지어 동등하게 배치하고(‘곁에 있어도 될까’), 세 박자 속에 “하나 둘 셋 넷”을 슬며시 끼워 넣으며(‘waltz at night’), 건반과 목소리 사이 또 홀수박의 강약에 주어진 거리를 좁히고 넓히며(‘숨’) 어떻게 소리들이 안정적인 세모꼴로 지어질 수 있는지를 들려준다. 이는 물론, 시간이 그리 배치된 소리들 사이로 “서서히 스밀 수 있”고, 제 자신의 속도로 “천천히 흐를 수 있게” 하는 일이기도 하다. ‘곁에 있어도 될까’가 후렴구 없이 한 단위의 (혹은 반쪽짜리처럼 느껴질 수 있을) 절로 마무리되어도 사뭇 불완전하거나 미완성된 느낌이 들지 않는 것도, ‘숨’과 ‘waltz at night’가 트랙 안에서 속도를 슬쩍 조절해도 느린 산책 같은 걸음이 비틀거리지 않는 것도 그 덕일 테다.

 

 

정현서와 함께 한 두 개의 트랙은 낮은 소리의 존재감을 활용해, 적은 수의 부품들만으로도 성긴 틈새 없이 소리의 아귀를 맞물려놓는 시와의 트랙들에 무게감 있는 말동무를 달아놓는다. 이전에 발표한 트랙들에 대한 “일종의 정본(正本) 작업 (김병우, [음악취향 Y])”으로서 스튜디오 작업으로 리메이크된 ‘잠 못 이루는 당신에게’는, 라이브 버전과 달리 오로지 시와의 목소리로만 시작된다. 분명한 질감의 목소리 저변에서 베이스음이 현현하듯 시공을 채워 넣는 모습은 순식간에 곡의 “채도를 높이고 명확히 선을 그리 (김병우)”면서 형상을 부여한다. 박자에 대한 그 어떤 표지 없이 시작된 트랙이 세 개의 소리들을 차곡차곡 엮어가며 이전 곡들과 같은 세 박자의 뼈대를 서서히 드러내고, 어느덧 세 개의 확연한 선분들이 서로와 나란히 교차된 무늬를 만들며, 그 마무리가 완성된다. [다녀왔습니다]의 예고로 발매되었으나, 마찬가지로 이번 EP에 다시 녹음되어 실린 ‘완벽한 사랑’에서 또한, 정현서의 베이스음을 들이며 그 “명확한 채도”가 올라간다. ‘잠 못 이루는 당신에게’의 도입부와 조금은 반대되듯, 이번에는 시와의 목소리 없이 두 대의 악기로만 트랙이 시작된다. 여기서도 베이스음는 원테이크라는 환경에 담겼던 2017년 판 ‘완벽한 사랑’의 단출함에 두터운 겹을 하나 깔아놓는다. 두 소리 사이에서 나타난 하나의 관계에 또 다른 소리 하나가 더해진 것만으로도, 두 관계들이 새로이 나타난다. 둘에서 셋으로, 또 하나에서 셋으로, 그렇게 셋에서 여섯으로. 그 중앙이자 밑바닥에서 미끄러지는 베이스음은 나머지 소리들과 멜로디를 주고받듯 오르내리며, 더욱 많은 이야기를 트랙에 더해놓는다.

 

 

3이라는 숫자가 안정성을 상징한다면, 이는 시와와 [잠 못 이루는 당신에게]에 더할 나위 없이 어울려 보인다. 21년도의 두 곡이 삼박자를 따르는 세 개의 소리들을 세 방향으로 교차해 그 구심점 주위를 돌고 돈다면, 뒤쪽의 두 곡은 두꺼운 소리를 부드럽게 추가한 삼각형의 소리 꼴에서 달라진 무게중심을 차근차근 찾아 나선다. “숨소리를 내어보면 사이가 생각나”는 것처럼, 시와의 셋은 무언가와 다른 무언가, 이 둘만큼의 값을 띄고 나타난 그 사이와 함께 한다. 양쪽 소리 간의 거리를 유유히 소요하는 정적이거나, 두 소리가 원래 놓인 땅에 내려앉은 저음이라거나, 너와 나를 머무름 없이 잇는 관계쌍이거나. 그러므로 시와라는 이름에 접속조사 “와”가 이미 품어진 것은, 그 뒤로 오는 무엇이든 그 이상으로 이어낼 수 있단 뜻이기도 할 것이다. 시와 소리, 시와와 정현서, 그리고 시와와의 또 다른 우연한 만남으로.

 

 


Editor / 나원영 (대중음악비평가)

BLUE ROOM [badbutgood]


마치 비빔밥의 모든 재료가 각각의 맛과 식감을 잃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맛의 조화를 이루듯 모든 요소가 한 곡 안에서 치열하게 부딪히며 영감의 스파크를 만들어내는 모습은 마디 단위로 청자의 귀를 자극하며 재미난 음악 한 그릇을 선사한다.

 


 

BLUE ROOM
badbutgood
2022.02.14

 

마치 비빔밥과 같은 음악이다. 물론, 마침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 저녁 메뉴가 비빔밥이었기 때문에 이런 생각을 하게 된 탓도 조금은 있지만, BLUE ROOM (이하 ‘블루룸’)의 이번 신곡은 오늘 저녁 메뉴를 제쳐두고서라도 다양한 요소의 버무려진 폼이 가히 일품 비빔밥에 버금간다 할 수 있을 만큼 갖가지 흥미로운 요소를 가득 품고 있다.

 

 

따뜻한 연주와 담백한 보컬의 조화가 기분 좋은 시너지를 불러일으켰던 지난 12월의 데뷔 싱글 [Not So Far]을 거쳐 더욱더 촘촘한 음악성으로 돌아온 블루룸은 총 7명의 멤버로 구성되어 있다. 밴드 리더이자 기획자이며 트럼페터이자 싱어송라이터이기도 한 bluebird, 그와 함께 밴드의 시작을 함께 한 재즈 기반의 비트메이커 hueil, DJ겸 프로듀서이자 그룹 ‘CHANNEL 201’의 멤버이기도 한 DAUL과 회사원 출신이라는 특이한(?) 이력의 싱어송라이터이자 팀 내 보컬을 담당하고 있는 dvckii, 더불어 bluebird의 학교 동료인 흑인 음악 기반의 베이시스트 hoyoung, 재즈 기타리스트 SiHov,드러머이자 비트메이커인 feel9ood까지. 이렇듯 블루룸 멤버들은 총 7명의 간단한 팀원 소개만으로도 문단 하나를 꽉 채울 만큼 무척이나 다양한 이력과 전문 분야를 자랑한다.

 

이렇게 결코 평범하지 않은 7명의 인원이 한 팀 아래 모였다는 사실 자체도 대단하지만, 누구 하나 묻히는 사람 없이 전부 자기 색깔을 뚜렷하게 내세우면서도 어수선하지 않은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는 점은 놀라울 정도다. 먼저, 재즈 및 흑인 음악을 기반으로 활동하던 멤버들이 만들어내는 능청스러운 그루브는 타이틀곡 ‘badbutgood’과 수록곡 ‘flatline’ 모두에 걸쳐 블루룸의 음악적 무드를 잡아준다. 그 밑단에서 묵직하게 리듬을 이끌어가는 드럼 비트는 은근한 힙합의 향기를 풍기는데, 이러한 느낌을 더욱 짙게 만드는 보컬 dvckii의 작사법과 개성 있는 창법은 랩과 가창의 경계를 미묘하게 넘나들며 자칫 익숙할 수 있는 사운드에 신선함을 더한다. 더불어, 이 모든 것을 하나로 아우르는 프로듀싱의 노련함 또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마치 비빔밥의 모든 재료가 각각의 맛과 식감을 잃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맛의 조화를 이루듯 모든 요소가 한 곡 안에서 치열하게 부딪히며 영감의 스파크를 만들어내는 모습은 마디 단위로 청자의 귀를 자극하며 재미난 음악 한 그릇을 선사한다.

 

 

참고로 팀명 ‘BLUE ROOM’은 리더인 bluebird의 이름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가까이에 있는 행복을 상징하는 파랑새가 머무는 방’이라는 뜻으로, 단어 그대로의 뜻과 다르게 행복한 방을 의미하는 이들의 음악은 그 이름처럼 생동감 넘치는 에너지로 듣는 사람의 기분을 기분 좋게 끌어올리는 힘을 가지고 있다. 여담이지만, 밴드의 시작을 함께한 hueil과 bluebird가 좋아하는 아티스트라 전해온 쳇 베이커의 곡 중에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행복하고 이상적인 공간에 대해 노래하는 ‘blue room’이라는 곡이 있다. 물론 미리 짜기라도 한듯 이어지는 이 흐름이 우연의 일치인지는 직접 이야기를 들어봐야 하겠지만, 적어도 음악을 통해 묻어나오는 희망과 행복에 관한 블루룸의 메시지가 진정성 가득한 설득력을 가지는 이유는 이들이 음악을 대하는 태도에서부터 자연스럽게 스며 나오는 맥락의 일환이리라.

 

단순히 듣기 좋은 음악이기만 했다면 블루룸의 음악을 ‘모든 재료를 한 데 모아 푹 끓인’ 스튜에 빗대어 글을 이어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멤버 모두의 소리가 존중 받으며 이루어내는 살아 숨쉬는 조화는 그저 ‘듣기 좋다’라는 수식 만으로는 부족했을 것이 틀림없다. 마지막으로, 이들의 음악을 조금 더 확실히 만끽하고 싶다면 유튜브를 통해 공개된 두 편의 라이브 비디오를 추천한다. 괜시리 웃음이 지어지는 멤버들 간의 편안한 분위기와 중반부터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의 맛깔스러운 조합에 자연스레 이들의 다음 스탭을 기대하게 될 것이다.

 


Editor / 월로비

조제 [post post post!]

물론 그의 음악을 들어온 사람들은 그의 음악이 상대적으로 알앤비에 가깝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지만, 그는 이번 앨범에서 훨씬 많은 장르적 표현을 때로는 곡의 요소로, 때로는 곡 하나의 방향으로 가져간다.

 


 

조제(Josee)
post post post!
2022.02.05

 

음악가가 한 가지 장르를 택하지 않는 것은 약이자 독이다. 그만큼 음악가가 표현하고 싶은 폭도, 욕심도 많다는 것이고 그것이 구현된다면 더없이 훌륭한 역량을 입증하는 것이지만, 반대로 자신이 어필할 수 있는 영역이나 시장이 불투명해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작품은 어떻게든 알려지기 마련이고, 또 알려져야 한다. 긴 공백을 지닌 후 돌아온 조제(Josee)를 이야기하고자 몇 이야기를 펼쳤는데, 싱어송라이터 조제가 1년이 넘는 공백을 넘어 자신의 첫 정규 앨범을 발표했다. 물론 그의 음악을 들어온 사람들은 그의 음악이 상대적으로 알앤비에 가깝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지만, 그는 이번 앨범에서 훨씬 많은 장르적 표현을 때로는 곡의 요소로, 때로는 곡 하나의 방향으로 가져간다. 그래서 그의 음악은 결국 ‘팝’ 정도로 묶을 수 있지만, 더 자세하게 보면 알앤비를 기반으로 인디 록, 인디 팝과 재즈 등을 결합한 얼터너티브 알앤비라는 점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첫 정규 앨범은 지금까지 그가 선보여 온 감성을 잘 유지하고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다고 해서 그가 전혀 다른, 낯선 것을 가져온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밴드 셋을 기반으로 한 앨범 전반에는 정규 단위의 앨범을 끌고 가는 음악적 역량과 다양한 표현 방식은 물론, 보컬로서의 조제가 지니고 있는 부드러움을 통해 여러 결을 지닌 곡이 한데 묶이며 차분하게 정리되었다. 보컬이 시종일관 같은 것도 아니다. 때로는 차분하게 힘을 빼고 가다가도 좀 더 단단한 퍼포먼스를 선보이기도 하며, 시티팝 느낌부터 록에 가까운 곡까지 다양한 형태를 오가는 동안 그 어떤 이질감 없이 풀어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조제라는 음악가의 아이덴티티를 단단하게 구축한다. 아마 들으면 들을수록 각 곡이 지닌 뉘앙스가 크게 다르다는 것을, 그리고 그 뉘앙스를 만드는 수많은 디테일과 구조의 변화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장항준 감독이 한 이야기 중에 그런 이야기가 있다. “블록버스터 영화는 오히려 거대한 것이 왔다갔다 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작은 형태의 스크린으로 봐도 나쁘지 않을 때가 있지만, 작은 영화야말로 섬세한 연출과 변화를 느끼기 위해 큰 스크린에서 봐야 한다”. 물론 영화와 음악이 같지도 않고, 이 앨범의 규모가 결코 작다고 할 수는 없다. 베이스에 누기를 비롯해 피아노, 기타, 드럼, 코러스 등 여러 연주자가 함께 만들었고 정규 단위의 작품이라는 것 자체가 결코 작지 않다. 하지만 정규 앨범도 하나의 온전한 작품이고, 인디펜던트로 선보이는 앨범은 아무래도 대형 레이블에서 나오는 앨범보다는 좀 더 작다고 볼 수 있다. 조제의 [post post post!]는 그만큼 크게, 집중해서 감상했으면 한다. 중의적인 가사와 높은 밀도의 프로덕션은 그렇게 감상했을 때 더욱 가치가 드러날 것 같아서다.

 


Editor / 블럭

겸(GY0EM) [우리가 맞이한 사랑의 겨울]

 

어차피 상대방은 이해 못할 것이니 자신의 생각을 들려주지 않겠다고 말하는 두 개의 목소리는 그러한 두 개의 악기 소리처럼 따로 떨어지지 않은 채, 하나의 트랙에서 함께 외로이 합쳐진다.

 


 

겸(GY0EM)
우리가 맞이한 사랑의 겨울
2022.02.04

 

어느덧 리버브는 전기기타를 주되게 사용하는 인디 팝의 필수재가 된 것만 같다. 이 이펙트는 사운드가 나타나는 공간상에서 울려 퍼지는 성질을 더 키우지만, 현실에서의 소리가 그러는 것보다 잔향이 훨씬 길게 남아있도록 조절하는 점에 있어 일시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소리의 성질을 연장하고, 그 시간이 조금이라도 영속하듯 느껴지는 효과를 내기도 한다. 조금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주어진 시공에서 자그맣고 짧게 발생하는 소리의 존재 규모를 기계적으로 키우기에, 리버브는 주어진 소리가 훨씬 더 쓸쓸하게 들릴 여지를 넓게 열어주기도 한다. 여러모로, 이 효과는 단 하나의 소리에 작용될 때, 그 울림이 더 크다.

 

 

겸의 [우리가 맞이한 사랑의 겨울]은 외로운 겨울의 감각을 조성하기 위해 그러한 리버브를 사용한다. 이때의 외로움은 대부분의 외롭다는 정서가 그렇다 하듯 타인의 부재를 상정하면서 발생한다. 이에 따라 EP의 세 트랙들은 첫 마디부터 ‘너’를 호명하며, ‘너’가 없는 고독감을 강조하기 위한 리버브 이펙트로 느린 여운을 준다. 그에 비해 ‘내 생각을 들려주지 않을 거예요’는 조금은 특별한 위치에 있다. 곡명이 제시하듯 필연적인 이해 불가능함에 따른 거부적인 태도의 노랫말이 나오면서도, 트랙에서는 구분되는 두 개의 목소리가 듀엣의 형태를 빌어 동일한 멜로디에 함께 겹쳐지므로. 이때 리버브 걸린 전기기타 소리는 상대적으로 조용한 건반 소리와 대치되며, 발라드적인 정취의 쓸쓸함을 키우기보다도 해당 이펙트가 인디 록에서 종종 사용될 때처럼 은은하게 고조되는 절정부에서 좀 더 꽉 찬 공간감을 조성한다. ‘겨울 끝의 밤’이나 ‘네가 건네던’에서 클래식 기타와 전기기타가 오롯이 동일한 역할로 사용되는 것과 달리, ‘내 생각을 들려주지 않을 거예요’는 전기기타와 함께 시작된 트랙을 자연스레 건반 소리로 전환시켜서 마무리한다. 어차피 상대방은 이해 못할 것이니 자신의 생각을 들려주지 않겠다고 말하는 두 개의 목소리는 그러한 두 개의 악기 소리처럼 따로 떨어지지 않은 채, 하나의 트랙에서 함께 외로이 합쳐진다.

 

 

겸의 데뷔 싱글이기도 했던 ‘잔상화’의 경우에 일은 조금 더 독특해진다. ‘잔상(殘像)’이라는 단어에 ‘지워지지 아니하는 지난날의 모습’이라는 사전적인 뜻 이외에도, 한자를 그대로 풀어 ‘잔인하게 상처를 입히는 일, 또는 그 상처’라는 의미가 덧붙여진 것이 트랙에서도 반영되기 때문이다. 중간의 내용물만 놓고 보면, 이 트랙은 EP의 다른 트랙들처럼 리버브가 걸려 천천히 반복되는 한 마디의 리프를 토대로 진행된다. 시간의 진행에 따라 특별할 것 없이 조금씩 달라지는 톤과, 중반에 나오는 솔로 구간까지 거치며 전개되는 이 리프는 다만 시작과 끝에서 사뭇 다른 소리의 안쪽에서 제시된다. 나름의 온기를 안은 이 전기기타 소리가 등장하기까지 전까지의 십몇 초 동안, ‘잔상화’에서 처음으로 마주하게 되는 소리는 추위에 떨 듯 파르르 진동하는 전자음이다. 마치 기계적인 효과를 사용해 주욱 늘인 소리의 끄트머리만을 따로 떼어온 듯한 이 소리는, 원래 어디에 붙어있었는지 혹은 애초에 붙어있기라도 했는지 알 수 없는 상태로 외마디 공명하면서 나타나, ‘잔상화’를 이끄는 전기기타 소리가 등장한 후로도 두 어 마디 동안 밑바닥에 찰싹 붙어있다. 마지막의 몇 초 동안에도 다시 유사하게 나타나는 이 소리는, 마치 안쪽의 이야기 전체가 “외부 자극이 사라진 뒤에도 감각 경험이 지속되어 나타나는 상”이라는 듯, 서늘한 울림으로 트랙 전체를 감싼다.

 

 

그것은 어쩌면 많은 소리들을 고독하게 만드는 리버브의 잔상일지도 모르겠다. ‘잔상화’는 잔상의 잔향의 잔영으로 영락해버려 지글거리는 주파수 한 줄밖에 남지 않은 소리의 사이 공간에 음악을 두어, 잔혹하게 입혀진 지난 상흔이 지워지지 않고 남아 화하는 장면을 그린다. “우리가 맞이한 사랑의 겨울”이 여전히 남겨둔 울림이 금세 사라지지 않도록 리버브라는 도구를 사용해 연장하려는 시도는, 도리어 지난날의 바랐던 모습들이 사운드에 영원히 새겨진 흉터의 꼴로 찾아오게 해버린다. 출입구를 선뜻 내주지 않는 유령 같은 소리를 지나쳐 ‘잔상화’의 안쪽 내용물을 즐긴다고 하더라도, 트랙의 시작과 끝에는 왜인지 모르게 불안하게 들끓고 있는 진동음이 분명하게 거기에 존재하고 있으며, 처음 들을 때에는 문득 이상하게 느껴졌던 이 구간은 트랙을 다시 들을 때마다 똑같이 남아있는 상처의 모습으로 화자와 찾아온다. 그렇게 오직 기계적인 변형 속에서 외로이 남아 청자에게 슬며시 섬찟함을 안기는 잔음의 잔재는, 홀로 맞이한 잔상의 겨울을 겪고 있는 ‘잔상화’의 화자와 트랙 안에서 언제까지나 함께한다.

 


Editor / 나원영 (대중음악비평가)

Kenichiro Nishihara [empath]

아시아 투어 등을 통해 한국에도 찾아온 바 있는 그가 이번에 2년이라는 시간이 걸려 정규 앨범을 발매했다. 여전히 현역 디제이로, 그리고 음악을 만드는 사람으로 활동 중인 그의 음악은 여전하지만 또 약간의 변화가 있다.

 


 

Kenichiro Nishihara
empath
2022.01.26

 

아마 한국에서 힙합 음악, 특히 일본 힙합에 관심 있는 이들이라면 켄이치로 니시하라의 이름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그만큼 그는 일본 내에서도, 밖에서도 입지전적의 인물로 통한다. 누자베스(Nujabes)로 대표되었던 재즈와 힙합의 조합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으며, 긴 시간 음악을 해오면서 에스노(ESNO)라는 또 다른 이름을 쓰며 자신의 이름으로 냈던 것과 조금은 다른 결도 선보였다. 아시아 투어 등을 통해 한국에도 찾아온 바 있는 그가 이번에 2년이라는 시간이 걸려 정규 앨범을 발매했다. 여전히 현역 디제이로, 그리고 음악을 만드는 사람으로 활동 중인 그의 음악은 여전하지만 또 약간의 변화가 있다.

 

 

우선 자신이 가장 아껴온 재즈라는 장르에 있어 그 표현을 더욱 강화했다. 헬싱키의 재즈 퀸텟인 파이브 코너스 퀸텟(The Five Corners Quintet)의 역할이 컸다. 확실하게 재즈를 담아내기 위해 그는 자신의 프로덕션에 연주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였고, 그 결과 그루브 강한 재즈 곡이 탄생할 수 있었다. 물론 여전한 부분도 있다. 서브스텐셜(Substantial)이나 팻 존(Fat Jon), 제이라이브(J-Live)와 같은 래퍼의 이름은 오랜 시간 힙합 음악을 즐겼던 이들이라면 반가울 수밖에 없다. 누군가에게는 과거의 스타일로 들릴 수도 있지만, 재즈 힙합이라 불리는 랩 음악이 지니고 있던 미덕을 그대로 간직하고 새롭게 만들어내는 것도 분명한 매력이다. 여기에 훨씬 더 입체적으로 만들어진 프로덕션, 좀 더 다양해진 BPM은 일본의 재즈 힙합은 천편일률적이라는 과거의 인식을 바꾸기에 어느 정도 효과가 있지 않을까 싶다. 실제로 그는 정규 앨범에는 없지만 시럽(SIRUP)부터 다오코(daoko)까지 일본에서 핫한 이들과 꾸준히 작업하고 있고, 옛사람이라는 이미지보다는 꾸준히,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걷는 그런 느낌이 더욱 가깝지 않나 싶다.

 

편안하게 감상해 보자는 접근해도 좋지만, 의외로 듣다 보면 배신감을 느낄 때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느낌이 나쁘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음악을 찾는 이들이 기대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기에 입체적이면서도 고유의 스타일을 어느 정도 함께 묶은 이번 앨범은 그를 좋아했던 사람에게는 물론, 좋아하지 않았던 사람에게도 과감하게 권해본다. 그만큼 들인 공이 드러나는 작품이다.

 


Editor / 블럭

이설아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살아요]

 

어쩌면,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살아요’의 바다는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바라다보는 바다이기에, 정지되어있는 것 마냥 느린 속도감을 띠고 나타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노랫말에서 ‘상상은 우리가 더 많이 믿는 것’이라고 하듯이 말이다. 이렇게 트랙은 ‘겁낼 것이’ 또 ‘급할 것이’ 전혀 없는 바다를 그러하게 믿어보며, 그렇게 나타난 상상을 이러하게 풀어낸다.

 


 

이설아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살아요
2022.01.08

 

1991년에 최초로 발견되어 호주의 대보초 해역에서 드물게 모습을 드러내는 “미갈루”는 현 시점까지 세계에서 유일무이하게 알려진 백색증 혹등고래다. 검푸른 바다빛깔의 해류를 타고 유유히 헤엄치는 거대한 흰 몸뚱이의 그 모습을 상상해보면, 그것은 이설아의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살아요’가 그리는 소리들과도 무척 닮아있기도 하다. 반대로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살아요’의 이야기에 잠시 등장하는 미갈루가 그 소리들과 닮았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물이라도 먹인 것처럼 느린 속도를 따라 둔중하게 울려 퍼지듯 조절된 베이스음이 트랙 전체에 짙게 깔려있는 형상은, 깊숙한 수심의 흐름과 닮아있다. 먼발치에서 머나먼 바다를 내다볼 때에, 바다가 거의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안쪽에서부터 천천히 흐르듯,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살아요’의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소리 또한 상대적으로 느린 제 속도를 따라 울려 퍼져나간다. 이런 베이스처럼 리버브 효과로 처리된 전기기타 소리가 느린 물살을 함께 거들어주며, 트랙의 느낌은 깊은 바다의 그것, 혹은 깊은 바다에서 유영하고 있는 그것, 어쩌면 깊은 바다에서 유영하고 있는 무언가를 바라보고 있는 그것과 자연스럽게 맞아떨어진다. 울림소리의 큰 잔향에 의해 전체적인 사운드에 대체로 무게감이 걸려있게 된다. 그렇다 해서 그 음색은 거대한 수압에 짓눌리듯 둔탁해지기보다는, 매질을 타고 느리게 전파되는 고래의 울음소리처럼 부드럽게 조절되어, 거대한 부피의 물이 부유하는 느낌을 충분히 이끌어낸다. 때문에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살아요’에서의 이 바다는, 심한 풍랑이나 높은 파고가 그렇게 자주 일지 않는, 거대하고 잔잔하며 느릿느릿한 곳이다.

 

하지만 이 트랙은 미갈루와 바다의 이야기가 아니라, 미갈루가 어디선가 천천히 잠영하고 있을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그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이야기다. 이설아의 목소리가 베이스와 전기기타의 바다 같은 효과음에 동일하게 덮이지 않고, 그보다는 상대적인 고음역대에서 조금 분리된 채 좀 더 분명히 나타나는 것이 그 때문 아닐까. 대신에 이 목소리에는 멀리 보이는 바다에 대해 대화를 나누듯, 코러스들이 쌓아올려지며 그만의 깊이감을 더한다. 모든 게 그 자신의 속도로 찬찬히 흘러가는 여기선 급할 것이 없기에, 이 목소리들 또한 바다 같은 낮은 소리들이 흘러가는 것에 발을 맞추며 그를 바라본다.

 

어쩌면,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살아요’의 바다는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바라다보는 바다이기에, 정지되어있는 것 마냥 느린 속도감을 띠고 나타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노랫말에서 ‘상상은 우리가 더 많이 믿는 것’이라고 하듯이 말이다. 이렇게 트랙은 ‘겁낼 것이’ 또 ‘급할 것이’ 전혀 없는 바다를 그러하게 믿어보며, 그렇게 나타난 상상을 이러하게 풀어낸다.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부터 상상된 바다가 사운드를 통해 천천히 파도를 이끌며 넘나든다. 그곳은 물론 언제나 고요하고 유유히 흘러가는 곳이 절대로 아니며, 특히나 백색증이 있는 생물들은 이런 적대적인 환경 속에서는 오랜 기간 동안 생존하기가 더 힘든 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살아요”의 바다는, 바다에 대한 많은 것들을 함께 믿어보기에 나타날 수 있는 모습의 바다가 된다. 그 바다에서 백색증의 혹등고래인 미갈루는 급하지도, 겁내지도 않으며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진짜로 저 머나먼 대보초 인근의 넓고 깊은 바다에서, 미갈루가 지금 이 순간에만큼은 여전히 존재하는 채로 유영하고 있듯이 말이다.

 


Editor / 나원영 (대중음악비평가)

uju [Preview]

 

이제 음악가 우주를 이야기할 때 시티팝이나 레트로 보다는 인디펜던트 팝 아티스트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싶다. 많은 이들이 우주만의 음악을 기다렸을 것이고 또 반가워하겠지만, 우주라는 음악가만이 선보일 수 있는 독특한 분위기는 역시 협업에서 보다는 자신의 것일 때 더욱 잘 드러나는 듯하다.

 


 

uju
Preview
2021.12.21

 

우주(uju)에 관해서는 과거 짧게 몇 차례 글을 쓴 적이 있다. 당시에는 레트로 팝이라는 키워드가 전면에 있었고, 그것이 음악 시장 내에서 하나의 흐름이었으며 우주는 그 안에서도 자신만의 톤을 구축하는 듯했다. 그 안에는 우주만의 표현과 정서도 분명하게 있었다. 이후 시간이 지났고, 우주는 부지런하게 작품을 발표했던 시기에 비해 잠시 휴식기 아닌 휴식기를 가졌다. 그러다 지난 해에 최첨단맨과의 싱글, 펑크 르블랑(Funk LeBlanc)과의 싱글을 발표하며 기지개를 켜는 듯했고, 오랜만에 EP [Preview]를 선보였다.

 

 

여전히 그의 음악은 레트로 팝의 범주에 속해 있지만, 이제는 레트로라는 단어를 떼어도 좋을 것 같다. 선공개한 ‘Mindset’에서는 익숙한 곡을 연상시키는 재치 있는 도입부 뒤로 매력적인 전개를 쌓고, 편안하게 들을 수 있는 알앤비-팝 음악을 선보인다. 이어지는 ‘아가씨’ 역시 세련된 흐름을 유지하는데, ‘아가씨’에서는 오히려 레트로라는 색을 찾기 어렵다. 상대적인 것이지만 최근의 유행을 담은 리듬이 담겨 있어 더욱 그렇게 느껴진다. 하지만 이어지는 ‘내가 행복할 줄 알았나요’에서는 알앤비 색채가 강한 곡이 등장하는데, 전반적으로 여기까지는 어느 정도 여백이 있으면서도 그것을 알앤비라는 문법에 가깝게 구성하는 방식을 택했다면 후반부인 ‘상상하고 싶지 않아’는 기존의 우주가 선보였던 시티팝에 가깝고, ‘포기’는 좀 더 한국 가요로부터 영향을 받은 듯한 발라드 넘버가 등장한다. 하지만 우주가 선보여 온 음악의 결과 온전히 떨어져 있지 않으며, 차분하게 전개되는 가운데 우주 특유의 음색과 디테일은 여전하다. 곡 전반적으로 기존에 발표했던 작품보다 훨씬 더 여유나 공간이 느껴지는데, 그래서 우주의 보컬이 더욱 명확하게 전면에 등장한다.

 

이제 음악가 우주를 이야기할 때 시티팝이나 레트로 보다는 인디펜던트 팝 아티스트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 싶다. 많은 이들이 우주만의 음악을 기다렸을 것이고 또 반가워하겠지만, 우주라는 음악가만이 선보일 수 있는 독특한 분위기는 역시 협업에서 보다는 자신의 것일 때 더욱 잘 드러나는 듯하다. 특히 목소리가 지닌 힘, 두 번 세 번 읽어볼 가사를 쓰고 그것을 전달하는 힘을 선보이며 이번 작품을 통해 여전히 자신이 가치가 있음을 증명했다.

 


Editor / 블럭

사공 [Here, mr.reindeer]


“쓸쓸한 겨울 앨범”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지만, 전곡을 감상한 뒤에 느껴지는 따뜻함은 위에서 언급한 모든 내용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고유의 음악성 덕분일 것이다. 음악을 통해 이야기를 전하는 방식에서 상냥함 마저 느껴지는 사공의 사려 깊은 따뜻함은 그렇게 뜨겁지 않지만 뭉근한 울림으로 오래도록 이어진다.

 


 

사공
Here, mr.reindeer
2021.12.25

 

학창 시절 당시 인상 깊게 들었던 수업 중 동화책, 정확히는 그림 위주로 구성된 그림 동화책에 관한 수업이 있었다. 그림 동화책의 역할과 의미를 갖가지 예시 작품들과 함께 알아보는 흥미로운 강의가 한 학기 동안 이어졌는데, 그중에서도 아직까지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이 바로 ‘좋은 동화는 아이와 어른 모두의 시선으로 읽어낼 수 있는 두 가지 층위를 가지고 있다’라는 내용이었다. 아기자기한 그림 표면에서 아이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교훈적인 내용과 더불어, 그 밑 단에서 어른의 시선으로만 이해할 수 있는 진중한 주제를 읽어내는 일련의 과정은 다층적인 시선에 관한 흥미로운 경험으로 기억된다.

 

 

이번에 소개할 사공의 EP [Here, mr.reindeer]를 처음 받아 들었을 때의 인상은 그림 동화책의 그것과 굉장히 흡사하다. 2019년 데뷔 후, 계절이 바뀔 때마다 어김없이 새로운 작품을 선보이며 누구보다 꾸준히 디스코그라피를 쌓아온 사공은 이미지적이면서도 문학적인 노랫말과 함께 노스텔지어를 자극하는 풍성한 악기 연주를 통해 서사적인 분위기를 강하게 풍기는 뮤지션이다. 그중에서도 작년 겨울에 발표한 [Here, mr.reindeer]는 서사적인 동시에 ‘동화적’이라고 까지 느껴지는 독특한 뉘앙스를 풍긴다.

 

[Here, mr.reindeer]는 “떠돌이 음악가 순록 아저씨를 받아준 마을에서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써온 곡들이 사후에 마을 사람들에 의해 발견된다.”라는 가상의 이야기를 통해 음악을 향한 사공 본인의 자전적인 마음을 투영한 작품이다. 여기서 동화 같다는 느낌을 받은 것은 의인화된 동물이 주인공으로 설정된 낭만적인 배경의 역할도 물론 있었지만, 앞 단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그 배경을 중심으로 다층적인 감상을 제공하고 있는 스토리텔링의 힘이 크다.

 

여기서의 ‘다층적’이라는 표현은 물론 앞 단에서 언급한, ‘어른과 아이의 시선’이라는 단편적인 기준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음악을 업으로 삼는 것에 대한 현실적인 고민과 작품성에 대한 열망 등, 음악가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해볼 수밖에 없는 생각들에서 출발한 이번 작품은 그러한 내용을 노골적으로 표현하는 대신 순록 아저씨라는 페르소나를 통해 오랜 시간 통과해왔을 감정의 맥락만을 공유한다. 음악을 ‘음악’이라 적지 않은 사공의 음악 이야기는, 그렇게 음악이자 사랑이며 인생일 수도 있는 각자의 소중한 무언가가 되어 저마다의 서사를 완성한다.

 

 

물론 이러한 메커니즘은 예술의 형태를 띠는 모든 작품의 기본적인 구조이지만, 이것을 두고 영화 같다거나 소설 같다는 표현 대신 굳이 ‘동화 같다’라는 표현을 사용한 이유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음악을 ‘음악’이라 표현하지 않은 데에 있다. 본래의 의도를 그림 같은 이야기 뒷단에 심어놓은 덕에, 마치 순수한 시선으로 그림 동화책을 읽어내려가는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음악을 감상할 기회가 주어지는 셈이다. 거기에 더해, 앨범 소개 글과 함께 한층 더 깊어진 이해를 통해 사공의 진솔한 마음을 엿볼 수 있는 180도 다른 감상 또한 가능하다. 그리고 이러한 다층적인 분리가 전혀 작위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그 사이에서 윤활유 역할을 해주는 음악의 힘 덕분이다.

 

내용적인 부분을 떠나 형식적인 측면에서도 사공의 이번 작품은 그림 동화책의 매력을 떠올리게 만드는 요소들을 품고 있다. 연주곡으로 구성된 1, 3, 5번과 그 사이 사이에 배치된 가창 트랙이 만들어내는 흐름은 마치 글과 글 사이에 한 면 가득 펼쳐진 그림 페이지를 연상케 하며 진한 여운을 남긴다. 뿐만 아니라, 사공의 전매특허라 할 수 있는 연주 파트는 마치 우쿨렐레나 벤조 같은 이국의 악기를 떠올리게 하며 현실과 동떨어진 어딘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야기를 듣고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쓸쓸한 겨울 앨범”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지만, 전곡을 감상한 뒤에 느껴지는 따뜻함은 위에서 언급한 모든 내용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고유의 음악성 덕분일 것이다. 음악을 통해 이야기를 전하는 방식에서 상냥함 마저 느껴지는 사공의 사려 깊은 따뜻함은 그렇게 뜨겁지 않지만 뭉근한 울림으로 오래도록 이어진다. 2번 트랙 ‘겨울의 노래’ 속에서 “붉어진 볼을 두 손으로 녹여주”며 사랑의 존재를 확인시켜주는 아이들처럼, 때로는 말없이 건네는 이야기의 힘이 우렁찬 아우성보다도 강할 때가 있으니 말이다.

 


Editor / 월로비

Meejah [Queen of Spring]

 

내면의 평화부터 한의 정서까지 교차하는 듯한 이 작품은 어쩌면 한국인의 모습을 하고 덴마크에서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겪는 감정일수도 있고, 정체성에 관한 갈망과 투쟁일수도 있다.

 


 

Meejah
Queen of Spring
2022.01.13

 

2008년 신문 기사에 따르면 덴마크 내 성인이 된 한국 입양인의 수는 그 당시 대략 8700명 정도라고 나와있다. 드러나지 않은 숫자까지 합치면 만 명 가량 있다는 것인데, 다행이도 국외 입양은 08년 이후 꾸준히 감소세이기 때문에 아마 비슷한 정도의 숫자가 덴마크에 살고 있으리라 짐작된다. 그래서인지 에바 틴드(Eva Tind)부터 마야 리 랑와드(Maja Lee Langvad), 요안 랑 크리스텐슨(Joan Rang Christensen)까지 국외 입양에 관하여 비판적인 입장을 담은 문학 작품과 정체성 탐구에 나선 작품이 국내외 여러 형태로 소개되었다. 말렌 최(Malene Choi)의 다큐멘터리 [회귀]를 봐도 덴마크인 중 한국에서 온 이들이 결코 적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이제 그러한 작품의 목록에 음악 작품도 추가할 수 있게 되었다. 바로 미자(Meejah)의 [Queen of Spring]이다.

 

 

아시아계 여성 최초로 덴마크에서 권위 있는 음악 시상식인 스테프울벤(Steppeulven)에 후보로 이름을 올린 미자의 중심에는 마이 영 외블리센(Mai Young Øvlisen)이 있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나서며 한국의 전통적인 음악과 문화를 연구했고, 거기에 한국의 철학은 물론 도가 사상에도 깊이 있게 빠져들었다고 한다. 그 결과 나온 것이 바로 팔괘를 전면에 드러낸 이 작품이다. 앨범에는 명성황후부터 도교의 관음신앙까지 다양하게 담겨 있으면서 샤머니즘, 판소리, 시조 낭송은 물론 힙합, 메탈, 포스트록까지 북유럽 특유의 어둡고 음울한 감성이 절묘하게 섞여 있다. 그 결과 어둡고 짙은 앨범이 탄생하게 되었다. 도가 사상이라고 하여 평온할 것이라 예상하면 오산이다. 이 작품은 정체성을 표출하고자 하는 욕구에서 탄생되었다고 하는 만큼 다채롭다. 첫 번째 곡 “Youth (Heaven)”에서 흔히들 이야기하는 동양의 아름다움이 간접적으로 전달된다면, 바로 이어지는 곡 “Jing (Thunder)”에서는 다양한 소리 구성으로 동양의 분위기를 내지만 랩과 함께 강렬한 느낌을 준다. 그래서 이 흐름을 쉽게 예측하기 어렵지만, 그래서 더 흥미롭다. 내면의 평화부터 한의 정서까지 교차하는 듯한 이 작품은 어쩌면 한국인의 모습을 하고 덴마크에서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겪는 감정일수도 있고, 정체성에 관한 갈망과 투쟁일수도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당사자의 정체성을 만든 것은 한국이라는 국가의 시스템이었지만, 문화적 뿌리와 정체성에 관한 탐구의 결과 또한 결국은 한국이다. 그 안에 담긴 정서와 이야기는 결코 일차원적이지 않다. 그래서 이 앨범을 들을 때 많은 것을 미리 생각하며 감상하면 더욱 좋다. 그 안에 담긴 음악적 갈래와 표현적 갈래, 정서적 맥락 모두 복잡하게 교차하여 있지만 결국은 그 자체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니다. 작품 자체로도 이 앨범은 좀 더 주목받을 가치가 있다.

 


Editor / 블럭

혼닙(honnip), 곽 [Dogs]

 

개들이 서로를 물어대는 모습을 어쩔 도리 없다는 듯 지켜보는 이야기를 광폭하거나 혼란스럽게 담기보다 “차분하게 내려보 (‘이유’)”는 시선으로 담담하게 다룰 때, 이 기이한 경관이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 걸지도 모른다.

 


 

혼닙(honnip), 곽
Dogs
2021.12.29

 

‘Dogs’의 첫머리에서 소리의 조각과 불순물은 장식품이 된다. 우울 한날(Oowl Hannal)에서의 작업까지를 포함하더라도 길지 않은 시간동안 적은 수의 트랙을 발매했지만, 혼닙의 음풍경이 유사한 음색과 양식의 포크 음악들보다 두드러졌던 건 그 때문이다. 곽이 말문을 열기 전까지 50초, 아니면 트랙 전체의 골격이 되어줄 베이스가 들어오기 전까지 30초 동안, 코와 입에서 나오는 미약한 숨소리와 기타 현이 만들어내는 경미한 잡음이 소리의 둘레에 자그마하게 뿌려진다. 중앙에는 나중에 목소리가 들어올 자리가 빈 채, 전자음 박동과 다르지 않는 어쿠스틱 기타 소리가 서서히 채워진다. 미묘하게 컨트리풍인 기타 피킹을 짧고 차분하게 반복해 속도감을 형성하는 이러한 방식은 [이유]에 수록됐던 ‘PAPEPATI’나 ‘조’, 아니면 ‘취’와 같은 트랙에서도 충분히 들을 수 있었다. 이는 혼닙의 트랙에서 기타 소리가 리듬과 선율에서 등장하는 두 개의 주된 방식이기도 하다. 다만 ‘Dogs’에서는 어쿠스틱 기타 연주가 감초처럼 등장할 뿐이고, 베이스음이 대신 주요 자리를 차지한다.

 

 

‘Dogs’는 음량 간의 큰 차이를 두지 않고 뒤섞여있던 소리들의 위계가 서서히 분류되면서 시작된다. 그나마 중심축에 위치하는 것은 다만 반복에 따라 심어지는 베이스음과 어쿠스틱 기타, 그리고 곽의 보컬이다. 베이스만큼의 저음부를 차지하지 못하여 퍼커션처럼 툭툭 들어오는 드럼과 가물거리는 전기 기타음이 새 장식음이 된다. 재미있게도, ‘Dogs’에서는 이렇게 하나의 길고 연속적인 호흡을 가진 구간들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주요 뼈대는 반복으로 이뤄졌고, 스쳐지나가는 작은 소리들이 빈 공간들을 드문드문 채운다. 이에 따라 곽의 보컬이 담아내는 멜로디 또한 어떠한 ‘라인’을 타고 오르내리기보다는, 큰 음고 변화 없이 짧게 흥얼거리는 구절들에 가까워진다. 그렇지만 그 덕에 각 절 맨 뒤에 위치한 “lose it”이 한 호흡에 길게 늘여지는 것에 따라, 상대적으로 힘을 세게 주었던 목소리가 끝까지 견디려 애를 쓰다 결국 흩어져버린다. 그 형상은 개들이 서로 싸워대고 신발을 물어뜯고 땅을 파고 파고 또 파는 광경에 손쓸 수 없이 기술만 하는 노랫말과 함께, 화자가 정신머리를 느리고 무력하게 “잃어가는” 것에 동원된다.

 

트랙의 전개에서 분명한 시작과 중간과 끝이 없이 언제나 진행 중인 느낌이 드는 것은 위에서 이야기했듯 대부분의 부분들이 각자의 규모에서 짧게 반복되거나 문득 나타났다 사라지며 전체를 이루기 때문이다. ‘이유’와 같은 트랙에서도 그랬듯, 혼닙은 반복을 새로 시작하는 구간을 서서히 삽입해오거나, 조그마한 소리들을 곳곳에 흩뿌리는 것으로 이러한 정경에 자세함을 더한다. 개들이 서로를 물어대는 모습을 어쩔 도리 없다는 듯 지켜보는 이야기를 광폭하거나 혼란스럽게 담기보다 “차분하게 내려보 (‘이유’)”는 시선으로 담담하게 다룰 때, 이 기이한 경관이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 걸지도 모른다.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걸 굳이 드러내지 않더라도, 트랙은 짧은 단위의 장면들이 계속 반복되는 줄 모르게 이들을 진행시키면서 청자를 서서히 옭아매온다. 나뒹굴고 있는 개들을 허탈하게 내려다보고만 있는 사람을 먼발치에서 가만히 바라보는 기분이 든다.

 

 

어느새 곽의 목소리는 훨씬 더 옅은 코러스와 미세한 중얼거림의 조각들이 되어 연주음들의 희미한 장식이 되어버리고, 약하게 둘러싸인 어쿠스틱 기타만이 남아 그 연주를 몇 십 초간 반복한다. 맨 앞에 나타났던 것보다 울림이 덜해진 사운드가 슬쩍 분명해지며, 다시금 무슨 사건이 일어날지도 모르겠다는, 또 다른 브릿지가 찾아온 것이 아닐까 하는 예감을 준다. 하지만 “Dogs”는 거기에서 곧장 끝난다. 그것은 이를테면 이동 중에 잠시 멈춰선 차창 바깥으로 기이한 풍경을 쳐다보다가, 멈춰선 것만 같던 시간이 다시 원래대로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눈앞의 모든 것이 순식간에 사라질 때의 짧은 여운만을 남긴다. 귀 안쪽의 세계에서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겠지만, 개들은 여전히 트랙 속에서 언제나 그랬듯 다른 개들이나 자기 자신이나 누군가의 신발을 물어뜯고 있을 것이다. 그 여운의 뒤꽁무니에서 채 사라지지 않고 10초가량 남아있는 조용한 여음은 이렇게 말하는 것도 같다: “난 낭만적인 개들과 여기에 있어. 그리고 계속 여기에 머물 거야. (로베르토 볼라뇨, 「낭만적인 개들」, 김현균 옮김, 열린책들, 2018.)”

 


Editor / 나원영 (대중음악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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